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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1) 권시용** 1. 머리말 2. 퇴계의 서원 확산 노력 3.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4.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퇴계 이황과 그 문인들이 조선시대 서원의 확산에 기여한 점을 살펴본 것이다. 퇴계 이황 은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의욕적인 신진사림들에게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시켜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다가올 사림의 시대를 준비하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대안으로서 서원에 주목했으며 그의 문인들과 더불어 서원 보급에 노력하였다. 퇴계문인들은 출세주의․공리주의에 매몰된 관학에 대한 비판 위에서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서 서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스승인 퇴계 의 서원 보급에 동참하였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모두 56명의 문인들이 43개소의 서원 건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이들이 주로 활동하였던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보면 전국적으로 건립 된 서원의 절반 이상에 이들이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방관으로 나간 문인들의 서원 건립이 두드러진다. 모두 17명의 문인들이 지방관으로서 22개 소의 서원 건립에 관여하였다. 초기 서원건립에 있어 지방관의 역할이 상당하였음을 고려하면 각 지역 으로 부임해 나간 이들의 서원 건립 노력은 조선 서원의 확대․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는 광해군대까지 건립된 서원의 55.2%에 퇴계 문인들이 관여하였으며, 임란이전까 지는 70%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경상도 지역의 서원 건립에 있어 퇴계문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음을 나타낸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경상도에 비해 퇴계문인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대부분 임란 이전에 관계한 사례였다. 이처럼 퇴계와 그의 문인들은 조선에서 서원제도가 도입되던 시기에 그 * 이 논문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인 『퇴계문인의 서원건립활동』(영남대학교 대학원, 2009)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shiyongs@naver.com 6 한국서원학보 제8호 보급과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핵심어 : 이황, 서원보급, 퇴계문인, 사림, 성리학 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조선 서원의 시작으로 풍기군수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건립을 들고 있다. 그러나 조선 서원의 典型은 퇴계 이황에게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 시절 백운동서원의 賜額을 요청하여 교육기관으로서 국가의 공인 을 받고, 사림에 의한 서원의 자율적 운영을 강조하였다. 풍기군수를 사임한 퇴계는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집중하였다. 한편으로는 유생들의 강학과 藏修를 위한 서원 건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실제 퇴계는 예 안현 일대의 伊山書院과 易東書院의 건립과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으 며, 여타 지역에서 건립되는 서원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서원보급운동 및 서원론(서원교육론)에 관련된 논의는 일찍 부터 진행되어왔다.1) 그러나 서원보급운동 과정에서의 퇴계 문인들의 역할 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다.2) 실제 퇴계가 직접 건립에 관여할 수 있었던 서원은 안동·예안을 중심으 1) 송긍섭, 「퇴계의 서원교육론 고찰」, 한국의 철학 2, 경북대 퇴계연구소, 1974; 이 우성, 「이퇴계와 서원창설운동-이조 성리학의 토착화와 아카데미즘」, 퇴계학보 19, 퇴계학연구원, 1978 ;『한국의 역사상』,창작과 비평사, 1978; 정순목, 「퇴계의 서원교육론고」, 퇴계학보 19, 퇴계학연구원, 1978; 정순목, 퇴계의 교육철학, 지 식산업사, 1986; 정순목, 「주회암과 이퇴계의 서원교육론 비교」, 인문연구 8, 영남 대 인문과학연구소, 1987;『퇴계학보』53, 퇴계학연구소, 1987; 정만조, 「조선서원 의 성립과정-중종 연간 사림을 위한 교학진흥책과 관련하여」, 한국사론 8, 국사편 찬위원회, 1980; 정만조, 「퇴계 이황의 서원론-그의 교화론과 관련하여」, 한우근박 사정년기념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1; 박양자, 「퇴계의 서원교육의 특성」, 퇴계 학과 남명학, 지식산업사, 2001. 2)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연구 성과로는 경북대 퇴계연구소에서 간행한 『퇴계학맥 의 지역적 전개』(보고사, 2004)’가 있다. 그 외 대부분의 서원연구에서는 퇴계의 서 원론을 다루면서 문인들의 서원 관련 사실들이 일부 언급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7 로 한 범안동권에 한정된다. 퇴계의 나이와 건강, 그리고 당시의 교통, 통신 과 같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먼 지역에서 건립되는 서원을 직접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문인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서 서원건립 에 나서기도 하고, 건립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들은 스승인 퇴계를 직접 찾거나 또는 서신을 통해 조언을 구하였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퇴계가 생각한 서원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애썼다. 퇴계 문인들은 퇴계의 서원보 급운동을 함께 추진해 간 동지였으며, 퇴계 사후에도 퇴계가 생각하고 있던 서원이 전국으로 보급될 수 있게 한 메신저였다. 이에 퇴계와 그의 문인들에 의해 조선 서원의 전국적인 보급과 발전이 이 루어졌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퇴계의 서원론에 공감하고 서원보급에 동참하 였던 퇴계문인들의 서원건립에 대해서는 구체적 연구가 부족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퇴계의 서원관에 공감하여 서원보급운동에 동참했던 퇴계 문인 들의 서원 건립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았다. 이를 통해 초기 서원 건 립과정에서 퇴계문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역할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Ⅱ. 퇴계의 서원 확산 노력 퇴계의 서원 제도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정치 및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 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기묘사화를 목격하였으며, 명종 초 의 을사사화에는 그 자신이 커다란 고초와 시련을 경험하였다. 특히 도학정 치를 통한 삼대의 지치를 실현한다는 조광조의 도학정치론에는 인식을 같이 했지만, 君德의 성취를 우선으로 추구했던 기묘사림들의 처세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3) 그것은 동시에 君德의 성취를 자신하지 못 3) 退溪先生文集卷9, 「答朴參判書」, ‘獨不見博者乎 一手虛著 全局致敗 … 況近世士林 之禍 率因虛著而作 覆車在前 故踵後者尤難進步 … 愚意嘗謂己卯領袖人 學道未成而 8 한국서원학보 제8호 했던 퇴계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은 곧 임금의 성취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기도 했으며, 임금을 둘러싸고 있는 당시 정치 환경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에 퇴계는 각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의욕적인 신진사림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는 향촌을 단위로 하여 향민을 교화하고, 이를 통해 사족 중심의 治化를 달성하려는 방향으로 정치적 입장을 전환하였다. 즉 향촌사림들에게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시켜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다가올 사림의 시대를 준비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공간으로서 書院에 주목했다. 한편 퇴계가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서 기존의 성균관과 향 교가 아닌 서원에 주목한 것은 당시의 官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작용한 때 문이다. 당시 교육기관으로서는 중앙에는 성균관이, 매 군현마다 향교가 있 었지만, 이미 향교와 국학은 과거와의 관련에서 출세주의, 공리주의로 매몰 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참다운 공부와는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향교와 국학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서원이야말로 성리학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생 각했다.4) 조선에서 서원제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초기 상황에서 퇴계가 서원보급을 위해 기울인 노력의 일단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다음 <표 1>은 퇴계 생전에 건립된 서원을 정리한 것이다. 暴得大名 遽以經濟自任 聖主好其名而厚其責 此已是虛著取敗之道 又多有新進喜事之 人 紛紜鼓作 以促其敗勢 使讒者得售其術 恐此當爲踵後者之至戒 不可忽也’. 4) 이우성, 「퇴계선생과 서원창설운동」, 퇴계학보 28, 퇴계학연구원, 1980.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9 서원 지역 건립 사액 제향인물 (제향시기) 건립관련 퇴계문인 紹修書院 경북 순흥 1542(중종37) 1550(명종5) 安珦(1543) 象賢書院 충북 보은 1549(명종4) 1610(광해2) 金淨(1549) 首陽書院 (文憲書院) 황해 해주 1549(명종4) 1550(명종5) 崔沖(1549) 崔惟善(1549) 濫溪書院 경남 함양 1552(명종7) 1566(명종21) 鄭汝昌(1552) 朴承任 臨皐書院 경북 영천 1553(명종8) 1553(명종8) 鄭夢周(1555) 鄭允良, 金應生 盧遂 白鶴書院 경북 신녕 1555(명종10) 黃俊良 五峰書院 강원 강릉 1556(명종11) 孔子(1556) 崔運遇 氷溪書院 (長川書院) 경북 의성 1556(명종11) 1576(선조9) 金安國(1556) 李彦迪(1556) 申元錄 伊山書院 경북 영주 1558(명종13) 1574(선조7) 李滉(1574) 許忠吉, 朴承任, 張壽 禧, 金玏, 金隆, 李德弘 迎鳳書院 (川谷書院) 경북 성주 1558(명종13) 1560(명종15) 金宏弼(1560) 程子(1573) 朱子(1573) 黃俊良, 金宇顒, 鄭逑 西岳精舍 (西岳書院) 경북 경주 1561(명종16) 1623(인조1) 金庚信(1563), 薛聰(1563) 崔致遠(1563) 李楨 硏經書院 경북 대구 1563(명종18) 1660(현종1) 李滉(1613) 李叔樑 文會書院 함경 함흥 1563(명종18) 1576(선조9) 孔子(1563) 玉川書院 전남 순천 1564(명종19) 1568(선조1) 金宏弼(1564) 李楨, 奇大升 仁賢書院 평안 평양 1564(명종19) 1608(선조41) 箕子(1576) 禮林書院 경남 밀양 1567(명종22) 1669(현종10) 金宗直(1567) 裵三益 玉洞書院 함경 안변 1567(명종22) 1592(선조25) 李繼孫(1567) 易東書院 경북 예안 1570(선조1) 1684(숙종10) 禹倬(1670) 金生溟, 琴輔, 金富弼, 金富儀, 金富倫, 趙穆, 琴應夾, 琴蘭秀, 朴士 熹, 李德弘, 琴應商, 李 叔樑, 李寗, 李完 <표 1> 퇴계(1542-1570) 생존 당시 건립된 서원 퇴계 생전에 건립된 서원은 모두 18개소가 확인되는데, 이 가운데 퇴계 본 인 및 그의 문인들이 건립에 관여하였던 서원은 13개소이다. 나머지 5곳의 10 한국서원학보 제8호 서원은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와 같이 지리적으로 먼 곳에서 건립되었고, 이를 제외한 경상도 지역에서 건립된 모든 서원에는 퇴계와의 관련성이 확 인된다. 일반적으로 퇴계의 서원건립 또는 관심을 설명할 때 「書院十詠」을 들고 있다.5) 이 가운데 퇴계와 직접 관련된 서원은 이산서원, 영봉서원, 역동서원 이다. 이들 서원은 모두 퇴계 자신이 ‘院記’를 지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 산서원은 퇴계가 「이산서원기」와 「이산원규」를 지었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기울인 서원이었다. 특히 「이산원규」는 이후 건립되는 경상도 지역 서원 원 규의 모본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퇴계문인 가 운데는 張壽禧가 이산서원 건립에 직접 관여하였다. 장수희는 이산서원 건 립을 직접 주관하였고, 서원 규모와 절목 등을 모두 퇴계에게 물어서 정하였 다고 한다.6) 영봉서원은 1558년(명종 13) 성주목사 盧慶麟이 성주지방 사림과 合謀하 여 1559년(명종 14)에 건립하였다. 서원 건립 당시 노경린은 퇴계에게 記文 과 현판 글씨를 청하였다. 이에 퇴계는 「영봉서원기」를 지었으며, 특히 건립 과정에서 발생한 제향인물의 당부와 위차 문제에까지 깊이 관계하였다. 또 그의 문인인 黃俊良, 鄭逑 등도 서원건립과 시비에 관여하였다.7) 한편 영봉 서원은 제향인물을 둘러싼 분쟁의 결과 川谷書院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때에 도 퇴계는 서원의 改享, 改號의 문제에서부터 세밀한 절목에 이르기까지 자 문을 해주었다.8) 5) 이황이 65세에 찬한 ‘서원십영’은 초기 서원 9개소에 대한 찬시이며, 제10수는 총론서 원이라 하여 서원 자체를 시평하였다. 풍기 紹修書院, 영천 臨皐書院, 해주 文憲書院, 성주 迎鳳書院(川谷書院), 강릉 五峯書院(丘山書院), 함양 藍溪書院, 영주 伊山書院, 경주 西岳精舍(西岳書院), 대구 硏經書院(畵巖書院)이 바로 서원십영에 등장하는 9개 소 서원이다. 6) 陶山及門諸賢錄, “伊山書院之創 公實主之前後幹事 十二年立規模 贍供億凡節目 皆稟定於先生詳載”. 7) 영봉서원 건립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논란은 정만조, 「퇴계 이황의 서원(교육)론」, 한우근박사정년기념논총(1981)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8) 退溪先生續集卷5, 「答川谷書院諸君書」.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11 역동서원의 건립에는 퇴계의 건립의지가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퇴계는 일 찍이 예안에 寓居한 바 있는 禹倬의 학문과 절의가 후학의 사표가 될 만하다 하여 서원 건립에 나섰다.9) 역동서원의 건립에는 퇴계를 비롯하여 예안지역 퇴계문인들의 주도적인 역할이 확인된다. 퇴계는 역동서원의 건립에 있어 서원 터의 물색부터 관여하였으며, 서원기를 짓고 서원 명호 및 각 祠, 堂, 齋, 門의 편액을 정하였다.10) 또 역동서원 건립을 전후하여 서원의 講學에 필요한 經書類를 수집하여 보내주기도 했으며,11) 역동서원이 낙성되자 친히 제생과 더불어 心經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편 퇴계문인들은 예안현감에 게 서원건립 문제를 적극 건의하여 협조를 얻어 내고, 교대로 건립을 감독하 였으며 전답이나 곡물 등을 기증하기도 했다.12) 다음으로 퇴계는 각지에서 이루어진 문인들의 서원건립을 지원하기도 했 다. 초창기 서원 건립에 있어서 퇴계 문인들의 역할은 상당했다. 퇴계 생전 에도 문인들은 퇴계의 서원 건립을 직간접으로 지원하였고, 또 한편으로 향 리나 지방관으로서 부임지 등에서 서원 건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때 문인 들은 서원 건립을 추진하는 동안 스승인 퇴계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건 립에 필요한 기문, 액호, 서적 등을 청하기도 했다. 임고서원은 퇴계문인인 盧遂, 金應生, 鄭允良 등이 주도하여 건립되었 다.13) 서원이 완성된 후 노수 등은 그곳에 장서할 목적으로 널리 서적을 구 하였다. 그 와중에 노수가 서울에 가서 서적을 구하였고, 당시 퇴계는 서울 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노수가 장서를 구할 목적으로 스승을 찾아오자 흔 쾌히 임금이 하사한 성리서를 내어주었다.14) 또 제향인물인 정몽주의 도학 9) 退溪先生文集卷23, 「與趙士敬書」, ‘吾鄕先正如禹祭酒風節 東方古今 豈可多得 立學 祀賢 旣昉於世 而吾鄕獨闕 此吾輩之恥也 公與聞遠 有所興慕 而至相與覓地指擬 此意 甚可尙也’ 10) 退溪先生文集卷42, 「易東書院記」. 11) 퇴계가 역동서원에 수집해 보내 준 서적들에 대해서는 ‘李春熙 편, 李朝書院文庫目 錄-李朝書院文庫考, 대한민국국회도서관’에서 자세한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12) 琴輔, 梅軒集卷2, 「易東書院記事」. 13) 臨皐書院誌, 1968. 14) 退溪先生文集卷43, 「內賜性理羣書, 付盧上舍(遂)俾藏圃隱書院識」, ‘永川盧上舍遂 12 한국서원학보 제8호 을 칭송하는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15) 강릉의 오봉서원은 咸軒이 지방 유림 과 더불어 논의하여 1556년(명종 11)에 건립한 것이다.16) 오봉서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함헌은 퇴계와 함께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한 인연이 있다. 오봉서원실기에 의하면 함헌이 오봉서원의 서원도를 그려 가지고 퇴계에 게 아뢰니 퇴계가 시를 지어 보냈다는 내용과 퇴계에게 丘山書院圖와 創建 首末을 편지로 보내서 書院記를 써서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서원기는 병으 로 사양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오봉서원 창건시 함께 발의했던 崔運遇 는 퇴계문인이었다.17) 경주 서악정사는 1561년(명종 16) 경주부윤으로 있던 李楨의 주도하에 건 립되었는데, 1623년(인조 1) 서악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이정은 경주부 윤으로 재직하면서 서악정사 건립과 향사, 건물의 액호 문제와 성리학 관련 도서간행 문제를 두고 퇴계의 교시와 자문을 받아 처리하였다.18) 대구 연경서원은 1563년(명종 18) 지역 사림들의 공의로 그 건립이 논의되 어 이듬해 3월에 상량되었고, 1565년(명종 20) 10월에 완공되었다. 연경서원 의 건립에는 퇴계 문인 중 李叔樑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숙량은 고을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서원건립을 주관하였으며, 서원이 완공된 뒤에는 서 원건립의 내력을 써서 퇴계에게 기문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퇴계는 이숙 량의 기록이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그 끝에 의론도 역시 조리가 있어서 이 미 기문을 쓴 것이라고 칭하며,19) 약간 수정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그 與金上舍應生 鄭秀才允良 於圃隱鄭先生舊居 倡構書院 垂成 盧君爲來京師 博求書籍 滉甚嘉其志而慕其事 顧旅寓蕭然 無他書可以相副 謹以頃所受內賜性理羣書一帙贈之 或以君賜與人爲疑 噫 爲書院奉藏書 一以爲先賢 一以爲後學 與人云乎哉’. 15) 退溪先生文集卷45, 臨皐書院成祭鄭文忠公文」. 16) 五峯書院實記, ‘明宗大王七年壬子 七峯咸公軒 以書狀官朝 皇明以千金購得吳道子 所摸 孔夫子眞像而歸 十年乙卯咸公 以利川府使 病退 爲本府敎授 是年秋 秀林崔壽 嶈廣川崔運遠香湖崔運遇 往訪語及我國西南多建書院 吾鄕素稱文憲 盍亦建乎 咸公 欣然曰 今日是議不可緩也 遂相地于邱山南澗又與前敎授崔德岺進士權大均生員沈淹 偕往卜基 稟告于府使洪公春年 議換基田 洪候卽牒許 以官屬吳少年者定院直 又白監 司西林尹公仁怒 咸公遂發求助書于鄕中’. 17) 崔雲遇, 香湖集, 「年譜」, 「五峯書院創建事實」. 18) 이수건, 「구암 이정의 가계와 생애 및 ‘退南’과의 관계」, 안동사학 제9․10집, 2005.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13 전에 지어놓았던 「서원십영」 가운데 연경서원을 노래한 시를 덧붙여 보냈다. 퇴계는 전라도 순천의 옥천서원 건립에도 관여하였다. 1564년(명종 19) 문 인인 이정이 전라도 순천부사로 재임 중 옥천정사를 건립하였을 때, 퇴계는 재호와 편액을 쓰거나 지어 주었다. 당시 이정은 순천부사로 2년여 재직하 면서 金宏弼과 曺偉의 유적을 탐방하여 臨淸臺를 수축하고 김굉필의 유문과 사적을 수집, 정리하여 퇴계의 도움과 교시를 받아 景賢錄을 편간하기도 하는 등 선현봉사와 지방자제 교육을 장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 밖의 서원에서도 퇴계의 건립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다. 1567년(명종 22) 밀양에 김종직을 제향하는 예림서원이 건립되었다. 이 예림서원의 건립 에서도 간접적이나마 퇴계의 관련성이 추측된다. 당시 밀양에는 퇴계 문인 인 裵三益이 密陽敎授로 나가 있었다. 배삼익은 1566년(명종 21) 퇴계에게 편지하여 김종직을 立祠하는 일에 대해 자문했다.20) ‘점필재의 행실은 후세 에 의논이 없을 수 없다’고 한 남명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에 대해 퇴계에게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물음에 대해 퇴계는 남명의 비 판이 타당한 면이 있지만, 김종직이 綱常을 扶植함이 많으니 서원을 건립하 고 사당을 세우는 일에 무리가 없다고 답하며, 서원을 완성하는데 힘써줄 것 을 당부하였다.21) 이에 예림서원은 김종직을 제향하여 이듬해에 건립되었 다. 함양의 남계서원 건립에는 문인인 박승임이 참여하고 있었다.22) 남계서 원지에 의하면 1552년(명종 7) 姜翼이 朴承任, 盧祼, 鄭復賢, 林希茂과 상의 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서원 건립에는 약 10년이 소요되었는데, 군 19) 梅巖先生文集 卷1, 「書李大用硏經書院記後」, ‘時出而讀之 愛其文淸而贍婉 而正敍 事詳而記勝 實其終之議論 亦有理趣 非所謂錄也 乃記也’. 20) 裵三益, 臨淵齋集 卷5, 年譜, ‘正月上書退溪先生 論佔畢齋立祠事’. 21) 退溪先生文集 卷35, 「答裵汝友書」, ‘佔畢翁果有如南冥所云 然亦甚有扶植處 何可 深斥 作院立祠 正不可不爾也 幸勿疑貳 勸卒成之爲佳’. 22) 藍溪書院誌 卷1, 「書院事實」, 국립중앙도서관소장, ‘世宗皇帝嘉靖三十一年(明宗大 王7年)壬子, 介菴姜翼 與朴君承任 盧從菴祼 鄭梅村復賢 林君希茂 相議曰 吾鄕乃一 蠹先生之鄕 而先生之歿己至五十年 尙無建院立祠之擧 實吾鄕之差 咸曰然 乃創立書 院是時也…’. 14 한국서원학보 제8호 수 尹確의 지원을 받아 1559년(명종 14) 원역을 마쳤으며 1561년(명종 16) 廟 宇를 완공해 정여창의 위판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후 1564년(명종 19) 군수 金宇弘의 지원으로 東西齋를 건립했고, 1566년(명종 21) 藍溪書院으로 사액 되었다. 이처럼 남계서원의 건립은 지역 사림과 지방관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다.23) 이같이 남계서원에도 퇴계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1562년(명종 17) 만들어지는 院規가 그것이다. 당시 강익은 「諸生通讀之規」 를 정했다24)고 하는데, 남계서원지에서 확인되는 남계서원의 원규는 서원 수리 및 謁廟 복장을 규정한 2개조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퇴계의 「伊山 院規」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강익이 원규를 정한 이 시점은 퇴계가 「이산 원규」를 작성한 직후였다. 남계서원이 건립되는 시기는 조선에 서원이 들어 서기 시작한 초기상황이었는데, 서원건립이 논의되던 시기에는 불과 소수서 원만이 건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계서원의 건립이 진행되던 시기와 맞물 려 퇴계와 그 문인들에 의해 서원건립이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 서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강익은 서원 건립에 있어 퇴계의 문인인 박승임 과 상의하였을 것이며, 박승임을 통해 서원과 관련한 퇴계의 영향을 받았으 리라 추측된다. 그리하여 원규를 정하는 데 있어서도 퇴계의 이산원규를 따 랐던 것이다. 퇴계는 신진사림의 강학 장수처로서 서원에 주목하였고, 서원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원기」, 「원규」를 지어 서원건립의 당위성과 필요 성을 설파하고, 앞으로의 서원 운영을 위한 기초를 세웠다. 퇴계가 서원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 보급에 진력하고 있을 무렵 그 문인들도 스승의 사업에 공감하고 동참하였다. 당시 경상도에서 건립된 13개 서원은 퇴계 본인이 직 접 또는 그 문인들을 매개로 하여 영향력을 미쳤다. 이는 서원 건립에 대한 퇴계의 열정을 보여 주는 사실이며, 더불어 이 사업에 있어서 퇴계문인들의 23) 송준식, 「남명학파의 서원건립 운동」, 남명학연구 15,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2003. 24) 姜翼, 介庵集, 연보.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15 구체적 역할이나 그 참여 형태, 규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성이 드러 나는 대목이다. Ⅲ.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퇴계문인들의 서원 건립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연구대상이 되는 퇴계문인의 범위에 대한 규정이 필요하다. 학파는 철학적 근본 입장의 공통 성에 기반한 학풍이 지속되고, 학맥의 師承관계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유학사에서 퇴계 이황은 독보적 위치를 점했으며, 많은 후학 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師承관계의 학맥을 유지해가며 퇴계의 학풍을 계승 하여 다양하게 전개시켜 갔다. 이에 퇴계의 학맥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이 어지면서 ‘퇴계학파’를 형성하였다. 퇴계가 서원 보급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을 무렵, 그의 문하에는 전국 적인 규모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퇴계는 고향인 안동․예안을 위시한 영남 지역 뿐 아니라 관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타 지역의 인물들과 교유하였고, 그들은 스스로 문인임을 자처하였다.25) 본고에서는 퇴계학파 중에서도 급문 제자를 대상으로 하였는데, 陶山及門諸賢錄 소재 퇴계문인을 기본으로 하 였다. 급문록에는 총 309명의 퇴계문인이 실려 있다.26) 25)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pp.339~343. 26) 급문록 소재 문인들의 숫자나 학통계승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김종 석은 309명 중 42명만을 학통제자로 분석하였다. 그는 퇴계라는 인물을 흠모하거나 사숙한 제자가 아닌, 퇴계의 학문 정신과 퇴계학의 주요 이론을 학문적 바탕으로 한 제자를 학통제자로 보고, 급문록과 문인들의 개인 문집에서 師承 관계를 비교․ 분석하여 그 범위를 최대한 압축했던 것이다.(김종석, 「도산급문제현록과 퇴계 학 통제자의 범위」, 퇴계문하의 인물과 사상, 예문서원, 2000) 한편 이수건은 영남학 파의 확립과정을 밝히면서 309명의 퇴계문인을 출신지역과 주요 성관별로 구분․분 석하였다. 그 결과 당대 퇴계문인은 거의 전국을 포괄할 정도로 분포지역이 광범위 했으며, 지역에서는 지연․혈연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학문적인 사우연원관계를 서로 전수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급문록에 실린 문인에 대해 당시의 ‘사제 관계’의 관념을 미루어 볼 때 상당한 근거를 갖고 기준을 정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16 한국서원학보 제8호 다음으로 書院과 祠宇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둘은 건립목적, 사회적 기 능, 제향인물 등에서 구분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서원과 사우의 건립추이에 대한 연구들에서 양자에 대한 이해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27) 그렇 지만 적어도 17세기 이전의 서원과 사우에 대한 이해에서 양자가 분명히 구 별된 존재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퇴계문인들이 활동한 시기는 늦어도 17세기 초반까지이므로, 따라서 본고에서는 서원과 사우에 대해서는 엄격한 구별을 전제로 서원만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1) 건립추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수를 정확하게 산정하기는 어렵지만 퇴계의 적전 문인이 활동하였던 광해군대까지로 한정하면, 이 시기 전국적으로 모두 125 개소의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를 지역적으로 보면 경상도 49개소, 전라도 26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이상과 같이 퇴계학파, 그 중에 서 급문록 소재 인물들의 퇴계문인 여부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과연 급문 록의 309명을 모두 퇴계 직전문인으로 볼 수 있는지, 또는 보다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직전문인의 범위를 한정시켜야 할 것인지는 앞으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 요하다고 본다. 27) 정만조는 17세기 이전의 서원과 사우는 엄격이 구별된 존재이며 서원이 우월한 존 재였음을 인정하지만, 17~18세기 이후 건립되는 서원은 본래의 일차적 기능인 藏修 와 講學보다는 부차적이었던 祀賢의 기능이 도리어 더 강조되어 그 기능이 사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서원․사우의 구별이 불분명해져서 마침내는 사우로 불러야 마땅할 것도 서원이라 불리어지면서 서원과 사우가 혼효되어 하나가 된 것 으로 이해하였다. 즉, 17세기 이후부터는 둘 사이의 구분이란 것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정만조, 「17~18세기의 서원․사우에 대한 시론-특히 사림의 건립활 동을 중심으로」, 「한국사론2, 서울대학교 한국사학회, 1975) 이와는 달리 전용우는 ‘비록 17~18세기에 서원․사우가 크게 남설되었다지만 본래 그 설치목적과 기능, 비 중이 달랐던 양자가 똑같은 추세로 남설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에 서원 의 제향적 기능이 크게 강조되어 사우와 기능상 混淆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원이 본래의 교육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존향 일변도의 사우로 변한 것이 아 닌 이상 마땅히 양자의 구별된 검토가 필요하다’고 이해했다.(전용우, 「조선조 서원․ 사우에 대한 일고찰」, 충남대 석사학위논문, 1985) 즉 17세기 이후 서원과 사우의 건립을 두고 둘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견해와, 비록 서 원과 사우의 남설로 양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마땅히 구별되 어야 한다는 의견 차이가 있다.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17 개소, 충청도 18개소, 서울․경기 11개소, 황해도 9개소, 평안도 5개소, 강원도 3개소, 함경도 4개소이다.28) 이 가운데 퇴계 문인이 직·간접적으로 건립에 관여한 서원을 살펴보면 아래 <표 2>와 같다.29) 28)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필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사항을 가감하여 정리하였다. 길경택, 「충북의 서원」, 훼철서원조사보고,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3. 송용재, 「대전․충남의 폐원우」훼철서원조사보고,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3; 충청남도, 충남의 서원․사우, 1999; 전라남도, 전남의 서원․사우, 전라남 도․목포대학박물관, 1988; 원영환, 「강원지방의 서원연구-문암서원을 중심으로」, 강원문화사연구 3, 1998; 최홍규, 「경기지역의 서원 현황과 성향-특히 용인지방 과 관련하여」, 한국의 서원과 학맥 연구, 경기대학교 소성학술연구원, 2002; 전 용우, 「호서사림의 형성에 대한 연구」,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1993; 전용우, 「조선 조 서원사우에 대한 일고찰」, 충남대 석사학위논문, 1985; 윤희면, 「조선서대 서원 정책과 서원의 설립 실태」, 역사학보, 2004; 이병훈, 「경상도 서원사우의 건립추 이와 제향인물의 성격」, 영남대 석사학위논문, 2005. 29) 기존 연구성과를 참고하면서 도산급문제현록에 실린 309명 중 개인의 文集, 서원 건립관련 기록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列邑院宇事蹟, 俎豆錄, 각 書院誌, 그리 고 邑誌類 등을 상호보완하며 확인하였다. 지역 서원 건립 사액 건립에 관여한 퇴계문인 제향인물 (건립당시) 강원 五峰書院(강릉) 1556(명종11) 崔運遇 孔子 文巖書院(춘천) 1610(광해2) 1648(인조26) 申湜 李滉 경기 道峯書院(서울) 1573(선조6) 1573(선조6) 南彦經, 金宇顒, 許曄 趙光祖 崧陽書院(개성) 1573(선조6) 1575(선조8) 朴淳 鄭夢周, 徐敬德 沂川書院(여주) 1580(선조13) 1625(인조3) 朴承任 金安國 경상 濫溪書院(함양) 1552(명종7) 1566(명종21) 朴承任 鄭汝昌 仙巖書院(청도) 1568(선조1) 黃應奎 미상 德川書院(진주) 1576(선조9) 1609(광해1) 尹根壽, 李光友 曺植 紫溪書院(청도) 1576(선조9) 1661(현종2) 黃應奎 金馹孫 臨皐書院(영천) 1553(명종8) 1553(명종8) 鄭允良, 盧遂, 金應生 鄭夢周 白鶴書院(영천) 1555(명종10) 黃俊良 미상 氷溪書院(의성)30) 1556(명종11) 1576(선조9) 申元錄 金安國, 李彦迪 伊山書院(영주) 1558(명종13) 1574(선조7) 許忠吉, 朴承任, 張壽禧, 金玏, 金隆, 李德弘 없음 <표 2> 퇴계문인들의 서원건립현황 18 한국서원학보 제8호 지역 서원 건립 사액 건립에 관여한 퇴계문인 제향인물 (건립당시) 迎鳳書院(성주) 1558(명종13) 1560(명종15) 31) 黃俊良(중수), 金宇顒, 鄭逑 朱子, 程子, 金宏弼 西岳精舍(경주) (西岳書院) 1561(명종16) 1623(인조1) 李楨 薛聰, 金庾信, 崔致遠 硏經書院(달성) 1563(명종18) 1660(현종1) 李叔樑 없음 禮林書院(밀양) 1567년(명종22) 1669(현종10) 裵三益 金宗直 鏡光書堂(안동) (鏡光書院) 1570(선조3) 權好文, 辛乃沃 없음 易東書院(예안) 1568(선조1) 1684(숙종10) 金生溟, 琴輔, 金富弼, 金富儀, 金富倫, 趙穆, 琴應夾, 琴蘭秀, 朴士熹, 李德弘, 琴應商, 李叔樑, 李寗, 李完 禹倬 金烏書院(선산) 1570(선조3) 1575(선조8) 崔應龍 吉再, 金宗直 迂溪精舍(영주) (迂溪書院) 1570(선조3) 李德弘 없음 玉山書院(경주) 1572(선조5) 1574(선조7) 許曄 李彦迪 靑城精舍(안동) (靑城書院) 1573(선조6) 權好文 없음 陶山書院(예안) 1574(선조7) 1575(선조8) 孫英濟, 琴蘭秀, 權好文, 權文海, 柳雲龍, 李德弘, 琴輔, 金隆, 趙穆 李滉 廬江書院(안동) 1576(선조9) 1676(숙종2) 金彦璣, 權好文, 權文海, 金復一, 金克一, 南致利 李滉 龍山書堂(안동) (周溪書院) 1576(선조9) 1693(숙종19) 具鳳齡, 權春蘭 없음 三溪書院(안동) 1588(선조21) 1660(현종1) 金玏, 金宇顒 權橃 玉洞書院(청송) 1602(선조35) 1690(숙종16) 鄭琢, 李庭檜 李滉 吳山書院(인동) 1585(선조18) 1669(현종10) 權文海, 柳雲龍 吉再 道東書院(현풍) 1605(선조38) 1607(선조40) 鄭逑 金宏弼 臨川書院(안동) 1607(선조40) 1618(광해10) 金玏, 鄭逑 金誠一 曲江書院(흥해) 1607(선조40) 曺好益 李彦迪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19 30) 申元錄은 1556년 향인들과 서원 건립을 논의하여 이듬해 書院正堂을 건립하였다. 1570년 서원 이름을 長川이라 했고, 1572년 봄 묘우를 세우고 김안국과 이언적을 제 향했다. 1576년 長川으로 사액되었다가 1600년 이건하면서 氷溪書院으로 개칭했다 (申元祿, 晦堂集 연보 및 열읍원우사적에 의함). 31) 1573년(선조 6)에 川谷으로 사액됨. 32) 열읍원우사적에 의하면, 1577년(선조10) 예천군수 安鳳首가 향인들의 뜻을 가 려내어 군 동쪽 6리에 서당을 창건했으며, 그 후 1612년(광해군 4)에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게 아뢰어 陞院 奉安했다고 한다(萬曆丁丑郡守安鳳首採鄕人之議 卜 地於郡東六里刱建書堂 壬子稟定于寒崗鄭逑旅軒張顯光陞院奉安). 또 초간집에 의 하면 권문해는 1577년 4월 향인들과 정산서원을 건립할 뜻을 세웠으나 이루지는 못했다고 한다(“五年丁丑[先生四十四歲]春 … 與鄕人議建鼎山書院 先生以本郡無士 子藏修之地 叔祖睡軒先生無妥靈之所 欲倣金濯纓馹孫李評事穆淸道公州廟院例 刱立 書院於鼎山 而先生遽易簀 仍値壬癸兵燹 未成…”, 「年譜」, 草澗集卷3). 정리해 보 면, 1577년 당시 예천군수와 권문해를 비롯한 향론을 바탕으로 서당이 건립되었다 고 보여진다. 이 과정에 권문해, 김복일, 박승임 등 당시 예천지역 퇴계문인들이 서 원건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초간집에 나타난 바와 같이 권문해가 갑자기 사망 하여 權五福을 봉안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이후 임진왜란의 와중에 서당건 물은 소실되었던 것 같다. 그 후 1612년 정구, 장현광의 노력으로 이황을 봉안하여 지역 서원 건립 사액 건립에 관여한 퇴계문인 제향인물 (건립당시) 鼎山書院(예천) 1577(선조10) 1677(숙종3) 朴承任, 金復一, 權文海32) 李滉 道岑書院(영천) 1613(광해5) 1678(숙종4) 金就礪 曺好益 전라 玉川書院(순천) 1564(명종19) 1568(선조1) 李楨, 奇大升 金宏弼 大谷書院(나주) (景賢書院) 1584(선조17) 1609(광해1) 金誠一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 筆岩書院(장성) 1590(선조23) 1662(현종3) 卞成溫 金麟厚 충청 忠賢書院(공주)33) 1581(선조14) 1624(인조2) 權文海 李存吾, 成悌元, 李穆 文獻書院(한산)34) 1594(선조27) 1611(광해3) 李誠中 李穀, 李穡 五賢書院(아산)35) 1610(광해2) 洪可臣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 八峰書院(충주)36) 1582(선조15) 1672(현종13) 金宇宏, 吳澐 李耔, 李延慶 雲谷書院(음성)37) 1602(선조35) 1676(숙종2) 鄭逑 朱子 평안 淸溪書院(강동)38) 1577(선조10) 曺好益 없음 20 한국서원학보 제8호 광해군대까지 설립된 125개 서원 가운데 퇴계 문인들이 관여한 수를 시기 별, 지역별로 정리하면 아래 <표 3>, <표 4>와 같다. 서원을 재건하였다. 33) 충현서원은 1581년(선조 14)에 徐起(1523~1591)와 그의 제자들이 주도하고, 당 시 공주목사로 와 있던 권문해가 쌀과 콩 50여 휘(1휘는 10말)를 재정 지원하여 공암서원이란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창설 당시 공암서원에는 朱子, 李存吾, 李穆, 成悌元이 제향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되었다가 1610년(광해군2)에 중 수되었고, 1624년(인조 2)에 ‘忠賢’으로 사액되었다. 34) 문헌서원의 기록상 창건연대는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李恒福이 찬한 「文獻書院記」에 의하면 李誠中이 한산군수로 부임하여 기린산 기슭의 목은 이색의 묘소 아래에 묘우를 짓고 ‘효정사’라는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을 보아 실제 창건시기는 이성중이 한산군수로 재임하던 1580년대 초반으로 보여진다.(충청남 도, 충남의 서원사우, 1999, p.603.) 35) 五賢書院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五賢을 제향하여 건립되었다. 홍가신은 아산의 향현으로 1605년(선조 38)경 개성유수에서 체임된 이후 아산의 시골집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홍가신은 일찍이 대관으로 있을 때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였다. 추측컨대 아마 퇴계를 비롯한 오현을 종사하는 아산의 분위기는 이 시 기 홍가신이 내려와 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원 명칭이 列邑院宇事蹟과 書院可攷에는 ‘五賢書院’이라고 되어 있으나, 東國院宇錄과 增補文獻備考에는 ‘仁山書院’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열읍원우사적에 실려 있는 「牙山縣書院事實成冊」이 1759년에 작성된 점에 비춰볼 때, 원래 ‘오현서원’이라고 불리다가 후에는 지명을 따라 ‘인산서원’이라고 불리게 된 듯하다.(충남의 서원사 우, 1999, pp.213~214.) 36) 1586년 팔봉서원이 세워져 李耔의 위판을 봉안했다. 서원은 충주에 있는데 1582년 봄 많은 선비들이 夢庵의 遺址 북쪽에 院宇를 건립하였다. 감사 金宇宏과 목사 李 選,劉漢忠,吳澐,金偉가 서로 이어가며 조성했다. 廟宇는 崇德, 강당은 好懿, 동 재는 明誠, 서재는 敬義라 이름하고, 이자를 주향으로, 灘叟를 병향했다. 원호를 溪 灘 또는 劍巖이라 일컬었다. 穌齋가 기문을 撰했다. 임진 병화에 파훼되었다가 난 후 중건하였다. 임자년에 穌齋를 병향하고, 그후 사림이 청액을 아뢰어 八峯으로 사액되었다.("十四年丙戌 八峯書院成 奉安位版[院在忠州 壬午春 州之多士 營建院宇 于夢庵遺址之北 監司金宇宏及牧使李選劉漢忠吳澐金偉 相繼助成 廟宇曰崇德 講堂 曰好懿 東齋曰明誠 西齋曰敬義 先生主享 灘叟竝享 院號溪灘又稱劍巖 穌齋撰記 壬 辰兵燹被燬 亂定重建 壬子 又以十淸穌齋竝享 其後士林陳疏請額 賜額八峯", 李耔, 陰崖集, 「연보」) 37) 1602년(선조 35)에 鄭逑가 충주목사로 부임하자 이곳 유림의 건의로 기존의 白雲 書堂을 운곡서원으로 개편하고 朱子의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61년(현종2)에 정 구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676년(숙종 2)에 ‘雲谷’이라 사액되었다. 38) 조호익이 평안도 강동에 귀양을 가서 高芝山 아래에 成材書堂을 열고 강학하였는 데, 퇴계를 모신 서원을 건립하려고 경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호익 사 후 관서 사림들이 성재서당 오른쪽에 祠宇를 짓고 퇴계를 주벽으로 하고 조호익을 배향하였다. 1672년 사액을 청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芝山集 附錄 卷1, 「年譜」; 附錄 卷3, 「淸溪書院請額訴」)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21 <표 3> 광해군대까지의 서원 건립에 참여한 퇴계 문인 현황 중종 명종 선조 광해군 계 임란이전 임란이후 경기 전체 5 3 3 11 퇴계문인 3 3 충청 전체 1 7 3 7 18 퇴계문인 2215 전라 전체 1 16 4 5 26 퇴계문인 12 3 경상 전체 1 9 20 11 8 49 퇴계문인 9 15 4 1 29 강원 전체 1 23 퇴계문인 1 12 평안 전체 12115 퇴계문인 1 1 함경 전체 2 114 퇴계문인 황해 전체 15219 퇴계문인 계 전체 1 16 55 25 28 125 퇴계문인 11 23 6 3 43 <표 4> 퇴계 문인 관여 서원 비율 중종 명종 선조 광해군 계 임란이전 임란이후 개소 (퇴계문인/전체) 0/1 11/16 23/55 6/25 3/28 43/125 비율 69% 42% 24% 7% 34.5% 중종 연간에 건립된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주세붕에 의해 백운동서원 으로 건립되어 퇴계의 청원으로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퇴계문인의 참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퇴계가 낙향한 후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 한 이래로 그의 문인들의 참여가 급증하였다. 실제 퇴계문인들이 가장 왕성 하게 활동하였던 명종~선조(임란이전)대를 보면 당시 건립된 서원 71개소 가운데 34개소에 관여하였다. 명종 대에는 16개소 중 11개소에 관여하여 69%에 이른다. 이들이 관여한 서원을 지역별로 보면 경상도 9개소, 강원도· 22 한국서원학보 제8호 전라도 각 1개소씩이다. 이 시기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에 건립된 모든 서원 에 퇴계와 그 문인들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조 대에는 80개소 가운데 29개소에 참여하여 36%의 참여율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참여율을 보면 55개소 중 23개소에 관여하여 42%로 나타난다. 반면 임란이후에는 25개소 가운데 6개소에만 관 여하여 24%에 해당하고, 광해군대에는 더욱 낮아져서 23개소 가운데 3개소 에만 관여하여 7%의 참여율을 보인다. 이처럼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퇴계문 인들의 서원 건립 참여도가 크게 차이나는 것은 임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을 재건하는데 朝野에서 총력을 기울였던 상황과 1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서 많 은 수의 퇴계문인들이 사망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며, 동시에 서원에 대한 관 심이 퇴계학파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정국 운영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명종 대를 거치면서 큰 폭으로 성장한 사림파는 선조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선조 초반의 동서분당을 시작으로 사림 세력은 분열하고, 임란직전 정권을 장악하였던 퇴계문인 중심의 남인세력은 전시 정국을 운영한 후 전란의 종식과 더불어 몰락하였다. 아울러 서원 건립에 적 극적이었던 퇴계 문인들이 사망하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부 제자들만의 참여가 확인된다. 이 시기 주 목되는 인물이 寒岡 鄭逑이다. 그는 임란이후 충청도 운곡서원, 경상도 도동 서원·임천서원의 건립에 관여하였으며, 북인정권 하에서 퇴계 문인들을 영 도하면서 퇴계의 4高弟 가운데 일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새롭게 건립된 서원은 줄어들었지만 전후 복구 과정에서 기존의 서원을 重建하는 경우도 있었다. 1606년(선조 39) 경상감사 柳永詢은 전란으 로 소실되었던 천곡서원(성주), 금오서원(선산), 쌍계서원(현풍), 남계서원 (함양), 덕계서원(진주)을 중건하였음을 알리며, 편액을 다시 내려주기를 청 하였다.39) 이처럼 각 고을에서는 관민이 협력하여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원 39) 선조실록 39년(1605) 12월 26일.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23 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기존에 세워졌던 서원 을 중건한 경우를 감안하면 임진왜란 이후에도 서원 건립의 열의는 지속적 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퇴계문인들이 건립에 참여한 서원의 지역별 비중을 보면, <표 5>와 같이 삼남지방의 서원 건립이 두드러지며 그 다음으로 경기도, 황해도의 순 으로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평안 함경 황해 계 개소 3/11 5/18 3/26 29/49 2/3 1/5 0/4 0/9 43/125 비율 27.2% 27.7% 11.5% 55.2% 66.6% 20% 0% 0% <표 5> 지역별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참여율 특히 경상도 지역은 전체 125개소 가운데 49개소로써 약 39.2%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 49개 서원 가운데 퇴계문인이 직간접으로 건립에 관여한 서 원은 29개로 55.2%를 차지한다. 이것은 경상도에 문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 던 것과 비례한다. 실제 명종연간 경상도에 건립된 서원은 9개소인데 이들 모두에 퇴계 및 그의 문인들이 건립에 관여하였고, 선조연간에는 31개소 중 19개소가 퇴계문인들에 의해 건립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많은 퇴계문 인들이 생존해 주로 활동하던 임진왜란 전까지를 두고 보면 경상도에서 건 립된 30개 서원 가운데 24개소에 퇴계와 그 문인들이 관여하였는데, 무려 70%에 이른다. 즉 경상도 지역의 서원 건립에 있어 퇴계문인들의 역할이 절 대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강원도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퇴계문인이 건립에 관여한 서원의 비율이 경상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경기도는 11 개소 가운데 3개소(27%), 충청도는 18개소 가운데 5개소(27%), 전라도는 26개 소 가운데 3개소(11.5%), 평안도는 5개소 가운데 1개소(20%)이며, 함경도와 황해도에는 퇴계문인들의 영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지역 24 한국서원학보 제8호 에서는 퇴계문인들이 건립에 관여한 서원의 건립 시기를 고려해 보아야 한 다.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퇴계문인들이 관여한 서원은 모두 임진왜란 이전 시기이다. 충청도의 경우도 임란이전에 2개소가 건립되었다. 즉 서원 건립 초기상황에서 이들 지역에 퇴계문인들에 의한 서원건립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서원의 전국적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퇴계문인들의 서원 건립이 각 지역에 있어 서원의 정착 및 확산이라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퇴계문인들이 조선에 서원 제도가 도입된 이래로 그것의 정착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확인했다. 특히 퇴계문인들이 주로 활동 하였던 임란이전까지를 보면 전국적으로 건립된 서원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 에 이들이 관계하고 있었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의 참여는 과반을 넘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경상도에 비해 퇴계문인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대부분 임란 이전에 관계한 경우로서 서원의 정착·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문인들의 서원 건립 활동 도산급문제현록에 실린 문인 중 서원 건립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56명이다. 이들 가운데 5개소의 서원 건립에 관여한 문인이 2명 이며, 4개소에 관여한 문인은 2명, 3개소에 관여한 문인은 3명, 2개소에는 12 명, 마지막 1곳씩의 서원 건립에는 모두 37명이 관여하였다.40) 단순히 건립 에 관여한 서원 수가 많다는 것이 퇴계의 서원건립을 충실히 계승했다거나 또는 서원 건립에 열의를 더 가졌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단 1곳의 서원 건 40) 5개소 權文海·鄭逑, 4개소 朴承任·李德弘, 3개소 權好文·金宇顒·金玏, 2개소 琴蘭 秀·琴輔·金隆·金復一·金誠一·柳雲龍·李叔樑·李楨·趙穆·曺好益·黃應奎·許 曄, 1개소 具鳳齡·權春蘭·琴應商·琴應夾·奇大升·金克一·金富倫·金富儀·金富 弼·金生溟·金彦璣·金宇宏·金應生·金就礪·南彦經·南致利·盧遂·朴士熹·朴 淳·卞成溫·孫英濟·辛乃沃·申湜·申元錄·吳澐·尹根壽·李誠中·李光友·李庭 檜·張壽禧·鄭允良·鄭琢·崔運遇·崔應龍·許忠吉·洪可臣·黃俊良 등이다.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25 립에 관여했지만 실제 서원 건립이나 퇴계가 추구했던 서원관의 실현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퇴계문인들이 서원건 립에 나섰을 때의 지위를 기준으로 하여 참여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 고자 한다. (1) 지방관으로서 참여 서원 제도가 도입된 이래로 막대한 물력이 소모되는 서원의 건립과 향후 운영에 있어서 지방관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서원 건립 부지 및 건축자재의 확보에서부터 인력의 동원 등에 이르기까지 서원 건립 과정에서 지방관의 재정적, 행정적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향중 사림들은 서원 건립을 위해 지방 관에게 인적·물적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방관 입장에서도 향 촌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재지사족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한편으로는 ‘興學’ 이라는 수령의 책무와도 일정부분 관련이 있었다.41) 서원 건립에 관여한 56 명의 퇴계문인 가운데 관직에 있었던 인물들을 보면 다음 <표 6>과 같이 21 명이 확인된다. 41)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p.21. 이름 서원 시기 지역 건립 당시의 관직 權文海 陶山書院 1574(선조7) 경상 예안 안동부사 廬江書院 1573(선조6) 경상 안동 안동부사 吳山書院 1587(선조20) 경상 인동 대구부사 鼎山書院 1577(선조10) 경상 예천 안동부사 忠賢書院 1580(선조13) 충청 공주 공주목사 金玏 三溪書院 1588(선조21) 경상 봉화 호조참판 金誠一 景賢書院 1584(선조17) 전라 나주 나주목사 金宇宏 八峯書院 1582(선조15) 충청 충주 충청감사 金宇顒 道峯書院 1574(선조7) 경기 양주 부수찬 <표 6> 仕宦하여 서원 건립에 참여한 문인 현황 26 한국서원학보 제8호 이들 가운데 중앙에서 관직을 맡고 있던 인물은 4명으로 김륵, 김우옹, 박 순, 허엽이 그들이다. 먼저 김륵은 호조참판으로 있으면서 1601년(선조 34) 權橃을 제향하는 「三溪書院奉安文」을 지었다. 그리고 1605년(선조 38)에는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廬江書院을 중수했다.42) 다음 김우옹은 부수찬으로 있 으면서 1573년(선조 6) 11월 30일 晝講에 입시하여 천곡서원의 賜額頒書를 청하였고43), 또 1574년(선조 7) 9월에는 승지 鄭琢과 함께 도봉서원을 높이 42) 金玏, 栢巖集, 年譜. 43) 金宇顒, 東岡集, 年譜. 이름 서원 시기 지역 건립 당시의 관직 三溪書院 1588(선조21) 경상 봉화 안동부사 川谷書院 1573(선조6) 경상 성주 부수찬 南彦經 道峯書院 1573(선조6) 경기 양주 양주목사 朴淳 嵩陽書院 1575(선조8) 경기 개성 좌의정 朴承任 沂川書院 1580(선조13) 경기 여주 여주목사 裵三益 禮林書院 1567(명종2) 경상 밀양 밀양교수 孫英濟 陶山書院 1574(선조7) 경상 안동 예안현감 申湜 文巖書院 1612(광해4) 강원 춘천 춘천부사 吳澐 八峯書院 1582(선조15) 충청 충주 충주목사 柳雲龍 吳山書院 1585(선조18) 경상 인동 인동현감 尹根壽 德川書院 1576(선조9) 경상 진주 경상감사 李誠中 文獻書院 1594(선조27) 충청 서천 한산군수 李楨 西岳精舍 1560(명종15) 경상 경주 경주부윤 玉川書院 1564(명종19) 전라 순천 순천부사 鄭逑 雲谷書院 1602(선조35) 충청 음성 충주목사 臨川書院 1607(선조40) 경상 안동 안동부사 許曄 玉山書院 1572(선조5) 경상 경주 大司成 道峯書院 1574(선조7) 경기 양주 부제학 許忠吉 伊山書院 1573(선조6) 경상 영주 榮川군수 黃應奎 仙巖書院 1577(선조10) 경상 청도 청도군수 紫溪書院 1576(선조9) 경상 청도 청도군수 黃俊良 白鶴書院 1555(명종10) 경상 영천 신녕현감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27 고 권면하는 箚子를 올렸다. 이후 10월 13일 侍講에서는 사액을 청하였다.44) 좌의정 박순은 1575년(선조 8) 여름 서경덕의 증직을 청하고, 송도에 崧陽書 院을 건립할 것을 창의하였다. 허엽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1574년(선조 7) 「玉山書院記」를 지었으며, 이어 도봉서원의 원규를 정하였다. 이들은 중앙 고위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지방에서의 서원 건립을 간접적으로 지원을 했던 경우이다. 중앙관료가 아닌 지방관의 신분이었던 인물은 17명이다. 이들이 지방관으 로서 서원건립에 나섰던 구체적 행적은 자료의 개인별 편차가 심하다. 문집 이나 서원기 등을 통해 구체적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단편적 사실만이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李楨(1512-1571) : 경주부윤으로 나가서는 서악정사를, 순천부사로 부임해서 는 옥천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악서원은 1561년(명종 16) 경주부윤 이정의 주도하 에 건립되었는데, 처음에는 서악정사라 이름 하였다가, 1623년(인조 1) 서악서원 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그는 서악정사 건립과 향사, 건물의 액호 문제, 성리학 관 련 도서간행문제에 대해서도 직접 도산서당을 방문하거나 서신왕래를 통해 퇴계 의 의견을 물어 처리했다.45) 또 순천부사로 재임시에는 金宏弼의 유문과 사적을 수집, 정리하여 퇴계의 교시를 받아 景賢錄을 편간하고, 1564년(명종 19) 김굉 필을 제향하는 옥천정사로 건립되었다. 당시 이정은 정사 건립을 위한 토지를 구 입하고, 퇴계의 자문을 구해 堂․齋號를 정했는데, 퇴계는 이를 직접 명명해 써 주 었다. 그리고 서적과 노비를 갖추어 교육과 운영의 기반을 닦는데도 도움을 주었 다.46) ② 金誠一(1538-1593) : 나주목사 재임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 황 등 동방오현을 향사하는 경현서원을 건립하였다. 그 규제는 일체 백록동서원 의 고사를 따르게 하였으며, 한가할 때는 諸生들과 더불어 경서의 뜻을 강론하고, 勤怠에 따라 점수를 매겨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를 다하였다.47) 44) 金宇顒, 東岡集, 年譜 ; 선조실록, 선조 7년(1574) 10월 13일. 그리고 東岡集 에는 양주에 서원을 중첩하여 설치하는 것을 금하지 말기를 청하는 「玉堂請勿禁楊 州書院疊設箚」가 실려 있다. 45) 이수건, 「구암 이정의 가계와 생애 및 ‘퇴남’과의 관계」, 안동사학 제9․10집, 2005. 46) 寄大升, 高峰集 권2, 「玉川書院記」. 28 한국서원학보 제8호 ③ 柳雲龍(1542-1607) : 1585년(선조 18) 인동현감으로 나가 冶隱 吉再를 제향 하는 吳山書院을 건립했다. 「오산서원기」에는 인동현감 유운룡이 길재의 묘를 수 리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더불어 묘소 앞 吳泰山 아래에 터를 정하고 院宇 를 건립했다. 1588년(선조 21) 3월에 준공하고, 4월 14일에 경내 諸生이 모여 길 재를 봉향했다. 오산서원이 낙성되자 유운룡은 관내 제생들을 이끌고 강학하였으 며, 여러 서원 원규와 오례의를 참조하여 學規를 정했다.48) 한편 오산서원 건립 과정에는 달성군수 권문해, 성주목사 柳夢鼎, 亞使 李熹가 물심양면으로 협조하 였다.49) ④ 金宇顒(1540-1603) : 1588년(선조 21) 안동부사로 재임시 안동부 사람들이 충재 권벌을 제향하는 三溪書院을 건립하려 함을 알고 그것을 권면하고 칭찬했 다. 그리고 安養廢寺田과 加飛谷書堂에 속한 公須田을 삼계서원에 이속시켜 주었 다.50) ⑤ 南彦經(1528-1594) : 양주목사로 부임하여 1573년(선조 6) 도봉산 寧國寺 옛 터에 조광조를 제향하여 道峯書院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이가 지은 「도봉서원 기」에 의하면 1573년 겨울에 목사 남언경이 이곳을 찾아보고 조광조의 유적을 회상하고는, 향유들과 함께 노력하여 이듬해 여름 옛 절터에 祠院을 지었다. 그러 나 목수의 役事만이 대강 완공되었을 뿐 나머지 모든 일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남언경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후임으로 온 목사 李齊閔과 또 그 뒤를 이은 李 廷馣이 사업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6년째 되는 1579년(선조 12) 봄에 비로소 준 공하였다고 전한다. 이어 成渾이 사액을 청하여 건립되던 해에 道峯으로 사액되 47) 金誠一, 鶴峰集附錄 권1, 「연보」, ‘十二年甲申先生四十七歲春 刱大谷書院 (州素稱 多士 未有藏修之地 先生親相地於城西五里錦城之麓 以祀寒暄一蠹靜庵晦齋退溪五先 生 使學者知所師宗 其規制一依白鹿洞故事 暇則與諸生講論經義 課其勤怠 以盡其作 成之方’. 48) 柳雲龍, 謙菴集 年譜. 49) 柳雲龍, 謙菴集 卷5, 「吳山書院記」. 50) 權橃, 冲齋集, 「年譜」, ‘神宗萬曆十六年戊子 士林建書院于先生(權橃)故宅西山之 外 (士林唱議爲俎豆崇奉之擧 各出財力 時東岡金文貞公宇顒知本府 樂聞而勸成之 以 縣南安養廢寺田及加飛谷書堂屬公水田屬書院 凡營建經紀 致力尤多)’; 金宇顒, 東 岡集, 「年譜」, ‘十五年丁亥先生四十八歲冬 拜安東府使 十六年戊子先生四十九歲 春 赴任(先生以約己奉公 愛民興學 爲爲政之本 公暇率鄕子弟 講學論禮 府人士欲爲 權冲齋橃立院 先生奬成之 土田之屬于公者 皆歸於院 府人士至今追思不忘云)’.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29 었다.51) ⑥ 申湜(1551-1623) : 춘천 文巖書院의 건립에는 신식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 였다. 1610년(광해군 2) 관동을 순찰하는 길에 들린 춘천에서 유생 몇 명이 찾아 와서 춘천이 퇴계의 外貫임을 사유로 서원 건립을 요청하였다. 이에 춘천부사 柳 希聃과 상의하여 서원을 설치토록 허락하고, 노비 약간 명을 주어 서원건립에 대 한 일을 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1612년(광해군 4)에 춘천부사로 다시 춘천에 오 게 된 신식은 이때까지 서원을 건립하지 못한 것을 보고, 다시 安崇讓·李冑 등과 상의하여 강변의 文岩 위에 터를 정하고 서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 신식이 ‘상량문’을 지은 것52)으로 보아서 그 해에 완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건립된 문암서원은 그 규모가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같다고 전한다. ⑦ 權文海(1534-1591) : 안동부사 재임시 여강서원의 건립에 직접 관여하였다. 여강서원은 퇴계를 제향하는 서원으로서 지역 사림을 위시한 퇴계문도가 주도가 되어 건립된 것이다. 권문해는 1573년(선조 6) 안동부사로 부임해 그 해 3월부터 여강서원 건립에 관여했다. 그는 4월에 廬江에 가서 폐사(白蓮寺)의 材瓦를 철거 했고, 이후 1574년(선조 7) 묘우, 재, 당이 완성될 때까지 수차례 현장에서 직접 서원 건립을 감독했다.53) 공주목사로 부임해서는 공암서원의 건립을 위해 재정 지원을 했다. ⑧ 孫英濟(?-1588) : 예안현감으로 있으면서 도산서원을 건립할 때 녹봉을 내어, 51) 陶山及門諸賢錄, ‘公晩歸嘗牧陽州 營建靜菴書院于道峯’. 趙光祖, 靜菴集, 「年譜」, ‘神宗萬曆元年癸酉 建道峯書院於楊州卽道峯山寧國寺舊 基 先生少時 愛其泉石 往來棲息 立朝之後 亦乘公退 命駕遊焉 至是 牧使南彥經創始 之’; 成渾, 牛溪集 권6, 雜著, 「議政府右參贊白公行狀」, ‘…先是楊州牧使南彦經, 立 文正公書院于道峯山下, 公欲自詣闕申請從祀及賜額’; 李珥, 栗谷全書 권13, 「道峯書 院記」, ‘書院之建 本爲藏修 而兼擧崇德報功之典 … 萬曆癸酉之冬 牧使南侯彦經 往 觀其洞 慨想遺躅 咨詢鄕士 議作瞻慕之所 衆志克合 乃卽寺址 營建祠宇 因設書院 鄕 人聳身 百工勤力 越明年甲戌之夏 祠院告功 祠宇在北 輔以東西齋書 院在南中 設講 堂 翼以兩夾室 前廊枕溪 廊側有門 因地形也 木役粗完 凡百未庀 而南侯以疾去官 繼 牧是州者 李公齊閔 李侯廷馣 踵其緖不替 於是廩士之具 藏書之室 毖祀之廚 次第訖 事 越六年己卯之春 始克斷手 其將落成也」. 52) 원영환, 「강원지방의 서원 연구-문암서원을 중심으로」, 강원문화사연구 3, 강원향 토문화연구회, 1998; 정경세, 『愚伏先生文集』卷16, 「文嚴書院上梁文(乙卯爲春川府 伯申叔正作)」. 53) 權文海, 草澗集, 「年譜」. 30 한국서원학보 제8호 자금을 보조하였다. 이에 金富倫이 ‘공사 시작할 땐 재물로 보조했고, 일을 보살 핌에 심정을 다했다’고 시를 지어 손영제의 노력을 찬하였다.54) ⑨ 尹根壽(1537-1616) : 경상감사로 재임시 金山廢寺와 眞興廢寺의 토지를 德山 書院과 陶山書院에 분속시켜 서원 건립에 필요한 자원으로 활용케 하였다.55) ⑩ 裵三益(1534-1588) : 1565년(명종 20) 밀양 교수로 나아가 김종직을 제향하 는 禮林書院의 건립에 관계하였다. 그는 1566년(명종 21) 정월 퇴계에게 편지하 여 김종직을 立祠하는 일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다.56) 이것은 ‘점필재의 행실은 후 세에 의논이 없을 수 없다’고 한 남명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퇴계에게 자문을 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물음에 대해 퇴계는 ‘남명의 비판이 타당한 면이 있지 만, 김종직이 綱常을 扶植함이 많으니 서원을 건립하고 사당을 세우는 일에 무리 가 없다’고 답하며57), 서원을 완성하는데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1567년 (명종 2)에 김종직을 제향하였다. ⑪ 黃俊良(1517-1563) : 1551년(명종 6) 신녕현감으로 부임해 白鶴書堂을 창건 하여 도서를 비치하고 논밭을 장만하였다.58) 덧붙여 1560년(명종 15) 7월 성주 목사 재임시에는 鹿峰精舍와 孔谷書堂을 건립하여 사림의 독서처 및 강학의 장소 를 건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당시 吳健이 성주 교수로 왔으므로 서로 뜻을 모아 유생교육에 노력했다. 녹봉정사는 황준량과 오건 및 성주 사람들이 1561년(명종 16) 팔거현의 폐사지에 건립한 것인데, 퇴계는 녹봉정사 건립을 칭찬하며 황준량 의 부탁대로 편액을 써 주었다.59) 그리고 성주 동쪽 공곡이란 곳에 여러 학생들 54) 陶山及門諸賢錄, ‘甲戌 建陶山書院 公傾捧助資 竭心殫力終底 有成雪月金公詩云 起工隨物力敦事盡心情’ 55) 德川書院誌, ‘監司尹公 以金山眞興廢寺土地 分屬德山與陶山 以備院中需用之資’ 56) 裵三益, 臨淵齋集卷5, 年譜, ‘正月上書退溪先生 論佔畢齋立祠事’. 57) 李滉, 退溪先生文集卷35, 「答裵汝友書」, ‘佔畢翁果有如南冥所云 然亦甚有扶植處 何可深斥 作院立祠 正不可不爾也 幸勿疑貳 勸卒成之爲佳’. 58) 陶山及門諸賢錄, ‘宰新寧 創白鶴書院 藏書置田’; 黃俊良, 錦溪集卷9 附錄, 「行狀 」, ‘其在新寧 歲値不稔 視民之飢 若己飢之 賑恤得宜 民以蘇息 前政逋負 公能節縮補 塡 數充則焚其券 尤留意學校 增新文廟 力加勸導 又就古縣 刱學舍一區 扁爲白鶴書 院 藏書置田 士心興慕’. 59) 退溪先生文集卷20, 「答黃仲擧」, ‘鹿峯精舍事 甚善甚善 彼中士人 乃發如此之願慕 將由使君與敎官倡作之力耶 勝於此間之俗 遠矣 扁額當依示 但浩然樓然樓二字 相接 呼之 音不響亮 作養浩樓何如’.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31 이 서당 세우기를 바랐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공곡서당을 세웠다.60) 한편 당시 성 주에는 전임목사 盧慶麟이 성주지방의 사림과 협력하여 건립한 영봉서원의 제향 문제를 두고 논란을 겪고 있었는데, 퇴계도 기문을 쓴 것을 계기로 시비에 말려들 어 있었다. 이에 황준량도 퇴계와의 사이에서 영봉서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 력하였다.61) ⑫ 許忠吉(1540-?) : 1572년(선조 5) 榮川郡守로 재임시 이산서원에 퇴계를 처 음으로 봉안했다. 또 박승임이 보낸 성학십도를 이산서원에서 간행하였다.62) ⑬ 朴承任(1517-1586) : 1578년(선조 11) 9월 여주목사로 재임시 沂川書院을 세웠고 金安國의 사당을 건립하였다.63) ⑭ 鄭逑(1543-1620) : 충주목사로 부임해 기존의 운곡서당을 고쳐 朱子를 제향 한 운곡서원을 건립하였다.64) 안동부사로 나가 있던 1607년(선조 40) 고을 선비 들이 김성일을 향사하는 臨川鄕社를 건립하고 김성일의 위판을 봉안했는데, 이때 정구는 고을 수령으로서 글을 지어 묘에 제사했다. 임천향사는 1618년(광해군 10) 임천서원으로 승격되었는데, 정구의 의견을 따른 것이라 하였다.65) ⑮ 金宇宏(1524-1590)과 吳澐(1540-1617) : 각각 충청감사와 충주목사로서 八 峯書院의 건립에 관여하였다. 팔봉서원은 1582년(선조 15) 충주지역 선비들이 건립하였는데, 1586년(선조 19)에 李耔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당시 감사 김우굉 과 목사 李選,劉漢忠,오운,金偉가 서로 이어가며 이를 조성했다고 한다.66) ⑯ 李誠中(1539-1593) : 한산군수로 재임시 문헌서원을 건립하였다. 증보문헌 60) 退溪先生文集卷48, 「星州牧使黃公行狀」, ‘州東有地曰孔谷 因諸生願立書堂 公欣然 營構 扁曰孔谷書堂’. 61) 영봉서원의 위차 시비 전말은 정만조, 「퇴계 이황의 서원론」, 한우근박사정년기념 논총(1981)이 참고 된다. 62) 도산급문제현록, 허충길조. 63) 朴承任, 嘯皐集, 「行狀」, ‘(萬曆六年)九月復陞通政 除驪州牧使 創書院 建慕齋金先 生廟’. 64) 雲谷書院誌, 충북향토문화연구소, 2003; 列邑院宇事蹟, 운곡서원조. 65) 金誠一, 鶴峰集附錄卷1, 年譜. 66) 李耔, 陰崖集, 「年譜」, ‘十四年丙戌 八峯書院成 奉安位版[院在忠州 壬午春 州之多 士 營建院宇于夢庵遺址之北 監司金宇宏及牧使李選劉漢忠吳澐金偉相繼助成’; 吳澐, 竹牖集, 年譜. 32 한국서원학보 제8호 비고에는 문헌서원의 건립을 1594년(선조 25)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성 중이 건립한 문헌서원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이 시기에 移建한 사실을 반영했기 때문이다.67) 실제 창건 시기는 이성중이 한산군수로 재임하던 1580년 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⑰ 黃應奎(1518-1598) : 청도군수 재임시 1576년(선조 9) 김일손을 제향하는 紫溪祠를 서원으로 陞院시키고, 「자계서원기」를 썼다. 1577년(선조 10)에는 기존 의 鄕賢祠를 이건하여 서원으로 승격하고 仙巖書院으로 개칭하였다. 퇴계문인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에 서원이 소개되고 보급되기 시작하 던 때로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이들은 해당 지역에 서원을 소개하고, 나아가 향인들이 서원 건립에 나서도록 독려했다.68) 특히 지방관이라는 위치를 적 극 활용해 서원 건립에 필요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서원 부지를 제공하거나[권문해·신식·남언경], 서원 운영을 위한 토 지를 마련하였으며[김우옹·윤근수·황준량], 건립 자금을 내놓기도 했다[손 영제]. 건립 과정에서 관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권문해]. 또한 서원이 완성 된 후에는 서원의 운영에도 적극 관여하여, 원규를 제정하고 직접 서원 강학 을 주도하기도 했다.[김성일, 유운룡]그 밖에 향인들의 서원 건립을 권면하거 나[김우옹], 기존의 향현사를 서원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황응규·정구] 이 처럼 지방관으로 나간 퇴계문인들은 사림의 건립 활동을 지원하고, 나아가 건립을 주도하거나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퇴계 문인들이 건립에 참여한 43개 서원 가운데 지방관으로서 관여한 곳 67) 文獻書院誌, 沿革, “判書李誠中爲韓山郡守時立廟于麒麟山下 扁以孝靖 享稼亭牧 隱兩先生 宣祖二十五年壬辰亂灰燼 二十七年甲午移建于韓山枯村”; 충청남도, 충 남의 서원사우, 1999, p.603. 68) 이 과정에서 이정은 경주 서악정사 건립시 비방을 받기도 했고, 제향인물의 선정을 두고서는 스승인 퇴계와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退溪先生文集 卷20, 「答黃仲擧 書」) 그렇지만 이정이 건립한 서악정사는 경주지역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경상도 열읍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후 경주지역의 사론을 주도해 가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순천부사 재직시 설립한 옥천서원은 전라도 지역 최초의 서원이었다.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33 이 22개소로 51.2%를 차지한다. 우선 시기적으로 보면 1550년대에 1개소, 1560년대에 3개소, 1570년대에 8개소, 1580년대에 6개소, 그리고 1600년대 이 후 4개소이다.69) 퇴계 생전에 서원 건립이 이루어진 경우는 서악정사와 옥 천서원, 백학서원, 그리고 예림서원 등 4곳이다. 그리고 퇴계가 사망한 후인 1570~80년대에 걸쳐 14개소의 서원이 건립되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봉 화, 인동, 밀양, 진주, 경주, 청도, 대구, 안동, 영천, 영주), 전라도(나주, 순 천), 충청도(공주, 충주, 서천, 음성), 경기도(여주, 양주), 강원도(춘천) 등 삼 남 지방을 비롯해 경기도와 강원도를 아우르고 있다. 여기서 이들이 서원건립에 나선 시기와 그 지역에 주목할 수 있다. 즉 이 들에 의해 건립된 서원은 주로 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또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정이 건립한 서악서원은 경주지역 최초의 서 원으로 이후 옥산서원이 건립되기까지 향론의 형성과 결집의 구심점으로 기 능했다. 옥천서원은 전라도 최초의 서원으로 경상도 풍기에서 시작된 서원 제가 전라도 지역에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강릉 오봉서원은 강원지역 에서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경기도·충청도 지역에서 퇴계문인들에 의해 건립된 서원도 그 지역 서원들 중 시기적으로 대부분 앞자리에 놓인다. 즉, 백운동서원 건립과 퇴계의 사액청원에서 비롯된 조선 서원이 점차 전국적으 로 보급되어 가던 시기에 퇴계문인들의 서원 건립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 다. 특히 지방관으로 부임한 문인들은 퇴계의 서원보급에 공감하고 부임지 에서 서원 건립에 나섰는데, 이들에 의해 전국 각 지역으로 서원제도가 확산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퇴계문인들은 새로운 서원 건립에 나서기도 했지만, 기존에 건립되 어 있는 서원의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원경제에 있어서 전답, 노 비, 院屬 등과 함께 중요한 것이 국가 또는 지방관, 향인들에 의한 서책, 魚 69) 1550년대 백학서원, 1560년대 예림서원·서악서원·옥천서원, 1570년대 도산서원· 여강서원·정산서원·도봉서원·이산서원·선암서원·자계서원, 1580년대 오산서 원·충현서원·경현서원·팔봉서원·삼계서원·기천서원, 1590년대 이후 문암서 원·문헌서원·운곡서원·임천서원 등이다. 34 한국서원학보 제8호 鹽 등 서원 소용의 각종 현물기부였다. 서원에서 사용되는 잡물은 屬店, 屬 寺 또는 원속 등을 통하여 서원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방 관의 기부와 부조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70) 서원경제에 있어서 지방관의 기 부와 부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관으로 나간 퇴계 문인들은 서원 건립에 나섰음은 물론 서원 운영을 위한 지원에도 적극적으 로 임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2) 향인으로서 참여 퇴계문인들은 지방관으로 부임한 상황에서 서원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 기도 했지만 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서원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다음 의 <표 7>은 이를 정리한 것으로 모두 40명의 문인들이 25개소의 서원 건립 에 관여하였다. 70)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p.205. 서원 지역 시기 문인 鏡光書堂 안동 1570(선조3) 權好文, 辛乃沃(안동) 曲江書院 흥해 1607(선조40) 曺好益(영천) 金烏書院 선산 1570(선조3) 崔應龍(선산) 濫溪書院 함양 1552(명종7) 朴承任(영주) 德川書院 진주 1576(선조9) 李光友(합천) 道東書院 성주 1605(선조38) 鄭逑(성주) 筆巖書院 전라 장성 1590(선조23) 卞成溫(호남) 道岑書院 영천 1613(광해5) 金就礪(안산) 臨皐書院 영천 1553(명종8) 金應生, 盧遂, 鄭允良(영천) 氷溪書院 의성 1556(명종11) 申元錄(의성) 臨川書院 안동 1607(선조40) 金玏(영주) 淸溪書院 평안 강동 1577(선조10) 曺好益(영천) <표 7> 문인들의 거주지에 건립한 서원 현황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35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상황에서 퇴계문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을이 나 인근 고을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고 있었다. 상기 40명의 퇴계문인 중 조 호익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기 고을이나 인근 고을의 서원 건립에 참여하 고 있다.71) 퇴계도 직접적으로 건립에 관여한 것은 역동서원(예안), 이산서 원(영주), 영봉서원(성주) 등 지역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또 역동 과 이산서원 같이 퇴계가 건립에 관여한 서원은 해당 지역 내 문인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역동서원에는 금난수·금보·김부륜·김생명 등 예안지역 문인 들이 모두 가담하였고, 이산서원의 건립에는 박승임·장수희 등 영주지역 문인들이 주도하였다. 이렇게 지방 향인의 위치에서 서원 건립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주하는 지 71) 영천에 살고 있던 조호익은 흥해 곡강서원 건립에서 회재봉안문과 상향문을 지으며 관여했고, 평안도 강동의 청계서원은 그가 귀양 간 상황에서 세운 것이다. 서원 지역 시기 문인 易東書院 예안 1568(선조1) 琴蘭秀, 琴輔, 琴應商, 琴應夾, 金富倫, 金富儀, 金富弼, 金生溟, 朴士熹, 李德弘, 趙穆(예안), 李叔樑(영천) 硏經書院 달성 1563(명종18) 李叔樑(영천) 川谷書院 성주 1568(선조1) 鄭逑(성주) 五峯書院 강원 강릉 1556(명종11) 崔運遇(강릉) 五賢書院 충청 아산 1610(광해2) 洪可臣(호서) 玉洞書院 청송 1602(선조35) 李庭檜(청송), 鄭琢(안동, 예천) 龍山書堂 안동 1576(선조9) 具鳳齡, 權春蘭(안동) 陶山書院 예안 1574(선조7) 權好文, 柳雲龍(안동), 琴蘭秀, 琴輔, 李德弘(예안), 金隆(영주) 伊山書院 영주 1558(명종13) 金隆, 金玏, 朴承任, 張壽禧(영주), 李德弘(예안) 紫溪書院 청도 1576(선조9) 鄭逑(성주) 鼎山書院 예천 1577(선조10) 趙穆(예안), 金復一(안동), 朴承任(영주) 廬江書院 안동 1576(선조9) 權好文, 金克一, 金復一, 金誠一, 金彦璣, 南致利(안동) 迂溪精舍 영주 1570(선조3) 李德弘(예안) 36 한국서원학보 제8호 역의 강학․장수를 목적으로 건립하는 것, 퇴계를 제향하기 위해 설립하는 것 이 있다. 거주지의 문풍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서원을 건립 사례로는 구봉령 (용산서원), 권호문(경광서원), 최응룡(금오서원), 김응생․노수․정윤량(임고서 원), 신원록(빙계서원), 장수희(이산서원), 이숙량(연경서원), 정구(도동서원) 등이 해당한다. 문인의 입장에서 스승인 퇴계를 제향하는 서원을 건립하는 사례로는 도산서원과 여강서원, 옥동서원이 대표적이다. 도산서원 건립에는 권호문, 금난수, 금보, 김륭, 유운룡, 이덕홍이 참여하였으며, 여강서원 건립 에는 권호문, 김극일, 김복일, 김성일, 김언기, 남치리가 가담했다. 예안 도산서원은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가 생전에 寓居하며 강학하던 도산 서당 및 농운정사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퇴계가 돌아간 후 권호문, 금난수 등 퇴계문인들은 1574년(선조 7) 퇴계를 제사하는 尙德祠 건립을 논 의하고, 이듬해 여름 서원을 낙성했다. 이어 1576년(선조 9) 2월 퇴계의 위판 을 봉안했다. 이때 조목은 봉안문과 축문을 기초했으며,72) 안동부사 권문해 는 인적·물적 지원을 하였다. 안동 여강서원 건립은 당시 안동부사 권문해 의 적극적 지원 아래 김언기, 권호문, 김복일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1573년 (선조 6) 역동서원에서 퇴계문집을 교정한 후 여강서원의 건립을 논의했다. 이에 여강서원은 1575년(선조 8) 안동부의 동쪽 여산촌에 있는 백련사의 옛 터에 창건되었으며, 이듬해 봄 퇴계를 봉안했다. 당시 권호문은 ‘여강서원상 량문’을 지었으며, 퇴계를 입향하는 의례와 절차를 정하는 논의에도 참여했 고, 서원이 완성된 후에는 제생을 이끌고 강학했다. 김언기는 서원이 낙성된 후 초대 산장을 맡았으며, 당시 안동부사인 권문해에게 조정에 건의하여 서 적과 토지, 노비의 지급과 함께 사액을 받을 수 있도록 상주해달라고 요청하 였다. 김복일 역시 안동부사에게 올린 글에서 여강서원이 사액을 받을 수 있 도록 감사에게 요청하였다. 남치리는 원규를 지었다.73) 한편 이산서원은 퇴 72) 權好文, 松巖集, 年譜; 琴蘭秀, 惺齋集, 年譜; 琴輔, 梅軒集, 行狀; 金隆, 勿巖 集, 年譜; 柳雲龍, 謙庵集, 年譜; 趙穆, 月川集, 年譜. 73) 永嘉誌, 廬江書院條; 權好文, 松巖集, 연보; 金復一, 南嶽先生文集, 「廬江書院 呈文」; 金彦璣, 惟一齋先生實記 卷1, 「上府佰權草澗文海書」; 南致利, 賁趾集, 年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37 계의 깊은 관심 속에 제향자 없이 건립되었던 서원인데, 퇴계가 사망한 후 김륭, 김륵, 박승임, 이덕홍 등의 적극적 주도 아래 퇴계를 제향 했다. 이외에도 대구 연경서원은 1563년(명종 18) 지역 사림들의 공의로 건립이 논의되어 이듬해 3월에 상량하였고, 1565년(명종 20) 10월에 완공되었다. 이 숙량은 고을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서원건립을 주관하였으며, 서원이 완공 된 뒤에는 서원 건립의 내력을 써서 퇴계에게 기문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숙 량은 「연경서원기」에서 당시 서원 건립에서 고을 수령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또 많은 서원이 尊賢을 내세워 건립되고 있지만 향인들이 스스로 강학의 장소를 구하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한 것도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74) 여기 에서 서원 건립에 있어 지방관의 원조와 제향인물의 선택 못지않게 향중 사 림의 건립의지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퇴계문인들은 지방 사림을 위한 강학의 장소이자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서원을 인식했다. 즉 성리학적 질서를 향 촌에 구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를 위한 공간으로서 서원을 선택한 퇴계 의 생각에 공감하고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향인으로서 이들은 스 승인 퇴계의 서원 건립을 지원하거나, 또는 그 자신들의 강학장수를 위한 공 간을 준비하고자 했다. 또 퇴계가 사망한 후에는 스승을 제향하는 서원 건립 에 앞장섰다. 한편 필암서원, 청계서원, 오봉서원, 오현서원의 4곳을 제외한 나머지 서 원은 모두 경상도, 특히 경상좌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퇴계문인들이 전국 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자기 지역의 서원건립에 적극 동참한 문인들은 주 로 경상좌도 지역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상도 특히 경상좌도를 제외한 타 지역에서 퇴계문인임을 자처한 인물들은 대부분 퇴계가 관직에 나아가 있을 무렵 교유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 경기지역 문인들 譜. 74) 李叔樑, 梅巖集, 「硏經書院記」, ‘是豈皆出於守令之建立 豈必皆主於尙賢而設置 鄕 人之能自奮發 而爲立講學之所者 亦或有之 其爲講劘道義 激勵風俗 豈曰少補之哉’. 38 한국서원학보 제8호 의 경우 퇴계가 사망한 후 전개된 동서분당과 남북대립 등 복잡한 당쟁 속에 서 동문으로의 결속력과 동질성을 점차 상실해 가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다.75) 이상에서 살펴본 건립주체에 대한 분석 외에도 퇴계문인들이 관여한 서원 에는 어떤 인물이 제향 되었는지, 퇴계가 생각한 선정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 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문인들이 직간접으로 관여한 서원은 43개소인 데, 그 중 제향인이 없는 서원은 9개소이다. 76) 제향인이 있는 34개 서원에 제향된 인물은 모두 30명이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 8>과 같다. 75) 황위주, 「서울 경기지역의 퇴계문인과 그 성격」, 퇴계학과 한국문화 33,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3. 76) 伊山書院(영주), 硏經書院(대구), 白鶴書院(영천), 仙巖書院(청도), 鏡光書院(안동), 靑城書院(안동), 迂溪書院(영주), 周溪書院(안동), 淸溪書院(강동). 제향인물 개소 서원 李滉 7 陶山書院(예안), 廬江書院(안동), 鼎山書院(예천), 景賢書院(나주), 玉 洞書院(청송), 文巖書院(춘천), 五賢書院(아산) 李彦迪 5 氷溪書院(의성), 玉山書院(경주), 景賢書院(나주), 曲江書院(흥해), 五 賢書院(아산) 金宏弼 5 迎鳳書院(성주), 玉川書院(순천), 景賢書院(나주), 道東書院(현풍), 五 賢書院(아산) 鄭汝昌 3 濫溪書院(함양), 景賢書院(나주), 五賢書院(아산) 趙光祖 3 道峯書院(양주), 景賢書院(나주), 五賢書院(아산) 朱子 3 迎鳳書院(성주), 雲谷書院(음성), 忠賢書院(공주) 鄭夢周 2 臨皐書院(영천), 崧陽書院(개성) 吉再 2 金烏書院(선산), 吳山書院(인동) 金安國 2 氷溪書院(의성), 沂川書院(여주) 金宗直 2 金烏書院(선산), 禮林書院(밀양) 孔子 1 五峰書院(강릉) 程子 1 迎鳳書院(성주) 薛聰 1 西岳書院(경주) 金庾信 1 西岳書院(경주) <표 8> 퇴계 문인들이 관여한 서원의 제향인물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39 제향인 없이 건립된 9개의 서원 중 이산서원(영주)의 건립에는 ‘제향시설 이 없어도 서원의 규모를 갖추었으므로 서원으로 이름해야 한다’는 퇴계의 의지가 직접 작용했다. 또 연경서원(달성) 역시 문인 이숙량이 건립에 주도 적으로 참여하며 퇴계의 자문을 구하였음을 고려해 볼 때, 서원에서의 존현 에 대한 퇴계 및 그 문인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제향시설 없이 건립될 수 있 었다고 생각된다. 다음 경광서원(안동), 청성서원(안동), 우계서원(영주), 주 계서원(안동)은 모두 퇴계문인에 의해 제향시설 없이 서당 또는 정사의 형태 로 건립되었다가, 건립을 주도하였던 인물을 사후에 제향하여 서원으로 승 원된 경우이다.77) 이처럼 존현보다는 강학․장수처로서의 교육을 강조한 퇴 77) 鏡光書院(안동): 권호문, 신내옥 등에 의해 경광서당으로 건립되었다가 사후 권호문 이 제향됨; 靑城書院(안동): 권호문에 의해 청성정사로 건립되었다가 사후 권호문이 제향됨; 迂溪書院(영주): 우계정사로 건립되었다가 사후 이덕홍이 제향됨; 周溪書院 (안동): 구봉령에 의해 용산서당으로 건립되었다가, 건립자인 구봉령이 사후 제향 됨. 제향인물 개소 서원 崔致遠 1 西岳書院(경주) 禹倬 1 易東書院(예안) 徐敬德 1 崧陽書院(개성) 曺植 1 德川書院(진주) 金誠一 1 臨川書院(안동) 金馹孫 1 紫溪書院(청도) 李存吾 1 忠賢書院(공주) 成悌元 1 忠賢書院(공주) 李穆 1 忠賢書院(공주) 李耔 1 八峰書院(충주) 李延慶 1 八峰書院(충주) 權橃 1 三溪書院(안동) 金麟厚 1 筆岩書院(장성) 李穀 1 文獻書院(한산) 李穡 1 文獻書院(한산) 曺好益 1 道岑書院(영천) 40 한국서원학보 제8호 계의 서원관은 이산원규에도 들어나며, 그 문인들에게 이어져 제향시설이 없어도 서원이라 명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78) 한편 위 <표 8>에서 정리된 제향인물을 살펴보면, 3개소 이상의 서원에 제 향된 인물은 이황79)·이언적·김굉필·정여창·조광조 등 5명이다. 이들은 사림들이 東方五賢으로 추숭하던 인물들로서 1570년(선조 3) 이후 문묘종사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들의 문묘종사운동은 사림의 도학적 정통성을 인정받 아 그 집권의 명분을 확립하려는 사림계의 정치적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데80), 퇴계문인들도 같은 시기 이들 5현을 제향하는 서원을 가장 많이 건립 했음이 확인된다. 특히 경현서원과 오현서원은 이들 5현을 제향하였다. 다른 제향인에는 중국계 인물로 공자, 주자, 정자가 있다. 중국 인물이 제 향된 서원은 강릉의 오봉서원과 성주의 영봉서원, 그리고 음성의 운곡서원 이다. 서원 건립 초기부터 지역과 관련이 있는 儒賢을 종사하려는 경향이 강 하였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오봉서원의 경우 강릉과 관련한 유현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자를 제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봉서원의 경우에는 제 향인물을 둘러싼 장기간의 분쟁을 겪었던 곳으로서 천곡서원으로 改號한 후 道學을 기준으로 해서 주자와 정자, 그리고 김굉필을 제향했다. 다음으로 김종직, 김일손, 서경덕, 조식, 김인후, 권벌, 김안국은 모두 조선 전기의 도학자로서 명망이 높았으며, 사림파와 긴밀한 관련을 가졌던 인물 들이다. 김종직과 김일손은 길재로부터 연원하는 사림파의 嫡傳으로 이해되 었으며, 서경덕과 조식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각각 화담학 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안국은 김굉필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至治主義 유학을 선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제향인 중 前朝 인물로는 김유신, 최치원, 설총, 정몽주, 길재, 이곡, 이색, 78) 白鶴書院(영천)과 仙巖書院(청도)은 제향인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이며, 淸溪書院 (강동)은 조호익이 퇴계를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을 도모했으나 완성에까지 이르지 는 못한 경우이다. 79) 이황은 사후에 제향인이 없던 이산서원과 연경서원에 제향되었다. 80)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 pp.180~181.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41 우탁 등이 있다. 정몽주, 길재, 이색, 이곡, 우탁은 고려조 인물로 성리학의 수용과 연구에 있어 후학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길재는 사림파의 적 통을 얘기할 때 첫머리에 드는 인물이고, 우탁의 경우에는 퇴계가 그를 제향 하는 역동서원의 건립을 발의하기도 했다. 예외적으로 김유신, 최치원, 설총 이 제향된 곳은 서악정사인데, 퇴계문인인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나가 건립 한 것이다. 서악정사의 건립 과정에서 이정은 스승인 퇴계와 제향인물을 두 고 의견차이가 있었다. 이정으로서는 경주지역의 인물인 신라 무열왕, 설총, 김유신, 최치원 등을 제향하려 했으나, 퇴계는 이들을 제향 하는데 의견을 같이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서원보급운동의 초기 단계에 있어 퇴계와 그 문인들 간에 제향인물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음 을 보여준다.81) 이상에서 퇴계문인들의 서원에서의 존현에 대한 생각과 실제 그들이 건립 한 서원의 제향인물을 살펴보았다. 우선 이산서원, 연경서원 등 제향시설이 없이 건립된 서원의 존재에서 존현보다는 강학․장수를 우선시한 퇴계 서원 관의 일면과 더불어 그 생각이 문인들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서원 건립에 祀賢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 서 퇴계문인들은 道學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퇴계의 생각에 부합하는 인 물을 선정하여 서원을 세워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Ⅳ. 맺음말 퇴계 이황은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의욕적인 신진사림들에게 참다운 성 리학 공부를 시켜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다가올 사 림의 시대를 준비하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대안으로서 서원에 주목했으 며 그의 문인들과 더불어 서원 보급에 노력하였다. 실제로 퇴계는 백운동서 81) 조준호, 「퇴계 이황의 서원건립활동과 서원론의 실현」, 역사문화논총 2, 2006, pp.133~135. 42 한국서원학보 제8호 원의 사액을 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산서원, 영봉서원, 역동서원의 건립에 직접 관여하였으며, 문인들이 관여한 임고서원(영천), 오봉서원(강릉), 서악 정사(경주), 연경서원(달성), 옥천서원(순천), 예림서원(밀양), 남계서원(함양) 등의 건립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다. 퇴계 문인들은 출세주의․공리주의에 매몰된 관학에 대한 비판 위에서 참 다운 성리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서 서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스승인 퇴계 의 서원 보급에 동참하였다. 또한 그들은 향촌 사림의 입장에서 성리학적 향 촌질서의 확립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 오고 있었으며, 이에 새로운 향촌 사림 의 구심체로서 서원을 인식하고 건립에 나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 근거 지뿐만 아니라 지방관으로 부임해서도 서원이 건립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 였다. 특히 지방관으로 나간 문인들의 서원건립이 두드러진다. 모두 17명의 문인들이 지방관으로서 22개소의 서원건립에 관여하였다. 이들은 부임지에서 서원을 설립하는 논의를 주도하거나, 향인들의 서원 건립을 독려․권면하고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또 건립 후에는 서원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다하고, 강학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서원의 운영에도 적극적이었다. 참여도의 차이는 있지만 초기 서원건립에 있어 지방관의 역 할이 상당하였음을 고려하면 각 지역으로 부임해 나간 이들의 서원 건립 노 력은 조선 서원의 확대․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지방 향인의 위치에서도 퇴계 문인들의 서원 건립 참여가 다양 하게 확인된다. 이들은 서원 건립의 뜻을 세우고 지방관의 지원을 이끌어 내 었으며, 그 자신들도 건립비용을 부담하고 건립 상황을 감독하였다. 또 건립 후에는 서원에서의 강학활동에도 충실히 참여하였다. 확인한 바에 의하면 모두 56명의 문인들이 43개소의 서원 건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특 히 이들이 주로 활동하였던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보면 전국적으로 건립된 서원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에 이들이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지 역적으로 경상도 지역에는 광해군대까지 건립된 서원의 55.2%에 퇴계문인들 이 관여하였으며, 임란이전까지 70%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경상도 지역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43 의 서원 건립에 있어 퇴계문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경상도에 비해 퇴계문인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대 부분 임란 이전에 관계한 경우로, 조선 서원이 점차 발전해 가던 시기에 그 정착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퇴계문인들의 서원 건립은 퇴계의 서원관을 계승․발전시키는 방향 으로 이루어졌다. 퇴계는 서원을 참다운 성리학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서 사 림에 의한 강학, 장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院儒 스스 로의 분발과 정진을 강조하였고 이록과 부귀를 꾀하는 공부, 특히 서원에서 의 과거 시험공부를 경계했다. 퇴계문인들 역시 과거급제를 위한 공부 일변 도로 치닫고 있던 당시의 현실출세주의에 비판적 견해를 가졌으며, 이에 퇴 계가 생각한 서원의 존재목적에 공감해 서원 건립에 동참하였다. 이들이 건 립한 서원들에서는 퇴계가 지은 「이산원규」를 모본으로 하였으며, 성리서의 강론에 주력하였다. 또한 서원의 제향시설에 대해 제향인물과 사묘를 절대 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퇴계의 생각이 그 문인들에게도 계승되 었다. 그 결과 연경서원과 같이 제향시설이 없이 건립되는 서원도 확인된다. 44 한국서원학보 제8호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列邑院宇事蹟, 俎豆錄, 書院可攷, 東 國院宇錄, 增補文獻備考, 永嘉誌, 陶山及門諸賢錄, 臨皐書院誌, 五峯書院 實記, 藍溪書院誌, 德川書院誌, 文獻書院誌, 雲谷書院誌, 退溪先生文集(李 滉), 竹老集(申活), 梅軒集(琴輔), 香湖集(崔雲遇, 梅巖集(李叔梁), 臨淵齋 集(裵三益), 介庵集(姜翼), 晦堂集(申元錄), 草澗集(權文海); 白沙集(이항복) , 陰崖集(李耔), 芝山集(曺好益), 栢巖集(金玏), 東岡集(金宇顒), 高峯集(奇 大升), 謙菴集(柳雲龍), 鶴峯集(金誠一), 靜庵集(趙光祖), 牛溪集(成渾), 栗 谷全書(李珥), 愚伏集(鄭經世), 竹牖集(吳澐), 冲齋集(權橃), 嘯皐集(朴承任) , 賁趾集(南致利), 松巖集(權好文), 국역 聯芳世稿, 寒岡集(鄭逑), 惟一齋 先生實記(金彦璣), 開巖集(金宇宏)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시대영남서원자료, 한국사연구지원보고자료집 6, 1999. 경기대학교 소성학술연구원, 한국의 서원과 학맥 연구, 2002.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편, 『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보고사, 2004.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이수환, 조선후기 서원연구, 일조각, 2001.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 정순목, 한국서원교육제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9. 정순목, 퇴계의 교육철학, 지식산업사, 1986. 김종석, 「도산급문제현록과 퇴계 학통제자의 범위」, 퇴계문하의 인물과 사상, 예 문서원, 2000. 박양자, 「퇴계의 서원교육의 특성」, 퇴계학과 남명학, 지식산업사, 2001. 설석규, 「16세기 전반 정국과 儒疏의 성격」, 대구사학 44, 1992. 송긍섭, 「퇴계의 서원교육론 고찰」, 한국의 철학, 경북대 퇴계연구소, 1974. 송용재, 「대전․충남의 폐원우」, 훼철서원조사보고,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1993. 송준식, 「남명학파의 서원건립 운동」, 남명학연구 15,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2003. 원영환, 「강원지방의 서원연구-문암서원을 중심으로」, 강원문화사연구 3, 1998. 윤희면, 「조선서대 서원정책과 서원의 설립 실태」, 역사학보, 2004. 이태진, 「사림과 서원」,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84.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45 전용우, 「조선조 서원사우에 대한 일고찰」, 충남대 석사학위논문, 1985. 전용우, 「호서사림의 형성에 대한 연구」,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1993. 정만조, 「퇴계학파의 서원(교육)론」, 퇴계학과 남명학, 지식산업사, 2001. 정순목, 「한강 정구의 교학 사상」, 退溪門下의 인물과 사상, 경북대학교퇴계연구 소, 예문서원, 1999. 조준호, 「퇴계 이황의 서원건립활동과 서원론의 실현」, 역사문화논총 2, 2006. 황위주, 「서울 경기지역의 퇴계문인과 그 성격」, 퇴계학과 한국문화 제33호, 경북 대학교 퇴계연구소, 2003. 46 한국서원학보 제8호 Seowon Establishment Activities of the Toegye's Students 82)Kwon, Shi-Yong* This study is focused on Seowon(書院) establishment activities of the Toegye's students(退溪門人) involved in distributing Seowon based on the Toegye's theory of Seowon. Toegye intended to prepare for the coming era of Sarim(士林) by teaching Sung Confucianism to new powers in Sarim and establishing Sung Confucian(性理學) order in the local areas. He considered Seowon system as a distinctive means for his intention and strove to distribute Seowon along with his fellow scholars. This study indicates that 56 students of Toegye's participated in Seowon establishment in 43 places. This accounted for approximately half of the total number founded nationwide before the Imjin War(壬辰倭亂). In addition, it was proved that the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Seowon establishment in Kyeongsang area(慶尙道). Toegye's stdents made efforts to found Seowon not just at the very places where they lived but where they served as local officials and the latter, especially, came to remarkable results showing that 17 students as local officials founded Seowon in 22 places. They initiated the discussion about founding Seowon, encouraged local people to join the establishment activity , and provided them with administrative, financial support. They kept on * Institute for Research in Collaborationist Activities, senior researcher/ shiyongs@naver.com 16-17세기 초반 퇴계 문인의 서원 건립 활동 47 supporting after completing Seowon through taking part in academic trainings(講學) and engaging in running Seowon. These facts tell us that they did play an essential role in introducing and spreading Seowon in the early Chosun Dynasty. In conclusion, Seowon establishment activities of the Toegye's students made its way to succeeding and developing the Toegye's theory of Seowon which was aimed at the academic training and moral cultivation of Sarim. keyword : Lee Hwang(李滉), Seowon Establishment(書院普及), Toegye's stdents(退溪門人), Sarim(士林), Neo-Confucianism(性理學) 이 논문은 2019년 5월 31일 투고 완료되어 2018년 6월 23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8년 6월 26일까지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 회의에서 게재·결정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