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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겨울 합본호 계간평>
인간의 삶이 회화적(繪畵的)으로 투영된 작품들
유 준 호(한국시조협회 자문위원)
시조를 쓰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시조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하는 의문부호를 붙여놓고 생각에 잠기기 일쑤다. 시조가 무엇인가 하는 문학 장르 상의 문제는 그 양식과 형태에서는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각양각색이다. 발표되는 작품들을 보아도 하나로 정립하여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고시조가 그랬듯이 요즘 현대 시조도 개념 위주로 쓴 것이 있는가 하면, 회화성이 주를 이루는 회화(繪畫) 시조도 적지 않고, 해설 조의 시조도 있고 객관적 묘사 위주의 시조에 머물러 있는 것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어느 계열의 시조가 가장 바람직한지는 특정하기 어렵다. 모든 문학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최고 과제라고 볼 때 시조가 시조로서 공감대를 형성하여 감동이나 느낌을 주려면 그 표현기법에서도 그에 걸맞은 모양새가 있어야 하겠다. 요즘 내가 읽은 단어 가운데 홍운탁월(烘雲托月)이 란 단어가 있었는데 이것이 시조를 표현하는 하나의 기법으로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져 이를 시조 창작에 응용하면 좋을 것 같아 이를 소개해 본다. 본래 이 단어는 수묵화가(水墨畵家)들이 달을 표현할 때 구름으로 달을 그려내는 전통적 동양화 기법으로 화면에 달의 형태는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을 구름으로 채워 채색하는 방법이다. 시조도 이와 같은 기법이 좋을 듯하다. 시조에서 이 표현 방법은 직서적으로 하지 않고 묘사나 비유의 기법을 사용하여 에둘러 정서적 감흥을 북돋는 방법이다. 이를 비유나 묘사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홍운탁월(烘雲托月)의 기법으로 표현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기법과 표현 형태가 완전 합일 융합된 표현으로 시조를 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에 근접한 표현을 하려는 모양새라도 보이면 더없이 좋을 듯하다. 이런 점을 눈여겨보며 이번 현대 시조 통권 154호에 실린 작품 중 몇몇을 살펴보려 한다. 가을 겨울 합본 호라고 하였지만 겨울 정서보다는 가을 정서를 표현한 것이 많았다. 또한 적지 않게 단시조들이 선보이고 있다. 시조의 원형은 단시조이기에 이를 주로 하여 단시조 11편과 회화성이 있는 연시조 5편을 대상으로 감상해 보려 한다. 먼저 회화성이 잘 나타난 것 같아 소시집으로 발표한 박미선 님의 작품 “경포호수”를 살펴보고 이 계절의 신작에서 작품을 찾아 감상하기로 한다.
벚나무 꽃이 피면 관광객 인산인해
물비늘 비비면서 노니는 물고기 떼
잔잔한 물결 너머로 가로놓인 석양빛
유유히 헤엄치며 둥둥 둥 청둥오리
세월의 덧없음은 여물게 물들이고
호수의 밑바닥에는 뭉게구름 흐르고
햇살이 부딪히며 세상도 담가지고
은빛별 구름 속에 갈 길을 재촉하니
와 아아 밝은 달님은 경포호에 풍덩 덩
-박미선, 경포호수, 전수
강릉 경포대 앞 호수를 바라보며 쓴 작품인데 그 광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회화적으로 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호수에 비친 광경이 정중동(靜中動)으로 표현되어 있다. 관광객이 넘치는 봄철 물고기가 호수 속에서 유영하며 노니는 모습과 그 잔잔한 물결에 금빛 노을 수놓으며 지고 있는 석양의 절경을 표현하고 있는데, 덧없이 흐르는 세월의 느낌을 구름에 위탁하여 보여주고 있다. 세상이 호수 속에 담긴 듯 날이 저물 때 은빛 별빛이 뜨고 달이 떠 하루의 마감을 재촉하는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감정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표현해 간 작품이다. 작품 끝머리에 “밝은 달님은 경포호에 풍덩 덩”하여 경포호수에 비친 달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경포대에서 보면 달이 다섯 개가 뜬다고 하는데 하늘에 뜬 달과 경포호수에 비친 달, 바다에 비친 달, 술잔에 비친 달, 그리고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달이다. 아마도 시인도 이런 감흥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의태어와 의성어를 사용하여 시조에 생동감(生動感)을 주고 있다.
파란색 바탕 위에
투명한 체스 눈금
수평선을 기준으로
기물(棋物)들이 늘어서고
바람도 게임에 빠져
일어나진 않는다.
-강민진, 뭉게구름, 전수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을 체스의 바탕으로 표현하고 있다. 체스(chess)는 서양장기이다. 체스판에는 눈금이 그어져 있는데 여기서의 체스판은 수평선에 맞닿은 허허한 공간이니 그 눈금을 투명하다고 하고 있다. 거기에 뭉게구름이 다문다문 흩어져 있는 것을 “기물(棋物)들”이라고 표현하였다. 푸른 하늘에 뜬 뭉게구름을 다른 사물인 체스의 기물로 환치하여 표현한 점이 특이하다. 바람도 이 게임에 빠져 정신이 팔렸는지 본래의 사명인 부는 일을 잊고 잠잠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고요한 날 한가로이 떠도는 뭉게구름을 보고 이에 감정을 이입하여 쓴 작품이다. 여기에 선보인 표현기법이 시조로 보인 홍운탁월(烘雲托月)의 기법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한여름 노심초사
잡초를 베어내고
돌아본 그 모습은
본래의 녹색 풀밭
늦가을
계절이 와서
그 생명을 걷는다.
-김선환, 순리, 전수
이 세상은 순리와 섭리대로 움직이고 흘러간다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 순리를 거스르고 사는 데서 탈이 난다. 자기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연을 그냥 자연으로 남겨두려 않음이 우리 인간들의 공통 심리인 성싶다. 잡초를 베어내고 캐내는 일이 헛짓임을 작품화한 시조이다. 잡초는 실은 이 땅을 기름지게 하는 역할자이기도 한데 우리 인간은 그저 귀찮은 존재로만 여겨 한사코 이를 없애려 애를 쓴다. 잡초는 이 땅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이지만 가장 끈질긴 존재로 뿌리로 흙을 들썩거리고 물을 저장해 주어 이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주는 기초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치면 사회 형성의 주축인 서민이기도 하다. 잡초나 서민은 눈에 확 띄는 크나큰 존재는 아니지만 자연이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자연과 사회를 이루는 이런 원초적 존재이다. 논밭 고랑에 곡식을 심어놓으면 어김없이 찾아와 그 곡식 주변을 에워싸 곡식의 생장을 저해하는 잡초가 어느새 무성하게 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베고 캐어낸다. 그러나 정리하고 되돌아보면 다시 풀밭이 된다. 인간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잡초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자연인 계절의 힘 앞엔 잡초도 무력해진다. 늦가을의 위력 앞에 생명을 접는다. 인간의 힘이 아닌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자연의 힘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갈파한 시조이다. 평범한 시조이지만 진리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그리며 서로 등진
애증의 한 세월이
불갑산 기슭에서
보란 듯 한껏 붉어
풀벌레
날아와서는
쑥대머리 부른다.
-김옥중, 꽃무릇, 전수
시인 김옥중은 단시조의 명인답게 아주 단아하고 명쾌한 작품을 쓰고 있다. 가을이면 전남 영광의 불갑산 기슭에서는 상사화 축제가 열리는데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한다. 시인은 그 축제의 현장에서 본 꽃무릇(상사화)이 만개한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이 꽃이 만개했을 때 그 꽃모습이 꼬불꼬불 고수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시인은 꽃잎들이 맺혀서 흩어진 그 모습을 쑥대머리라고 표현하였다. 비유가 뛰어나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피면 꽃이 없어 이 둘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는 애증의 꽃이다. 시인은 그 사연을 시조 속에 품어 넣어 표현하고 있다.
대낮에 웬 등롱인가.
가만히 바라보니
“사람을 찾고 있다”라며
디오게네스가 지나간다.
내 마음 어두운 골목
초롱꽃을 피운다.
-김우연, 초롱꽃, 전수
시인은 ‘초롱꽃’을 등롱이라고 은유하여 표현하고, 거기서 인간 자족을 외치던 디오게네스처럼 자신도 자연 속의 진실한 삶 속에서 사랑을 찾아 마음속 어둠을 밝혀 밝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켜서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나는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공중목욕탕에서 나오는 걸 보고 누가 “사람이 많이 있소?” 묻자 “아니”라고 대답한 디오게네스는 “복잡하오?”라 물으니 “그래”라고 답하며 사람이 많아서 복잡하지만 참 인간은 적다는 뜻으로 대답했다 한다. 그는 금욕적 자족을 강조하고 향락을 거부하는 순수 자연적인 생활방식을 강조하며 산 그리스 철학자이다. 시인은 초롱꽃 속에서 그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그리고 있다. 세상의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자족하며 살기를 주창한 모습을 초롱꽃에서 보고 이를 디오게네스가 들고 다닌 등롱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람이
스산하면
잎들이 씨근거린다.
하늘의
파란 쪽(藍)에 가을이 머리 풀고
햇볕을
토실토실 푸니
열매 알곡(穀) 다 시(詩)답다.
-김종기, 가을이 머리 풀고, 전수
제목이 상당히 시적이다. ‘가을이 머리를 풀고’라고 하였는데 이는 계절 가을이 머리칼을 날리고 있다고 하여 의인화하고 있다. 가을은 잎들이 잎맥에 물기가 말라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면 분위기는 쓸쓸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고 잎들은 조용히 잠이 든 듯 숨을 접어간다. 이것이 초장에 나타난 모습이며, 중장엔 가을하늘의 맑고 푸른 기운을 파란 쪽물로 감은 머리로 표현하여 투명하고 밝은 가을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종장에 와서는 마지막 햇볕이 곡식을 여물게 하는 모습인데 ‘햇볕이 토실토실 풀려’ 알곡들을 익혀내니 알곡들이 알차고 아름다워 시(詩)답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잎들이 시들어 가고 하늘은 푸르러져 가며 곡식들이 햇볕 아래 알차게 익어감을 표현하여 가을에 일어나는 일들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 낙엽 알록달록 고운 얘기 수(繡)를 놓아
진흙 위 쓰레기 위 버려진 나무 위에
써 내린 늦가을 편지 서정 가득 가을 산.
가을 산 오를 떼면 갈잎의 기타 소리
낙엽 편지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낭만을 물들인 가을, 내 마음도 천연색.
-신민숙, 수를 놓은 가을 산, 전수
이 작품의 서정적 자아는 계절인 성싶다. 가을 산이 단풍 들어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조로 물들어 있는 것을 계절이 산천에 한 땀 한 땀 색실을 풀어 수를 놓은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 속엔 자연이 지닌 숱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시인은 더럽혀진 세상을 지워내는 가을날의 단풍을 수실로 수를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서정을 한편의 늦가을 편지로 써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가을 산에 오를 때면 발끝에 밟히는 낙엽 밟는 소리를 시인은 ‘기타 소리’라고 하여 자연 속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때의 바스락 소리에 시인은‘아련한 그리움’이 가슴 복판에 흐르고, 마음도 천연색이 되어 색색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첫수가 가을의 아름다운 외형적 정경을 표현하고 있다면 둘째 수는 그 가을에 느끼는 시인의 내면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외면과 시인의 내면에 자리하는 가을날의 심상을 앞뒤 수로 호응시켜 표현한 작품이다. 대비법을 사용하여 시적 짜임새를 도모한 점이 눈길을 끈다.
웬 날벼락! 천둥 번개
우박이 쏟아졌다.
고랭지 배추밭 주인의
눈물 바람 속울음
봄이면 봄다웠으면 좋겠어요, 하느님.
-오영빈, 하늘을 바라보며, 전수
때아닌 때에 때아닌 일이 벌어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대기 오염으로 지구의 곳곳에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가 하면 한여름 장마철도 아닌데 감당 못 할 물 폭탄이 쏟아져 내려 삶의 터전을 삼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봄이면 조용조용 생명이 움들이 돋아 새 생명의 합창 소리가 가득한 생동의 계절이어야 할 텐데 천둥 번개 치며 콩알만 한 아니, 어린애 주먹만 한 우박 덩이가 쏟아져 논밭의 작물들을 작살내 망가뜨리고, 특히 봄철을 기약하며 농민이 한껏 기대를 품고 가꾼 고랭지 배추밭을 쑥대밭 만들어 배춧잎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고 도리깨질을 한 듯 모두를 패대기쳐 놓아 농부들 희망의 눈빛에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니 이게 웬일인가.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래서 배추밭 주인은 망연자실하여 ‘눈물 바람,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 이런 안타까움에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작품을 맺고 있다. 도치법을 사용하여 간절한 기원의 심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단시조는 종장이 생명이고 그 종장은 돌올한 점층으로, 시적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그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기쁨과 슬픔까지
한 꿰미에 엮어 안고
말없이 바라보는
서로 휘어 아픈 허리
한순간 눈 맞은 죗값
평생
치르고 있다.
-윤진옥, 연리목, 전수
연리목은 두 나무의 가지나 줄기가 맞닿아 결이 서로 통한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시인은 이를 부부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부는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하는 일심동체의 인생 반려자이다. 기쁨도 함께 슬픔도 함께하며 한 꿰미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서로를 의지하며 고단한 세상살이를 함께 짊어지고 서로를 아끼며 눈빛 속에 사랑만을 담아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몸뚱이는 휘어지고, 허리는 아파져 온다. 인생은 이렇게 사랑과 아픔을 겪으며 지내는 여정인가 보다. 사실 결혼은 한순간 그냥 마음이 통하여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시인은 부부가 된 것을‘한순간 눈맞은 죗값’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이 죗값이면 죗값이 되겠다. 이것이 한 인간의 평생이 되어 있다. 부부 사이를 연리목으로 표현한 시안(詩眼)이 참신하다.
마지막
잎새 한 장
잠잠히 내리는 날
기러기 하늘 높이
열 지어 날아가고.
까치밥
여남은 개도
한 톨 볕에 익는다.
-이가은, 문득 초겨울, 전수
여기서 시제 “초겨울”은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선쯤 되는 것만 같다. 싸늘한 날씨가 초겨울을 연상시켜 제목을 그리 한 것이 아닐까. 어느새 잎이 다 져 가지 끝에 잎새 한 장만 남아 바람에 흔들리다 그것마저 정적을 깨며 떨어지고 있다. 때마침 기러기는 열을 지어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고 감나무 가지 끝에 남아 떨고 있는 까치밥 홍시들도 얼마 남지 않은 햇볕에 그 붉음을 더하고 있다. 볕을 곡식이나 작은 열매 등의 낱낱의 알을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인 ‘톨’이란 시어를 사용하여 무형의 낱말을 유형화하여 표현한 것이 일종의 낯설기 기법인 것만 같아 참신하다. 저물어 가는 세월 가을의 막바지 끄트머리 모습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시조인데 열서식(列敍式)으로 표현되어 있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나 단시조의 특성인 종장의 극적 전환을 이루는 표현이 안 되어 조금은 아쉬움을 자아낸다.
백토를 뿌린 길가 오곡백과 풍성하다.
낮잠 깬 허수아비 웃음 짓는 코스모스
환하게 손짓하는 곳 이야기꽃 피었다.
노다지 들판 위에 멈춰 선 기적소리
정을 엮는 시골 장터 왁자한 웃음소리
단숨에 달려가고픈 코스모스 환한 들판
인정만 오고 가던 지워진 간이역을
그리우면 더듬으면 지나가는 남도 열차
정든 이 만날까 몰라 가슴 설렌 고향역
차창 밖 풍경들이 열병식을 펼치는 듯
세월에 익어가던 황금빛 수다들로
옛 고향 그리운 소식 햇살처럼 퍼진다.
-이동배, 북천역, 전수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 있는 간이역으로 매년 가을이면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역은 곡식들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넓은 들판에 자리하고 있는데 옛날엔 약간 왁자지껄한 역으로 오가는 이도 심심찮게 많았는데 지금은 이용객이 드물어 기적 소리만 남기고 대부분 기차가 무정차로 지나가고, 축제 기간에는 무궁화호가 하루 5회 정도씩 오가는 무배치간이역이라 한다. 이 간이역을 중심으로 오순도순 살아가던 고향 사람들의 정겨운 삶의 모습을 떠올려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 속엔 지금은 옛이야기로 남아 있는 시골의 화기애애한 모습과 만나서 정담을 나누던 시절이 나타나 있고,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며 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들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향심(思鄕心)을 느끼고 있다. 한 편의 수필 속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든다. 작품 속에서 첫수와 둘째 수, 셋째 수와 넷째 수 사이에 유사한 이미지로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조금 이미지를 집약하여 세 수쯤으로 압축했으면 어떨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갈바람 불어올 때
살랑이며 오는 그대
온종일 마다 않고
미소로 오는 그대
가을엔
그 예쁜 마음
엽서에 담겠습니다.
-이문균, 코스모스, 전수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인데 이는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소녀가 가을바람에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제일 처음 만든 꽃으로, 처음 만들다 보니 모양과 색을 요리조리 다르게 만들어 보다가 지금의 하늘하늘하고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코스모스가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가을의 전령사로 자리매김한 지 꽤 오래된 가을들녘의 대표적인 꽃이 되었다. 특히 들판 길가에 늘어서서 오가는 이의 가슴 속에 잔잔한 애정과 서정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런 코스모스를 시인은 가녀린 어느 여인의 모습으로 환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상당히 감각적인 작품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온종일 마다 않고’ 미소를 날려 오가는 이들의 눈길 속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코스모스에 시인은 홀려 가슴에 품고 있는 예쁜 마음을 엽서에라도 담아 느껴보겠다고 하고 있다. 사물을 인간화하여 그 특성을 잘 살려 쓴 작품이다.
우르르 몰려들던 참새 떼 쫓으려고
가을 들녘 저물도록 망보던 허수아비
옛날엔 입 하나 지키기 그리 힘이 들었지.
세상 참 넉넉해져 새 떼쯤 모르는 척
팔 벌려 지키는 일 거둔 지 한참 됐네.
일자리 잃은 허수아비 재취업은 하려나.
-임춘자, 허수아비, 전수
먹을 것이라곤 오직 밥밖에 없던 시절, 그 주곡은 들판에 심어놓은 곡식뿐이기에 이를 목숨만큼이나 귀히 여겼다. 그런데 얄궂게도 참새 떼가 몰려다니며 추수 무렵 익어가는 곡식 낟알을 쪼아먹어 곡식을 축내고 있다. 눈에 뵈는 대로 쫓아내지만, 바쁜 농부의 눈길은 여기에만 머물러 둘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대역(代役)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새들을 쫓았다. 십자가 나무에 헌 옷을 입혀 사람 모습을 만들어 들판에 세워 새들이 사람으로 착각하고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기물이 허수아비이다. 헛 사람 모습을 하고 있기에 허수아비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이것이 오래되지 않은 어느 과거의 모습이다. 생명의 원천은 먹는 데서 나오는데 인간들의 먹거리는 바로 이곳 새들이 끼어들어 극성을 부리는 들판에서 나왔다. 그러니 농부의 처지에선 새들은 일종의 먹거리 도둑이다. 그 도둑을 쫓아내야만 했던 절박한 순간들을 기억에 담아 표현한 것이 첫째 수이다. 둘째 수는 약간 새들이 쪼아 먹어도 곡식의 알갱이는 먹고 살기 부족하지는 않을 만큼 넉넉한 현실이 되어, 그냥 모른 척 허수아비를 세우지 않은 지 오래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허수아비는 제 자리를 잃고 백수가 되었다. 각박했던 과거 삶의 모습과 넉넉해진 현대 삶의 모습을 허수아비라는 제재를 통하여 대비해 표현하였다.
버릴 것 다 버려야
내 모습이 보이는 것
칼바람 몰아친들
자존이야 변할쏜가
내 안의
굳은 심성은
나이테로 키운다.
-전현하, 겨울나무, 전수
세상 만물은 거짓을 꾸며 입고 사는가 보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은 알몸의 진솔한 모습을 옷 속에 숨기고 꾸며 제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하는 일종의 위장 전술의 한 면이 되기도 한다. 이는 동물들이 털 속에 그 몸을 가리고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나무들도 잎들로 자기 몸을 감싸서 제 모습을 숨기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 생물들은 적고 많음의 차이는 있을망정 자기 본 모습을 감추고 살아간다. 이런 것들 특히 나무들이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언제일까. 스스로 잎들을 버리고 비워서 그대로의 본디 나무 모습을 드러낼 때이다. 이를 시인은 잎 다진 겨울나무의 앙상한 모습에서 찾아 거짓 없는 본디 사물 자체의 자존을 엿보고 있다. 다 버린 다음에 드러나는 나무의 자존과 곧은 심성을 인간과 대비하여 표현하였다. 다만 그 자취는 알뜰히 남기지 않지만, 나이테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나무도 동물도 인간도 겨울이란 계절을 겪고 나면 삶의 테두리인 나이테를 몸속에 그려 가지게 된다. 세월의 흐름 속에 잊히지 않는 만상의 모습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땅뺏기 자치기로
운동장이 어둑해야
그제야 내일 놀자며
툭툭 털고 집에 가던
어릴 적 행복 넘치던
추억거리 많았었지.
초롱불 밤길 밝힌
골목 따라 마실 가고
화롯불 다독이며
불씨를 잠재우고
새벽엔 쏘시개 댕겨
세숫물을 데웠었지.
-정순량, 어릴 적엔, 전수
지금 아이들에겐 다 잊히어진 어린 날의 놀이들을 작품 속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전자기기의 발달로 핸드폰에 담긴 게임에 빠져 홀로 즐기는 놀이에 심취한 이에겐 꼭 별나라 일 같은 모습이다. 어찌 보면 현대의 아이들은 각박한 현실 놀이에 빠져 고립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옛날엔 공동놀이를 즐기며 인간애를 쌓아가고 사회성을 길렀다. ‘땅뺏기’‘자치기’는 혼자서는 못하고 상대가 있어야 하는 놀이인데 이런 놀이로 어린 날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첫수를 쓰고, 둘째 수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던 시절에 밤마실 다니던 모습과 사랑방에 놓인 화롯불을 다독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다독인 불씨로 불쏘시개에 불을 댕겨 세숫물을 데워서 세수하고 밥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추억 어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추억의 세레나데를 연주하고 있는 회억(回憶)의 시조이다. 정순량 시인의 작품은 대부분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 시조, 기원의 시조인데 이 작품은 드물게 이를 벗어난 작품이다.
새장에 갇혀 있는
내 보배 예쁜 새들
어쩌다
네게 잡혀
감옥인 듯 우는 소리
한 장씩
책장을 넘겨
창공으로 날린다.
-채명호, 나의 시집, 전수
시집 속의 시들을 ‘새’로 환치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시나 시조는 미적 감흥을 자아내는 운문으로 아름답고 고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문학 장르이다. 시인은 이를 ‘예쁜 새’라고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감옥’이라 면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 죄수들의 거처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여기에 쓰인 ‘감옥’은 새장으로 표현되고 있는 시집을 뜻한다고 보아 긍정적이다. 그래서 ‘우는 소리’도 서정의 울림소리로 보아야 하겠다. 초, 중장이 은유로 표현되는 시구들로 이루어졌다면 종장의 ‘한 장씩/ 책장을 넘겨’라는 좀 아쉬운 직서적 표현으로 되어 있다. 다만 ‘창문으로 날린다’란 시구로 그 맥을 이어 맺음을 하고 있어 전체적인 조화를 도모하고 있다. 종장 첫머리 표현을 초, 중장과 유사한 표현으로‘새장의 문틈을 열어’로 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은유적 표현이 돋보이는 한 편의 단시조로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 작품이다.
시조는 균형과 절제가 이루어진 언어로 표현하는 응축의 문학이다. 꼭 필요한 언어가 제자리를 찾아 배치되었을 때 그 시조는 안정감을 준다. 체험하고 느낀 감정을 감성의 뿌리에서 건져 올려 이를 사유 깊은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이를 대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자유와 위안을 느끼게 하는 문학이다. 때로는 자연과 타협하고 때로는 그 속에 인간화를 이룩하여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신세계의 영역을 개척하여 이를 아름다운 이미지의 영토를 마련해 주는 것이 바로 시조이다. 시조는 우리 민족이 얼 속을 타고 흐르는 울림 있는 정한의 흐름이다. 여기 현대 시조 속에 자리한 작품 속에는 얼마만큼의 회화성이 자리하고 있고, 얼마만큼의 개념이 표출되어 있다. 처지지 않는 긴장감이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몇몇 작품에서는 표현에서 새로움을 느끼게 하고도 있다. 그 표현의 새로움을 시인들은 낯설기 기법이라고 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기법이 잘 사용되면 즉, 표현의 타당성을 획득하게 되면 우리는 감탄을 자아낸다. 천의무봉이란 말이 있듯이 표현에서 억지로 꿰맨 자국이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앞으로 이런 시조들이 많이 선보여 시조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갔으면 싶다. 역설적인 기법으로 썼으되 역설로만 느껴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끝으로 내가 오래전에 본 작품 중 이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작품 한 편을 소개하며 끝맺음하려 한다. 『구순의 오라버니 옷이 자꾸 자랐다./ 기장도 길어지고 품도 점점 헐렁하고/ 마침내 옷 속에 숨으셨다. 살구꽃이 곱던 날에(최순향, 옷이 자랐다.)』 노화하여 몸이 쇠해지는 과정과 끝내는 죽음으로 들어가는 인생의 허무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옷이 자랐다’라는 말은 일상어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감회를 느끼게 하는 시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