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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1 2월 11일, 孝寧大君의 8세손으로 槐山 忠原里에서 태어나다.
인조 - ~ ~ 崇禎 - ~ 향시와 별시에 합격하였으나 科業에 뜻을 두지 않고, 병자호란 이후 鳥嶺을 넘어 외가가 있는 尙州 山陽村에 이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26 겨울, 聞慶에 있는 四佛山을 유람하고 〈遊四佛山說〉을 짓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38 成渾과 李珥의 문묘 陞廡 문제가 일자 百拙庵 柳㮨을 疏頭로 하여 〈嶺南儒生論牛溪栗谷不合從祀疏〉를 올려 禁錮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42 8월 25일, 졸하다. ○ 10월, 延豐 長豐山에 장사 지내다.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 聞慶 近嵒書院에 배향되다.
이구(李榘) 1613년(광해군 5)~1654년(효종 5)
活齋先生文集卷之四 / 雜著 / 洪寓庵立祠發文 *홍언충
嗚呼。我士林之有寓庵洪先生久矣。先生有文章有直道。出處之正操守之確。庶幾乎一致夷險。樂夫天命者。其高風偉節。足以聳動乎當時而矜式乎來世。昔者西厓老先生未嘗不亟稱以爲斯人合有祀享。當咸寧稟事之際。固有親承此敎者焉。矧我山陽一縣。山川風物之秀異。而前後人傑。闊焉寡聞。其能毓德而播馥。睠玆而終焉者。惟先生一人。則玆鄕之人所以景止欽仰於靑山灣碕之間者。自有所不能已焉。縣有近嵒書齋。爲士林遊息之所。視諸黨膠之制略備。而前輩雅意咸願以先生尸祝於斯。蓋其一時商訂於鄕邦諸老者。的有所定論。而未免人事之推遷。至于今泯泯。吁誠欠典也。玆者士論齊發。不謀而同。惴惴焉惟不克成就此事是懼。將以月日。建立祠廟。第念斯文重事。非一縣之所敢私也。凡我一體之士林。不可不先事而告意。故敢此通諭。俾有消詳。伏望僉尊。樂與而辱敎之幸甚。
活齋先生文集附錄 / 近嵒書院奉安文[趙錫喆]
伏以大道已衰。正學幾晦。各尊所聞。異言喧豗。於休先生。豪傑天資。海東名儒。山陽處士。窮居篤學。眞知實得。獨尋正的。直排異學。理氣幽奧。性命精微。推演朱說。發揮溪旨。或書辨證。或圖揭示。見何精到。論何的確。十條嘉謨。亦出丹愊。志决長往。孰知其跡。山中日月。崇禎之曆。一區桑鄕。百世淸風。俎豆盛禮。嗟哉未遑。凡在後學。詎無崇報。睠玆嵒祠。四賢攸妥。炳然忠節。蔚乎道義。矧玆木老。先生心友。一氣相感。臭味同孚。侯誰並躋。息老㙜叟。學術德業。異世同道。一堂腏食。禮義攸當。玆簡吉辰。敬奉躋享。靑襟棼集。禮儀翼翼。千秋妥靈。報祀無斁。
常享祝
私淑之道。明理之學。遺範在玆。百世矜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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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洪汝河) 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
木齋先生文集卷之六 / 上樑文 / 寓庵洪先生立祠上樑文
誦其詩讀其書知其人。寔資尙友。國有學州有序家有塾。皆以明倫。爰創一畝之宮。庸揭百世之範。恭惟寓庵先生。古之烈士。傑然一時。味已辨於取熊。生有不爲。死有不避。詞競傳於賦鵩。命何其短。意何其長。事君無改節之心。奉天有不讎之義。鄕先生歿可祭社。其在斯人。至今日始議作堂。蓋亦有待。眷茲近喦書室。寔惟商嶺奧區。旣衍旣原。卽水抱山環之地。宜絃宜誦。抑冬溫夏涼之天。秀氣攸鍾。北盤黛美之嶽。芳塵可挹。南眺謝家之山。距先生之故居。若是近也。因講堂之舊貫。庶易就乎。鄕老出力而鳩材。多士釋經而敦事。齋廬庖湢之備設。益恢申侯之舊規。尸祝薦祼之縟儀。聿遵厓門之正論。儼輪奐而創構。面勢甚尊。精肸蠁而降歆。苾芬旁達。茲歷吉日。將擧脩樑。恭殫蛾術之誠。敢陳燕賀之唱。兒郞偉拋樑東。看取初昇曉旭紅。年富學人如此日。功程脩遠更昭融。兒郞偉拋樑南。十里靑山著寓庵。欲學丈夫風節事。請君莫向利名酣。兒郞偉拋樑西。指路漳州莫使迷。平正一條堪踏去。休論適國有千蹊。兒郞偉拋樑北。環繞列星控紫極。三十輻共一轂然。心體如之須默識。兒郞偉拋樑上。一片靈臺涵萬象。聖賢辛苦說明誠。盡與斯人除慾障。兒郞偉拋樑下。夏誦冬絃集儒雅。大學始敎必由茲。美俗薰陶民自化。伏願上樑之後。文風丕振。正道乃行。建學立師。想成均敎育之制。樂群敬業。資麗澤講習之功。人慕節義之風。家興禮讓之俗。爲臣作忠。爲子作孝。有餘力以學文。不肅而成。不勞而能。詎見遷於異物。
목재집 제6권 / 상량문(上樑文) / 우암 홍 선생을 입사한 사당의 상량문〔寓庵洪先生立祠上樑文〕
시를 외우고 글을 읽어 그 사람을 알아 옛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벗함의 바탕이 되고, 국(國)에는 학(學)을 두고,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가(家)에는 숙(塾)을 둠은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함이었네. 이에 한 이랑의 사당을 세우니, 이로써 백세의 모범을 드리웠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암(寓庵) 선생은 예전의 열사(烈士)로 일시에 준걸스러운 분이네. 맛으로는 의리를 분별할 줄 알아, 살아서는 하지 않는 일이 있었고, 죽음을 피하지 않아 사(詞)는 복조부(鵩鳥賦)를 읊어 전한 것보다 소문이 났네. 목숨이 그렇게 짧은데도, 뜻은 어찌도 그렇게 장구(長久)하게 품으셨던가. 임금 섬김엔 절개를 고치려는 마음이 없었고, 하늘의 뜻을 받듦엔 원수를 두지 않으려는 의리를 지녔네. 마을의 어진이가 죽으면 사당에 모셔지며 이 분도 거기에 해당하기에,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사당 지을 의논을 하니 기다림이 있은 것이네.
돌아보니 이 근암서원(近嵒書院)은 참으로 상산(商山) 고갯마루 그윽한 구역에 있네. 낮은 언덕과 진펄이라 강물이 감싸고 산이 에둘렀으며, 거문고 타고 글 읽기에 마땅한지라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네. 빼어난 기운 모여 들어 북으로 예쁘게 화장한 눈썹 같은 산들이 웅크리고 있고, 향기로운 자취 손에 닿을 듯 남으로 사씨(謝氏) 집안의 산을 조망하네. 선생의 옛집과 거리가 이처럼 가깝고, 강당은 옛 일을 인하여 그대로 따랐기에 쉽게 이루겠구나.
마을 어른들은 힘을 보태고 재물을 모으며, 많은 선비들도 책을 내려놓고 일을 돕네. 재실ㆍ부엌ㆍ목욕탕을 갖추니, 신후(申侯)의 옛 모범을 더욱 넓히네. 축문 읽고 천관(薦祼)하며 성대히 제사 지내며, 이에 서애(西厓) 문하의 정론(正論)을 준수했네. 엄연히 빛나고 새롭게 얽었기에 지세(地勢)도 매우 받들고, 정결하게 제사지내 내려진 복이기에 향기가 널리 퍼지네. 이에 길일을 지나, 긴 들보 올리기를 시작하네. 공경히 아술(蛾術)의 정성을 다하고, 감히 연하(燕賀)의 잔치 노래를 짓네.
어기영차 들보 동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東
보라, 새벽의 붉은 태양 처음 솟아오름을 / 看取初昇曉旭紅
나이 젊은 학자들은 이 태양과 같으니 / 年富學人如此日
갈 길이 머니 거듭 밝히고 녹여야 하네 / 功程脩遠更昭融
어기영차 들보 남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南
십리 청산은 우암을 밝게 드러내니 / 十里靑山著寓庵
대장부의 풍모와 절개를 배우려거든 / 欲學丈夫風節事
청컨대 그대들은 이익이나 명예를 탐하지 말라 / 請君莫向利名酣
어기영차 들보 서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西
장주로 가는 길 가르켜 주어 헤매지 않게 했으니 指路漳州莫使迷
평평하면서도 곧은 한 갈래를 내달려야지 / 平正一條堪踏去
국도로 가는 데에 천 갈래 길 있다고 말하지 말라 / 休論適國有千蹊
어기영차 들보 북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北
에워 싼 뭇 별들 북극성을 향하고 / 環繞列星控紫極
서른 폭 바퀴살은 바퀴통 하나를 함께 하듯이 / 三十輻共一轂然
몸과 마음이 그와 같아서 모름지기 묵묵히 알도다 心體如之須默識
어기영차 들보 위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上
한 조각 마음에 만상이 담겨 있기에 / 一片靈臺涵萬象
성현께서 힘들여 명과 성을 말하였으니 / 聖賢辛苦說明誠
이 사람들과 함께 욕심의 장애물을 모두 없애기를 / 盡與斯人除慾障
어기영차 들보 아래에 던지세 / 兒郞偉拋樑下
여름에는 글 읽고 겨울에는 음악 익히며 아름다운 선비들 모였고 / 夏誦冬絃集儒雅
태학에서의 첫 가르침도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으며 / 大學始敎必由茲
미풍양속으로 훈도하니 백성들 저절로 교화되네 / 美俗薰陶民自化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樑)한 뒤에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고, 정도(正道)가 곧바로 시행되어 학교를 건립하고 스승을 모셔 성균관에서 교육시키는 제도를 생각하고,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이업을 공경하여 붕우 간에 서로 도와가며 강습하는 공로(功勞)의 밑바탕이 되길. 사람들은 절의(節義)의 풍모를 사모하고, 집안에선 예양(禮讓)의 풍속을 일으켜 신하가 되어선 충성하고 자식이 되어선 효도하기를. 남은 힘이 있어 학문을 익힌다면엄하게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수고롭지 않아도 가능하기에 어찌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전락하랴.
[주-D001] 우암 …… 사당 : 우암은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자는 직경(直頃)이고, 호는 우암(寓菴)이다. 갑자사화 때 진안으로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때에 또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해도에 이배하던 중 조령에 이르러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사당은 홍언충을 향사한 근암서원 내의 경현사(景賢祠)를 가리킨다. 《近嵓書院誌》[주-D002] 시를 …… 벗함의 : 《맹자》에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시를 낭송하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그의 삶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옛 시대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讀其書誦其詩,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라는 말이 있다. 《孟子 萬章下》[주-D003] 국(國)에는 …… 둠 :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 교육하던 것에는 마을에는 숙이 있고, 고을에는 상이 있고, 지방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라는 말이 있다.[주-D004] 한 이랑의 사당 : 덕 있는 선비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일묘의 담장과 환도의 실에다 대를 쪼개어 엮은 문을 달고 문 옆에 작은 문을 내며, 쑥대로 엮은 출입문과 옹기로 들창을 달고, 옷은 번갈아 입고 나오고 이틀에 하루치의 음식을 먹는다.〔儒有一畝之宮, 環堵之室, 篳門圭窬, 蓬戶甕牖, 易衣而出, 幷日而食〕”라는 말이 있다.[주-D005] 맛으로는 …… 알아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도 먹고 싶지만 모두 먹을 수 없다면 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며, 생명도 보전하고 싶고 의리도 취하고 싶지만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을 경우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는 말이 있다.[주-D006] 사(詞)는 …… 났네 : 〈복조부(鵩鳥賦)〉는 가의(賈誼)의 작품이며, 본문은 가의와 관련된 고사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폄척되어 나가 있을 때, 그의 집에 복조(鵩鳥)가 날아 들어왔다. 그는 복조를 상서롭지 못한 새라고 여겨 불길한 생각에 〈복조부〉를 지어 스스로 위로했는데, 그 후 얼마 안 되어 가의가 죽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84 賈誼列傳》[주-D007] 근암서원(近嵒書院)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소재한 서원이며, 1669년(현종10)에 설립되어 홍언충(洪彦忠, 1473~1508)ㆍ이덕형(李德馨, 1561~1613)ㆍ김홍민(金弘敏, 1540~1594) 등을 배향하였다.[주-D008] 낮은 언덕과 진펄 : 오토(五土)의 신(神) 중 하나이다. 오토는 다섯 가지 토지, 곧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구릉(丘陵)ㆍ분연(墳衍 언덕과 평지)ㆍ원습(原隰 높은 벌판과 낮은 진펄)을 가리킨다. 춘분과 추분을 지난 무자(戊子) 일을 사일(社日)이라고 하며, 이날 여기에 제사를 지낸다. 《周禮 地官 大司徒》[주-D009] 거문고 …… 시원하네 : 현송(絃誦)이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것을 말한다.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봄에는 시를 외우고 여름에는 거문고를 탄다.〔春誦詩 夏絃琴〕”라는 말이 있다.[주-D010] 사씨(謝氏) 집안 : 진(晉)의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에는 자질이 우수한 자제들이 많았으며, 사령운(謝靈運)ㆍ사조(謝眺) 등의 시인이 배출되었다. 이후 사씨는 왕씨(王氏)와 더불어 명문거족의 대표가 되었다. 《世說新語 言語》[주-D011] 신후(申侯) : 근암서원을 처음으로 창건한 신잠(申潛, 1491~1554)을 가리킨다.[주-D012] 천관(薦祼) : 제사의 절차로 천은 제수(祭需)를 올리는 것을 말하고, 관은 신의 강림(降臨)을 바라며 모사(茅沙)를 담은 그릇에 술을 조금씩 세 번 따르는 것을 말한다.[주-D013] 서애(西厓) : 호가 서애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을 가리킨다.[주-D014] 아술(蛾術)의 정성 : 아(蛾)는 개미를 뜻한다. 개미는 하찮은 벌레이지만 끊임없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계속하여 마침내 큰 둑을 만든다. 학문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닦아야 성취가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개미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워 익힌다.〔蛾子時術之〕”라고 하였다.[주-D015] 연하(燕賀)의 잔치 : 연하는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목욕할 채비가 갖추어지면 이들이 서로 슬퍼하고, 큰 집이 이루어지면 제비와 참새들이 서로 축하한다.〔湯沐具而蟣蝨相弔, 大厦成而燕雀相賀〕”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디 제비와 참새가 사람의 집을 자기들의 깃들 곳으로 삼아 서로 축하한다는 뜻이다. 흔히 남이 새로 집을 지은 것을 축하하는 말로 쓰이며, 또는 일반적인 축하의 뜻으로도 쓰인다.[주-D016] 장주(漳州)로 …… 했으니 : 장주는 복건성(福建省)에 있다. 주자가 허순지(許順之)에게 답한 편지에, “예를 들어 건주(建州) 사람이 천주(泉州)로 가는 길을 모른다고 치자. 그에게 남쪽을 따라 검주(劒州)에서 길을 묻게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장주(漳州)를 지나쳐 찾게 할 것인가. 이는 큰 병통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如建州人, 未識泉州. 須且敎他從南劒州問路去, 豈可敎他過漳州尋耶. 此是大病不可不知〕”라고 한 말이 있다. 《晦庵集 卷39 答許順之》[주-D017] 서른 …… 하듯이 : 이 말은 《도덕경》에 “하나의 바퀴통에 바퀴살 서른 개가 모이지만, 그 쓰임은 바퀴통의 빔에 있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주-D018] 몸과 …… 알도다 : 우암 선조의 훌륭한 업적을 그대로 잘 따른다는 뜻이다. 원문의 黙識는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말 없이 기억해 두고 배우기를 싫증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내게 해당하는가.〔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주-D019] 성현께서 …… 말하였으니 : 《중용장구》 제21장에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명으로 말미암아 성해지는 것을 교라 이르니, 성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는 말이 있다.[주-D020] 남은 …… 익힌다면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제자(弟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오면 공손하며, 언행을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여력(餘力)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는 말이 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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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서원(近嵒書院)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다. 1665년(현종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1홍언충(洪彦忠)과
2이덕형(李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3년(숙종19)에
3김홍민(金弘敏)과
4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6년(정조10)에
5이구(李榘),
6이만부(李萬敷),
7권상일(權相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9월에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입재집(立齋集)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상주(尙州)
근암서원(近嵒書院) 을사년(1665,현종6)에 세웠다. :
1홍언충(洪彦忠)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어 있다. ㆍ
2이덕형(李德馨)ㆍ
3김홍민(金弘敏) 호는 사담(沙潭), 전한(典翰)을 지냈다. 범(範)의 아들이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ㆍ
4홍여하(洪汝河) 호는 목재(木齋),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고종후(高從厚)의 외손이다.
근암서원(近嵒書院) (1669)
조선 현종(顯宗) 때 경상도 상주에 건립한 서원. 1544년(중종 39)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근암서당(近嵒書堂)을 설립한 뒤 1665년(현종 6) 홍언충(洪彦忠)을 배향하여 향현사(鄕賢祠)가 되었으며, 1669년(현종 10) 이덕형(李德馨)을 추배하여 서원으로 선액(宣額)됨. 홍여하(洪汝河)ㆍ김홍민(金弘敏)ㆍ
5권상일(權相一) 등을 추배함. 현재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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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李榘) 山陽處士活齋先生李公行狀 근암서원 사불산
이구(李榘) 1613년(광해군 5)~1654년(효종 5)
活齋先生文集卷之四 / 雜著 / 遊四佛山說
崇禎戊寅冬。余遊四佛山且有日。客有過余問者曰子知此山之名乎。曰然。曰然則子將奚取於此山哉。昔里名勝母。曾子不入。豈非君子之心。不欲蹈非義之地耶。今子從事儒者。山以四佛爲名。樂爲之遊而曾不以爲嫌。此殊非崇吾道排異端之意也。竊爲子不取也。曰子言則正矣。未免隘也。夫天地儲精。結而爲山。巍然屹然者。莫非吾道中物事。而或名之以異端者。此豈有與於山哉。山自無心而人乃名之。則罪在人而不在山也亦明矣。曾謂此山自爲四佛山乎。人或有墨名而儒行者。尙云可以與之遊也。今玆之山。雖蒙四佛之名。而其壁立千仞。確乎難拔底氣像。則未嘗以此而變焉。固不害其爲仁者之樂之也。由此言之。僕雖非仁者。其所以樂而遊之則未或不可也。况世之人儒名者皆是。而夷考其行則多非矣。然則爲異端者。其果山耶人耶。客曰善。遂相與倘佯而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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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로(鄭宗魯) 1738년(영조 14)~1816년(순조 16)
立齋先生文集卷之四十三 / 行狀 / 山陽處士活齋先生李公行狀
李榘 1613 1654 全州 大方 活齋, 山陽
先生諱榘字大方姓李氏。活齋其自號也。當光海政亂。超然遠避。娶長水黃氏翼成公喜之後。刑曹正郞時幹女。以萬曆癸丑二月十二日。生先生於忠原里第。
及丙子下城之後。先生恥宗國之至此。而超然有蹈海之意。遂斷棄擧業。挈家踰嶺。隱居于商山之山陽村。杜門靜養。盖數十年。
遂以卒。乃甲午八月二十五日。而享年纔四十二。先生同志友溝壑齋權公坵。議欲爲私諡。如孟貞曜,徐節孝故事。木齋洪先生曰此古道。未易言。惟狀其行編其書。以垂不朽。則他日太史氏傳東方卓行。疇有出其右者。十月葬于延豐之長豐山巽向原。
至健陵丙午。遂腏享于近嵒書院。斯可謂報施之一道也耶。日先生五世孫元陽。持遺事示宗魯。請爲狀。辭不獲。敢撰次如右。
권상일(權相一) 1679년(숙종 5)~1759년(영조 35) 청대집(淸臺集)
淸臺先生文集卷之十四 / [行狀] / 曾祖考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成均生員府君家狀。
權坵 1611 1682 安東 次山 藏齋, 溝壑齋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1 2월 11일, 孝寧大君의 8세손으로 槐山 忠原里에서 태어나다.
인조 - ~ ~ 崇禎 - ~ 향시와 별시에 합격하였으나 科業에 뜻을 두지 않고, 병자호란 이후 鳥嶺을 넘어 외가가 있는 尙州 山陽村에 이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26 겨울, 聞慶에 있는 四佛山을 유람하고 〈遊四佛山說〉을 짓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38 成渾과 李珥의 문묘 陞廡 문제가 일자 百拙庵 柳㮨을 疏頭로 하여 〈嶺南儒生論牛溪栗谷不合從祀疏〉를 올려 禁錮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42 8월 25일, 졸하다. ○ 10월, 延豐 長豐山에 장사 지내다.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 聞慶 近嵒書院에 배향되다.
초간본 板木 140매가 1986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어, 괴산군 괴산읍 霽月里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다.
洪彦忠을 위한 立祠發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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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일(權相一) 1679년(숙종 5)~1759년(영조 35)
영조 16 1740 경신 乾隆 5 62 尙州 弄淸臺 옆에 尊道書窩를 짓고 ‘淸臺’라 자호하다.
영조 35 1759 기묘 乾隆 24 81 대사헌, 知事가 되다. ○ 7월 11일, 졸하다. ○ 9월, 山東 果雙洞에 장사 지내다. ○ 12월, 예조 좌랑 金㙔를 보내 치제하다.
정조 7 1783 계묘 乾隆 48 - 10월, 竹林精舍에 위판이 봉안되다.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 10월, 近嵒書院에 移享되다.
정조 14 1790 경술 乾隆 55 - 10월, ‘僖靖’으로 시호를 받다.
정조 21 1797 정사 嘉慶 2 - 문인 趙錫喆과 증손 權遵, 從姪 權㷞 등이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청대집(淸臺集) 권미에는 趙錫喆이 1796년에 지은 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