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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十六 / 墓誌銘 / 彥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夫人姓金氏。彥陽郡人。高祖諱就礪。大師門下侍郞。諡威烈。曾祖諱佺。大傅門下侍郞。諡翊戴。祖諱賆。都僉議參理。諡文愼。父諱倫。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彥陽府院君。諡貞烈。母卞韓國大夫人崔氏。大儒中書令文憲公諱冲十三世孫副知密直司事諱瑞之女也。年十三。歸閔氏。盡婦職。性嚴。敎子弟必以禮。宗族至今稱之。生一女。適判軍器寺事金昴。新羅王諱傅十八世孫也。金氏子男。曰齊閔。曰齊顏。曰九德。女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典客副令許誼,郞將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贍。次未適。齊閔改九容。遣其子興威衛錄事明善。以狀徵銘。且曰。吾外祖及菴公性眞率。不立崖岸。日以詩酒自適。不問家人生產。而惟夫人之是聽。夫人議酒食。以娛外祖之心。亦惟日不足也。敎女孫必曰。事夫之禮。自始至老。唯守一敬而已。至於衣食。必精必潔。惟其時可矣。故當時語曰。閔公之放曠。夫人理於內故也。彥陽伯敬直。雖長於夫人。亦憚夫人。不敢少慢。簽書密直希祖與諸弟。皆母事之。歲己亥。及菴公旣歿。喪甫畢。避辛丑紅賊于嶺南。還居驪興。嘗自嘆曰。吾孫齊顏不得其死。吾何顏復入京邑乎。其剛烈有父風云。歲甲寅秋九月十九日。以病卒。年七十三歲也。以其年十二月十五日。葬于郡南鉢山之西。及菴之葬。子嘗以詩相其挽。夫人之墓銘。其可辭。曰。然。銘曰。驪江之西。鉢山之陽。及菴之室。金氏攸藏。威烈之風。振于貞烈。閨門肅然。有文有節。惟爾子孫。惟心之存。無墜婦則。以慰九原。
목은문고 제16권 / 비명(碑銘) /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의 묘지명 병서(幷序)
부인의 성은 김씨(金氏)이니, 언양군(彦陽郡) 사람이다. 고조(高祖) 휘(諱) 취려(就礪)는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가 위열(威烈)이요, 증조 휘 전(佺)은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가 익대(翊戴)요, 조부 휘 변(賆)은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 시호가 문신(文愼)이다. 부친 휘 윤(倫)은 수성수의협찬보리공신(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이요, 모친인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씨(崔氏)는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휘 충(沖)의 13세손이 되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휘 서(瑞)의 딸이다.
부인은 나이 13세에 민씨(閔氏 민사평(閔思平))에게 시집을 와서 부인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엄한 성품으로 자제를 반드시 예법에 맞게 가르쳤으므로, 종족(宗族)들이 지금까지도 일컫고 있는 터이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김묘(金昴)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김묘는 신라 왕 휘(諱) 부(傅)의 18세손이다.
김묘는 아들 제민(齊閔), 제안(齊顔), 구덕(九德)을 두었다. 딸은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前) 개성 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 종부 영(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郞將) 허호(許顥), 전 전객 부령(典客副令) 허의(許誼), 낭장 겸 박사(郞將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섬(金贍)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은 이름을 구용(九容)으로 고쳤다. 그가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인 아들 명선(明善)에게 행장(行狀)을 들려 보내 명(銘)을 지어 달라고 나에게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인 급암공(及菴公 민사평)은 성품이 진솔(眞率)하여 사람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시와 술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며 모두 부인(夫人)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부인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날마다 걱정하였다. 부인이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면 으레 ‘남편을 받드는 예법은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한결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옷과 음식을 마련할 때에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면서 때에 맞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민공(閔公)이 자유분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가정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부인보다 손위의 오빠이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감히 조금이라도 거만하게 대하지 못하였으며, 첨서 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도 모두 모친을 대하듯 부인을 섬겼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급암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신축년에 삼년상을 금방 마쳤을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으므로 영남(嶺南)으로 피난하였다가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부인이 자탄(自嘆)하기를 ‘우리 손자 제안(齊顔)이 제 목숨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경읍(京邑)에 다시 들어가겠는가.’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한 기질이 부친의 풍도를 닮은 데가 있었다고 한다. 갑인년(1374, 우왕 즉위년) 9월 19일에 병으로 별세하였으니, 향년 73세였다. 그해 12월 15일에 군(郡)의 남쪽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에 장사 지냈다. 급암을 장사 지낼 적에 선생이 시를 지어서 만사(挽詞)를 거든 인연도 있으니, 부인의 묘지명을 어찌 또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그 말도 맞다고 대답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의 양지 / 鉢山之陽
급암공의 부인인 / 及菴之室
김씨가 잠들었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그 기상을 / 威烈之風
정렬공이 떨쳤나니 / 振于貞烈
규문 역시 숙연하여 / 閨門肅然
문채와 절도가 있었어라 / 有文有節
아 그대 자손들이여 / 惟爾子孫
이 마음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부도(婦道)에 어긋남 없게 하여 / 無墜婦則
구원에 계신 분의 영혼을 위로하라 / 以慰九原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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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 제29권 / 시(詩)
김 대간(金大諫)이 나를 찾아와서, 어제는 상관(上官)이 술을 금했기 때문에 황봉주(黃封酒)를 마시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떠나고 난 뒤에 육우(六友)에 대한 시 세 수를 지어 읊었다.
시와 술로 멋대로 지내며 만년이 되었다만 / 詩酒淸狂到晚年
나는야 금곡엔 침을 뱉고 평천을 벗하노라 / 僕奴金谷與平泉
급암이 남긴 운치에 그 누가 비슷할까마는 / 及菴餘韻誰能似
육우의 풍류가 그래도 전인보다 낫겠는걸 / 六友風流却勝前
조정에서 바라는 건 바로 풍년이니 / 朝廷所欲是豐年
상운과 예천인들 어디에다 쓰겠는가 / 何用祥雲與醴泉
벼 익고 물고기 살지면 주금도 풀리리니 / 稻熟魚肥開酒禁
그때 술상 앞에 풍악 울려도 좋으리라 / 不妨琴瑟列樽前
최소년의 나의 벗은 오직 간의뿐 / 諫議唯吾最少年
날마다 황봉주를 샘물처럼 마시는데 / 黃封日日酒如泉
육우의 풍류가 도리어 우습게도 보이나니 / 風流六友還堪笑
노대는 술 없이도 작약 앞에서 시 읊는걸 / 老大醒吟芍藥前
[주-D001] 육우(六友) : 김 대간 즉 김경지 구용(金敬之九容)의 당호(堂號)이다. 육우는 소강절(邵康節)의 풍(風)ㆍ화(花)ㆍ설(雪)ㆍ월(月)에 강(江)과 산(山)을 합친 것인데, 《목은문고》 제3권 〈육우당기(六友堂記)〉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주-D002] 금곡(金谷) : 진(晉)나라 위위(衛尉) 석숭(石崇)의 그지없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별장의 이름인데, 밥을 지을 때에도 장작 대신에 납촉(蠟燭)을 쓸 정도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汰侈》[주-D003] 평천(平泉) : 당 무종(唐武宗) 때의 명재상인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이름인데, 기화요초(琪花瑤草)와 기암괴석이 즐비하여 마치 선경(仙境)에 온 것 같은 흥취를 자아내었다고 한다. 《刷談錄 李相國宅》[주-D004] 급암(及菴)이 …… 낫겠는걸 : 시주(詩酒)를 즐기기로 유명했던 급암 민사평(閔思平)에 비교해 보아도 김구용(金九容)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목은문고》 제16권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의 묘지명〉에 “급암은 날마다 시와 술로 유유자적하였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며 모두 부인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부인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날마다 걱정하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김구용은 바로 급암의 외손자이다.[주-D005] 상운(祥雲)과 예천(醴泉) : 오색구름과 감미로운 샘물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상서롭고 길한 현상으로 여겨져 왔다.[주-D006] 벼 …… 좋으리라 : 고려 시대에 큰 가뭄이 들면 국가에서 금주령(禁酒令)을 내리곤 하였는데, 비가 흠뻑 내려서 풍년이 들면 그때 마음껏 주연을 즐겨도 괜찮을 것이라는 말이다.[주-D007] 최소년(最少年)의 …… 간의(諫議)뿐 : 목은이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벗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바로 김구용이라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나면 형으로 모신다.[十年以長 則兄事之]”는 말이 나오는데, 김구용은 목은보다 꼭 열 살 아래의 후배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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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齋亂稿卷第七 / 碑銘 / 有元高麗國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彥陽府院君。贈諡貞烈公金公墓誌銘。幷序。
公姓金氏。諱倫。字無己。號竹軒。又號戇村。雞林彥陽人也。曾大父。皇太師門下侍郞平章事贈諡威烈公諱就礪。大父。皇太傅門下侍郞平章事贈諡翊戴公諱佺。考。皇都僉議參理集賢殿大學士監脩國史贈諡文愼公諱賆。妣。皇陽川郡大夫人許氏。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贈諡文敬公諱珙之一女。以至元十四年丁丑夏六月二十有九日丁亥。生公。十七年庚寅。哈丹寇我疆。我遷都江華。文敬爲冢宰。殿國人之後。命公挈家以先。公年十四。指畫如成人。一族賴之。蔭補鹵簿判官。轉典廏丞。由別將陞郞將。爲牽龍行首左都知右中禁二指諭。拜神虎衛護軍兼監察侍丞。累遷獻部議郞,典符令,中門使兼司憲執義,提點,典符,密直,右副承旨。以檢校僉議評理階匡靖大夫。出刺忠,水,益三州。入爲讞選二部典書,密直副使。以慶尙,全羅都巡問使鎭合浦。加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三司左右使。封彥陽君。階重大匡。號推誠贊理功臣。又加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號推誠守議協贊功臣。遂拜左政丞。未幾乞退。封府院君。階壁上三韓。號加輔理二字。此歷官出處太略也。其爲護軍也。洪忠正子藩。擧以爲辨正都監副使。有巨室與鄕民爭一女奴。子孫百口。公閱其籍曰此某代某相。某歲月與諸子立券者。距今玆若干年矣。齒女奴子若孫以較。先後相懸。而女奴之名。一字微偏。豈改魚爲魯者乎。某相諸子俱有後。當家置籍一本。盍取而考其異同。如其言。巨室遂詘。其爲侍丞也。某甲乙二人爭家口。乙曰。先世嘗訟于臺。知臺姓許忘名。別白而分與之甲所得物。故無由孼。乙家幸得蕃殖因遺。火亡其籍。甲幸災。誣乙爲兼幷爾。公默計歲月曰。所謂許知臺。必吾家文敬公也。命吏檢當時印簿。所分名數俱存。以詰甲。甲亦詘。其精詳多類此。內臣挾憾。手敺五品郞殿門。公劾論甚峻。兼劾證左。言不以實爲內臣地者。內臣者方有寵。證左亦達官大族。排根公左官爲州。時大修宮室及佛廟。驅民就役使者旁午。皆憚公。非不得已。莫敢入境。州人賴以息肩。其鎭合浦也。軍將不敢以緩急私撓於民。州郡不得以喜怒妄加於吏。天子之使來觀之。卒乘之肅。號令之嚴。無不竦然以敬。及與之游畋。左右馳射。舍拔屢中。則又歡然以樂。所至稱道不容口。公嘗從忠烈王入朝。忠宣王日候于邸。從臣慕顧退縮。公身兼數任。獨侍左右。忠烈嘉其志。忠宣亦待以禮。毅陵見留京師五年。瀋王得幸天子。群不逞之徒誘脅國人。上言願得瀋王爲主。公與弟禑。獨不署名狀中。或私於公曰。違衆自異。若後悔何。公罵曰。臣無二心。職耳。何後悔之有。曹頔搆亂。自速兵死。永陵命公訊其黨于巡軍萬戶府。一府嫉其從逆勇。欲栲掠痛理。公曰。此輩詿誤於曹頔指嗾。何足責哉。若使傷肌膚毀筋骨。必謂我枉法強服以欺朝廷。乃弛其刑。囚感悅。首罪無隱。永陵被徵。道召公與偕。公年過六旬。聞命馳赴。數日及之鴨綠江。至則丞相伯顏。奏令五府官雜問。而力右頔黨。頔黨多利口。公折以片言。辭理簡直。五府官改容。目之爲白鬚宰相。永陵得釋東歸。襲爵四年。讒構蝟毛。天子賜以襲衣尊酒而籠普寔來。繼遣朶赤頒德音。王出迎。朶赤露刃扶王。載一騎馳去。公時家居。聞變遽起。痛不及奔問。詣籠普。又知其不可以義感。退與宰相言所以乞哀朝廷者。咸曰。陪臣犯天威。恐有大譴。公慷慨責之曰。君臣。父子也。子而救父。孰以爲罪。畏罪不救。可謂子乎。於是始議上書。卒不果。公終身憤憤。形於言色。公主與嗣王。訪公請諡事。對曰。先王不返。徒以憸壬。斂怨累德。今其禍首猶在。必先擧正厥罪。以明先王非辜。然後可請。因疏其人罪惡上之。兩宮感悟。轉呈朝廷。授公改正贈諡二請表入奏。謝曰。臣桑楡之年七十又二。恐顚擠道路。以辱明命。未死敢不勉。退而理裝行有日矣。遽得風疾。十日不飮水漿。令左右扶起。具衣冠。趺坐而逝。實至正八年戊子二月二日也。訃聞。輟朝三日。官庀葬事。贈諡貞烈公。是月二十四日。窆于大德山感應寺之巽岡。祔文愼公兆域。遵理命也。公喜觀書。多識典故。有問。響應無疑。仁於宗姻。信於故舊。見其來。必置酒。竟日極歡。聞其病。每市藥。造門相視。悃愊如漢吏。而疾惡嘉善之公。無擇於戚疏。曠達若晉士。而愛君憂民之切。不渝於夷險。故賢者慕其行。不肖者畏其義。街童巷婦。聞稱竹軒。亦能知其爲公也。夫人副知密直司事崔諱瑞之女。先一年沒。贈卞韓國大夫人。
生七男二女。
曰可器。版圖摠郞金海府使。先沒。
曰敬直。重大匡陽城君。
曰宗烜。出家爲華嚴師。
曰達岑。亦出家爲禪師。
曰淑明。開城判官。
曰希祖。典理判書藝文提學。
曰承矩。通禮門副使。
女一適驪興君閔思平。
一適宗簿令金輝南。亦先沒。輝南化平人。擧公非一金也。
庶出男曰穢迹。二女未適人。某辱知於公。見謂詩友。而希祖又委禽爲子壻。於其謁銘。義不可負。謹取李執義達衷善狀。檃括而爲序。且系以辭。嗚呼。風敎之移世也。剛可使繞夫指兮。方可使內夫枘也。鼎柱車不尙烹兮。冠苴履不愧弊也。允也貞烈兮。溫而厲儼而和也。松柏乎歲寒兮。砥柱乎頹波也。榮慕而瘁擯兮。我獨敦乎信也。害違而利從兮。我獨全乎忠也。化斯民之庶幾兮。有諸己之不啻也。胡登庸而惠疇兮。旋脫去若棄屣也。雖謝事而杜門兮。寧一飯而妄吾君也。惓惓乎刷恥于國兮。汲汲乎除民之賊也。嗚呼如公兮。當求諸古人之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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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부(化平府) : 전라도 광산현(光山縣)의 고려 때 이름이다. 원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광주(光州)로 고쳤다. 1258년(고종 45)에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라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의 고을이 되었고, 뒤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가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화평부로 강등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무진주로 다시 회복되었고, 1373년에 다시 광주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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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난고 제7권 / 비명(碑銘)
유원 고려국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恊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 증시(贈諡) 정렬공(貞烈公) 김공(金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
공(公)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휘는 윤(倫)이며, 자(字)는 무기(無己)이고 호(號)는 죽헌(竹軒)이며 또 다른 호는 당촌(戇村)으로, 계림(鷄林) 언양(彦陽) 사람이다. 증대부(曾大父)는 황태사 문하시랑평장사(皇太師門下侍郞平章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 휘 취려(就礪)요, 대부(大父)는 황태부 문하시랑평장사(皇太傅門下侍郞平章事) 증시 익대공(翊戴公) 휘 전(佺)이요, 고(考)는 황도첨의참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皇都僉議參理集賢殿太學士監脩國史) 증시 문신공(文愼公) 휘 변(賆)이다. 비(妣)는 황 양천군대부인(皇陽川郡大夫人) 허씨(許氏)이니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 증시 문경공(文敬公) 휘 공지(珙之)의 맏딸이다. 지원(至元) 14년(1277) 6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27년(1290)에 합단(哈丹)이 우리나라를 침구(侵寇)하므로 나라의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에 문경공이 총재(冢宰)가 되어 국인(國人)들의 뒤를 맡게 되었으므로 공에게 명하여 가족을 이끌고 먼저 가게 하니, 공의 나이 14세였는데도 지도하며 계획하는 것이 어른과 같아서 온 가족이 그의 힘을 의뢰(依賴)하였다. 음직(蔭職)으로 노부판관(鹵簿判官)에 보임되었다가 전구 승(典廏丞)으로 전직되었고, 별장(別將)을 거쳐 낭장(郞將)에 올랐으며, 견룡행수 좌도지우중금이지유(牽龍行首左都知右中禁二指諭)가 되었으며, 신호위호군 겸감찰시승(神虎衛護軍兼監察侍丞)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헌부의랑 전부령 중문사 겸사헌집의 제점전부 밀직우부승지(讞部議郞典符令中門使兼司憲執義提點典符密直右副承旨)가 되었다.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에 품계는 광정대부(匡靖大夫)로서 외직(外職)에 나아가 충주(忠州)ㆍ수주(水州)ㆍ익주(益州)의 세 고을을 맡았다가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헌선이부전서 밀직부사(讞選二部典書密直副使)가 되었으며, 경상 전라 도순문사(慶尙全羅都巡問使)로서 합포(合浦)를 진무(鎭撫)하였고, 첨의평리 상의회의 도감사 삼사좌우사(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三司左右使)를 더하였다. 언양군(彦陽君)에 봉하였는데, 품계는 중대광(重大匡)이고 호(號)는 추충찬리공신(推忠贊理功臣)이었다. 또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추성수의 협찬공신(推誠守議恊贊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드디어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퇴직(退職)하기를 비니, 부원군(府院君)에 봉하였는데 품계는 벽상삼한(壁上三韓)이고 호는 보리(輔理) 두 글자를 더하였다. 이것이 역임했던 벼슬과 출처의 대략이다.
공이 호군이 되었을 적에 홍충정(洪忠正 충정은 시호)의 아들 번(藩)이 천거하여 판정도감부사(辦正都監副使)가 되었었다. 거실(巨室 세력 있는 가문(家門))이 시골의 백성과 한 여노(女奴)를 두고 다투었는데, 그의 자손이 1백 명이나 되었다. 공이 그 문서를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모대(某代)의 모상(某相)이 모세월(某歲月)에 여러 아들과 더불어 문권(文券)을 만든 것으로, 그 기간이 약간년(若干年)이 되었다. 여노의 아들 및 손자의 연령을 따져 선후(先後)를 비교하여 보면 서로 다르고 여노 이름의 한 글자가 희미하니, 이것은 어찌 어자(魚字)를 노자(魯字)로 고친 것이 아니겠는가? 모상의 여러 아들이 모두 후손이 있으니 마땅히 집집마다 문서 한 권씩을 유치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그것을 가져다 그 이동(異同)을 상고하지 않는가?”
하였다. 공의 말과 같이 상고하려 하니 거실이 드디어 굴복하였다. 공이 시승(侍承)이 되었을 적에 모갑(某甲)과 모을(某乙) 두 사람이 가구(家口)를 다투었는데, 을이 말하기를,
“선세(先世)에 대각(臺閣)에 소송하였었습니다. 지대(知臺)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잊었습니다만, 분별하여 명백히 나누어 주었는데, 갑이 얻은 가구는 죽어버리고 후손이 없었으나 을이 얻은 가구는 다행히 번식(蕃殖)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재로 인하여 그 문서를 잃어버리자, 갑은 화재를 다행으로 여겨 을을 무고(誣告)하여 가구를 겸병(兼幷)하려 합니다.”
하니, 공이 묵묵히 세월을 계산하여 보고 이르기를,
“이른바 허 지대(許知臺)는 반드시 우리 집 문경공(文敬公)이로다.”
하고, 관리에게 명하여 당시의 인부(印簿)를 검열(檢閱)하여 보니, 나누어 준 가구의 이름과 수효가 함께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그로써 갑에게 힐문(詰問)하니 갑이 역시 굴복하였다. 공이 일에 대하여 정밀하고 자세함이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어떤 내신(內臣)이 감정을 품고 5품(品)의 낭관(郞官)을 전문(殿門)에서 구타하자, 공이 핵론(劾論)하기를 심히 준엄하게 하고 겸하여 증좌(證左 증인)가 사실대로 말하지 아니하고 내신을 두둔하는 것을 탄핵하였다. 내신은 바야흐로 임금에게 총애(寵愛)가 있었고 증좌도 또한 달관 대족(達官大族)이었으므로, 공을 배격하여 주관(州官)으로 좌천(左遷)시켰다. 그때에 궁실(宮室) 및 불묘(佛廟)를 크게 중수하였는데 백성을 모아 역사에 보내기 위하여 사자(使者)가 빈번히 왕래하였으나, 모두 공을 꺼려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감히 경계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이 힘을 입어 편안하였다.
공이 합포(合浦)를 진무할 적에는 군장(軍將)들이 감히 급(急)하다는 것으로써 사사로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였고, 주군(州郡)의 원들도 감히 사감으로써 관리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였다. 중국의 사자가 와서 군졸(軍卒)과 거승(車乘)의 엄숙함과 호령의 엄함을 보고는 송연(悚然)히 공경하였으며, 함께 사냥을 할 적에는 좌우(左右)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쏘는 족족 맞히니 또 환연(懽然)히 즐겼다. 그리하여 이르는 곳마다 칭찬하는 말이 입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이 일찍이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 갔을 적에 충선왕(忠宣王)이 날마다 저택(邸宅)에 와서 안부를 물었는데, 모시는 신하들은 물러가기를 생각하였으나, 공만은 여러 가지 책임을 겸하고 왕의 좌우에서 모셨으므로, 충렬왕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겼고 충선왕도 또한 예로써 대우하였다.
의릉(毅陵 충숙왕의 묘호이다)이 경사(京師)에 억류된 지 5년에, 심왕(瀋王 왕고(王暠))이 천자에게 총애를 얻게 되자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국인(國人)을 위협하고 꾀어 ‘심왕으로 임금 삼기를 원합니다.’라고 상언(上言)하게 하니, 공과 동생 원윤(元尹) 우(禑)만이 장중(狀中)에 서명(署名)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공에게 사사로 말하기를,
“중의(衆議)를 어기고 스스로 달리 하다가 후회하게 되면 어쩌겠소?”
하니, 공이 꾸짖기를,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직분이다.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자, 영릉(永陵 고려 충혜왕(忠惠王)의 묘호)이 공에게 명하여 그 도당(徒黨)을 순군만호(巡軍萬戶)에서 신문하게 했는데, 온 부중이 그 종역(從逆)을 미워하여 심하게 고문하면서 통렬히 다스리려 하매, 공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이 조적의 선동에 빠져 그리된 것이니 어찌 족히 책하랴. 만약 그들의 살이나 뼈를 다치게 하면 반드시 ‘내가 법을 굽혀 강제로 굴복시켜 조정을 속인다.’ 할 것이다.”
하고, 이에 그 형(刑)을 늦추니 죄수(罪囚)들이 감동 열복하여, 그들의 죄를 숨김 없이 자백하였다.
영릉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길에서 공을 불러 함께 가자고 하니, 공이 60세가 지났으나 왕명을 듣고 달려가서 수일 만에 압록강(鴨綠江)에서 만났다. 경사에 당도하니 승상(丞相) 백안(伯顔)이 황제에게 주달(奏達)하여, 오부관(五府官)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심문하게 하면서 조적의 무리를 힘써 도왔다. 조적의 무리에 말 잘하는 자가 많았으나 공이 한마디로 결단하매 사리(辭理)가 간명 정직하니, 오부관들이 경의를 표하면서 백수재상(白鬚宰相)이라 일컬었다. 영릉이 석방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왔으며 복위(復位)한 지 4년 동안에 소인들이 얽어낸 참소가 수없이 많았다. 천자가 습의(襲衣)와 준주(尊酒)를 하사하였는데 농보(籠普)가 가지고 왔으며, 이어 타적(朶赤)을 보내어 덕음(德音)을 반포하게 하였다. 왕이 나아가 맞으려 하니 타적이 칼날을 들이대고 왕을 잡아 말에 싣고 달려갔다.
공이 그때에 집에서 거처하다가 갑자기 변이 일어났음을 듣고, 분문(奔問)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농보에게 가서 또 의리로써 감동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재상(宰相)으로 더불어 원 나라에 애걸할 것을 말하니, 모두들,
“배신(陪臣)으로서 천자의 위엄을 범하면 큰 꾸짖음이 있을까 두렵다.”
하니, 공이 강개(慷慨)히 그들을 꾸짖으며,
“임금과 신하는 그 정의(情義)가 부자와 같다. 아들이 아버지를 구하는데 누가 죄주겠는가? 죄가 두려워 아버지를 구하지 않는다면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상서(上書)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끝내 못하고 말았으므로, 공은 종신토록 분통함이 말과 낯빛에 나타났다. 덕령공주(德寧公主)가 사왕(嗣王)과 함께 공에게 시호(諡號) 청하는 일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선왕(先王)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한갓 소인을 가까이하여 원망을 사고 덕을 더럽힌 때문인데, 이제껏 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오히려 살아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죄를 바루어 선왕이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힌 뒤에 시호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인하여 그 사람의 죄악을 써서 올리매 양궁(兩宮)이 감오(感悟)하여 원 나라에 전정(轉呈)하게 되었는데, 공에게 정삭(正朔)을 개혁할 것과 시호를 청하는 두 표(表)를 주어 들어가서 주달하게 하니 사은하기를,
“신이 죽을 나이가 다 된 72세입니다. 길에서 쓰러져 명명(明命)을 욕되게 할까 두려우나, 죽기 전에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와서 행장을 챙겨 곧 출발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려 10일간이나 음식을 못먹었다. 그리하여 좌우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서 의관을 갖춘 다음, 단정히 앉아 서거(逝去)하니, 지정(至正) 8년(1348) 2월 2일이었다. 부음을 왕에게 아뢰니 3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비호(庇護)하였으며 정렬공(貞烈公)이라 증시(贈諡)하였다. 2월 24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의 동남쪽 언덕에 하관(下棺)하여 문신공(文愼公)의 조역(兆域)에 부장(祔葬)하였으니, 이명(理命 돌아가신 분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공은 책 읽기를 좋아하여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물으면 곧 대답하여 의심이 없었다. 종족(宗族)과 인척(姻戚)에게는 인후하고 친구에게는 신의(信義)가 있었으며, 그들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종일토록 즐겼으며,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약을 사가지고 찾아가 보았다. 진실하고 정성스럽기는 한(漢) 나라의 관리와 같았으나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가상히 여기는 데에는 공정하여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고, 광달(曠達)하기는 진(晉) 나라의 선비와 같았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기를 간절히 하여 이험(夷險)에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어진 사람은 그의 행실을 사모하고 불초한 사람은 그의 의를 두려워하였으며, 거리의 아동과 부녀들도 죽헌(竹軒)이라 칭송하였으니, 또한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부인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최서(崔瑞)의 딸로 공보다 1년 앞서 졸(卒)하였는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되었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가기(可器)는 판도총랑 김해부사(版圖摠郞金海府使)로 먼저 졸하였고, 경직(敬直)은 중대광 양성군(重大匡陽城君)이고, 종훤(宗烜)은 출가(出家)하여 화엄사(華嚴師)가 되었고, 달잠(達岑)은 역시 출가하여 선사(禪師)가 되었고, 숙명(淑明)은 개성판관(開城判官)이고, 희조(希祖)는 전리판서 예문제학(典理判書藝文提學)이고, 승구(承矩)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이다. 딸 하나는 여흥군(驪興君) 민사평(閔思平)에게 출가하였고, 하나는 종부령(宗簿令) 김휘남(金輝南)에게 출가하였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는데, 휘남은 화평(化平) 사람으로 공과 같은 김씨가 아니다. 서출(庶出)의 아들은 예적(穢迹)이고 2녀는 출가하지 아니하였다. 내가 공의 알아줌을 입어 시우(詩友)가 되었었고, 희조는 또 나의 위금(委禽)이 되어 공의 묘갈명을 청하니 의에 저버릴 수 없으므로, 집의(執義)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행장을 삼가 취하여 바로잡아 서(序)를 쓰고 이어 사(辭)를 지었는데, 사는 다음과 같다.
아, 풍교(風敎)가 세속을 아름답게 함이여! 강한 것을 부드럽게 하고 모난 것을 원만하게 하였다. 솥으로 수레를 괼지언정 솥에 고기를 삶기는 숭상하지 않았고, 해진 관(冠)으로 신창을 만들지언정 해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진실하구나 정렬공이여, 온화(溫和)하면서도 엄려(嚴厲)하고 위엄(威嚴)이 있으면서도 화락(和樂)하다. 추운 겨울의 송백(松柏)과 같고 거센 물결의 지주(砥柱)와 같도다. 영달(榮達)하면 따르고 곤췌(困瘁)하면 물리침이여 혼자만은 신의를 도타이하였으며, 해(害)는 피하고 이(利)를 따름이여 혼자만은 충성을 온전히 하였도다. 이 백성 교화되기를 바랐음이여 내 몸에 있은 다음에 할 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등용되어 백성에게 혜택을 주다가 곧 헌신 벗어 버리듯 하였는가? 비록 일을 사절하고 은거하였으나 어찌 일반(一飯)의 사이인들 우리 임금 잊으랴! 권권(惓惓)히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어 버렸음이여 급급(汲汲)히 백성의 해로움을 제거하였도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은 마땅히 옛사람 가운데에서 찾아볼지어다.
[주-D001] 위금(委禽) : 사위가 되었다는 뜻. 혼례(婚禮)에 납채(納采)할 적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드리므로 이렇게 부른다.[주-D002] 솥으로 …… 않았고 : 《韓昌黎集》 試大理評事王君 墓誌銘에 “솥으로 수레를 괼 수는 없고 말로 마을을 지키게 할 수는 없다.” 한 데서 온 말로 인물을 적재 적소에 써야 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검소하다는 뜻으로 말을 바꾸어 인용하였다.[주-D003] 해진 관(冠)으로 …… 않았다 : 《漢書》 賈誼傳에 “관이 비록 해졌더라도 신창으로 깔지는 않는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역시 말을 바꾸어 검소하다는 뜻으로 썼다.[주-D004] 지주(砥柱) : 난세에 처하여도 의연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뜻. 지주산(砥柱山)이 황하(黃河) 가운데 우뚝 서 있으므로 이렇게 비유하여 말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나금주 (공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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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村先生文集卷之三十五 / 東賢事略 / 金政丞諱倫
公字無己。號竹軒。又號贛村。彥陽人。曾祖門下侍郞平章。諡威烈公就礪。祖太傅平章事。諡翊戴公佺。考僉議參理。諡文愼公賆。母許氏。中贊文敬公珙之一女。忠烈王庚寅。公年十四。時哈丹寇我疆。國人入江都避之。文敬爲冢宰。留守舊都。以殿國人之後。命公挈家以先。公指畫如成人。歷任中外。處事剛明。常從忠烈入朝。忠宣日候于邸。二王皆嘉其志。至治中。忠肅被誣。徵留京師五年。瀋王得幸於天子。誘䝱國人。使上言願得瀋王爲主。公獨不肯署名。或私於公曰。若後悔何。公罵曰。臣無二心。職耳。何悔之有。至元之季。忠肅薨。曺頔搆亂。謀廢忠惠。不勝伏誅。公與韓文節公宗愈治其倘。獄成驛聞。丞相伯顏右頔倘。顧奏徵忠惠。公等從之。至則令五府官雜問。頔倘多利口。公折以片言。五府官皆改容目之。會伯顏死。王得解東歸。累遷至左政丞。至正戊子。得疾。十日不飮水漿。令左右扶起。具衣冠端坐而逝。年七十二。諡貞烈。公喜觀書。多識典故。有問響應。仁於宗姻。信於故舊。見其來。必置酒極歡。聞其病。必市藥相視。
양촌선생문집 제35권 / 동현사략(東賢事略) / 정승 김륜(金倫)
공의 자는 무기(無己)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또 다른 호는 당촌(戇村)인데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증조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가 위열공(威烈公)인 취려(就礪)요, 할아버지는 대부평장사를 지냈으며 시호가 익대공(翊戴公)인 전(佺)이요, 아버지는 첨의참리를 지냈으며 시호가 문신공(文愼公)인 변(賆)이요, 어머니 허씨(許氏)는 중찬 문경공(文敬公) 공(珙)의 맏딸이다.
충렬왕 경인년(1290)에 공이 14세였는데, 합단(哈丹)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자 국인(國人)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난을 피하였는데, 문경공이 총재가 되어 송도(松都)를 지키면서 뒤를 맡고, 공에게 가족을 데리고 먼저 가게 하니 공이 지휘하고 계획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는 처사(處事)가 강명하였으며, 일찍이 충렬왕을 따라 입조(入朝)하였을 적에 충선이 날마다 충렬의 관저로 와서 문후하였는데, 그때 공이 항상 모시고 있었으므로 두 왕은 모두 공의 뜻을 가상히 여겼다.
지치(至治) 연간에 충숙이 무고를 당해 경사에 불려가 5년간 머물러 있었는데 심왕(瀋王)이 천자의 굄을 얻어 국인을 위협하여 ‘심왕으로 임금 삼기를 원한다.’고 상언(上言)하게 되었으나 공만이 서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사적(私的)으로 말하기를,
“그러다가 후환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니, 공이 꾸짖기를,
“신하는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직책대로 할 뿐인데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였다. 지원(至元) 말에 충숙이 훙(薨)하매, 조적이 난을 일으켜 충혜왕을 폐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베임을 당하자, 공이 문절공(文節公) 한종유(韓宗愈)와 그 무리를 다스려 옥사(獄事)가 성립되어, 역마로 승상 백안(伯顔)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백안은 적(頔)을 옹호하여 도리어 황제에게 아뢰어 충혜왕을 불렀으므로 공 등이 따라갔는데, 이르자마자 오부(五府)의 관리를 시켜 여러 가지로 심문하였다. 적(頔)의 무리가 교묘하게 잘 꾸며댔지만 공이 한마디로 결단하니 오부의 관리가 모두 얼굴빛을 고쳐 예우하였다. 마침 백안이 죽었으므로 왕이 풀려나서 귀국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정승(左政丞)에 올랐고, 지정(至正) 무자년(1348, 충목왕4)에 병이 들어 10일 동안 물 한 모금 못마시다가, 좌우(左右)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는 의관(衣冠)을 갖춰 입고서 단정히 앉아 죽으니, 나이는 72세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공은 글읽기를 좋아하여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므로 묻기만 하면 곧 대답하였다. 친척에는 인애(仁愛)하였고, 친구에는 신의가 있어 친구가 찾아오면 반드시 술을 내어 마음껏 즐겼으며,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약을 사 가지고 가서 문안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기태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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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사 김승구
급암시집 제2권 / 율시(律詩)
진주 김 사군 김승구 이 부임하려 할 때 해주 성 사군 성원규 을 찾아가 작별하였다. 이에 시를 부치다〔晉州金使君將之官訪海州成使君相別詩以寄之 金承矩成元揆〕
진주와 해주는 천여 리인데 / 菁城竹郡千余里
축지법으로 며칠간의 즐거움을 이루었네 / 縮地能成數日懽
내 몸이 늙어 버린 것을 스스로 웃거니와 / 自咲及菴身已老
한가로운 꿈이 술자리를 맴도는 걸 막지 못하겠네 / 不禁閑夢遶杯盤
주인은 자주 보는 심상한 일인데 / 主人貫見尋常事
애끊는 소주는 취기가 가시지 않네 / 腸斷蘇州醉未消
어찌하면 남방의 미녀를 데려다가 / 安得採來南國艶
하룻밤 술동이 앞에서 미모를 다투게 할까 / 尊前一夜鬪嬌饒
아름다운 진주는 일찍이 들렀던 곳 / 晉陽佳麗曾經處
노랫소리 악기소리 나던 누대는 자주 꿈에 들어오네 / 歌管樓臺入夢頻
묻노니 이제 땅 주인은 없는데 / 且問如今無地主
강에 가득한 가을 달빛은 누구에게 속해 있나 / 滿江秋月屬何人
별 뜻 없이 우연히 술에 이끌려 / 無端偶被酒拘牽
자신도 모르게 역관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으리 / 不覺郵亭一夜眠
길 가는 이 막아 이틀 밤 보낼까 두려우니 / 恐阻行人經信宿
이별의 눈물을 흘려 울어 대는 시냇물을 불리지 마라 / 莫傾別淚漲啼川
[주-D001] 김 사군(金使君) : 고려 말 문신인 김승구(金承矩)를 가리킨다. 아버지는 정승을 지낸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김륜(金倫)이다. 감찰 장령(監察掌令)과 전의령(典儀令)을 거쳐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에 임명되었으나 낭장 강백안(康伯顔)을 구타한 사건으로 인하여 순군옥에 갇혔다가 재상 박수년(朴壽年)의 청원으로 면직에 그쳤다. 뒤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으나 개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주-D002] 성 사군(成使君) : 고려 말 문신인 성원규(成元揆, ?~1382)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시호는 간헌(簡憲)이다. 천안과 해주에 부임하여 치적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동북면 병마사에 올랐다. 뒤에 밀직 부사를 지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주-D003] 소주(蘇州) : 당(唐)나라 때 소주 자사(蘇州刺史)를 지낸 시인 위응물(韋應物)을 가리킨다. 그는 고결한 성품에 시가 또한 한담(閒澹)하고 간원(簡遠)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도잠(陶潛)에 비겨 도위(陶韋)라고 일컬었다. 여기에서는 진주(晉州)에 부임하는 김승구를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유호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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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시집 제3권 / 시(詩) / 장인 생신에 우곡 시에 차운하다〔氷翁生日次愚谷韻〕
생일날 고상한 모임은 난정보다 나으니 / 生朝雅集勝蘭亭
좌석의 손님들 별들에 응하지 않는 이가 없다네 / 座客無非應列星
어찌 굳이 〈오호도〉를 다시 바치겠는가 / 何必五湖圖更獻
이암이 은거하여 양생을 하시는데 / 二岩高臥養修齡
남북으로 서로 바라보며 띠풀 정자를 세우니 / 南北相望構草亭
시통을 날마다 전하는 종이 있다네 / 詩筒日遞有奴星
만년에 새로 친구 사귀겠다 말씀하지 마소서 / 莫言晩節新傾蓋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공경했던 우정이 있으니 / 久敬交情自妙齡
[주-D001] 장인 : 급암의 장인인 김륜(金倫, 1277~1348)을 말한다.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자는 무기(無己)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공정하였으며, 백성을 잘 다스리고 원나라와의 교섭에서 공훈이 많아 좌정승, 부원군에 올랐다.[주-D002] 난정(蘭亭) : 중국 회계(會稽) 산음(山陰)에 있던 정자의 이름이다. 동진(東晉) 때 회계 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하여 손작(孫綽), 사안(謝安) 등 당시의 명사 42인이 그곳에 모여 계사(禊事)를 행하고 이어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주-D003] 좌석의 …… 없다네 : 《후한서(後漢書)》 권2 〈명제기(明帝紀)〉에 “관도공주(館陶公主)가 아들을 위하여 낭관의 자리를 요구했으나, 명제가 윤허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낭관은 위로는 하늘의 별들에 응하고, 나가면 백 리 고을의 장관이 되니,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들이 앙화를 입게 되므로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郞官上應列宿 出宰百里 苟非其人 則民受殃 是以難之〕’라고 하였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좌석의 손님들이 낭관의 벼슬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손님들을 찬미한 말이다.[주-D004] 오호도(五湖圖) :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나라를 평정한 범려(范蠡)가 과감히 물러나 오호에서 노닐며 한가롭게 살았다는 고사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오호도〉를 바쳤다는 말은 송나라 진집중(陳執中)의 고사에 나온다. 진집중이 박주 판관(亳州判官)으로 있을 적에 그의 생일이 되자 친족들이 모두 〈노인성도(老人星圖)〉를 올렸는데, 조카 진세수(陳世修)만은 〈범려유오호도(范蠡遊五湖圖)〉를 올렸다. 진집중은 매우 기뻐하며 그날로 부절(符節)을 반납하고 돌아가서 이듬해에 마침내 치사(致仕)하였다.[주-D005] 이암(二岩) : 여기서는 철동 삼암(鐵洞三岩) 가운데 장인 김륜(金倫)과 우곡 정자후(鄭子厚)를 일컫는다.[주-D006] 남북으로 …… 세우니 : 장인 김륜과 우곡 정자후가 한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유호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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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十三 / 書後 / 題惕若齋學吟後
及菴閔先生詩。造語平淡。而用意精深。其時。益齋先生,愚谷先生與竹軒政丞居同里。號鐵洞三菴。及菴。竹軒壻也。竹軒仙去。而及菴又來居其第。三菴之稱未絶。一世宗之。予晚生。幸及平時。皆得接其道德之輝。以爲終身山斗之仰。蓋幸之幸也。益齋先生每嘆曰。及菴詩法。自得天趣。又言拙翁彥明父性放達。少許可。獨愛及菴甚。游聯騎。宿對床。不問家人有無生產。又同嗜酒。又同樂也。予之往來及菴之門也。及菴年已衰矣。而溫溫閑雅。俯引後進惟恐後。一日。狂高軒陋巷。坐樹陰移日而去。予至今未敢忘。外孫金敬之氏生長于及菴先生之家。及志學。又學于及菴。得以親炙益齋,愚谷。故其蓬生麻中。不扶而直。勢所必至。又況生質粹美。儕輩莫敢齒乎。今觀學吟。益知詩法絶類及菴。人樂有賢父兄。詎不信然。嗚呼。詩豈易言哉。文章云乎哉。學問云乎哉。嗚呼。詩豈易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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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난고 제3권 / 시(詩) / 눈 내린 뒤에 죽헌(竹軒)과 약속하여 이가정(李柯亭)의 산재(山齋)를 찾다
가정의 인품과 경지 맑고 그윽하니 / 柯亭人境兩淸幽
눈 내린 뒤에 산음에서 노는 것을 상상했네 / 像想山陰雪後遊
만일 동행에 시우가 있었다면 / 若使同行有詩友
자유는 굳이 배를 돌리지 않았으리 / 子猷未必便回舟
[주-D001] 죽헌(竹軒) : 김륜(金倫)의 호. 자(字)는 무기(無己)이며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주-D002] 이가정(李柯亭) : 가정은 이숙기(李叔琪)의 호.[주-D003] 자유(子猷) :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의 자.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우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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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시집 제4권 / 시(詩) / 한산부원군 정승 한공 종유 만장〔漢山府院君政丞韓公挽章 宗愈〕
세상에 드문 큰 재목이 산동에서 나왔으니 / 宏材間世出山東
칠 척 장신에 기상이 웅장했네 / 七尺身長氣像雄
조정에 큰 공로 세운 현명한 총재요 / 省府元功賢冢宰
사림의 높은 명망을 얻은 노숙한 종장이었네 / 儒林重望老宗工
고결한 품격과 재상의 사업은 재상 관저에 남아 있는데 / 淸風相業留黃閤
한낮의 신선 놀이로 적송자와 짝하였구려 / 白日仙游伴赤松
두 아우가 모두 내 문하의 선비이니 / 兩弟俱爲門下士
내가 와서 절하며 곡하는 게 어찌 부화뇌동이겠나 / 我來拜哭豈雷同
[주-D001] 한공(韓公) : 여말의 문신 한종유(韓宗愈, 1287~1354)를 가리킨다. 충숙왕 대에 그는 심왕(瀋王)의 왕권 탈취 음모에 맞서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왕을 보위하였고, 김륜(金倫)과 함께 조적(曺頔)의 난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충혜왕에게도 충성을 다하였으며 충목왕 시절에는 좌정승에 올랐다. 충정왕 때 권신들이 전횡하자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한가롭게 살았다.[주-D002] 세상에 …… 나왔으니 :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전(趙充國傳)〉의 찬(贊)에 “진한(秦漢) 이래로 산동(山東)에서는 재상이 많이 배출되고 산서(山西)에서는 장군이 많이 배출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산동 지방은 중국 구주(九州) 가운데 청주(靑州)에 해당하는데, 한종유의 본관이 청주(淸州)이기에 산동을 끌어온 것이다. 따라서 한종유가 본래 재상의 자질을 지녔다는 점을 말한다.[주-D003] 한낮의 신선 놀이 :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 적송자(赤松子)는 대낮에 다녀도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유호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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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시집 제1권 / 고시(古詩) / 9일 우곡의 연회에서 익재 시에 차운하다〔九日愚谷席上次益齋詩韻〕
흉회는 운몽택 여덟아홉 개를 삼킨 듯 / 胸呑雲夢者八九
나이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쇠하지 않으셨네 / 壽過八旬不枯朽
우리 공의 이런 모습을 보고 더욱 경애하노니 / 見此我公益敬愛
소문을 들은 후진들은 다투어 달려오네 / 聞風後進爭趨走
여러 번 모임을 열어 도심을 논하고 / 屢開率集論道心
마침내 새 시를 내놓으면 사람들 입으로 전파되네 / 遂出新詩播人口
지초 먹던 상산옹을 실컷 좇았고 / 茹芝猒逐商山翁
국화 따던 도연명도 즐겨 따랐지 / 採菊愛從彭澤叟
문 앞에 이미 백의가 왔으니 / 門前已有白衣來
상자 안 옛 푸른 모포를 전당잡히지 마시길 / 篋中莫典靑氈舊
두 분이 술자리를 베풀면 반드시 나를 초대하니 / 兩公置酒必招予
아마도 선친과 장인이 생각나셨겠지 / 應念先君幷外舅
시에 화답하는 신선 같은 손님은 문창의 무리요 / 賡詩仙客文暢流
장수를 비는 훌륭한 조카는 죽림의 벗일세 / 獻壽賢甥竹林友
산에 오를 때 비록 밀랍 칠한 나막신을 신지 않지만 / 登臨雖非蠟屐游
바람에 모자 떨어진 뒤 호탕함은 점차 더해지네 / 爛熳漸加吹帽後
취하여 읊조리는 우리의 광간함을 비웃지 마오 / 醉吟狂簡人莫嘲
소동파와 황산곡을 믿고서 스스로 뻐기는 것이니 / 恃有蘇黃自矜負
[주-D001] 우곡(愚谷) : 고려 후기의 관료이자 문인인 정자후(鄭子厚, ?~1361)의 호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죽헌(竹軒) 김륜(金倫)과 같은 동네에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철동삼암(鐵洞三菴)이라고 불렀다. 김륜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 사위인 급암이 장인인 김륜의 집에 와서 살게 되면서 삼암(三菴)의 칭호는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牧隱藁 牧隱文藁 卷13 題惕若齋學吟後》[주-D002] 흉회는 …… 듯 : 운몽택(雲夢澤)은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이전에는 그리 크지 않은 습지를 지칭했는데, 진(晉)나라 이후로 동정호(洞庭湖)까지 포괄하는 큰 호수를 뜻하게 되었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운몽과 같은 것 여덟아홉 개를 한꺼번에 집어삼키듯, 그 흉중이 일찍이 막힘이 없었다.〔呑若雲夢者八九 於其胸中曾不蔕芥〕”라고 하였다. 이는 정자후(鄭子厚)를 형용한 말로, 나이가 팔십이 넘었는데도 흉중이 막힘이 없다는 말이다.[주-D003] 지초(芝草) 먹던 상산옹(商山翁) : 상산사호(商山四皓)는 중국 진 시황 때 난리를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에 들어가서 숨은 네 사람이다. 그들이 은거할 때 “빛나는 붉은 지초는 요기할 만하도다.〔燁燁紫芝 可以療飢〕”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뒤에 여후(呂后)의 부탁을 받고 한(漢)나라 궁궐에 나아가 태자를 보필하였다.[주-D004] 백의(白衣) : 술을 가져온 심부름꾼이다. 진(晉)나라 때 도잠(陶潛)이 9월 9일에 술이 떨어져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차, 마침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흰옷을 입은 사환을 시켜 술을 보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續晉陽秋》[주-D005] 옛 푸른 모포 : 선대(先代)로부터 전해 온 집안의 귀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방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자, 도둑이 놀라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주-D006] 문창(文暢) : 당(唐)나라 정원(貞元) 때의 승려이다. 그는 일찍이 당대 문사인 한유(韓愈)와 교유하였다. 여기에서는 손님 가운데 고상한 승려가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주-D007] 훌륭한 …… 벗일세 :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진(晉)나라 초기에 대숲에 은거하여 술과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는 〈영회(詠懷)〉 시로 알려진 완적(阮籍)과 그의 조카 완함(阮咸)이 끼어 있었다. 여기서 훌륭한 조카는 정자후(鄭子厚)의 생질인 황석기(黃石奇)를 가리킨다.[주-D008] 밀랍 칠한 나막신 :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산수 시인(山水詩人)인 사영운(謝靈運)이 임천 내사(臨川內史)로 있을 때 밀랍을 칠한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였다.[주-D009] 바람에 …… 뒤 :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중양절에 용산(龍山)에서 속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 바람이 불어 맹가(孟嘉)의 모자가 떨어졌지만 맹가는 이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흔히 풍류가 넘치는 잔치를 열었다는 의미로 사용한다.[주-D010]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 : 여기에서는 정자후(鄭子厚)와 이제현(李齊賢)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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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五 / 開城府[下] / 古跡
李齊賢第。在水鐵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