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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개노래(050)-달빛과 풀벌레소리가 기도할 것이다
을해박해(1815년)가 일던 해에 신리성지 손자선 성인 생가가 지어졌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1849년에 그 집에서 손자선 성인이 태어났다.
성인의 생가는 교우촌인 황무실[1]을 머리에 이고 있다.
그 후 1865년부터 성인의 집에서 성 다블뤼 주교님이 잡히기 전까지 은거하였다.
병인(1866)·무진(1868)박해로 신리 주교님과 신부님들과 회장님, 그리고 손자선과 근방 교우들이 순교하면서 마을은 풍비박산이 났다.
주인을 잃은 성인의 생가는 들짐승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해를 거듭해도 주인이 돌아오지 않자 초가지붕은 굴창[2]이 나고 서까래도 하나 둘 썩어내려 앉았다.
왜정으로 토지등록제가 시작되자 눈치 빠른 이가 신리의 대부분 토지를 자기 소유로 돌려놓았다.
그 바람에 손자선 성인 생가와 집터도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한국순교자 75위 시복(1925)으로 고무된 합덕본당 백 비리버 신부님은 애쓴 끝에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터를 되찾았다(1927).
그 뒤로 2002년 신리성지에 서울 샬트르 수녀님들 세 분이 파견되기까지 생가는 몇 차례 개축과 수리를 거쳤다.
갈매못성지에서 소임하시던 권영옥 마리엣타 수녀님은 일흔하나에 신리성지 개발소임을 자원하였다.
김성산에서 김복원 방지거로 주인이 바뀐 민가를 대충 고쳐서 수녀원으로 사용했다.
권 수녀님은 서산본당소임을 하며 해미성지를 개발했고, 서울혜화동성당에 걸려 있는 103위 성인화(문학진作)를 제작하는데 힘 쓴 경험을 가지신 분이다.
하지만 손자선 성인 생가였던 신리공소강당은 세월과 홍수(1995)로 주춧돌이 가라앉고 기둥뿌리가 썩어가면서 기울고 있었다.
강당 마루는 파도가 치고 일부는 땅바닥에 닿아 있고 내벽은 빗물로 얼룩져 가고 있었다.
성 다블뤼 주교님께서 순교 전에 부모님께 보낸 서한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십자고상 곁에 누렇게 걸려 있었다.
천정 대들보에 먹물로 적힌 “天主降生 一八一五年(嘉慶二一年) 丙子 二月一八日 辰時 上樑”라는 글귀가 권 수녀님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수녀님은 이른 새벽에 자빠져가는 공소강당에 들어가 은인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마루바닥에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아예 부복하곤 했다.
마치 다미아노성당을 수리하던 아시시 방지거 성인 모습 같았다.
한 여름엔 털고무신에 검은 겨울수도복을, 한 겨울엔 낡은 구두에 회색 수도복을 입고는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순례자들을 맞았다.
그 순례자가 주교든 신부든 신자든 가리지 않고 강당마루에 세우고 성 다블뤼 주교님과 순교자들을 상기시킨 다음 십자고상에 큰절을 시켰다.
그렇게 한 해 여름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될 무렵 신리공소강당을 손자선 성인 생가로 복원해달라며 성금이 답지하였다.
하지만 손자선 성인 생가를 생전에 보았던 사람들은 다 죽고 없었다.
오직 오기선 요셉 신부님이 대전 대흥동본당 시절에 찍어 놓은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그 사진을 보며 성인의 생가 복원을 기도 중에 궁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리공소강당은 성인 생가의 주춧돌과 기둥과 대들보가 같았다.
생가의 초석과 뼈대를 강당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공소강당은 전례마루방과 판공 때 사용하던 구들방이 둘이 있었다.
사진과 문헌과 구전으로 볼 때 성인 생가의 본 모습은 부엌과 마루가 달린 방 둘에, 지하에 인쇄소가 있는 건너방 하나가 있었다.
그렇게 고증된 성인의 생가 복원을 위해 공소강당은 해체되었다가 다시 네 달 반 만에 현재처럼 복원되었다.
해체 과정에서 강당마루 밑에 죽어 미라가 된 개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권 수녀님은 그것도 모르고 그 마루 위에서 새벽마다, 날마다 엎드려 성지를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권 수녀님은 그믐달이 별과 손잡고 잠을 자는 새벽이든, 명을 다해가는 풀벌레가 울며 먹다만 풀잎을 덮고 자는 밤이든 그치지 않고 신리성지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례자들은 성지에 와서는 “그늘이 없다”, “앉을 데가 없다”, “식당도 없다”, “화장실이 구적거린다”, “장궤틀이 없는 조립식 성당이 덥고 춥고 불편하다”며 투덜거렸다.
권 수녀님과 다른 수녀님 한 분은 순례자들이 떠나고 나면 장화를 신고 화장실로 달려가 물청소를 하는 등 순례자들 맘이 상할까봐 노심초사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수녀님들이 밤이면 달빛과 풀벌레소리를 기도로 만들었고 낮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발자국을 찍어 길을 만들었다.
이제 그런 흔적도 강산이 한 번 변하니 사람들 기억 속에서 다 지워져 간다.
수녀님게서 의도했던 기도하는 성지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모해가고 있다.
요셉의 사적을 모르는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지우려 하듯이(탈출 1,8 이하), 커져버린 다른 성지들이 초심과 달리 변질되어 가듯이 신리도 순교자들로부터 멀어질 것 같아 마음이 협량해진다.
그래도 내년에도 또 이듬해도 봄·여름·가을·겨울 달빛과 풀벌레소리가 그 때 그 수녀님들로부터 배운 기도를 끊임 없이 바칠 것이다.
신리 순교자들이 그랬듯이 죽음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야 할 증언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말이다.
[1] 황무실 : 예산군 고덕면 고덕면 호음리 71번지와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번지가 맞닿은 지역이다. 석우리 1007-9번지에 황무실에서 사목하던 메스트르(1808-1857) 신부님과 랑드르(1828-1863) 신부님 묘가 있었고 지금도 석우리 산 148-9번지에 성물이 매장되어 있는 무명순교자들과 교우들의 묵묘가 산재되어 있다.
황무실에 대해 생소하여 덧붙이면,
1. 황무실은 대전교구 초기공동체 중의 하나로, 인근에 신해박해(1791-1793)로 홍주에서 동사순교(1793)한 원시장 베드로와 정사박해(1794-1800) 홍주에서 참수순교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이 거주했다.
2. 그 후 신유(1801), 기해(1839), 병인(1866), 무진(1868) 박해 등이 내포를 휩쓸 때도 황무실 교우공동체는 계속 보존되었다.
3. 1852년 조선에 잠입한 성 김대건 신부님의 스승 메스트르 신부님은 1853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1856년 새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으며 고아사업과 배론신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베르뇌 주교님이 조선 제4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후의 메스트르 신부님은 1857년 11월 초부터 충청도 내포 황무실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맡아 사목하다 과로로 쓰러져 그해 12월 20일 선종하였고 12월 25일 황무실에 묻혔다.
4. 베르뇌 주교님은 1861년 조선교구 전 지역을 8개 사목구역으로 구획하였다. 그 중 충청도 하부내포(홍주)를 ‘성모성탄사목구’로, 1857년부터 조선교구 부주교로서 한수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님에게는 충청도 상부내포(황무실)를 '성모왕고사목구'로 구획하였다. 메스테르 신부님이 선종한 후에 황무실 인근 사목을 1861년 조선에 입국한 홍 랑드르(J. M. Landre, 洪) 신부님에게 맡겼다.
5. 홍 랑드르 신부는 1861년 가을부터 황무실에 머물며며 가을판공을 치루었다. 랑드르 신부님은 1862년 9월 23일 페롱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보듯이 종부성사를 받을 만큼 중병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해 10월 중순 경에 회복되어 사목을 활기차게 펼치다 다시 1863년 봄에 중병을 얻어 9월 16일 황무실에서 선종하여 메스트르 신부님 곁에 묻혔다.
6.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 민 위앵 신부님은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여러 신부님과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위앵 신부님은 신리에 머물며 다블뤼 주교님한테 1865년 6월 18일 성체축일까지 조선말을 배운 뒤 황무실로 파견되었다. 위앵 신부님이 신리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로 갈 때의 그 감동을 이렇게 편지에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유럽에서 당신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그 후 위앵 신부님은 삽교천과 신리와 인접한 세거리 교우촌으로 와 사목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신리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님이 체포되자 위앵 신부님 오메르트 신부님과 함께 자수하여 황석두 루카 회장님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갖은 고문을 겪은 뒤 처형지가 갈매못 물가로 정해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30세 순교하였다.
7. 황무실 교우촌에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이름 없이 탄생시켰다.
8. 황무실에 있던 메스트르 신부님과 랑드르 신부님의 묘는 1970년 4월 30일에 합덕(舊合德) 본당 성직자 묘역으로 안장되었다가 2003년 4월 11일 대전가톨릭대학교에 있는 대전교구성직자묘역인 '하늘묘원'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9. 신리성지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아산만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들고, 조수가 드나드는 수로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가 있는 여사울, 신리, 황무실, 솔뫼, 덕산, 고덕, 홍주 등은 수로로 자연스럽게 연계되어 신속하게 복음이 전파 확장될 수 있었다.
10. 1890년 8월 조선교구장직무대행인 코스트(Coste, Eugene Jean George, 1842∼1896) 신부님은 황무실 공동체에서 뻗어나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715-24번지에 양촌본당(합덕본당 전신)을 설립하여 퀴를리에 신부에게 맡겨서 충청도 남서쪽을 관할하게 하였다. 또한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18번지에 간양골본당(공세리본당 전신)을 설립하여 파스키에 신부에게 맡겨 충청도 북동쪽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868년 무진박해 때 해미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이래 22년 만에 2개의 본당이 충청도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1. 대전교구 초기공동체가 있던 황무실은 1970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성당으로 이장하면서 교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다 돌보지 않는 사적지가 되어갔다. 성물들(십자고상, 묵주)을 땅 속에 간직한 무명의 순교자 또는 신자들의 묘들이 황무실을 지킬뿐이었다. 황무실은 외교인의 가족묘역으로 변해버렸다. 1970년 이전까지 합덕 교우들 중에 황무실 내력을 아는 열심한 교우들은 솔뫼성지처럼 황무실을 신앙선조들의 고향으로 여기고 자주 순례하며 신부님들과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다. 내가 어릴 적 교우들은 후손들에게 황무실이 간직한 사연을 들려주곤 하였다.
12. 황무실은 달레교회사나 관변문서에서 소위 상위 행정관할지인 '덕산' 또는 '홍주' 등의 지명 속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 박해시대에 황무실은 홍주목 덕산현 관할지로 면천군과 범천면(솔뫼)과 인접해 있었다.
13. 사리 때 바닷물이 만수가 되면 삽교천 구만포까지 배가 올라 갈 수 있을 때를 맞추어 홍주나 덕산 사람들이 배로 아산만과 서해를 거쳐 한강을 거쳐 서울 마포까지 왕래하였다. 하지만 조금 때 바닷물이 삽교천에 적게 들어오면 홍주나 덕산에서 황무실을 거쳐 현재 삽교천 방조제에 인접한 남원포까지 걸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서울을 오갔다. 그래서 황무실은 서울 교우들의 소식을 전해 듣기 쉬운 길목에 있었다.
14. 황무실과 그 인근에는 달레 교회사의 기록으로도 한국 천주교 초기인 1790년대에 순교하신 부터 신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 덕산 응정리(현재 성동리와 창정리 경계지) 출신의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와 원시보 야고보 (1730-1799년)
- 면천 여(현지명 미지) 출신의 방 프란치스코( ?-1799년)
- 면천에서 태어난 박취득 라우렌시오( ?-1799년)
- 덕산 관내에서 태어난 정산필 베드로( ?-1799년)
그 외에도 황무실 사람으로 직접적으로 기록된
- 황무실 태생 이보현 프란치스코 (1773-1800년)
- 면천 소약골(현재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에 쇠악골로 추정)에서 태어나 황무실에서 이단원(존창) 루도비꼬에게 영세 받은 유군명(유권명) 시메온
- 면천 양대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으나 황무실에서 회두하고 열심히 살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전 베드로 등이 있다.
달레교회사나 관변문서에 ‘내포’, ‘홍성’, ‘덕산’ 등 지방, 목, 군, 현의 지명과 관련된 순교자들 중에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황무실’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한 분들로 추정되는 분들이 있다.
또한 ‘내포’라는 지명은 주문모, 모방, 샤스탕 신부님, 앵베르 범 주교님의 사목 순회나 피신시 나타나고 있으며, 장 베르뇌 주교님도 1857년 편지에서 매스테르 신부님이 맡은 사목구역이 “좀 덜 고생스러운 구역”, 즉 ‘비교적 교세가 안정되고 사목하는데 필요한 질서가 갖추어진 곳’으로 조선 교회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잘 정비된 사목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황무실’은 한국 초기 교회부터 1866년 3월 30일 위앵 민 신부님(1836-1866년)이 갈매못에서 순교할 때까지 교구장들에 의해 계속해서 사제에게 맡겨진 신자공동체, 즉 사목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무실에는 한국천주교회가 은사로 간주하는 ‘초기교회 순교’라는 영감이 담겨 있고, 조선교회 역대 교구장들은 황무실 공동체를 줄곧 중요 사목지 또는 사목 거점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아 내포교회의 중심지였으며 한국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설립되는 ‘사목구 본당’의 전신 또는 예형이라 할 수 있다.
마침내 조선이 1876년 일본을 시작으로 1882년 미국에 이어 구미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줄곧 박해를 받던 한국천주교회에 신앙의 자유라는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선교사들만이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조미수호조약을 맺은 1882년에 한국 최초로 본당인 ‘종현 본당’(현재 명동 본당)이 설립된다. 그 후 제물포(1883년), 양평(1887년), 대구(1886년), 원산(1887년), 갓등이(현 왕림, 1888년), 풍수원(1888년), 전주(1889년), 부산(1889년), 전북 용안 안대동(1890년), 양촌(1890년), 간양골(1890년) 등지에 사목구로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내포교회 공동체의 태동지가 ‘황무실’이고 황무실 공동체가 지니는 순교사적 영감과 공동체성을 합덕 본당이 계승하고 있다.
[2] 굴창 : ‘고랑창’에 가까운 내포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