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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일들(2)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드리자>
2016년 10월 16일 / 추수감사절 / 창세기 1:1-31
연암 박지원이 쓴 고전 수필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신경 쓰여 강물을 건너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는데,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초연해지자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로운 인생길을 갈 때에는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 될 것인가를 경계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경우에 매스컴이나 친구나 이웃을 통하여 보고 듣는 것에 초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며 서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해지는 시대입니다.
■ 영국의 래클 경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연습이 다 된 후에 연주 날 전에 오케스트라와 총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오라토리오 중에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할렐루야’ 합창 후에 나오는 소프라노의 아리아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내 주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라는 곡을 소프라노 가수가 불렀습니다. 그 가수는 정확한 음정과 박자,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 표현 그리고 적절한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노래를 불렀고, 많은 청중이 ‘야, 참 잘한다’ 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래클 경이 갑자기 지휘봉을 멈추고 노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노래 부르던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관중들까지도 놀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이때 래클 경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당신은 정말 내 주가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가수가 그런 것을 생각이나 했었겠습니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그저 당황해서 “예, 예 … .”하며 대답했습니다. 래클 경은 “그러면 다시 불러요.”하면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소프라노 가수는 음정, 음색, 호흡, 박자, 감정 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 .’ 아까는 ‘참 잘한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던 많은 청중들이 이번에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었다고 합니다.
▶ 제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는 군왕이라도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오면 인간은 그렇게 자신이 허약한 존재인줄을 절감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인간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황제의 죽음이라는 코미디를 보니까 황제가 죽음의 선고를 받는 순간에 그 황제의 위엄도, 그 호령도, 그 품위도 온데 간 데 없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작다고 여기게 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서면 작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들은 소크라테스(Socrates)를 생각하면 그가 한 유명한 말인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네 자신을 알라!’는 문구는 사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어디에서 인용한 말인데, 그 글귀가 쓰여 있는 곳이 그리스의 델피(Delphi)에 있는 신전 앞입니다. 그 신전 앞에 가면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이 희랍어로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기에 대해 스스로 크다 생각할 때 신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면 결코 자신이 크다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자연과 죽음과 하나님, 이 세 존재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8편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 시를 읊은 시인은 먼저 ‘여호와 우리 주님, 온 누리에 주님의 이름이 어찌 그리도 장엄한지요.’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보고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면서 그대로 그 자연의 위대함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연결되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위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은 드디어 자신의 실체를 바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3절 / 주님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든든히 매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을 이 몸은 우러러 감탄하며 바라봅니다.
4절 / 인간이란 이렇듯 보잘 것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주님은 그토록 생각해 주시는지요.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이렇게 보살펴 주시는지요.
인간은 늘 교만하다가 절묘하게 만들어진 자연을 보고 그 앞에서 한번 기가 죽고 그 절묘한 자연이 바로 하나님의 손의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고선 다시 한 번 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볼 때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장엄한 자연을 마주하고, 그 자연을 만드신 더 위대하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얼마나 편차가 심하며 하나님의 스케일과 인간의 능력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유한(有限, Finitum)이 무한(無限, Infinitum)앞에 서게 된 셈이고, 순간적인 것(The transient)이 영원한 것(The eternal)앞에 서는 셈이고, 영속적인 슬픔과 염려 속에 살아서 끝내는 재로 변할 인간이 평화와 굳건함 그리고 예정된 코스를 어김없이 미련없이 도는 자연의 법칙처럼 굳센 하나님의 질서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이 불안한 모습인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런 경험을 이 시인은 하고 있는 셈입니다.
▶ 구약성서의 욥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욥은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고난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고난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 달라.’고 항변합니다. 그 고난과 그 고난에 대한 해결책도 다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데, 욥은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자꾸 하나님에게 자기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렇게 묻고 나오셨습니다.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이 말은 ‘너는 아직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너 자신은 이 창조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웅대한 세상을 지은 설계도를 내가 가지고 있는데 너의 고통에 대한 설계도 정도야 내가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자연의 창조자임을 발견할 때 드디어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님을 발견하고 이 자연의 주인은 따로 있었으며 그 주인이 바로 나도 지으셨음을 알게 되는데 이때가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찾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 하나님 앞에 무조건 자기를 작게만 여겨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선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고. 자연 앞에서 오만하여 우리의 본질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깨우친 다음에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자연 앞에 인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자신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치 갑자기 암실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지만 조금 있으면 점점 주위의 물체가 눈에 들어오듯이 이 시인도 처음에는 자연 속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의 너무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고 떨고 있었지만 조금씩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그것이 5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시 8:5-8 / 그렇지요. 하나님보다는 조금 못하게 지으셨어도 영광과 존귀라는 아름다운 화관을 씌워 주셨지요. 6) 주님 손수 지으신 것 일일이 다스리게 하시고 온갖 피조물을 발아래 두게 하셨습니다. 7) 양떼와 소떼와 들짐승들과 8) 하늘에 날아다니는 날짐승과 바다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두루 나다니는 온갖 것을 다 맡기셨습니다. 9) 여호와 우리 주님, 온 누리에 주님의 이름이 어찌 그리도 장엄한지요.
인간은 자기가 전혀 무익하게 창조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운 자연도 결국 인간의 발아래 두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다스리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존재는 비교법에 의하면 자연보다 위대하게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보고서 그토록 감탄하면서 그 자연을 보고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가만히 보니 인간은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보다도 더 존귀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다시 교만해져서 자연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이 주신 법칙 위에 군림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스케일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발로입니다. 다 한 가지의 반응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낳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설악산을 자주 갔었는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난 뒤에 설악산을 갔을 때는 그 전에 갔을 때와 전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총각이나 처녀가 애인이 생겨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데 창조주를 발견한 뒤에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져 보여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고전 15:9-10 / 나는 모든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10) 그나마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나는 이 자비와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최고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푹 안겨보았으면 합니다. 주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우리는 이 위대한 창조를 이룩하신 하나님의 품에 있고 그리고 이 창조의 오묘함보다도 더 오묘하게 우리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고 범사에, 언제든지, 우리의 목숨이 다가도록 감사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 1970년대 미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최고의 best seller 작품이 있었는데 그 책은 바로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쓴 「뿌리」(Roots)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7대조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할아버지 쿤타킨테가 서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미국에 노예로 끌려와 어떻게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조상의 뿌리를 추적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무려 17번을 넘나들면서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왜 이처럼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많은 정성을 기울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뿌리, 즉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는가?’라는 내 인생의 뿌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뿌리의 문제, 내 인생과 우주의 근원의 문제를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1)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1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우리 인생과 우주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이미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히브리서 11: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본래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초월적 존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태극기 휘날리며》(太極旗 휘날리며, 2004년)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극본·감독을 맡아 대한민국에서 1,17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본, 흥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찍기 위해서 만들었던 세트장은 주말이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테마여행코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인물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주연배우도, 세트장도 아닌 바로 그 영화를 만든 감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마디씩 합니다. “야! 역시 강재규감독이야! 강 감독 영화 참 잘 만들었네!” 영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감독의 얼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영화감독이 있어서 그가 머릿속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돌아다니면서 작품을 찍고, 배우들과 엑스트라들을 지휘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한 편의 영화나 예술작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신비롭고, 오묘한 이 우주만물을 보면서 “이것들을 만든 분이 없다. 하나님이 없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만들어졌을 거야.”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로마서 1:19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속에 보임이라(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핑계할 수 없습니다(롬 1:20b). 창세기 1:1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천지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심으로 존재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잠언 3:5-7에 보면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뢰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머리가 좋으면 얼마나 좋고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겠습니까? 실로 여호와를 겸손히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1:7).
오직 우리는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후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 79장)
②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③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④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상을 아무 뜻도 없이, 목적도 없이 그저 심심하니까 재미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하신 뜻을 좇아, 분명한 목적과 방향가운데 창조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에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생활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가 서로 남을 도우면서 살도록 새로운 일을 계획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우주와 세상 만물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 안에서 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해야만 하겠습니다.
James Packer박사는「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God's plans for you)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만드셨다면, 그분만이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를 말해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깨달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저희들이 내 인생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발견하기 위해서 힘써 성경을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맨 첫 페이지, 맨 첫 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주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다른 책과 다른 점입니다. ‘내가, OOO’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든 우주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이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서 사람이 그 인생을 만들어 가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뜻을 성취해 나가시는 history, 즉 his story인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my story가 아닙니다. ‘God's story in my life.’ 즉 ‘내 인생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내 인생의 첫 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주님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가시고,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고, 가장 멋있게 창조해 가실 것을 믿습니다.
2. 창조의 역사들(2-25)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땅의 상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것은 원어적으로 보면 ‘계속해서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마치 어미 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이 우주를 품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자 신비롭고 웅장한 천지창조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일어날 때에 성령님의 품으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창조는 원어에 ‘바라’로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어둡고 공허하고 혼돈된 상태에서 아름답고 조화롭고 충만한 천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신기한 역사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성령님께서 품으실 때 가능합니다. 마리아도 처녀의 몸으로 어떻게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때에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35). 어미닭이 따스한 품으로 계란을 품을 때에 귀여운 병아리가 탄생하듯이, 성령께서 그 사람을 품으시면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새 생명 탄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첫째 날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창 1:3 /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나 환히 비춰라’ 하고 명령하시자 빛이 생겨나 환히 비추었다.
빛은 모든 만물의 생성의 근원이 됩니다. 즉 모든 사물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 바로 빛입니다. 빛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빛이 없이는 결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으므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빛이 있으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있습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심으로 흑암 가운데 있던 우주를 밝히시고, 창조의 서막을 여셨습니다. 이는 연극이 시작될 때에 까만 커튼이 걷히고 밝은 조명이 들어와서 제1막이 시작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역사를 시작할 때마다 항상 빛으로 임하십니다.
모세가 황량한 광야에서 깊은 시름에 젖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시나무 떨기 불꽃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무지와 교만 가운데서 신자들을 핍박하고 돌아다닐 때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빛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영적인 눈을 띄워주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경 거지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9:5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이 세상의 빛이다.
사단은 어두움의 영입니다(엡 6:12). 어두움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이를 잊고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빛이 임하면 이런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 땅에 말씀의 빛으로 역사하셔서 허무와 운명, 정욕과 안일, 시기와 미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빛으로 충만케 하시길 기도합니다.
2. 창조의 둘째 날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창조하셨습니다(6-8).
창 1:6 / 하나님께서 ‘물 한가운데에 창공이 생겨나라. 그 창공이 위에 있는 물과 아래에 있는 물을 나뉘어라.’ 하고 명령하시자
궁창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대기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대기권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수증기층이 없으면 소리도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촛불도 켤 수가 없습니다. 식물이 자랄 수도 없고, 호흡을 할 수도 없습니다. 대기는 산소와 질소의 비율이 1:4의 비율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인 산소가 조금만 더 많아지면 조그만 가스불에도 온 집이 다 타지고, 동네가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합니다. 또 질소가 78%인데 약 2%만 더 많아져도 모든 동물은 질식해서 죽고 맙니다. 그래서 브라질은 선진국들이 외채를 갚으라고 독촉하면 ‘아마존의 밀림을 개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논다고 합니다. 아마존의 나무들을 베어내면 지구에 산소량이 줄어들어서 사람들이 질식해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르다 보면 가장 신기한 것이 구름입니다. 비행기는 구름위로 올라 가는데 구름이 마치 솜이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름은 매 초당 1,600톤의 물을 증발시켜서 하늘로 끌어 올려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많은 양의 수증기를 증발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석탄이나 석유를 태워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태양열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물을 증발시키시고 하늘에 거대한 저수지층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궁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또 이 대기권이 저녁에는 비닐하우스역할을 하기 때문에 얼어죽지않고 따뜻하게 밤을 지낼 수가 있습니다. 궁창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3. 셋째날 하나님께서는 물이 한 곳으로 모이도록 하시고 드러난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과 바다의 경계선을 그으시고, 바닷물이 땅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바다와 육지의 비율은 정확하게 7:3의 비율로 되어 있습니다. 조미미(조미자) 가수가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히트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 가수의 노래대로 실제로 바다가 조금이라도 육지로 변하게 되면 이 지구는 강우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사막화되고 맙니다. 반대로 바다의 비율이 늘어나면 너무 많은 수증기 증발로 말미암아 지구가 습지대로 변하여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물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비율로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습니다.
또 바닷물 속에는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즉 해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래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는 높낮이가 없기 때문에 어디서 어디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바닷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닷물이 다 썩어서 고기들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셔서 바닷물이 고여있지 않고 흐르도록 만드셨습니다. 바람이 해면위로 불게 되면 해면에 나타나는 응력(應力 / 변형력 - 물체가 외부 힘의 작용에 저항해서 원형을 지키려는 힘.) 때문에 수심 100km 깊이까지 바닷물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가 겉으로 볼 때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속에서는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해서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겨울에는 강물과 바닷물에 얼음이 어는데 이 얼음이 보온덮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잘 지낼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셋째날 하나님께서 또 각종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들을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채소와 과일처럼 건강에 좋은 식품이 없습니다.
콩은 오장을 보호하고 창자와 위장을 따뜻하게 보하는 기능을 합니다. 양파는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피의 흐름을 좋게 하기 때문에 고혈압, 동맥경화를 예방해 줍니다. 인삼은 높은 혈압은 낮춰주고, 낮은 혈압은 높여주는 혈압조절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추나물에는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빈혈을 예방해 줍니다. 선인장에는 당분과 단백질성분이 풍부하여 기관지계통을 건강하게 해 줍니다. 감자에는 모든 필수아미노산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어서 혈액 속에 콜레스톨을 조절해 줍니다. 쑥에는 칼륨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간에 좋습니다. 구기자 열매는 베타인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눈에 좋습니다. 이상은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인간이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푸른 풀과 채소와 과일들을 철마다 때마다 풍성하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4. 넷째날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창 1:16 / 하나님은 이렇게 두 큰 빛 해와 달을 만드셨다. 그 중에서도 큰 빛인 해는 낮을 환히 밝히게 하시고 작은 빛인 달은 밤을 밝히게 하셨다. 또 밤을 밝히시려고 수많은 별도 만들어 놓으셨다.
태양은 표면온도 6천도, 중심온도 1천 5백만 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1, 2년도 아니고 수 천년동안 누가 연료를 공급해 주는 것도 아닌데 자체적으로 이처럼 높은 열을 계속해서 발산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에너지양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100만년을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합니다. 이 엄청난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는 끊임없이 연료를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막대한 양의 자원을 태워야만 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원자력 발전소까지 짓지만 자꾸만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태양은 이제까지 한 번도 정전사태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연탄 한 장 대준 적이 없지만 지금도 스스로 잘 타고 있습니다. 한전은 꼬박꼬박 전기세를 받아가지만 하나님은 태양열세를 한 푼도 받지 않으십니다.
또 달은 정확하게 29.53일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 달이 있기 때문에 조수간만의 차가 생겨서 바다 생태계가 유지됩니다.
또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이 별들은 모두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궤도를 따라 저마다의 길을 돌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자동차들은 아무리 도로를 잘 닦아 두어도, 하루에도 수많은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기차는 아예 레일을 깔아 놓았는데도 이탈사고가 발생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균적으로 한 시간에 한 명 꼴로 교통사고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광활한 우주에 수많은 별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충돌사고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 많은 별들이 어디 매달린 것도 아니고 누가 태엽을 감아 놓은 것도 아닌데 운전자도 없는데 정확하게 질서정연하게 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5. 다섯째날 하나님께서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창 1:21 /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큰 바다 생물과 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온갖 물고기와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니는 갖가지 새를 모두 지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들은 하늘을 잘 날아다닐 수 있도록 몸이 가벼워야 하기 때문에 뼈 속이 다 비어 있습니다. 또 그 몸의 구조도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도록 방추형(紡錘型)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새들은 나침반, 레이다, 활주로도 없지만 원하는 때는 언제든지 날기도 하고 멈추기도 합니다. 속도와 방향도 자유자재로 바꾸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도 사뿐하게 착륙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새를 본받아서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비행기사고가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한번 사고 났다하면 몇 백 명이 다 죽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하찮은 참새나 뱁새 한 마리도 사고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물고기를 봅시다. 물고기의 몸은 물속에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미끈미끈한 비늘로 덮여 있습니다. 또 물고기는 몸속에 부레가 있어서 물속에서 잘 뜨도록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들은 주로 알을 낳아서 번식하는데 고등어는 한번에 50만개의 알을 낳습니다. 대구는 900만개의 알을 낳습니다.
연어는 강에서 부화하여 자라다가 생활은 바다에서 합니다. 그리고 산란기 되면 정확하게 자기가 태어났던 그 고향 강으로 되돌아옵니다. 수천 Km 떨어진 바다에서 살다가도 산란기가 되면 4년 전에 자신이 태어났던 그 강물로 정확하게 되돌아옵니다. 연어가 새끼였을 때에 그 주변의 물맛과 흙냄새의 정보를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가 4년이 지나면 정확하게 그 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알을 낳고는 좀 더 위로 올라가서 죽습니다. 그러면 그 알에서 나온 새끼 연어들이 위에서 떠내려온 엄마 연어의 시신을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그 새끼연어는 바다로 나갔다고 다시 4년이 지나면 또 그 자리로 정확하게 돌아와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그러면 또 그 새끼연어들이 엄마 연어의 몸을 먹고 자라서 또 바다로 나갑니다. 이런 기가 막힌 메카니즘(mechanism)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6. 여섯째날 하나님은 육축과 각종 곤충류와 짐승들을 만드시고 최후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곤충의 세계도 신비롭습니다. 벌들이 지어놓은 집들을 보십시오. 어쩌면 그렇게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정육각형으로 짓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얼룩말이나 펭귄은 다 그놈이 그놈 같습니다. 그런데 새끼들은 정확하게 자기 어미를 구별합니다. 얼룩말은 자기어미의 무늬를 보고 구별하고, 펭귄은 냄새를 통해 어미를 구분합니다.
사람의 인체 또한 신비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심장은 1분에 60~70회를 뛴다고 합니다. 즉 하루 동안에 10만 번, 일생동안 70살을 기준으로 26억 번을 뜁니다. 우리가 건전지를 사용해 보면 아무리 좋은 건전지도 한 달 정도 쓰고 나면 다 방전이 되어서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요즘 쓰는 핸드폰도 배터리 충전 안 시키고 이틀만 지나면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는 그 어떤 배터리도 없는데, 일생동안 하루도,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잠을 자고있는 동안에도 뜁니다. 충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70년 동안 뛰는 심장박동의 에너지를 합해 놓으면 그 힘은 30톤짜리 바위를 에베레스트 산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몸속에 super power 천연 배터리를 장착해 두셨습니다.
피아노에는 보통 88개의 키보드가 있어서 88개의 음을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귀에는 약 1,000개의 다른 음을 구분할 수 있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로 목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이 누군지 대강 압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완벽한 설계 가운데서 세상 만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과일만 해도 봄에는 자두, 앵두, 딸기, 여름에는 수박, 참외, 복숭아, 가을이면 포도, 감, 밤, 사과, 배, 겨울에는 귤. 꽃이나 채소도 철따라 모양과 색깔과 향기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아름답고 다양하고 colorful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보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하였습니다(시 8:2). 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보고도 누가 감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편 14:1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느니라.”
4.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본문에는 ‘가라사대’ 라는 말씀과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이 10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사람의 말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공자 왈, 맹자 왈. OOO 가라사대는 있지만 ‘그대로 되니라’가 없습니다. 사람의 말에 권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놀라운 권능이 있습니다. “가라사대 … 그대로 되니라”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잘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순종하지 않은 것은 유독 사탄과 인간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다 순종을 했기 때문에 각기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단과 인간만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불순종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22에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이여 제발 회개하시오. 우리는 말 잘 듣든데 왜 당신들은 안 들으세요. 제발 순종 좀 하시오”라고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들이 질서있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각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좋았더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하나님 자신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스럽고 웅장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세상이 한없이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으로 보입니다. 새가 지저귀는 것도 우는 소리로 들리고, 강물 흐르는 소리도 구슬프게 들리고, 바람소리도 스산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새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들립니다. 강물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이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들에 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조차도 다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 인생이 이처럼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만드실 때 하나의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우선 3일 동안 영역을 구분하셔서 만드셨습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셨고, 둘째 날 궁창과 바다를 만드셨고, 그리고 셋째 날 뭍과 채소와 과목을 만드셨습니다. 다음으로 3일 동안 그 영역을 주관할 주관자들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 빛을 주관할 해, 달, 별을 만드셨고, 다섯째 날 궁창과 바다를 주관할 새, 물고기를 만드셨고, 여섯째 날 뭍, 채소, 과목을 주관할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창조세계를 주관하고 관리하도록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하나의 창조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사람→세상만물이라는 질서와 조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질서 안에서 세상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은 실로 최고의 예술가이시며 그 지혜가 무궁무진하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나를 만드신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시다. 저희들이 나의 인생기초를 이 창조주 하나님께 놓음으로서, 뿌리깊은 인생, 의미있는 인생, 목표가 분명한 인생, 창조적인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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