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겠어. 카페를 가야겠어. 집에선 아무것도 안 돼." 주다가 말했다.
"나도. 같이 가자. 나 지금 나가야겠다."
"나왔어?"
"주다야. 근데 있잖아, 나 사실.."
"빨리 말해."
"너네 집에서 엽떡먹고 싶어."
"아, 나 이거 해야되는데 지금?"
"그냥 너네집에서 공부하자."
"알았어."
"근데 너네 집 201호였나, 2호였나."
"202."
"왜 그건 맨날 까먹을까."
내가 방문한 주다의 집은 총 네 군데이다. 이렇게 보니 주다는 이사를 꽤 자주 다녔구나. 예전부터 주다의 집은 둥지와 같았다. 모든 친구 새들이 주다의 집으로 모여들곤 했다. 그만큼 주다네 집은 프리했다. 주다가 머무르는 집에는 모두 평화로움이 배어 있었다. 그건 집의 특성이 아니라 주다의 특성이었다. 주다는 여전히 짱구를 무지 좋아한다. 짱구를 볼 때마다 너무 자기같아서 놀란다고 한다. 주다가 짱구 영상을 보낼 때마다 나는 공감하며 배가 아프게 웃는다. 주다는 짱구 뿐 아니라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센도 닮았다. 주다의 집은 짱구네 집만큼 익숙하다. 못말리는 주다의 집에선 어떤 돌발행동도 허용된다. 나는 짱구를 보듯 주다를 본다. 없는 것 같다가도, 아직도 선명한 동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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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니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좋은 사람이 뭐야?”
“너 그런 거 물어볼거면 글에 다 써라.”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랑곳 않고 다시 물었다. 그녀에겐 끈질김이 없기 때문이다.
“어? 제일 좋은 사람.”
“나? 글쎄, 음... 도이.”
이리저리 굴려가던 답변의 정착지가 도이라니. 더 없이 좁혀진 세계관에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도이는 우리의 오랜 세계관 속 너무나도 핵심 인물이다. 그 세계관은 까마득한 유년 시절, 혹은 초등시절에 쓰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시절 간 우리는 서로의 특별함을 캐어내며, 서로를 운명이라 불렀다.
“도이? 왜?”
나는 알 것 같지만서도 물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도이가 좋은 애란 건 특히 우리 사이엔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녀의 생각이 듣고 싶어서 물었다.
“그냥, 도이는 좋은 애야. 사람이 여기서는 좋은 사람이고, 또 저기서는 썅년이고 그렇잖아. 근데 도이는, 그런 게 없어. 도이는 어디서든 좋은 사람이야.”
명백한 이유였다. 도이는 정말 그렇다.
난 도이가 아마 태어나서 아무것도 져버린 적이 없을 거라고 추측한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애꿎은 환경도, 누구라도 인상을 찌푸릴 인간도, 빛바랜 어떤 사물도 말이다. 그것이 지금 도이의 삶이다.
하지만 나는 도이가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정열도 알고 있다. 코어가 강한 도이는 잘 버티지만, 도이도 언제까지나 참을 순 없을 테니까. 만약 도이가 폭발한다면 그 폭발은 그 어떤 폭발보다도 거대하지 않을까. 무의식 속에 도이의 다른 생을 상상해본다. 그 때의 도이던, 지금의 도이던 나에게는 다 같은 도이일 것이다. 그 애는 소리 없이 울고, 소리 없이 웃는다. 사랑도 별 소리 없이 한다. 그 애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의 격차는 매우 작아서, 그 공간은 바다가 아닌 꼭 시냇물 같다. 그 대신 바다는 그 애의 마음으로 들어간다. 진해바다에서 태어난 그 애는 영원히 바다를 품고 살 것 같다. 그 애 안의 해안에 모든 소리가 즐비해서 그녀는 줄곧 소리 내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이가 지금 우리 곁에 없는 이유는 경찰이 되기 위해, 포항 바다 앞 이모 집으로 유학 겸 유배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수도 없는 싸움과 편가르기의 목격자로서 도이는 아무런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변화하는 기상을 방관만 했다는 말은 아니다. 도이는 바위처럼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킨다. 그 누가 어떻대도, 얼마나 파렴치하대도, 얼마나 미심쩍대도. 그럼 바위에 요상한 해초들이 달라붙어 그녀를 성가시게 할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린 말했다. ‘왜 그렇게 줏대가 없어? 넌 가만 보면 호불호라는 게 없는 것 같애.’ 그때마다 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 괴로움을 헤아릴 수 없다. 지금에서야 알게 될 뿐이다. 도이가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던 건지.
언제나 거기에 있는 그녀의 발은 모래에 묶인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을 돌아보면 바위 주변은 적당히 화사하기만 하다. 버팀의 미학, 그것이 그녀의 방식과 언어라고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각자가 지닌 언어들이 발효되어 비로소 각자의 비법이 되는 순간들은 알맞게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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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럼 제일 나쁜 사람은 누구였어?”
“제일 나쁜 사람? 생각 안 나는데. 너는?”
“음, 나도. 근데 난 가끔 나쁜 사람들이 좋아. 나쁜 게 꼭, 나쁜 건가? 나쁨이 나쁨의 극치는 아니잖아.”
“아냐, 나아-쁜 게 있어, 분명 있어. 아, 난 사람 속이는 사람!”
“왜? 너 속았어?”
“내가, 편의점 보이스피싱을 당했잖아.. 야, 사람 속이는 거는 진짜, 진짜, 제일 나쁜거야. 어? 거짓말하는 거.”
“아..”
괜히 숙연해졌다. 나는 내 앞에 얘가 뭘 해도 웃긴 편인데, 이 얘기가 나올 때만큼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다. 웃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다는 작년 한파 때, 나쁜 일을 겪었다. 그녀는 당시 열심히 돈을 벌고 있었다. 주간이든 야간이든 가리지 않고 편의점 알바를 섭렵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한 사기꾼에게 90만원을 갈취당했다. 나는 당시를 회상한다. 이젠 어렴풋하니, 시간이 꽤 지난 게 다행이었다. 매섭게 추웠던 겨울 날, 다짜고짜 단톡방에 나 사기당했다는 메세지가 왔었다. 편의점 본사를 사칭해서 전화가 왔단다. 매장이 90만원 상당의 피해를 입었단다. 그걸 배상하느라 지금껏 번 알바비가 다 물거품이 될 것 같다고 했다. 편의점 사장이 이전에 보이스피싱 조심하라고 당부를 했었단다. 막상 그 상황이 오니 너무나도 사기꾼의 말을 잘 듣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고 말하던 그녀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 때 그녀는 정말로 상처를 입었었다. 그녀가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친구를 잃었을 때, 부모님과 대판 싸우고 집을 나왔을 때보다 더 눈에 보이는 상처였다.
“그럼 사람 패는 것보다 그게 나빠?”
“어. 그게 나빠. 왜인 줄 알어? 속으면, 속은 내가 잘못이 돼.”
“야. 그게 어떻게 니 잘못이야..”
“맞으면, 위로받을 수 있어! 그래, 저 새끼가 나쁜놈이야. 괜찮아, 괜찮아.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어. 근데 속으면, 내가 나를 바라봐. 속은 나를 탓하게 돼.”
“넌 정말 경험으로 체득하며 사는구나.“
주다는 정말 경험으로 체득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주다가 나에게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첫 번째로 말해준 장점은, ‘넌 잘 주고 잘 받는 사람이야.’, 였다. 주다는 이번 학기가 개강하고 춘천으로 갔다. 가서 친구도 사귀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한다면서 기대를 잔뜩 안고 떠나던 그녀의 기분은 정점이었다. 그렇게 집을 떠났던 주다는 두달 뒤 다시 본가로 내려왔다. 며칠 전,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간만에 마주한 그녀의 근황은 ‘나 지금 택시비를 아끼려고 40분을 걸어 춘천 터미널로 걸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주다는 그동안 기분이 너무 좋아서 돈을 다 썼다고 했다. 용돈까지 다 쓰고, 돈이 없어서 쫄쫄 굶다가 집밥이라도 먹고 싶어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포기가 빠른 주다는 자꾸만 중간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거나 택시를 타고 싶다고 말했지만 끝내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잘 주고 잘 받는 주다는 이제부턴 돈을 아끼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으로 살아갈 거라고 말했다. 작년, 생일도 아닌 인영이에게 고가의 헤드셋을 선물한 주다는 오늘 인영이에게 떡볶이값을 나눠내자고 했다. 인영이는 주다의 동생이다. 주다의 몸과 마음은 정말 가깝게 연결되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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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지막, 제일 이상한 사람은 누구야?”
“음, … 연동섭이라고 중학교 때 같은 반이던 애.”
“왜?”
“아 아닌가, 근데 걔가 꽤 멀쩡한 여자애랑 사귀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여자애도 이상한 걸 수도 있어.”
“아니야, 걘 정말 괜찮은 애야.”
“그래서 왜 이상하다는 건데?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설명을 못 하겠어.”
“예시라도 있을 거 아냐. 에이 그럼 패스, 걔 말고 또 이상한 사람.”
“너.”
“나? 왜? 흐흐, 이상한 거의 기준이 뭐야?”
“그냥, 남들은 잘 안하는 짓을 한다거나, 그런거지. 아, 그리고 소정이도 이상해.”
“그냥 다 이상한 거 아냐?”
“어, 맞어. 예화도 이상해. 시진이도 이상해. 야, 지우도 이상하다.”
“근데 그거 알아? 니가 방금 이상하다고 말한 사람들, 다 너 이상하다고 말한 적 있다. 나도 니가 참 이상해”
주다가 할 말을 잃고 막 웃었다. 주다가 나에게 장점을 물어본 날, 자신의 가족들은 도무지 도움이 안 돼서 나에게 물어보는 거라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깔깔 웃으며 그 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야 있잖아, 인영이는 내 장점이 발상이 특이한거래.”
“그래? 왜?”
나는 괜히 알 것 같은 기분에 미리 웃음을 장전하고 물었다.
“아니 내가 예전에 인영이랑 있을 때, 전등에 하루살이가 몰려있던 걸 보고 은영이한테 ‘으으으, 야, 전등 간지럽겠다!’ 이랬대. 그래서 발상이 특이한 게 내 장점이래. 엄만 뭐래는 줄 알어? 내 장점은 긍정적인거래. 하루는 내가 엄마 술 마시는 거 보고 지나가면서 ‘엄마 알콜 중독이야?’ 하고 물었는데, 그건 원래 심각한 일인데 겁나 해맑게 물어봤다고 내가 긍정적이래.”
나는 그녀가 생생히 떠올라 깔깔 웃었다. 모두 그녀의 장점이 맞았다. 내가 주다에게 빠져들었던 이유들이기도 하다. 나는 주다의 두 번째 장점을 이렇게 말해주었던 것 같다. ‘너는 네 이야기가 뚜렷하게 있어서 뭔갈 물어봤을 때 하나의 관점으로서 도움이 돼.’ 오늘도 주다의 장점은 발휘되었다. 주다와 난 몇 달 사이에 한 두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다. 서로가 머무르는 곳이 달라서이다. 하지만 주다와 나 사이에 시간은 무색하다. 우리는 서로의 모든 걸 다 알기에 함께하는 사이가 아니라, 아무리 몰라도 되는 사이라서 그렇다. 그날 밤 우린 대학생처럼 공부를 하다가도, 18살처럼 배터지게 먹고 7살처럼 슈가슈가룬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