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직필이 만일 구치소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읽지 못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책들을 약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들의 극히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구속노동자 후원회” 라는 시민단체와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라는
시민단체들에서 매달 약간의 영치금과 후원회 “소식지” 및 서적들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론직필이 만일 구치소
밖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읽지 못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책들을 덕분에 잘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론직필이 출소하게
되면 그 시민단체들을 찾아가 감사 인사도 드리고, 나아가
정론직필 스스로 그 시민단체들에 회원가입하여 후원자가 될 생각입니다.
이 게시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에 있는 춘원 이광수의 친일 행적 관련 글 부분이고 나아가 남로당 출신이라는 철도노동자 이수갑 선생의 유고집 및 전태일 선생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평전 내용입니다. 그 내용들은
모두 우리 카페 회원님들에게 소개할만한 내용들이라고 생각되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후원회 소식 / 통권 299호 / 발행일 2016.09.28 /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발로 읽고, 눈으로 듣는 서울 이야기 (3)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거주지, 효자동
가옥
유영호(운영위원)
(p27~29)
이미 그(=이광수)에게 일본은 연민의 대상이며 조선의 희망이었을 뿐이다. 그런 이광수에게 허영숙이
없었더라도 나는 그의 친일행위는 이미 예약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했기에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이광수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광수가 아니라 천황의 신민인 고야 마 미타로(香山光郞,향산광랑)로 살았던 이광수.
해방 후, ‘친일옹호론’을 창시하다
이랬던 이광수에게
조선의 해방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아마도
지옥 같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거세게 몰아치는 친일청산의 폭풍을 피해 일체의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봉선사에서 약 1년간 은둔하였고, 1946년 5월 전처를 버리고 온갖 비난과 의심 속에서 재혼한 허영숙과 이혼을 한다. 이에 대하여 서울신문은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 자)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미 군정 속에서
발 빠르게 정세를 파악했다. 아직
좌우 대립의 혼돈의 상태에 있던 1947년 그는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를 통해 <도산 안창호>를 집필하였으며, 백 범 김구를 찾아가 그가 기록해 둔 항일 일기를 자신이
편집하게 해달라고 한다. 이런
그 의 행동이 자신에게 방패막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런 이광수의 행동에 대하여 심산 김창숙은 노발대발하였다. 친일파의 더러운 손으로 중요한
광복 사료들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어쨌든
백범이 한자로 쓴 항일투쟁의 일기(=백범일지)는 이렇게 (친일 매국노) 이광수의 손을 거쳐 한글로 우리 앞에
원문의 대대적인 첨삭과 ‘나의
소원’이란 명문을 새로 달고 <백범일지>로 재 탄생된 것이다.
그리고 한 해
뒤 그(=이광수)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방식을 통해 정면돌파할 것을 결정하였다. 미 군정의 후원 속에 친일파들을 그대로
온존시키는 정책을 편 이승만
정권 하에서의 반민특위란 그에게 우스워 보였던
듯싶다. 그가 자신의
친일행위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청산 자체를 거부하는 논리로 집필한 <나의 고백> (1948.12)은 여전히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리로 등장하고 있다. 결국 그는 1949년 2월 7 일 반민특위에 의해 문학예술인 (친일 매국노) 제1호로 체포되지만 불과 한 달 도 못돼 석방되고 말았다. 한편 1906년 이광수와 함께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 서 함께 수학한 것을 계기로 무척 가까웠던 벽초 홍명희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일본 유학시절 둘(=이광수와 벽초 홍명희) 모두가 조선의 근대화를 꿈꿨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이광수는 친일로, 홍명희는
항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이
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이 창씨개명을 하기에
이르자 홍명희는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 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 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 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 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홍명희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결국 홍명희는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남북협상 회담에 참가하기 위하여 북으로 갔다. 그리고 떠나며 문중 인사를 올릴 때 “이승만이가 김일성 반절만
되어도 안 가 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말이다. 결국 홍명희는 이승만을 반대하며 북으로 갔고, 그의 친구 이광수는 이승만의 보호 아래 무사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춘원 이광수는 원래 일본 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문을 기초했고, 그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해로 찾아온 허영숙과 애정 도피여행을 하고
결국 1921년 이광수는 전처와 이혼하고 허영숙과 결혼을 했다고 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허영숙은 일제 총독부가 이광수를 포섭하여 친일 매국노로 만들기 위해 파견한 “밀정”이었다고 소설가 박종화는
추측하는가 봅니다.
암튼,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런데
최근에 정론직필이 알게
된 내용들은 바로
아래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즉, 저 위 글에서도 보다시피,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도대체 왜 친일 매국노 이광수에게 자신의 한문 원본
”백범일지”의 한글본 편집을 맡긴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아래
소개할 이수갑 선생의 책에도 나오지만 해방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함께 “대한 독립촉성 노동 총동맹”(=대한노총=한국노총) 이라는 것을 만든 것인지? 김구 선생이 그런 행위도 참으로 납득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1945년 일제 해방 시 21세였던 이수갑이라는 청년은 나중에 “남로당”에 가입하게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래
소개할 “이수갑 선생 유고집”을 보면, “조선공산당”이라고 하는 단체가 이미 일제시대부터 지하에 존재하던 단체였던가 봅니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의 주도로 일제시대에도 “노동 운동”을 했다고 하는가
봅니다. “조선노동당” 당원들이 일제시대 “노동 운동”을 하다 붙잡혀 많이 감옥에 수용되었다가 일제 해방과 더불어 그들이 감옥에서
나와 다시 “조선공산당”을
설립한 모양입니다.
왜 위 얘기를 장황 하게 하는가 하면… 과거 구소련, 중공이라는 두 거대 공산
국가들에는 각각 “소련공산당”, “중국공산당” 이라는
당, 즉 “국명+공산당” 이라는
당명이 있었지요.
즉, 만일 그런 식으로 북한에서도 당명을 정했더라면
아마도 당연히 “조선공산당”이
되었을 것 같 같은…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노동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공산당”이라는
단체명이 이미 일제시대부터 존재했고 그 이름이 만일 일제시대 조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더라면, 북한 김일성 집단은 “조선공산당”이라는 이름의
단체명을 사용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 얘기는 뭐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고, 그냥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 하여튼 이수갑 선생님의 유고집에서 많은 새로운
내용들을 알게 되어 아래 소개하고자 합니다.
해방 직후(1945년~1949년) 남한 사회 실상 (2/4) 에서 계속...
2016.11.02 정론직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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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엔지개그님, 감사합니다.
요새는 친미 옹호론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