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집(剛齋集) 송치규(宋穉圭)생년1759년(영조 35)몰년1838년(헌종 4)자기옥(奇玉)호강재(剛齋)본관은진(恩津)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김정묵(金正默)의 문인 剛齋先生集卷之五 / 序 / 河東鄭氏族譜序 *순조 30 1830 경인 道光 10 72 2월, 세손사를 상소하여 사직하다. ○ 9월, 세손시강원 찬선이 되다.* 河東鄭氏旣有族譜。而一蠧文獻公先生諸後孫。又相與別爲派譜。蓋以原譜不能致詳於名下註故也。將印。
先生十二世孫煥弼來。問序於余。夫譜者。將以傳乎世而徵諸後。今去先生世不甚遠。後承諸派。又未有散居者。則其所收錄。罔或遺漏。而昭穆井井。若立殣於宣祖丁酉。勤王於仁祖甲子。倡義於英宗戊申。諸公忠節之卓。前後相望。于祖有光。而實蹟記載。皆得纖悉。則序固在其中矣。何必贅以蕪拙之辭。但先生長男直長希稷。不幸嫡無嗣。有庶子曰如山。而乃移統於其弟正郞希卨。其重宗祀之意。有足起欽者。而昏朝時如山之孫元禮。諂附弘瞻。藉其勢而爲奪宗之擧。仁廟改玉。始上聞歸正。如山餘裔。近又以活字。印出先生實記。而變亂其世系。他日世變。有不可知者矣。先生之後而有是者。可勝傷歎哉。移宗顚末。不可不詳於直長公名下。如或不然。豈小失也。遂書此。俾歸而弁諸卷。 강재집 제5권 / 서(序) / 하동 정씨 족보 서〔河東鄭氏族譜序〕 하동 정씨(河東鄭氏)가 족보를 갖고 나서, 일두(一蠧) 문헌공(文獻公) 선생의 여러 후손들이 또한 서로 파보(派譜)를 따로 만들었다. 대체로 이전의 족보가 이름 아래에 있는 주석을 자세하게 달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인하고자 하면서 선생의 12대 후손인 정환필(鄭煥弼)이 와서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譜)라는 것은 세상에 전하여 여러 후손들을 징험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은 선생의 시대와 그다지 멀지 않고, 또 후손의 여러 파(派)들도 흩어져 살고 있지 않으니, 기록할 때 빠진 것이 없고 소목(昭穆)의 순서도 조리가 분명하다. 선조(宣祖)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순국〔立殣〕하고,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인조2)에는 힘을 다해 왕을 구원하였으며, 영종(英宗) 무신년(1728, 영조4)에는 앞장서서 대의를 외쳤다. 이와 같이 여러 공들의 뛰어난 충절(忠節)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서 조상에게 영광되고 실적(實蹟)의 기록도 모두 매우 자세하여 서문이 본래 그 속에 들어 있을 것인데, 하필이면 견문이 좁은 나의 글로 사족을 달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선생의 장남으로서 직장(直長)을 지낸 정희직(鄭希稷)이 불행하게도 본처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고, 정여산(鄭如山)이라고 하는 서자(庶子)만 있어서 바로 자기 동생인 정랑(正郞) 정희설(鄭希卨)에게 그 종통을 옮겼다. 종사(宗祀)를 중시하는 뜻은 존경할 만한 점이 있으나,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정여산의 손자 정원례(鄭元禮)가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에게 아첨하고 달라붙어 그 세력을 믿고 종통을 빼앗는 행위를 하였다. 인조가 왕위를 계승하고 나서야 올바른 곳으로 돌려놓아 줄 것을 상소하였다. 정여산의 후손들이 근래에는 또 활자(活字)로 선생의 실제 기록을 인쇄하여 세계(世系)를 어지럽혔으니, 먼 훗날 세대가 변하면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사후에 이런 일이 있으니, 상심과 탄식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종통을 옮긴 전말(顚末)은 직장공(直長公)의 이름 아래에 자세하게 적지 않을 수 없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작은 실수이겠는가. 이에 이 서문을 쓰고, 돌려주어 책의 권두에 넣게 한다.
[주-D001] 일두(一蠹) 문헌공(文獻公)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ㆍ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이다. 저서에 《일두집》이 있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이재유고(頤齋遺藁) 황윤석(黃胤錫)생년1729년(영조 5)몰년1791년(정조 15)자영수(永叟)호이재(頤齋), 서명산인(西溟散人), 운포주인(雲浦主人), 산뢰(山雷), 월송외사(越松外史)본관평해(平海)특기사항김원행(金元行)의 문인. 홍계희(洪啓禧), 신경준(申景濬) 등과 교유 頤齋遺藁卷之十一 / 序 / 河東鄭氏族譜序
自雞林三姓相王則有六姓之錫。而李鄭于六爲大。今攷氏族書。鄭不及李之最大。而分封別籍。亦僂指非一。盛矣哉。若河東一貫。非非一之一乎。而史文多闕。年系多疑。吾小友學明恒以是病之。茲三派各成一小譜。而其歸極於贈密直副使諱國龍同爾。雖未及究夫大全。而猶足以明世本攝人心。一開卷而油肰有孝悌之心矣。何者。慕祭酒 晏 沈死之實。慕文獻 汝昌 道學之傳。則風聲淵源。雖不姓鄭。宜莫不聳。况於同祖之旁尊者乎。又况孝洞 文孫 之流名廬墓。忠節 遠 之一死葦冦。霞谷 雲龍 之首倡義旅。而本之正學。尤炳烈礌硠於百世者乎。是譜雖小。可以不讓大全。彼徒以旂常彜鼎之舃奕。而無以重輕於三綱五典之敎者。曷足道也。吾友霞谷肖孫也。歸而求之有餘師。嗚呼。高山仰止。尙無忝所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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