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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소설 연재 5회분
꽃 무 덤
진영희
차창에 맺히는 빗방울이 일정한 방향으로 추락한다. 잠시 날아와 바둥대다가 빠른 속도로 빨려들 듯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무릎 위에 놓았던 가방 속의 상자를 끌어안았다.
눈을 감았다. 창틈으로 쌀쌀한 공기가 스며든다. 다시는 대실마을의 땅을 밟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내가 외삼촌도 몰래 미움과 원망의 근원지인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김천을 지나서야 눈을 떴다. 개천을 따라 가는 길이 예전 같지 않다. 가로수로 남아있던 몇 안 되던 미루나무는 자취를 감추었고 버스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사투리만이 변하지 않은 채 나를 맞았다.
그러다가 또 한참을 달리면 버스에 닿을 듯이 낮은 산기슭과 길가에는 구절초를 비롯한 가을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문득, 꽃송이를 따서 땅 속에 넣고 유리조각으로 덮은 후 흙을 뿌려놓고 몰래 들여다보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난날을 돌이키지 않으려고 애쓰던 마음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필름처럼 펼쳐졌다.
내가 다섯 살 되는 해, 어머니를 따라 새 터 마을 잔칫집을 다녀온 나는 심한 열병을 앓았다. 나흘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는데 그 이후로도 시름시름 기운을 잃고 몇 걸음 걷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지냈던 그 해를 넘긴 이후로 나는 한 쪽 다리가 짧아져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늦게 얻은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던 나와 나를 잔치에 데려갔던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집을 며칠 씩 비우기가 예사인데도 미안해하기는커녕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동네의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놀림을 받으며 자라던 내게 그 두려움은 앞날의 고단함을 예감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늘 혼자서 놀았다. 들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해가 긴 낮 시간 동안 혼자 하는 소꿉놀이에서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되고 손님도 할머니도 되었다. 그러다가 울타리나 냇가에서 꽃을 꺾어 와서 땅속에 넣은 다음 유리조각을 얹고 흙으로 살짝 덮어 나만 아는 표시를 해 놓으면 그 날의 내 일은 끝났다. 어쩌다 꽃밭에 있는 큰 꽃송이를 한 송이라도 따는 날이면 아주 부자나 된 듯이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나의 비밀을 알고 있던 대영이가 자기네 밭 옆에 크고 예쁜 꽃이 있는 데를 안다고 했다. 더군다나 거기는 꽃을 따서 버리는 곳이어서 마음대로 꺾어와도 된다는 게 아닌가.
단번에 나는 대영이를 따라 나섰다. 우리 집에서는 좀 먼 그곳은 아주 다른 세상, 정말 별천지였다. 온 밭이 빨강과 분홍색 꽃으로 가득 피어서 백만 송이도 넘을 것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예쁘고 넓은 꽃밭을 본 적이 없었다.
“이걸 정말로 따도 된단 말이가!”
“그렇다캐도! 아저씨가 꽃을 따서 버리는 걸 봤다. 봐라, 저쪽에 꺾어서 버린 거 있다 아이가.”
나보다 한 살 많은 대영이를 믿고 나는 치마폭에 꽃을 따서 담기 시작했다. 꽃병에 꽂을 것이 아니어서 꽃송이만 따면 되었다. 다리가 불편한 것도 잊고 할머니를 돌봐야 되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아주 행복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꽃밭을 누볐다.
“이놈의 자석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고!”
한창 꽃따기에 열중해 있을 때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와 대영이 앞에 구레나룻 수염이 턱과 얼굴의 반을 덮은 아저씨가 고함과 함께 동화 속의 악당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지 내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는 바람에 꽃송이를 다 쏟고 말았다. 대영이는 꽃을 안 땄다고 말하고는 바로 달아났다. 나는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리고 꽃을 따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용서해 달라고 했다.
“아저씨, 나 감옥 가야 돼요?”
내가 아주 서럽게 울며 말했는지 아저씨가 더 놀라며 나를 일으켜 주었다.
“이런 일로 감옥에 안 간다. 걱정 마라, 줄기를 안 꺾어서 다행이다.”
아저씨는 그 꽃의 이름이 작약이라는 것과 약초여서 좀 더 있으면 뿌리로 영양분이 내려가게 꽃을 따 주어야 하는데 아직은 좀 이르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내가 딴 꽃을 봉지에 다 담아주었다. 꽃이 또 필요하면 와서 말하라고, 그러면 꺾어도 되는 꽃을 알려주겠다고도 했다. 나는 아저씨가 하느님보다 더 훌륭해보였고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수염이 많이 난 사람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슴이 벅차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 송이만 넣고 유리로 덮어도 천국의 문처럼 예뻤다. 우리 집 꽃밭과 뒤란으로 가는 길, 흙이 있는 곳은 다 파서 꽃을 심었다. 그렇게 꽃을 감춰 놓고 몰래 들여다보는 것은 그 시절의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확실한 행복이었다. 유리를 통한 꽃의 색깔은 얼마나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유리가 없으면 그 일을 완성했다고 할 수 없다. 유리가 모자라서 호박잎으로 덮어놓고 강변마을에서 고물상을 하는 할아버지 댁 울타리로 뛰어갔다. 굵은 철사 줄 같은 것이 얽혀있는 물건을 쌓아놓은 바닥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있었다. 그것을 주워 와서 장식을 끝냈을 때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 은밀한 일은 나의 세계에서 다음에 먹을 양식을 쌓는 일과도 같았다. 온 집 안 밖 땅속을 꽃동산으로 꾸며 놓으니 마치 큰 곳간을 가진 듯이 뿌듯했다. 내겐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와 나와 할머니가 배고프지 않게 먹을 내가 관리하는 양식이 있어야 했다.
냇가로 나가면 기다란 자갈밭이 있었다. 돌밭을 일구어 만든 대영이네 호박밭 가에는 예쁜 돌이 참 많았다. 햇빛이 비치면 보석같이 반짝이는 자갈 강변이 우리 마을에 있는 것이 참 자랑스러웠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내가 그 때까지 본 건물 중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가 보였다. 대영이는 그 학교 1학년이다. 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다. 대영이가 작약 꽃밭에서 나를 두고 도망을 가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나와 놀아주었던 아이여서 또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이리 와 봐라.”
대영이가 내 손목을 잡았다.
“이게 딱 맞아야 되는데 너는 아직 살이 안 쪄서 내년에 학교에 몬 가겄다.”
엄지와 장지 손가락으로 손목을 잡아 손가락 끝이 맞닿아야 되는데 나는 말라서 손가락 반 마디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날 집에 돌아오면 나는 두 그릇씩 밥을 먹었다.
“아이고 우리 정인이 착하다. 인자 어른 되겄네.”
어머니는 내 숟가락 위에다 반찬을 얹어주며 말했다.
그러나 정작 학교에 입학할 무렵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려 아예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은 어머니의 한이 서린,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찾기 힘든 궁상과 환자의 냄새가 떠나지 않았던 어머니와 나의 노동을 기다리는 공간이었다. 병들고 힘없어진 할머니는 아들 못 낳는 며느리를 더 무시하지 못한 채 그런 생활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지겹도록 고향을 벗어나고 싶은 꿈을 꾸며 할머니를 적당히 구박하고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 밑천으로 우리 집 논밭이 모두 팔려나간 후에도 어머니는 품삯을 받고 그 밭에서 일했다. 살림은 점점 궁핍해져서 쌀독에 쌀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아버지 없는 집의 할머니를 봉양하는 일은 덤으로 여겨졌다. 영악한 나는 햇볕 쬐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깔아 앉혀놓고 일부러 잊은 척 하기 예사였다. 해질 무렵까지 냇가에서 놀다가 어머니가 오기 직전에야 할머니를 방으로 부축해 옮겼다. 내 도움 없이 요강에 앉기도 힘들어하는 할머니가 얼굴이 누렇게 되어 떨고 있을 것은 충분히 상상되는 일이었다. 독한 년이라고 내게 면박을 주면서도 어머니에게 이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할머니와의 줄다리기는 아버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라는 데에 당위성이 있었다.
5학년의 가을이 시작될 때 쯤 아버지가 오셨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아닌 날의 방문은 처음이었다. 내 구두 한 켤레와 어머니의 스웨터를 사 가지고 얼굴이 하얀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한참동안 아이의 손을 잡고 좋아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가 울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계속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병수발을 한 어머니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할머니가 염치없어 보여서 나는 할머니를 더 구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문서를 가지러 왔던 아버지는 병든 할머니를 모셔갈 수가 없어서 하룻밤을 묵고 그냥 돌아갔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그나마 따뜻했던 기억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내 다리를 쓰다듬던 손길이었다. 짧은 다리를 지그시 당기던 아버지가 왜 다른 선물이 아닌 다리 불편한 딸의 구두를 사 왔는지 이상스러워 하며 나는 잠자는 척 고른 호흡을 하기에 정신을 쏟았다.
“내, 형편이 되는대로 니 다리는 꼭 고쳐 주꾸마.”
아버지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흔들어 한동안 멀쩡한 다리로 걸어 다니는 꿈에 젖어 지냈다.
리본이 달려있는 반짝거리는 빨간 구두는 내가 신기에 너무 컸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다준 것이어서 고리를 꽉 조인 다음 학교 갈 때에만 신고, 바닥을 씻어서 마루 위에 올려놓았다가 다음날 또 신곤 했다.
운동회 연습을 하고 조금 늦게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논길 따라 산길 따라 친구들보다 몇 발자국 뒤에서 걸어오는데 재민이가 나를 놀렸다.
“쩔뚝 쩔뚝! 맞지도 않는 구두를 신고 안됐다. 너거 아부지가 사다 주더나. 신발 싸이즈도 모르는 사람이 아부지 맞나?”
재민이는 다리를 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서너 명 되는 아이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재민이를 노려보았다.
“꽃밭에서 쉬어라, 나비야! 나알개 쉬어 가아 거라, 나비야!”
재민이는 운동회 연습 때의 무용에 맞춰서 두 팔을 젓고 노래까지 부르며 날아가는 나비 흉내를 냈다. 놀림에 익숙해져 있던 나였지만 그 날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구두를 벗어들고 재민이를 때릴 기세로 맞섰다. 재민이는 전에 없던 나의 행동에 잠깐은 놀라는 것 같았지만 금방 나를 무시했다.
“어쭈! 덤벼? 니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애? 덤벼 봐!”
팔을 몇 번 뻗더니 재민이는 순식간에 내 구두 한 짝을 빼앗았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나는 절룩이며 이리저리 뛰었다.
재민이는 구두를 줄듯 말듯 나를 놀리다가 내게로 던진다는 것이 그만 길 아래 낭떠러지로 날리고 말았다. 바로 아래는 냇물이 시퍼렇게 흘렀다. 다른 길로 돌아서 냇가로 내려갔다. 왁자지껄하던 아이들도 걱정이 되었는지 따라 내려와 같이 찾았다. 냇물을 따라 두 명이 내려가고 나머지 아이들은 산기슭을 훑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아찔한 절벽 바위 사이로 산딸기나무의 빨갛게 익은 단풍잎과 가시만 무성했다.
해질 무렵까지 울면서 냇가를 맴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물속으로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 날이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내 곁을 떠난 날보다 슬펐다. 신발 소식을 먼저 들은 어머니는 맨발로 온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무 말 없는 어머니가 더 무서워서 발갛게 부은 발을 감추고 밤새 앓았다. 잠결에 내 발을 주무르는 어머니의 손이 풀벌레 소리와 함께 꿈처럼 와 닿았다.
할머니는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작은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동네가 떠나가게 울며 안상주 노릇을 했고 장례식이 끝나자 어머니와 나는 서울 외삼촌댁 동네의 반 지하 집으로 서둘러 이사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와 어른들이 정말 싫었다. 호적까지 넘겨주고 빈손으로 와서 힘들게 일하러 다니는 어머니가 밤마다 앓는 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가진 장애를 뛰어넘기 위해서 악착같이 공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손끝이 맵다는 소리를 들으며 설거지를 하는 사람으로 취직한 지 이 년 만에 주방 일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외삼촌댁 동네를 떠나 우리 모녀가 식당에 딸린 방으로 옮겨 간 것이 그 무렵이다. 방학이면 과외지도도 받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서울 아이들은 내게 관심조차 없었다. 친구도 경쟁자로만 보는 그런 아이들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졸음이 올 때마다 나는 성한 다리로 아픈 다리를 누르면서 나를 채근했고 피곤했을 어머니도 먼저 잠자는 적이 없이 텅 빈 식당의 홀에서 채소라도 다듬었다.
“무식하믄 당하는 기라. 시대도 변했지마는 너는 여자라고 죽은 듯이 살지 말아라. 내가 무신 일을 해서라도 니 뒷바라지는 할 기다.”
“됐어요. 난 엄마처럼은 안 살 테니 걱정 마.”
곱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이는 내게 어머니는 눈 가의 주름을 잔뜩 만들며 웃기만 했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나는 약학대에 입학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어머니는 일을 하루 쉬면서 울었다. 당연한 일 같아서 나도 담담히 곁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출을 받아 보태서 연립주택 2층 전세로 이사했다.
약학대는 경사가 있는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입생이었을 때의 나는 시간을 충분히 잡고 학교에 일찍 가서 다리 저는 것을 의식하여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내가 다리를 절룩인다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대해주는 것을 믿고 싶었다.
학교 입구에서부터 담장이나 언덕마다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는 그 많은 꽃들을 볼 때면 땅에 묻고 유리로 장식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냥 꽃송이를 몇 개 따서 뱅뱅 돌리며 스스로를 달랬다.
‘서정인, 미꾸라지 용 됐지. 놀리는 사람도 없고 밥걱정 안 해도 되는데 꽃을 왜 묻어? 그냥 보이는 대로 아름다움을 느끼면 돼.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해? 인제 다 나았어, 어린 날의 네 상처로 더는 아파하지 마.’
파란 하늘이 눈부셨다. 꽃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사라질 무렵, 쌀독에 양식 없는 꿈을 꾸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친구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곧바로 산소 아래 도로까지 갔다. 대실은 비가 안 왔다. 과수원 길을 따라 올라간 뒷동산의 밭 한 뙈기만한 선산은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그 아래에 어머니의 예측대로 가묘가 나란히 두 개 있었다. 예측이 아니라 어머니가 생전에 혼자 다녀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아버지와 작은엄마의 가묘를 두 개 다 파 엎고 싶었다.
“소박 당한 지 십년도 넘었구만, 미쳤다고 여기다 뿌려 달래. 작은 엄마가 독하다고? 독하니까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묘 자리까지 벌써 차지하고 있잖아, 엄마는 정말 바보야, 바보!”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음과는 달리 어머니께도 그리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 내게 정말 여기에 뿌려달라는 그 말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임종을 앞 둔 여윈 몸으로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느그 아부지 대구 공장에서 불만 안 났어도 니 다리 수술해 준다캤는데… .”
“내가 언제 아버지 덕 보고 살았어? 수술 안 해도 잘만 살잖아.”
아버지 말만 나오면 더 퉁명스러워지는 나는 아픈 어머니께는 좀 다정하게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밑천 없이 시작한 원단 장사, 공장도 짓고 마이 키왔는데 불이 나 갖고 다 망해 묵고, 그래서 인자는 내가 죽어도 너를 너거 아부지한테 몬 맽기겄다.”
“맡긴다고 내가 가나? 밑천은 왜 없어? 다 까먹어서 그렇지. 우릴 버려서 벌 받은 거 아니고 뭐야.”
“그래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느그 아부지 아이가.”
“아버지는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야!”
“내 죽으믄… 시집도 안 간 너를 우짜꼬. 우리 정인이 불쌍해서 우짜꼬.”
어머니는 죽는 자신의 일은 안중에도 없고 내 걱정만 했다.
“너 하나 잘 키와서 약대 보냈으니 나는 원도 한도 없다. 너거 아부지 몰래 선산에다 내 뼈나 뿌려조라.”
“왜? 하필이면 그 집 산에다가? 엄마는 징글징글 하지도 않아? 그럴 순 없어.”
“그냥 이유 캐묻지 말고 그리 해 줘라, 정인아.”
어머니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궁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4개월이 못되어 어머니는 그렇게 영영 눈을 감았다.
나는 마음을 바꾸어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지 않고 묻기로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묘 위에는 소나무 열 그루를 심은 것으로 다른 집 땅과 경계선이 만들어져 있다. 아버지와 작은엄마의 가묘보다 훨씬 높은 곳, 제일 잘생긴 중앙의 소나무 아래를 나무토막으로 파기 시작했다.
“할머니, 내가 좀 구박한 거 용서하시고 끝까지 할머니 지킨 우리 엄마 거기서 잘 거둬 줘.”
할머니가 듣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땅을 파는 내내 나는 중얼거렸고 할머니도 그 말은 들어줄 것 같았다.
문득, 어린 시절의 꽃 장식을 한 번만 더 해서 유리조각으로 표시를 해두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버스를 타고 오면서부터 그런 생각은 계속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구절초가 지천에 피어있다. 급하게 꽃송이만 똑똑 따서 가방에 담았다. 산소 근처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꽃을 따라가며 넘치도록 따서 눌러 담아 왔다.
“봐, 엄마. 이건 양식이야. 엄마 위에다 덮어줄게. 엄마, 저승가면 잘 살라고 내가 마지막으로 꽃으로 예쁜 곳간을 만들어 줄게. 이건 모두 돈이고 쌀이고 옷이거든.”
어머니의 유해가 담긴 도자기를 열어 나무로 판 구덩이에 천천히 그것을 부었다. 도자기에 묻은 것까지 탈탈 털어서 다 뿌린 다음 그 위에다 꽃송이가 위를 보게 덮었다. 북받쳤던 설움이 한 차례 터졌다.
“저승에서는 절대로 남한테 행복 뺏기지 마. 그리고 나 이렇게 된 것 엄마 탓 아니라고 했지. 괜찮아, 한 쪽 굽 높은 신발 신으면 정말 표시도 안 나. 나는 씩씩하게 살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아.”
꽃으로 한 층을 더 쌓고 또 쌓아서 유리조각 대신 내 손수건을 펴서 얹었다. 흙을 덮고 다독거리는 동안, 눈앞이 흐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유리 아줌마한테 든 보험금을 받으면 집 대출금 갚고 내 대학공부는 물론, 다리 수술비까지 나올 것이라며 내게 진 빚을 그렇게나마 갚는다는 어머니였다.
몇 시간을 나는 축축한 흙 위에 앉아 있었다. 혼자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는데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두 손으로 다리를 주무르다 아득히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옛집이 더러 남아있기는 하나 개성도 모양도 없는 양옥으로 개조된 동네가 낯설다.
몇 걸음을 걸어 내려오던 나는 소나무의 모양을 눈여겨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올라갔다. 제일 가운데 소나무 아래로 자리를 잡았지만 두 그루 중 어느 것인지 나중에 혼란스러울 수 있다. 꽃무덤 위의 소나무 밑둥치에서 오십 센티 정도 위 쯤 되는 곳을 손톱으로 찍었다. 표시가 금방 지워질 것 같다. 볼펜을 꺼내어 그어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애초에 유골을 뿌려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모종삽 하나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나는 이로 그 자리를 물어뜯었다. 다음에 내가 왔을 때 알아볼 수 있는 표시가 확실해 질 때까지 깊게 나무의 골을 팠다. 한참동안 찝찔하고 떫은맛이 입 안에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산길을 따라 초등학교 가는 길로 걸었다. 서쪽 하늘이 노을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오슬오슬 한기가 밀려왔다.
다리가 놓이고 큰 길이 생긴 곳을 따라갔다. 어린 시절, 구두를 잃어버렸던 산길로 접어들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듯 무성했던 수풀이 힘없이 가라앉아 있을 뿐 길의 흔적조차 희미하다. 시퍼렇게 흐르던 냇물도 물줄기가 약해졌다. 냇가로 내려가 보았다. 따 먹기도 아깝도록 탐스러웠던 산딸기나무와 잡목들이 단풍이 든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곳이라는 생각이 또 들어서 찬찬히 산자락을 훑어보았다.
그러던 나는 무엇에 끌리듯 바위 아래의 나뭇가지에 시선이 꽂혔다. 기슭을 올라갔다. 부서진 바위조각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위가 있는 움푹 파여진 곳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신발 한 짝이 걸려있었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귀가 먹먹해졌다. 어지럼증이 생겨나 산이 아래로 쏟아질 것 같았다. 신발 위에는 이끼가 살짝 끼어 있었다. 나무는 언제 습기를 머금어서 이것을 품었을까? 잔 먼지 같은 흙이 쌓인 위에 파랗게 이끼가 낀 신발이 참으로 지루했다는 듯 나를 보았다. 풀줄기와 이끼로 친친 얽혀 오지게도 박혀 있었다. 손이 떨려왔다. 이끼를 긁어내며 신발을 잡아 뺐다. 먼지가 풀썩 나면서 구두는 삭아서 툭 끊어졌다.
아아, 8년이 지나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구두는 아버지가 내게 사다주었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나는 때때로 징그러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을 때가 있다. 열병이 나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병원에 다니던 때 썼던 연두색의 가는 줄무늬 파라솔 색깔을 아직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프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족사진 찍을 때 어머니가 입었던 남색 공단의 윤기 나는 부드러운 한복과 제삿날 입던 빳빳하게 풀한 옥양목 옷에서 나던 사각거리는 소리와 냄새 같은 어린 시절의 사소한 촉감들까지 생생하다. 잃어버린 신발의 빨간색 둥그스름한 코와 리본장식 같은 것은 눈을 감아도 아직도 또렷이 알 수 있다. 그것은 내 구두가 틀림없었다.
먼지까지 두 손으로 받친 구두를 들고 다시 산소로 향했다. 이것을 발견하라고 어머니는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구두도 꽃상여를 태워 쉴 곳으로 보내주자.’
8년 동안이나 나를 기다렸으니 꽃잎을 덮고 묻힐 자격을 주어야 될 것 같다.
가는 길에 보이는 꽃송이들을 또 땄다. 어머니 소나무 옆의 여섯 번 째 소나무 아래에 묻으면 두 그루가 무덤의 정 중앙, 센타가 되는 거라는 생각에 기운이 솟았다.
평소 전화를 걸지도 않던 아버지의 번호가 맴돈다.
*010-****-2587 – 이리 오와, 빨리 치루어. 2587 2587… . 마치 숫자들의 조합이 내 발을 움직이게라도 하는 양 걷는 느낌이 없다.
‘엄마, 아버지도 형편이 어려우니까 다리를 안 고쳐줬지 마음은 그게 아닐 거야. 엄마 말대로 다 용서하고 자유로워질게. 오늘, 내 아픈 기억들은 모두 여기서 장사 지내고 갈게.’
어디선가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볼 것만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소로 가는 길이 아스라하게 안개에 쌓인 듯이 흐리다. 저녁노을의 붉은 빛과 어우러진 산기슭이 어릴 적 보았던 백만 송이 보다 많아보였던 작약 꽃밭처럼 아름다운 신기루로 보인다.
금방 해가 떨어질 거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래 전 운동회 때, 날개를 달고 꽃 속을 휘저으며 부르던 노래가 튀어나와 박자를 맞추었고 나는 산소를 향해 뛰었다.
- 꽃밭에서 쉬어라, 나비야. 날개 쉬어 가거라, 나비야.
그리 가지 말아라, 거미줄에 걸릴라, 이리이리 오너라 나비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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