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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 박명원 묘 왕가의 묘를 지칭할 때는 공주, 옹주를 먼저 불러드리는 것이 예의인듯 하다. 우리네 정서로는 남자를 먼저 불러야할듯 한데... 어떤 곳에서는 남자를 먼저 부르는 곳도 많지만 나도 왠지 공주, 옹주를 먼저 불러야할것 같아서 일부러 이렇게 쓴다. 화평옹주묘는 군부대 안에 있어서 답사하기가 제한적이다. 오래전에 한번 방문했었는데 그때는 부대사정상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휴일이라 들어가서 참배하고 묘역을 답사할 수 있었다. 군부대 내 묘지를 사진 찍을때는 여러가지로 조심스럽다. 스스로 알아서 보안문제 될만한 것은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 하든지 사이드를 지워서 안보이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이자리를 빌러 답사에 협조해주신 부대 인사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조대왕의 친필 묘비가 인상적이며, 묘비에 임좌병향이라는 글자를 여러곳에 새긴것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보국은 잘 갖춰져 있는데 묘역은 거의 천혈에 가깝게 조성되었고 산을 많이 깎아서 앞부분은 원래의 모습을 상실했다고 보여진다. 입구에 신도비가 있는데 하마비가 인상적이다. |
박명원(朴明源) 회보(晦甫), 만보정(晩葆亭), 충희(忠僖), 금성위(錦城尉) 요약 1725(영조 1)∼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보정(晩葆亭). 할아버지는 참봉 박필하(朴弼夏)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택상(李宅相)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영조의 제3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에 봉하여졌으며 영조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처음 순의대부(順義大夫)를 받았으나, 뒤에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승진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나라에 경사나 슬픈 일이 있을 때면 금옥보책명정서관(金玉寶冊銘旌書官)이 되었는데, 모두 10여 차례에 이르렀다. 1776년(영조 52) 삼절연공 겸 사은사(三節年貢兼謝恩使), 1780년(정조 4) 진하 겸 사은사, 1784년 사은사 등 세 차례에 걸쳐 중국에 정사로 파견되었다. 몸가짐에 절도가 있었으며, 검소하였고 또한 풍류와 운치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화평옹주(和平翁主)는 조선의 왕족으로, 제21대 왕 영조의 서녀이며, 생모는 영빈 이씨이다. 정조와 의소세손의 고모가 된다. 1727년 4월 27일(양력 6월 16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사도세자에게는 친누나에 해당한다. 1731년(영조 7) 마마를 앓아 영조가 모든 형의 집행을 정지시켰다. 1738년(영조 14) 12세의 나이에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혼인하였다. 박명원은 노론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 된다. 옹주는 평소 영조의 총애를 받아 그 의물이 매우 성대하였으며, 혼례를 치른 후에도 남편 박명원과 함께 궐 안에서 생활하였다. 1748년 6월 24일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영조가 그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다. 옹주는 곧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暎嬪) 이씨(李氏)의 소생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했으므로, 가인(家人)을 시켜 아뢰기를,“병이 위독하여 다시 천안(天顔)을 모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하자, 임금이 갑자기 행행하였다. 일이 갑작스러운 데에서 나왔으므로 백관(百官)이 미처 다 모이지 못한 탓으로 여위(輿衛)가 미비하여 의장(儀仗)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옹주가 곧 이어 졸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빈소(殯所)에 임어하여서는 통곡하면서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날씨가 매우 무더웠는데 밤새도록 환궁하지 않자, 대신과 여러 신하들, 정원(政院)이 누차 접견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인대(引對)를 허락하지 않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염습(殮襲)할 때 친림(親臨)하였으며, 일등(一等)으로 호상(護喪)하라고 명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67권, 1748년(영조 24)』 영조는 화평옹주의 죽음을 슬퍼함이 지나치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노하여 그들을 파직시켰으며, 화평옹주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게 하여 분묘를 만드는 데만도 수 개월이 소요되었다. 그의 3년상이 끝날 무렵 친조카인 의소세자가 태어났다.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는 혜경궁 홍씨의 의소세자 출산을 도왔던 영빈 이씨에게 죽은 딸은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하느냐고 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의소세자의 몸에 화평옹주의 몸과 같은 위치에 점이 있는 것을 보고 영조는 놀라워했다고 한다. 화평옹주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현, 파주시 파주읍)에 있다. 1790년(정조 14)에 영조의 친필로 비문을 쓴 묘비가 세워졌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파주시향토유적제13호 |
문화재명칭 | 화평옹주, 박명원 묘 및 신도비 |
소재지 | 경기 파주시 파주읍 파주1리 산 57-1 부대내 |
관리자(연락처) | 반남박씨 |
▼ 화평옹주, 박명원 묘 원경
▼ 화평옹주, 박명원 묘 및 신도비 안내판
▼ 화평옹주, 박명원 묘 원경
▼ 화평옹주, 박명원 묘 장명등과 묘비
▼ 화평옹주, 박명원 묘 묘비... 상석 앞쪽에 임좌병향이라고 좌향이 새겨져 있다.
▼ 화평옹주, 박명원 묘 묘비... 영조의 친필이며 상단에 어필이라고 새겨져 있고, 덮개돌 상단과 비좌에도 임좌병향의 좌향이 새겨져 있다. 조금은 특이하다.
▼ 화평옹주, 박명원 묘 전경
▼ 화평옹주, 박명원 묘 묘비... 비신에 총탄자국이 있다.
▼ 화평옹주, 박명원 묘 망주석... 세호가 청룡은 올라가고 백호는 내려오는 상이다.
▼ 화평옹주, 박명원 묘 후경을 찍으려고 했는데 부대 전경이 나오게 되어 궁여지책으로 옆모습을 찍었다.
▼ 화평옹주, 박명원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입구쪽 안내판이 좀 더 깨끗해서 다시 올린다.ㅎ
▼ 화평옹주, 박명원 신도비 원경
▼ 화평옹주, 박명원 신도비... 비문은 정조가 지었다.
▼ 화평옹주, 박명원 신도비 앞에 있는 하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