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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매고 유럽 누비기 - 김신연 실비아
안식년 1년 동안 배낭매고 세계를 누볐다. 방학이면 학회 해외 답사팀을 꾸려 오지 마을과 문명의 발상지를 찾아 다녔다. 대학생들 인솔하고 해외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우정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60개국 이상을 다녔지만 아직도 갈 곳이 많다.
지구촌 어디든지 다 가볼만 하다. 중미의 쿠바, 남미의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는 물가가 저렴하다. 남미 4개국 40일 동안의 현지 여행 경비가 일백만원이면 충분하다. 마추픽추, 우유니소금사막호수, 티티카까호수가 이곳에 있다. 배낭여행 하기에 지금이 최적기다.
내 여행담을 듣고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 있다. 산티아고 길 다녀와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역시 여행은 걸어서 가야 감동이 배가 된다. 고생해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영국부터 시작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2개월 여행 종지부를 찍고, 프랑스 생장 피에르 포르로 가서 한달 간 순례길 800km 걷기로 큰 그림을 그렸다. 서울에서 유레일패스 한달권을 일백만원에 발권받았다. 유레일패스가 있었기에 노르웨이에서 포루투갈까지의 종횡무진 여정이 가능하였다. 유럽인들도 부러워하는 1등석 좌석, 차액만 지불하면 침대열차도 탄다. 코펜하겐에서는 VIP라운지 이용도 가능하다. 노르웨이 송내피요르드 관광 끝내고, 베르겐에서 기차를 타고 코펜하겐에서 환승을 해 독일 쾰른에 새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레일패스는 크루즈 승선도 가능하다. 라인크루즈에 몸을 싣고 빵과 포도주를 마시며 라인강 주변의 고성을 감상하였다. 로렐라이 언덕을 지나 기차역 근처 선착장에 내렸다. 한국 청년을 만나 함께 기차 타고 프랑크프루트까지 갔다. 청년은 김치에 삼겹살에 상추쌈에 캔맥주까지 주는 한국인 민박집을 예약했다고 했다. 무조건 따라 갔다. 숙식이 잘 해결되었다.
하이델베르그, 베를린, 옥토버페스트가 열리고 있는 뮌헨을 거쳐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북쪽 바닷가 섬 몽생미셀로 가서 중세수도원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프랑스인들이 찾는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해변 휴양도시 생말로 투어도 마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성모님 발현지 루르드로 향했다.
새벽녘에 루르드에 도착. 역 바로 앞에 문을 연 카페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주인에게 짐을 맡겼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루르드 성지! 크고 작은 성당에서는 미사가 계속 봉헌되었다. 루르드 성모님을 뵙고, 기적의 샘물도 마시고, 오후 떠날 때쯤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성모님! 루르드에서 제가 꼭 봐야할 것이 있다면 다 보고 떠나게 해주십시오.’
성지를 나오면서 입구의 안내 지도를 다시 한 번 쳐다보며 오늘 순례한 곳을 정리했다. 점선으로 그려진 둥근 원, 이게 무슨 표시일까? 의아해 하고 있는데, 지하도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나온다. 들어가 보았다. 가운데 제단이 있는 어마어마한 성당이었다. 가장자리로 소성당 수십 개가 있다. 그 점선은 지하원형대성당의 표시였다.
야간열차 타고 니스로 가서 주변의 모나코, 깐느를 구경하고, 테제베를 타고 엑상프로방스로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무슨 대회가 열려 시내 호텔이 동났다. 시 외곽에 있는 유스호스텔로 갔다. 방은 있는데 저녁 식사는 불가능. 유스호스텔 회원이어서 할인 받고, 구내매점에서 요기를 하려는데, 직원이 파티장에서 푸짐하게 음식 한 접시를 차려 내왔다. 굶을 거 각오한 날 현지인들의 파티 덕분에 포식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프로방스 대성당 근처 세잔느의 집을 찾았다. 정오미사 후 성당에서는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파티를 마치고 아비뇽으로 갔다. 거기서 일박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바르셀로나 하면 길위의 집이 떠오른다. 스페인에 귀화한 40대 초반의 한국인 노총각이 운영하는 민박집. 우리는 그를 심선생이라고 불렀다. 큰 마켓의 매니저다. 심선생은 새벽에 일어나 뷔페식으로 차려놓고 출근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내 집처럼 실컷 먹으라고 하였다. 설겆이만 하면 오케이. 매달 월급의 반을 자기가 근무하는 마켓에서 제일 좋은 쌀과 반찬과 부식 재료 구입하는데 사용한다고 했다.
환경이 서울 우리 집보다 더 좋으니, 집 떠난 지 두 달째 되어가는 마티아는 숙소에서 쉴 생각만 하였다. 몬쎄라트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보고 혼자서 다녀오라고 하였다. 혼자라도 가자, 결심하고 근처 전철역으로 달렸다.
몬쎄라트를 외쳤다. 역무원이 그림을 그려가며, 가는데 한 시간, 올라가는데 30분, 20분 구경한다면, 내려오는 케이블카가 없다고 설명하였다. 포기하고 길위의 집으로 갔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어, 마티아가 깊은 잠에 들었나? 생각이 들어 심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상기된 심선생 목소리 “혼자서 기차타고 몬쎄라트 가셨다고요? 되돌아 올 수가 없는데 큰일 났구나 싶어서 마티아 씨랑 지금 몬쎄라트로 모시러 가고 있습니다. 빨리 기차타고 오세요. 몬쎄라트역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리세요. 기다리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쏜살같이 달려 기차를 탔다. 역에서 만나 꼬불꼬불 산길을 달려 바위산 정상에 요새처럼 서있는 수도원에 도착하였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망연자실 서 있는데 신부님이 지나가셨다. 심선생이 신부님 붙들고 사정하였다. 기적처럼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는 큰 성당에 마티아와 둘이서 들어갔다. 거기, 기적의 검은 성모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성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성모님!”
바르셀로나를 떠나 발렌시아로 갔다. 시민들이 첼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축배잔을 들고 우리에게도 맥주를 권했다. 발렌시아에는 마드리드행 초고속 특급열차가 있다. 마드리드에서 떠나는 포루투갈 리스보아행 국제 야간 침대 열차표보다도 비쌌다. 큰맘 먹고 티켓팅 하였다. 시속 300km 기차 안에서 매트 위에 커틀러리가 세팅되고 고급스런 식사가 나왔다.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역무원에게 티켓을 보여주었다. 가르쳐준 플랫폼 번호에서 30분 전부터 기다렸는데 전광판에 리스보아행 글자가 뜨지를 않았다. 다시 밖으로 나와 역무원에게 물었다. 놀란 역무원이 우리를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얼른 기차를 타라고 했다. 국제열차 타는 역은 이곳이 아니고 30분쯤 더 가야 했다. 다른 승객들이 우리 기차표를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환승역에 도착하자 빨리 내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탈 침대 열차는 옆의 선로에 있었다. 단숨에 계단을 올라갔다가 옆의 계단으로 내려왔다. 기차가 멀리 보였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는데 기차가 떠났다. 그래도 마구 달렸다. 오!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부르면서 그냥 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가던 기차가 섰다. 열차 문이 열렸다. 우리가 타니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승객들이 박수를 치기도 하고, 물을 마시라고 건네주기도 하였다. 한국인을 만났다. 정시에 출발한 국제열차가 승객 태우려고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파티마요” “성모님이 도우셨네요.” “예, 성모님이 함께 하셨어요.”
새벽에 리스보아에 내렸다. 반나절 리스보아 관광을 하고 오후 1시 30분 기차를 타고 파티마성지로 갔다. 미사 먼저 참례하고, 안내소에 가 하룻밤 묵을 수녀원을 소개받았다. 정갈하고 저렴하였다. 밤에 수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촛불 들고 십자가의 길 철야기도를 하였다. 다음날 직행버스를 타고 리스보아로 왔다. 리스보아 근교 신트라 관광을 하고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이제부터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지로 가야한다.
어느 루트로 가지? 유레일 살 때 받았던 유럽 철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절경 구간 정보가 있다. 마드리드에서 부르고스까지가 절경이다! 부르고스로 가서, 국경 넘어 프랑스 바욘으로, 거기서 환승해 생장으로 가는 방법을 택하자, 그러면 유레일 유효기간 마지막 날 밤에 생장에 도착한다.
절경을 보며 달리니 지루할 틈도 없이 부르고스에 도착하였다. 센트로(시내)로 갔다. 한국인 순례자를 만나 숙소 소개도 받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 미사에 참례하였다. “지금의 배낭 짐을 지고 800km 걷기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간절히 기도하고 나왔는데, 한국 수녀 두 분이 가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수녀님!” 인사드렸더니, 아침에 농장에서 딴 배라며 우리에게 건넸다. 순례자냐고 물었다. “수녀님. 우리는 내일부터 순례 시작합니다.” “행운을 빕니다!” “근데 고민이 있어요.” 무슨 고민이냐고 물었다. 큰 배낭 한 개는 수녀원에 맡기고, 꼭 필요한 짐만 내 배낭에 넣고 바욘행 기차를 탔다. 전화번호 적어주며, 포에대스 아블라르 콘 헬레나? 하면 수녀님과 통화가 된다고 하였다.
프랑스로 오니 풍광이 확 바뀐다. 바욘에서 내렸다. 생장 기차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노을이 내리는 강물 위의 다리를 건넜다. 대성당이 보였다. 들어가니 주교님이 미사 집전을 하고 계셨다. 영성체할 때, 주교님이 손수 들고 축성하신 큰 성체, 반쪽은 주교님이 영성체하시고 그 남은 반중 절반을 내게 주셨다.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
밤 8시 넘어 기차를 탔다. 생장이 목적지인 몇 명의 외국인을 만났다. 모두들 숙소 주인이 역으로 마중 나온다고 했다. 숙소 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부부뿐. 밤 10시 넘어 생장에 도착하였다. 플랫폼에 알베르게 주인 몇 분이 손전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밤중에 무작정 도착하는 순례자들이 그동안 꽤 있었나보다. 할아버지 봉사자가 우리를 알베르게로 안내했다. 손전등을 켜고 숙소로 들어가, 우리가 사용할 2층 침대를 가리켰다. 모두들 잠이 들었으니 조용히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라고 하였다. 조식 포함 1인당 8유로를 냈다. 두 달 동안 배낭 속에서만 있었던 침낭을 꺼내 처음 사용하였다. 생장 순례자 숙소에서 잠을 자다니, 감사합니다. 주님!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2011년 10월 3일, 순례자협회 사무실로 가서 2유로를 내고 순례자 증명서인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았다.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껍데기도 배낭에 매달았다. 산티아고 노선도, 한글판 유의사항도 챙겼다. 길가 수도에서 식수 받아가고, 피레네산맥에는 마트가 없으니 먹을거리를 사가라고 당부하였다. 문을 나서려는데 할아버지가 내 손에 중고 등산용 스틱 한 개를 들려주었다. 꼭 완주하라는 격려로 알고 고맙게 받았다.
이 지팡이는 800km 전 구간 동안 내 발이 되었다. 덕분에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아 산맥을 거뜬히 넘었지 싶다. 순례 끝나고 산티아고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교통편 중 요금이 저렴한 것이 비행기였다. 저가항공은 몸에 지닌 배낭 하나만 무료다. 스틱은 짐으로 부쳐야 하는데, 짐 한 개에 한 사람 요금이다. 스틱을 쓰레기통에 꽂았다. 마음이 쓰렸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어 25km 걷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생장 마을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오늘은 워밍업 삼아 10km만 걷고 첫 알베르게인 오리손에서 묵자, 이렇게 마음을 바꾸고 느긋하게 시장에 들러 수제 치즈와 빵, 과일을 샀다. 길거리에서 작은 배낭도 18유로에 샀다. 준비도 완벽하게 끝나서 드디어 출발! 산으로 올라갈수록 떠나온 생장 마을이 고향 마을처럼 아련하게 보여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제 밤에 두려움을 안고 왔는데 이렇게 행복하게 순례를 시작하다니, 꿈만 같았다. 5km쯤 걷고 점심을 먹었다.
오리손에 두시 넘어 도착. 우선 맥주부터 한잔 쭈욱 마셨다. 바람도 상쾌하고 발아래 산들이 보이고 기분 좋은 휴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알베르게를 구경하였다. 조석식 포함 30유로. 어제 8유로 내고 묵었던 숙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너무 비싸다. 다음 알베르게까지는 6시간 넘게 걸리니 지금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3시 30분인데 다시 출발하였다. 마음을 따르라!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롤랑의 샘에서 물을 보충하고 계속 걸었다. 산 능선에 허름한 대피소가 보였다. 외국인 노인 한 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곧 어두워지니 묵어가라고 하였다. 피레네산맥 정상에서 잠자는 것도 추억이 될 거라며 권했다. 귀 얇은 마티아 “여기서 자고 가자.” 하였다. 생각 좀 해보자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노인 왈 “먹을 거 있느냐, 배가 고프다.” 하였다. 남은 빵을 주면서 퍼뜩 생각이 스치었다. 내일 아침은 무엇을 먹지? 아무리 피곤해도 이런 곳에서 나는 잘 수가 없다! ‘일어나라, 실비아야. 네 머물 곳은 여기가 아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성모님의 목소리. “가요!” 단호하게 외치니 마티아도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갈 길은 먼데 해가 졌다. 이상했다. 그 밤 그 길을 누군가 안내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처음 가고 있는 산길인데도 헤매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정확하게 갔다. 깜깜한 숲속 밤길이 내 눈에 하얗게 보였다. 예수님, 성모님, 야고보 성인이 함께 했다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9시 가까워서야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알베르게에 도착하였다. 따뜻이 맞아주었다. 10유로 내고 숙소 배정받고, 근처 식당으로 가서 순례자 메뉴인 메누델빼레그리노를 시켰다. 9유로였다. 풀코스에 와인 한 병이 나왔다. 푸짐한 식사에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다. 알베르게도 오리손보다 몇 배나 시설이 훌륭하였다.
열심히 걸어 14일 부르고스에 도착하였다. 수녀원에 갔다. 필요한 것은 챙기고, 불필요한 것은 수녀님께 드리고, 배낭은 우리가 귀국 전날 묵을 마드리드 호텔로 부쳐주기로 하였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해물볶음밥 비슷한 빠에야를 먹으면서 밤늦도록 헬레나수녀님과 담소를 나누었다.
17일 묵었던 모나스떼리오 데 산타클라라수녀원은 하얀 시트까지 주고 5유로 밖에 받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8시 미사에 참례했다. 수녀님들의 성가가 천상의 소리다. 큰 은혜를 받았다. 수녀원 쿠키도 샀는데, 정말 맛있다.
26일 칸타브리아산맥 능선을 걷고 있는데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정상에 위치한 오세브레이로 알베르게에 저녁 무렵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5유로에 새 시트커버까지 주었다. 근처 아주 작은 성당 저녁 7시 미사에 참례하였는데, 두 분 신부님이 미사 집전을 하셨다. 신자는 우리까지 합쳐 다섯명 정도. 다음날 새벽에도 미사참례를 하였다. 성당 안에 있는 성모자상, 제대 오른쪽에 켜진 무수한 촛불, 분위기에 취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곳이 기적의 성당이라는 것을. 1300년 경, 한 농부가 폭풍우를 무릅쓰고 미사에 참석하였는데 신부님이 “이런 고약한 날씨에도 빵과 와인 때문에 오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비아냥거렸다. 그때 성찬 예식 때 쓸 빵이 예수님의 살로, 와인이 예수님의 피로 변하고 성모상은 이 기적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보았던 그 성모상이 바로 기적의 성모이고, 촛불 켜진 곳에 모셔진 두 개의 유리병에는 그때 변한 살과 피가 보존되어 있다! 순례 중에 기적의 성당에서 거행된 미사에 두 번이나 초대받은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더욱 감격스러웠다.
11월 1일 산티아고에 입성하였다. 완주증을 받았다. 대성당에 가니 야고보 성인상이 있었다. 등에 어린애처럼 매달렸다. 미사 중 눈물이 나왔다. 광장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만났던 순례자들을 다 만났다. 우리 숙소 창문 너머로 대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밤에는 보석처럼 빛났다.
서쪽 땅끝 마을 피니스테레도 갔다. 걸으면 3일 족히 걸리는 거리를 완행버스로 세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버스 타고 왔다고 알베르게에서 재워주지 않았다. 호스탈에서 일박하고 묵시아로 갔다.
묵시아는 성모님께서 야고보 성인이 설교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돌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다. 바르 주인이 오후 4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환승해서 산티아고를 가야 한다고 하였다. 성모님이 도착하셨다는 바닷가로 나갔다. 날씨가 화창했다. 파도가 밀려와 큰 바위 돌에 부딪히면 폭포처럼 쏟아지면서 만들어내는 하얀 물보라.
석달 동안의 여정이 스쳐갔다. 한 달은 영국을, 한 달은 유레일 타고 유럽을, 한 달은 지팡이 한 개 짚고 걸었던 순례길. 숙소가 다 차서 애태우고, 빨래가 마르지 않아 젖은 채로 다니고, 바르를 만나지 못해 끼니를 거르고, 서러웠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성모님의 위로를 받고 한 방에 부서지는 통쾌한 느낌을 받았다.
바닷가에서 성모님의 귀여움을 받으며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정류장 근처로 되돌아오니 웬 리무진 버스가 있었다. 산티아고행 직행버스였다. 우리가 타자마자 버스는 떠났고, 그때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성모님께서 함께 하셨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산티아고에 예상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였다.
11월 5일, 산티아고 콤뽀스텔라 대성당 정오미사에 참례하였다. 미사 전에 많은 향을 피우는 보따푸메이로 행사가 열렸다. 높이 1.6m, 무게 80kg인 향로에 40kg의 숯과 향을 넣고 8명의 사제들이 줄을 당기면서 향로를 좌우로 움직였다. 숯불 향로가 좌우 65m 길이의 아치를 그리며 80도 각도까지 벌어지면서 21m까지 올라간다. 장관이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순례자들의 불결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시작하였다는데 지금은 순전한 종교의식이다. 헌금으로 비용이 모아지면 향로 의식을 거행한다.
장엄한 향로 미사에 참례하고, 지팡이 버리고, 저가항공을 탔다. 마드리드 호텔에 가니 배낭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에서 푹 쉬며 느긋하게 톨레도 관광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결산해 보니 두 사람의 3개월간 총 여행경비가 항공료 포함 1천 5백만원쯤 되었다. 물가가 비싼 영국 대신 다른 곳을 갔다면 훨씬 덜 들었을 것이다. 나는 홍차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마티아는 에딘버러 축제를 봐야 해서 우리는 영국을 꼭 가야 했다.
독서처럼 여행도 소멸되지 않는 평생의 자산이다. 배낭여행 경비는 아깝지 않다. 안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놓았다. 손주들에게 다녀온 곳 이야기를 해 준다. 중학생만 되면 산티아고 100km 순례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정년을 하면 추운 겨울날에는 따뜻한 곳으로 가서 보내리라. 보아둔 곳이 몇 군데 있다. 나를 기다리는 세계의 벗들이 있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재산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생긴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오지이고, 먼 곳이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나는 그곳을 찾아갈 수가 있다. 숙소도 구하고, 음식도 먹고,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고 한국으로 되돌아올 자신이 있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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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봄, 공세리성지에서 만나 뵙고 몹시 궁금했었습니다. 두 분이서 오랜 기간 동안 유럽성지순례를 하셨노라는 이야기에 그저 신비로울 뿐이었지요. 단체가 아닌 개인적 여행은 엄두도 못내는 제겐... 산티아고, 파티마, 루르드, 콤뽀스텔라, 바로셀로나... 모두 정겨운 이름들이라 반가웠습니다. 가슴에 아련한 추억으로 무늬져 있어서 더욱!!!
실비아님, 고맙습니다. 전에 부탁드렸던 작품도 올려주시고 성지순례기를 통해 더 많은 세상을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작품 올리라고 말씀주셨기에 용기내서 올렸습니다. 저는 12월 과달루페성모님 축일에 멕시코에 가서, 성지 순례하고 축제도 참례하고 하였어요. 중남미 사람들, 신앙심이 대단합니다.
바로 제가 원하는 삶을 실행 하고 계시네요, 주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실거에요. 부럽습니다.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저로서는 감탄 감탄 !!!!!
부러우시다면 지금 당장 떠나세요. 배낭여행은 비용이 저렴하지요. 시간이 있다면 가톨릭 국가인 중남미로 가세요. 지금이 최적기입니다. 적은 비용으로 가는 방법, 제가 알고 있어요.
스크랩 해갈께요. 글구 한 번 만나고 싶어요. 꼬~~옥 만나주세용 저는 겁쟁이라서 유럽을 돌고돌아 왔지만 실비아님처럼 걷고걷고를 목하고 버스로만 부러워하며 가야지 걸어서 가야지 벼르고 있답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저는 한양여대 비서인재과 교수입니다. 왕십리 근처 지나신다면 우리 대학에 오셔도 좋습니다. 010-6738-8336 입니다.
짝짝!! 박수 보냅니다. 숨가쁘게 읽어 내려왔어요^^ 딱, 제 스타일시네요~ 유레일패스, 야간열차 침대칸, 바로셀로나 마드리드...프랑크 푸르트, 로렐라이 언덕이 보이는 강가의 기차역은 아마도 뒤셀도르프가 아닐런지요...유럽의 길은 걷고 또 걷고 걷다가 쉬고...그 맛이지요. 이런 여행을 정말 즐기는 저도 아직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지 못했는데요. 꼭 한번 갈거에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함께 갈 산티아고 멤버 조만간 모집 해야할까봅니다.~
순례단 모집하세요. 올 5월에는 제 남동생 내외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만족도 100%입니다. 순례를 가신다면 조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내년 계획이 과달루페가서 성모님 만나고 오는건데요.
과달루페성모님 집에 모시고 늘 기도하고 있어요. 꼭 갈꺼에요, 중남미로... 한번 찾아뵙고 꼭 조언을 받겠습니다.
그렇다면 과달루페 성모님 축일 즈음에 멕시코를 가세요. 깜짝 놀랄만한 성모님 축제 퍼레이드를 볼 수 있어요. 세상의 어떤 축제도 과달루페 성모님 축제만큼 신나고 경이롭고 열광적이고 어마어마한 축제는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