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712. 연중 제1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12 04:36
- 객토 작업. 나쁜 밭을 좋은 밭으로 바꾸는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같이 묵상하면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하나는 이사야서와 복음의 말씀이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는 과연 훌륭한 농부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비처럼 내리시면 반드시 열매를 맺고야 말지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복음은 하느님께서 말씀의 씨를 우리의 마음 밭에 뿌리시지만 좋은 밭은 열매를 맺고 나쁜 밭은 열매 맺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훌륭한 말씀 농부시라면 왜 아무 데나 당신 말씀의 씨를 뿌리시냐는 점입니다.
저 같으면 제 말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도록 열매 맺을 좋은 땅에만 씨를 뿌릴 텐데 주님께서는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가리지 않고 말씀의 씨를 뿌리신다니 농부로 치면 당신의 그 귀한 말씀의 씨를 헛되이 낭비하는 농부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숨은 뜻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의 씨를 우리가 보기에 낭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런 것이지 하느님은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적으로 보지 말고 사랑으로 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말씀도 사랑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모두를 사랑하시고, 좋은 밭과 나쁜 밭을 가려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로 또는 한 번에 열매 맺을 밭에만 당신 말씀의 씨를 골라서 뿌리시고 그렇지 않을 밭에는 뿌리지 않으셨다면 저에겐 아예 씨를 뿌리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저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열매 맺지 못하는 저에게 수없이 씨를 뿌리셨지요. 길바닥 같을 때에도 씨를 뿌리셨고 돌밭 같을 때에도 뿌리셨으며 가시밭 같을 때에도 씨를 뿌리셨으며 좋은 밭이 될 때까지 뿌리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서의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열매 맺게 하실 거라고 하신 것은 사랑의 의지 표시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될 때까지 당신의 말씀이 잔소리가 되고 쓸데없는 말씀이 될지라도 당신 말씀을 거두거나 되돌리거나 하지 않으실 거라는 의지 표시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밭을 차츰 바꾸는 겁니다.
말하자면 객토(客土) 작업입니다. 길바닥 같은 밭을 점차 돌밭으로 객토하고, 돌밭 같은 밭을 점차 가시덤불 밭으로 객토하고, 가시덤불 밭 같은 밭을 열 배 열매 맺는 밭으로 객토하고, 그 밭을 차츰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열매 맺는 밭으로 객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나는 현재 어떤 밭인지 돌아볼 것이고, 객토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기로 결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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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2.욕망과 갈망의 차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욕망을 배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것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더 많이 가진 것을 보면서 나도 그것을 원하게 되었고, 누군가가 더 큰 칭찬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 자리에 서고 싶어졌으며, 누군가의 성공을 바라보며 그것이 행복의 모습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이 가르쳐 준 욕망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그것들은 우리 존재보다 더 커져 우리의 생각을 이끌고 감정을 흔들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욕망들을 모두 이루고 난 뒤에도 마음 한편에서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오는 이유는, 욕망은 채워질수록 더 커지지만 갈망은 사랑을 만날 때에만 비로소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대개 어떤 것을 향합니다.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평판, 더 안전한 미래, 더 큰 영향력, 더 아름다운 외모, 더 완전한 건강을 향하여 끊임없이 손을 뻗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삶에 필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삶의 중심이 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로 자신을 평가하기 시작하고, 존재의 가치는 관계가 아니라 소유의 양으로 계산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가진 것은 많아지는데 존재는 가벼워지고, 주변은 화려해지는데 마음은 황폐해지며,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깊은 외로움은 더욱 짙어집니다.
갈망은 다릅니다. 갈망은 어떤 것을 원하지 않고 한 분을 원합니다. 갈망은 소유보다 현존을 사랑하고, 결과보다 관계를 사랑하며, 성공보다 일치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갈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아니, 너는 누구를 원하는가. 너의 기쁨은 무엇에서 시작되는가. 너의 눈물이 흘러가는 마지막 자리는 어디인가. 너의 마음은 누구를 향하여 쉬지 못하는가. 갈망은 우리를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하느님 앞에 홀로 서게 합니다.
보나벤투라는 이해보다 갈망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식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지식이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개념으로 붙잡히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책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지만, 갈망은 하느님께 우리를 데려갑니다. 스승은 길을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랑은 우리를 그 길 위로 걸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은총을 구하고, 기도를 구하고, 정배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그는 가장 놀라운 말을 남깁니다. 빛보다 불을 찾으라고. 빛은 사물을 보여 주지만, 불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빛은 길을 비추지만, 불은 존재를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불은 우리 안에 쌓여 있던 거짓 욕망들을 태워 버리고, 하느님만을 향하는 하나의 순수한 갈망으로 영혼을 다시 빚어 갑니다.
프란치스코 역시 인간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흐름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영께 자신을 내어드리려는 갈망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를 원하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 앞에서 참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는 칭찬을 먹고 자라며, 다른 하나는 침묵 속에서 자랍니다. 하나는 비교를 통해 자신을 높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잊습니다. 하나는 높이 오르려 하고, 다른 하나는 낮아지기를 기뻐합니다. 이 두 흐름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서로를 향해 맞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욕망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욕망을 정화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갈망을 없애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이 본래 향해야 할 곳을 다시 보여 주십니다. 강물이 바다를 향하여 흘러갈 때 생명을 살리듯이, 인간의 갈망도 하느님을 향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살립니다. 그러나 강물이 방향을 잃으면 범람하여 마을을 무너뜨리듯이, 갈망이 자기 자신만을 향하면 욕망이 되고, 욕망은 결국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죄는 갈망의 죽음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갈망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보다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사랑합니다. 평화는 원하지만 평화를 주시는 분은 잊고, 축복은 원하지만 축복의 근원이신 분은 외면하며,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는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도 점점 더 깊은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 없이 얻은 모든 것은 언젠가 다시 잃게 되지만, 하느님 안에서 얻은 것은 잃어버려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소유보다 오래 남고, 관계는 결과보다 깊으며, 은총은 모든 성취보다 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흩어진 욕망들을 하나로 모으는 자리입니다. 기도는 마음속에 흩어져 있는 수백 개의 욕망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시간입니다. '주님.' 그 한마디 안에서 우리의 욕망은 갈망으로 바뀌고, 갈망은 사랑으로 자라며, 사랑은 다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깊은 욕망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점점 단순해집니다. 선택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해지고, 길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해집니다.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음은 마침내 하나를 향하여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작은 것을 원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한한 사랑을 위하여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유한한 만족으로 영혼을 달래려 했고, 영원한 당신을 위하여 지음받았는데 잠시 스쳐 가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눈앞의 이익과 눈앞의 즐거움과 눈앞의 편안함이 눈멀게 한 우리의 비극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류 공존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평화를 잃어버리고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이는 문화를 만들어 공멸로 향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 저지른 결과입니다. 욕망의 늪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지옥이라는 상태적 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갈망이 사라진 곳에는 심각한 외로움이 만든 처참한 죽음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욕망이 지쳐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그날,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 무릎을 꿇는 그날,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타고 있던 갈망의 작은 불씨를 다시 살려 주시기 위하여 조용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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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건축가가 지인의 배려로 박물관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장고에는 아직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은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러보다가 낯설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체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되지 않고 이 수장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친일파인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이 쓴 글이라 전시 불가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물 흐르듯 쓰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매우 능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충분히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 죄가 너무 커서 모든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위대한 일을 많이 남겼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죄인의 삶을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 안에서 남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실 땅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우리의 농사 방법과 달리, 이스라엘 지역의 농사는 씨를 먼저 흩뿌린 뒤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듯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까지 씨앗이 날아가도록 놔두는 농부는 없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낭비이고, 따라서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 세상에 말씀의 씨앗을 던지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관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먼저 길가는 수많은 발길에 짓밟혀 단단하게 굳어버린 길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나 세상의 논리로 굳어버려 말씀이 한 치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겉으로는 흙이 있어 보이나 그 밑에는 단단한 돌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위로를 구할 때는 기쁘게 말씀을 받지만,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할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뿌리가 없어 이내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흙도 깊고 뿌리도 내렸지만, 주변의 가시덤불이 햇빛과 양분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더 커서 영적 질식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자기 삶의 실존적 결단으로 깨닫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수확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비옥한 땅에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굳어버린 길가 같은 내 마음, 얕은 돌밭 같은 내 결심, 걱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 같은 내 영혼에도 끊임없이,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혹시 자기조차 포기한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세상에 존재하는 네 부류의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안에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모습이 모두 있음을 발견합니다. 어제는 돌밭이었어도 오늘 쟁기질을 열심히 하고 돌을 골라내면 충분히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의 4~5배 정도 거두면 평년작이고 7~10배 정도 거두면 대풍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 배, 예순 배의 수치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씨앗의 4분의 3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4분의 1의 씨앗이 모든 실패와 낭비를 덮고도 남을 승리를 거둔다는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길이 험난하고 세상의 유혹이 가득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자가 강물의 세기를 안다(우드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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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저의 관점은 씨가 아무리 좋아도 수확을 결정짓는 것은 씨가 떨어진 토양의 상태라고 봅니다. 비유에서 드러난 것처럼, 어떤 씨는 딱딱하게 굳어진 영혼처럼 길바닥에, 깨달음이 깊지 않은 영혼처럼 돌밭에, 산만한 영혼처럼 가시덤불에, 그리고 한 영혼처럼 좋은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수확의 결과가 다르게 드러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이런 결실 맺는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의 관심은 이런 축복받은 놀라운 삶의 결과보다는 이런 결과가 가능한 토양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삶의 토양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느냐에 있습니다.
결실을 거두기 위해 여러 준비 과정, 무엇보다 먼저 땅을 깊이 갈아엎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992년 청주 척산리 수련원에 살 때의 제 경험에 의하면, 묵혀둔 밭일수록 새로운 밭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일이 더 많고 힘들더군요. 아무튼 묵힌 밭은 깊이 갈아엎어야 하고, 흙덩어리를 부수어야 하고, 돌멩이도 제거하고 잡초도 일일이 뽑아내야 합니다. 또한 씨앗이 잘 자라도록 여러 가지 것들, 곧 자기 방식대로 찢기고 죽은 퇴비가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써 좋은 땅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풍요로운 결실을 원하면서도 이런 거친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일구기 위해 영양분을 보태야 하는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거름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분해된 유기물을 흔히 부식토(humus)라고 하는데, 겸손(humility)이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이 부식토는 특히 색깔이 짙고 영양분과 유기질이 많은 흙, 곧 좋은 땅입니다. 봄에 정성 들여 심은 아주 작은 씨앗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이룬다는 것은 자명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양질의 토양인 부식토와 함께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 충분한 흙, 부식토가 있다면 우리 영혼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은 자라고 성장하며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아름답게 편안하게 해 줄 만큼 영적 큰 나무가 되리라 봅니다. 겸손은 성장을 낳고, 성장은 좋은 결실을 거둡니다.
또한 제 삶의 경험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좋은 땅(=마음의 밭, 心田;영혼)에 떨어진다고 해도 싹을 틔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수분(=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수분이 씨앗에 하는 일은 성령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하시는 일과 같습니다. 수분과 씨앗이 인간의 마음에 함께 찾아올 때 비로소 생명의 기적, 수확의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그 씨가 내 안에서 발아하여 충만한 그리스도의 나무나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밭에 떨어진 모든 말씀은 성령이 생명의 수분을 주시지 않은 한 땅속에서 동면의 나날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이55,10)라는 말씀이 새삼스럽게 오늘 저의 마음에 요동을 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밭을 찰진 부식토(=겸손)로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활동(=수분)이 활발하게 우리의 부식토와 더불어 작용할 때 생명의 씨앗은 자라고 성장해서 새가 머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저는 세상 살아오면서 고신 극기를 잘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 또한 고신 극기를 썩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겸손한 사람을 만나기가 여간 쉽지 않고 만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겸손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4,6) 겸손한 사람이 성공한 삶을 이룬다고 할 때 <겸손>과 <성공>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겸손>과 <성공>이란 단어의 어원학적 뿌리 역시 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공 success>은 <뚫고 나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단어의 중간 부분인 cede는 씨앗 seed의 어원입니다. 결국 씨앗이 비옥한 땅, humus를 뚫고 햇빛 속으로 나올 때 그것은 성공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뚫고 나오는 것이 곧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겸손에 기반하고 뿌리를 둠으로써 성공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성공(=좋은 결과, 좋은 결실) 없이는 진정한 겸손이 없고, 겸손 없이는 진정한 성공이 없음을 기억하면서 성공한 삶, 결실 맺는 삶을 위해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기도를 대신해서 모턴 켈시라는 분이 쓴 책, 「기도와 레드우드 씨앗」에서 발아에 관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 발아란 이상한 과정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합니다. 새해처럼 묵은 것은 가고 새것이 됩니다. 정적으로 완벽하던 씨앗이 균형이 깨지며 훼손을 입습니다. 껍질 새로 물이 스며들면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모의 애리조나에 긴 겨울 우기가 지나면 대지가 갑자기 깨어 살아나 사막은 꽃밭이 됩니다. 몇 년씩 잠자던 씨앗들이 깨어 살아나 광활한 산비탈에 자줏빛 융단을 깔고 산자락에 울긋불긋 색을 입힙니다. 건조한 이집트 무덤에서 발굴된 곡식 낱알이 습한 토양에 심기자 부풀어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 씨앗의 밀폐된 관점에서 볼 때 발아란 유쾌한 과정이 아닙니다. 물이 껍질을 뚫고 들어가 속을 들쑤셔 놓습니다. 생명의 싹이 잠에서 깨어나 부풀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 ‘우리 또한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는 충만한 삶을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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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씨 뿌리는 삶 “하늘나라 꿈의 현실화”
어제 7월11일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성 요셉의 배밭 친구들” 남양주 성 요셉 수도원 후원회 창립 미사>후 뒤풀이 중 많은 둥근 탁자들 위에서 웃음 가득한 꽃 같은 분들이 담소를 나누며 함께 점심 식사하는 모습이 하늘나라 잔치의 실현처럼 너무 아름다운 감동이었습니다.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이게 진짜 미사 잔치다!”
감탄사를 발하며 주위를 돌며 대화도 나누고 강복도 드리며 구경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상징하는 둥근 원형의 식탁들에 둥그렇게 앉아있는 모습은 그대로 공동체의 일치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미사잔치 2부로 그대로 미사의 연장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음식 나눔이 없었다면 참 허전한 반쪽미사가 될 뻔했습니다. 미사의 하늘나라 꿈이 현실화된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신자 분들 오랜만에 하늘나라 잔치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실현도 없습니다. 하늘나라 꿈을 희구하며 노래했던 오래전 <하늘을 바라보며>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높고 푸른 정신으로 살라고 높고 푸른 하늘이다 깊고 넓은 마음으로 살라고 깊고 넓은 하늘이다 영롱한 별빛 영혼으로 살라고 늘 영롱하게 빛나는 별이다 맑은 마음으로 살라고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다 하느님 태양에 희망 두고 살라고 늘 밝게 빛나는 태양이다“<2007.7. > 그동안 수도원이, 제가 늘 꿈꿔왔던 <하늘나라 꿈>이 새 원장을 만나 현실화된 느낌이었습니다. 속화가 아닌 성화하는 잔치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저는 계속 꿈을 노래할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살고 꿈도 현실화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예나 이제나 제 역할은 꿈꾸는 일이요 주님의 꿈쟁이 순수와 열정의 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꿈중의 꿈이, 진짜 꿈이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계속 현실화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밤마다 외딴곳에서 하늘나라 꿈을 꾸고 낮에는 하늘나라 꿈을 현실화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비유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 하늘나라 꿈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 비유의 중심에는 그 주인공 예수님이 자리 잡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꿈의 비밀을 알려주는 하늘나라의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을 봅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한결같이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늘나라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망애가 있었기에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현실에,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고 한결같을 수 있었음은 하늘나라 꿈의 실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시야가 참 깊고 넓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시야를 닮았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자세가 약여합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한결같이 끊임없이 침묵 중에 씨를 뿌릴 뿐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입니다. 늘 좋은 날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오는 날, 눈오는 날, 흐린 날, 더운날, 추운날도 있듯이 삶의 환경도 비슷합니다. 어찌보면 삶의 리듬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려도 길바닥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실패인듯하지만 하느님의 시야엔, 믿음의 시야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짧은 시야와 안목으로 보면 실패지만 깊고 넓은 시야와 안목으로 보면, 결과를 종합하면 성공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인생도 그러할 것이니 비유의 결론은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써서 나누면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려질 것입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 같은 마음들에도 떨어지겠지만 무수한 착한 이들의 비옥한 땅에 떨어져 말씀은 많은 열매를 맺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만은 아실 것이고 그 결과도 언젠가는 들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깨우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듣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삶의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주님의 깊고 넓은 시야를 지니고 씨 뿌리는 삶에 항구 하라는 것입니다. 입은 다물고 귀는 활짝 열어 주님의 말씀을 이웃의 의견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꼰대소리를 듣지 않는 어른이 됩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최고의 처방은 편견이나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잘 보는 것이요 잘 듣는 경청입니다. 이런 이들에 대한 주님의 행복선언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을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고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이거 제2독서의 바오로입니다. 마음의 눈과 귀가 활짝 열려 무지에서 해방된 세분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먿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내 마음 밭에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말씀 탓이 아니라 내 마음밭 탓입니다. 바오로의 신비로운 깨달음을 통해 사도의 하늘나라 꿈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의 마음 밭이 얼마나 비옥했던지 깨닫습니다. 바오로야 말로 참 신비가이자 영성가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마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신비로운 해석도 우리를 고무하고 분발케 하고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결론하여 우리 마음 밭을 가꾸는 수행에 전념하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 들으라 하십니다.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석이지만 주님의 해석이라 해도 좋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 같은 마음 밭에 뿌려지면 별무소득일 뿐입니다. 좋은 땅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침묵과 경청의 좋은 마음 밭 조성이 우선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좋은 땅의 마음 밭으로 변모시켜 주시어 마침내 우리 하나하나 좋은 수확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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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키엣 대주교님. 씨앗이 되어 열매가 되는 삶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풍요롭게 다가옵니다. “씨 뿌리는 사람”, “밭”, “씨앗”, 이 세 가지 이미지는 각각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됩니다. 하느님 먼저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이신 씨앗, 그리고 세상과 인간의 마음 밭입니다. 작은 씨앗은 불안한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거쳐 결국 좋은 땅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 끈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씨를 뿌리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며,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초대입니다. 그 사랑은 창조, 섭리, 예언자들, 그리고 수많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향해 말씀하시며 사랑을 드러내시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여전히 불안정한 땅입니다. 돌밭과 같은 거친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완고하여 말씀을 뿌리내리지 못하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은 욕망과 자기 뜻에 사로잡혀 말씀을 억누릅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씨를 뿌리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씨앗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만을 듣고 순종하심으로써 “좋은 땅”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돌도 가시덤불도 없는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자리합니다. 또한 씨앗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을 넘어, 당신 자신을 씨앗으로 내어 주셨고 그 씨앗은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풍성한 수확을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 나라의 풍성한 수확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음의 밭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불안한 길가가 되지 않도록 영적 경계를 세워 악의 침입을 막고, 돌밭이 되지 않도록 완고함을 제거하며, 가시덤불이 되지 않도록 욕망과 나의 뜻을 뽑아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씨 뿌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말씀 안에서 맺은 열매를 다시 씨앗으로 삼아 세상에 뿌려야 합니다. 복음은 희망과 생명과 평화, 그리고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씨앗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삶으로 부름 받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는 고통과 희생을 포함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수 없습니다.”(로마 8,18)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피조물을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스러운 자유로 이끕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을 하느님의 뜻 안으로 회복시키는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말씀의 사명을 완수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길이며, 그 안에서 세상은 참된 평화와 생명의 충만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황무지가 푸른 풀로 덮이고, 산과 언덕은 기쁨으로 가득하며, 양 떼가 들판을 덮고, 들은 풍성한 곡식으로 넘쳐나며, 노래와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의 말씀이 내 삶의 어떤 “밭(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서 머물고 있는지 조용히 성찰해 봅시다. 2.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으로서, 내 말과 행동이 복음의 희망과 생명을 실제로 드러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내어놓는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포기와 변화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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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3,1-23 같은 농부가, 같은 씨앗을 뿌립니다. 그런데 열매는 땅에 따라 갈립니다. 씨앗이 부족해서도, 농부가 인색해서도 아닙니다.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풀이해 주십니다. 씨는 말씀이고, 땅은 그 말씀을 대하는 우리 마음입니다. 성 예로니모는 평생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고 풀이하는 데 바친 교부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에게 말씀은 스쳐 듣고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받아 곱씹고 새겨야 할 ‘씨앗’이었습니다.
예로니모는 묻습니다. 나는 어떤 땅인가? 길가는 말씀이 들어설 틈도 없이 단단히 굳은 마음입니다. 돌밭은 처음엔 반기지만 뿌리가 얕아 작은 시련에도 곧 말라 버리는 마음입니다. 가시덤불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우거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는 마음입니다. 이 세 땅의 공통점은 받은 씨앗을 ‘아끼지 못하고’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땅이 된다는 것은 타고난 비옥함이 아니라, 말씀을 소중히 여겨 정성껏 가꾸는 ‘선택’입니다. 굳은 마음을 갈아엎고, 얕은 돌을 골라내며, 가시덤불 같은 걱정과 탐욕을 베어 내는 일 ― 그 꾸준한 아낌이 마음을 좋은 땅으로 바꿉니다.
주님께서는 그 결실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 하십니다. 소중히 품은 한 알의 말씀이 이토록 넉넉한 열매가 됩니다. 아낌은 인색함이 아니라, 작은 것을 귀히 여겨 큰 열매로 키우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땅인가? 나는 말씀을 스쳐 듣고 흘려보내지는 않는가? 내 안의 어떤 ‘가시덤불’이 말씀의 숨을 막고 있는가? 나는 받은 말씀을 소중히 아껴 뿌리내리게 하는가?
주님, 제 마음을 좋은 땅으로 일구어 주소서. 굳은 길과 얕은 돌과 우거진 가시덤불을 걷어 내시어, 당신 말씀의 씨앗을 소중히 품게 하시고, 백 배의 열매로 자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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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성당이나 본당이 통폐합되는 것을 영어로 ‘머지(Merger)’라고 합니다. 코네티컷 교구도 많은 본당이 통폐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오클랜드 교구도 그런 과정에서 한인 공동체가 자리를 옮겨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민 공동체는 사제가 있을 때는 미사와 성사를 중심으로 활기를 얻지만, 사제가 없으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두 달에 한 번 엘파소 한인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그곳에는 한국인 사제가 없습니다. 교우들은 주일에는 영어 미사에 참례하고, 매주 화요일에는 사제관에 모여 기도 모임을 합니다. 대부분은 70세가 훌쩍 넘으신 어르신들이지만, 젊은 두 가정도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고백성사, 강의, 미사를 하였고, 5월에는 고백성사와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저는 그곳에서 따뜻한 신앙의 마음을 봅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오고,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고, 미사에 참례한 모든 분이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교우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전국의 공소를 다니며 고백성사와 미사를 봉헌하셨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신앙은 큰 건물이나 많은 숫자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는 정성, 공동체를 지키려는 사랑이 있을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엘파소 방문 중에 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에게는 딸이 세 명 있습니다. 큰딸은 4년 전에 보스턴 대학에 입학했고, 이제 곧 졸업한다고 합니다. 둘째 딸은 이번에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막내딸은 4년 후에 뉴욕의 NYU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자녀들이 좋은 길을 걸어가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족이 매일 저녁 함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엘파소 방문 때도 세 딸이 함께했고, 두 딸은 미사 복사를 했습니다. 형제님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사는 가정의 자녀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공부하면 미국에서는 장학금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형제님의 두 딸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비게이션을 생각했습니다.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면 자동차는 길을 찾아갑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도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줍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목적지를 하느님께 두면, 때로는 흔들리고 돌아가더라도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은 ‘신앙’이라는 목적지를 분명히 정했기에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그리고 토양입니다. 씨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말할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어려움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씨앗이 있습니다. 토양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환경을 말할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서 자란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환경은 분명히 한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토양이 있어도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 뿌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마음에 믿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사제는 교우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교우들은 서로에게 위로와 사랑의 씨앗을 뿌립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도 씨앗입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도 씨앗입니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는 씨앗이 됩니다. 따뜻한 격려는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나 상처 주는 말, 판단하는 말, 험담하는 말도 씨앗이 됩니다. 그것은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공동체를 갈라놓고, 신앙의 싹을 말라 버리게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좋은 씨앗을 뿌리기보다 분노와 이기심의 씨앗을 뿌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도 좋은 밭이 되어야 합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들어도 곧 잊어버립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잠시 기뻐하지만, 시련이 오면 쉽게 포기합니다. 가시덤불 같은 마음은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좋은 땅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인내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은 처음부터 완성된 땅이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로 만들어지는 땅입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기도의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미사의 은총으로 물을 주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과 배려로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교만과 욕심의 돌을 골라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가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길에도 고난은 있습니다. 엘파소 공동체처럼 사제가 없어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매일 함께 기도하며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져도 기도 모임을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척박한 땅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내린 좋은 땅입니다. 세상은 숫자와 규모를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밭을 보십니다. 세상은 조건과 환경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결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본당에서,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좋은 말을 뿌리고, 사랑을 뿌리고, 용서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싹을 틔우시고, 꽃을 피우시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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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1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이 있는 존재 이유’와 ‘말씀의 권능’에 대해 밝혀줍니다. 곧 ‘말씀이 왜 있는지’와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리는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이는 말씀의 존재 이유가 ‘이루기 위함’이며, ‘말씀이 이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우리가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협조할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의 실현’을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복음>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의 실현’인 열매 맺기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이 말씀은 먼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이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허락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은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똑같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받아들이는 이는 가진 것을 더 받아 넉넉해지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들이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그렇게 결정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그러나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둠이 초래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5; 이사 6,10)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들이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을 고쳐주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라는 말씀일까요? 그러나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 주어가 “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 이처럼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들여다 볼 일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행복이 선언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러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땅을 지배하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밭에서 일할 줄을 알며,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과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매만지며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씨앗을 품은 농심’을 지닌 사람,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 사람, 무엇보다 먼저, 자신 안에 그분의 씨앗, 그분의 사랑이 뿌려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라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기꺼이 죽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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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그 씨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미사와 기도로써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밭이 길바닥이나 돌밭, 또는 가시덤불과 같다면 말씀의 씨는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맙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 말씀을 깊이 새기지 못하거나 환난과 박해 앞에 흔들릴 때 우리는 복음의 증거자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뿌려지는 씨는 그 자체로 ‘좋은 씨’입니다. 이 씨가 제 생명력을 마음껏 드러내게 하려면 먼저 우리의 땅을 잘 일구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의 씨를 잘 키워 내어 저마다 삶에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을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창조주 하느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귀로 듣고 그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눈으로 확인하며 몸소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아직 이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기쁨을 전하는 일입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풍성하게 수확하지는 못하더라도 씨가 지닌 생명의 가능성을 믿어야만 다시 밭을 갈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고 씨의 생명력을 믿으며 오늘도 다시 호미를 듭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의심의 돌덩어리와 불신의 가시덤불을 걷어 내고, 말씀의 씨가 우리 삶에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날마다 정성껏 노력해야 합니다. 그 씨를 끝까지 믿고 돌보며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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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2. 연중 제15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습니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진복팔단은 우리 삶의 우선 순위의 순서를 새롭게 정렬하도록 초대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진복팔단: 제1주간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2026년 7월 11일 토요일 프란치스칸 수녀 패트리샤 조던(Sr. Patricia Jordan)은 우리의 마음이 변모되게 하는 길로서 진복팔단을 관상하라고 초대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발견하는 여정의 좋은 출발점은 진복팔단입니다. 진복팔단의 한 가지 해석은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디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치유와 인격의 통합(wholeness)을 향한 여정에서 여러분이 맞닥뜨릴 선택과 도전의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진복팔단은 우리의 인간적 본능이나 감정, 사고와 의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역량에 따라 새롭게 정렬하고 재구성하도록 초대합니다. 성경적 언어로 이것은 "메타노이아", 곧 회심이라는 고통스러운 여정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여정은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는 은총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광야 체험'을 거치 마음의 여정은, 우리가 그 과정에 충실히 참여할 때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을 회복시켜 줍니다. 당신 마음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잘못된 사랑과 삶의 관념을 벗겨내고 허물어뜨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진복팔단을 묵상하십시오…. 진복팔단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여러분 마음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상처와 깨어짐의 영역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각 진복팔단을 따로 묵상해 보기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할 때, 진복팔단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거짓 자아가 만족시키려 애쓰는 잘못된 안전의 상징, 권력, 그리고 자존심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마음입니다.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진복팔단에서 말씀하신 '마음의 깨끗함'은, 애정과 지성, 그리고 의지가 하나로 통합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을 전제합니다. References Patricia Jordan, An Affair of the Heart: A Biblical and Franciscan Journey (Gracewing, 2008), 52–5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nh Trí,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방울씩 이루어 가는 처방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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