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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2023. 12. 2 토요일. 서울대교구청 3층 대회의실 14~18시
제1차 심포지엄 일정
개회사 구요비 주교(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제1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 탄생에서 선교사 임명까지
허보록 Philippe BLOT 신부(파리외방전교회 부지부장)
제2주제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제3주제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최병욱(강원대학교)
제4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 검토
조선교회 구성원들의 입장과 반응을 중심으로
방상근(교회사연구자)
제5주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종합 토론
좌장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역사와고문서전문가위원회 위원장)
토론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박광용(가톨릭대학교)
장정란(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폐회사 박선용 신부(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교구장
시복시성 기도문
모든 성인들의 덕행으로 찬미와 영광 받으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성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성인성녀들을 공경하여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나이다.
조선 선교를 자청한 뒤 온갖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선에 들어가 선교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온 삶을 봉헌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저희들이 거룩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신망애 향주삼덕에 뿌리를 박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공로로 저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시며
저희의 마음속 지향을 들어 허락하심으로써
(잠깐 침묵 중에 기도의 지향을 아뢴다.)
당신 권능을 드러내시고 저희가 희망하는 대로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가 복자와 성인들 대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08. 7. 1.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인준
2023. 3. 23.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수정 승인
제3주제
최병욱(강원대학교)
1. 머리말
2. 박해 시기의 천주교 선교와 중국 교회 상황
3.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과 수도회 간의 분쟁
4. 맺음말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조선대목구 설립 전후의 중국 교회 상황
1. 머리말
이 논문은 조선대목구 설립(1831년) 전후의 천주교 선교와 중국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arthélémy Bruguière) 주교가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험난한 과정이 그의 신념과 의지가 아니라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먼저, 아편전쟁 이전 청조(淸朝)가 천주교를 매우 엄격히 박해하던 시기의 천주교 선교와 중국교회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옹정(雍正)과 건륭(乾隆) 시기에 이어 가경(嘉慶) 시기(1796~1820)에 들어서 청조의 금교(禁敎) 정책은 더욱 엄격해졌고, 이러한 상황은 아편전쟁 이전까지 이어졌다.
흠천감(欽天監)을 비롯해 그나마 관직을 유지하며 버텼던 북경(北京)의 선교사는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 세라(Serra, 高守謙), 피레이라(Pires Pireira, 畢學源)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동당(東堂)과 북당(北堂)으로 대표되던 성당은 파괴되거나 청조에 의해 폐쇄되었고, 북경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 선교사는 서만자(西灣子)를 중심으로 그나마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선교 활동을 유지하였다.
당시 마카오는 중국 내지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를 연결해 주던 거점이었는데, 청조는 이 거점루트에서 발각되는 중국 신자들을 체포하여 신강(新疆)이나 흑룡강(黑龍江)으로 유배 보내 노예로 삼았다. 심지어 청조는 마카오-포르투갈 당국에 중국인의 천주교 신앙 금지를 계속 알렸고, 내지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을 고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선교사에 대한 박해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체포되어 추방되거나 지방 당국에 의해 처형된 예도 종종 발생했다.
‘사천(四川) 시노드’로 유명한 파리외방전교회의 뒤프레스(Gabriel-Taurin Dufresse, 徐德新, 1750~1815) 주교는 1815년에 순교했으며, 아편전쟁 전야인 1839년에 호북(湖北)에서 선교하던 라자로회의 페르부아르(Jean-Gabriel Perboyre, 董文学, 1802~1840) 신부는 체포되었고, 이듬해 순교했다.
이러한 청조의 엄격한 금교(禁敎) 정책에도 불구하고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중국 전역에서 비밀리에 이뤄지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중국인 신부들의 활약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교회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선교의 지속성과 가족을 통한 전파, 그리고 선교의 자립성 강화이다.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교인의 수는 크게 감소하지 않았고, 비밀리에 가족 집단을 통해 전파되고 있었으며, 선교 주체인 사제가 외국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외국인 선교사가 공개적으로 교회의 세속적 사무의 직책을 수행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교 시기 중국인 성직자들이 본국의 선교 사업을 활발히 전개할 때인 1795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에 들어와 활동했으며,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준비를 위해 1834년 조선에 들어왔던 여항덕(余恒德) 신부의 활동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던 수도회 간의 분쟁과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다룰 것이다. 그것은 수도회 내부에서의 국적이 다른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미 이러한 예는 청나라 초기 예수회 내부에서의 프랑스 선교사와 포르투갈 선교사와의 알력에서도 나타났었다. 특히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여전히 유효했던 19세기 초에 보호권을 시행하고자 했던 북경의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간의 갈등, 나아가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조선대목구 선교사의 갈등은 페레올(J. Ferréol, 高, 1808~1853) 주교의 경우에도 드러나듯이 첨예한 문제였다.
결국 당시 중국의 천주교 선교와 교회 상황, 청조의 천주교 박해, 수도회 사이의 분쟁, 선교 보호권 문제 등 다양한 원인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으로의 여정은 매우 험난했다고 볼 수 있다.
2. 박해 시기의 천주교 선교와 중국 교회 상황
청대(淸代) 중국의 최고 통치자들은 황제의 권력과 통치 질서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선교사의 과학기술 재능을 받아들였고, 천주교 신앙 자체는 수용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황실 종친과 만주 기인(旗人)들이 천주교에 입교하기도 했지만, 금지와 박해 시기에서 천주교 신앙을 유지해 온 가장 큰 힘은 평민층이었다.
따라서 청조의 금교 정책으로 통치자와 관료 사대부들을 끌어들이기 어려웠던 선교사들은 선교 대상을 바꾸고 서민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주력해야 했다.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阿片戰爭) 이전 중국 천주교 선교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명조(明朝) 말기에서 청조(淸朝) 강희(康熙, 1661~1722) 초까지이다. 이때는 중국 황제들의 지지 혹은 묵인 속에서 천주교 전파가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강희 후기부터 건륭(乾隆, 1736~1796) 시기까지로, 이 단계는 청조의 금교 정책으로 천주교 전파가 어려워졌고 신자 수도 정체된 시기였다. 천주교가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강희 초까지 비교적 전파가 순조로웠던 것은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합유(合儒)’, ‘보유(補儒)’라는 적응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 과학기술을 매개로 하여 관료 사대부층을 끌어들여 이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례논쟁으로 중국 관료 사대부들의 천주교에 대한 열망이 낮아졌고, 천주교의 중국 전파는 그 보호막을 잃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가경(嘉慶, 1797~1820) 시기에서 아편전쟁(1840~1842) 전까지이다. 이 시기는 이전 시기와 비교해 천주교 선교를 더욱 엄격히 금지했던 시기였다. 이 단계에서는 천주교 금지를 청조의 법률적 조항에 넣어 사교(邪敎)의 위치까지 비정했던 시기였다. 특히 가경 연간에 들어 청조 측의 천주교 강경 탄압 일변도의 법령이 제정되고 천주교 측에서는 중국 전통 배제 위주의 ‘사천 시노드 교령’이 충돌하면서 이전의 건륭 시대와 같은 ‘황제의 은혜’로 선교사를 사면해 주는 등의 특혜가 존재 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없어졌다.
서양 선교사의 북경 황실에서의 흠천감 봉직도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의 천주교 금지와 박해 시기에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중국 전역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중국인 신부들의 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 선교의 지속성
청대(淸代) 천주교 전파의 한 가지 특징은 선교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청조의 엄격한 금교 시기에도 천주교는 민간에 끊임없이 전파되었다. 일반적으로 옹정제(雍正帝)가 천주교 금지를 명령한 1724년 이후부터 아편전쟁 전까지 청조는 120여 년간 공식적으로 금교 정책을 유지한 것은 분명하다.
이후 아편전쟁 이후 열강, 특히 프랑스의 강요에 의해 중국인들의 천주교 신앙 금지를 해제하였고(1846년), 천주교 신앙 자유와 선교 자유가 1858년 천진(天津)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 체결에 의해 합법화됨에 따라 천주교 선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금교 시기에는 천주교 선교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보는데, 비록 신자 수는 정체되기는 했지만,1) 오히려 이 시기에 중국 천주교는 자체적인 발전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1724년 1월 12일(옹정 1년 12월 17일), 예부는 금교(禁敎)를 청해 옹정제의 비준을 받았으며, 이는 청나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전면 금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금교 정책 선포 이후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청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내지(內地)에 들어가 선교했다. 1746년(건륭 11)과 1784~1786년(건륭 49~51) 두 차례의 대규모 교안(敎案)을 통해 20여 명의 서양 선교사가 체포되었다.
청조는 서양 선교사들의 내지 잠입 선교에 풍습이 해롭다는 이유로 수차례 입건해 체포했지만, 선교사의 내지 선교는 근절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815년(가경 20) 사천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뒤 프레스(Gabriel-Taurin Dufresse, 徐德新)를 체포했고, 같은 해 호남에서 난트루아(Francesco Maria Lantrua, 藍月旺)를 체포했는데, 모두 “서양 오랑캐로 내지에 잠입하여 여러 성에 들어가 선교하고 다수를 선동하여 유혹해 불법이 극에 달했다.”2)는 죄목이었다. 아편전쟁 전야인 1839년(도광 19)에도 청조는 호북(湖北) 곡성현(穀城縣)에서 수년간에 머물며 선교한 라자로회 선교사 페르부아르 신부를 체포했고, 그는 1840년 순교했다.3)
이렇게 옹정제의 금교 정책 반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내지에 체류하며 선교 활동에 나섰고, 민간 사회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의 수도 계속 유지되었다. 천주교 금지 정책이 건륭 시기보다 엄격했던 가경 시기에도 천주교의 선교 활동은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1811년(가경 16) 에 당시 사천 총독(四川總督) 상명(常明)의 상주에 따르면, 사천 거현(渠縣)과 파현(巴縣) 지방에서만 관청의 권유로 출교한 천주교 신자가 2천여 가구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12년에는 200여 가구가 추가로 출교하였다.4)
1815년(가경 20)에 이르러 사천 의빈(宜賓) 등지에서 천주교 신자 주영(朱榮), 동오(童鰲)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는데, 신자 811명을 찾아냈다. 같은 해 “각 주현에서 천주교 신자 당백후(唐伯猴) 등 57명을 체포하고 아울러 스스로 배교한 장인(張仁) 등 341명을 체포했다.” 두 사건만 합쳐도 1년 동안 사천에서 1천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가 적발된 것이다. 이는 청나라 금교 시기 사천 지역의 수만 명의 천주교 신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5)
여기서 거론한 청조의 사천 지역 천주교 박해 사건은 일부 정황만을 반영할 뿐 청나라 초기 민간 사회의 방대한 천주교 신앙 활동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옹정제가 정식으로 금교령을 내린 지 거의 1백 년이 지난 후에도 민간에서는 천주교 신봉자가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실제로 민간에서 여전히 성행하던 천주교 신앙 활동에 대해서 지방 관아에서도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11년(가경 16) 어사(御史) 감가빈(甘家斌)은 가경제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천주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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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00년에 30만 명에 달했던 천주교 신자는 1800년에는 21만 5천여 명으로 줄어들 만큼 정체되어 있었다. 중국의 천주교 신자는 1870년대에 가서야 30만 명이 넘어섰다(顧保鵠 編著, 『中國天主敎史大事年表』, 臺中: 光啓出版社, 1970, 38·55·65쪽).
2) 中國第一歷史檔案館 編,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Ⅲ, 北京: 中華書局, 2003, 1067쪽. 뒤프레스 신부는 사천에서 1815년에 순교하였고, 난트루아 신부(가경[嘉慶] 당시 문건에는 난월왕[蘭月旺]으로 표기함)는 1816년에 호남(湖南)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모두 2000년 성인품에 올랐다.
3) 페르부아르 신부는 중국 순교자 중 최초로 1996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4)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Ⅱ, 909-910·986쪽.
5) 사천 지역의 선교권은 1702년 교황청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위탁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1770년 사천의 천주교 신자는 12,000명이었고, 1792년에는 25,000명, 1840년에는 64,912명에 달했다(劉志慶‧尙海麗, 『天主敎修會在華傳敎士硏 究』,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23, 191쪽).
6) 張先淸, 「淸前期天主敎在華傳播特徵分析」, 『世界宗敎硏究』, 2006-3, 5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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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로 유입된 후 “광동(廣東), 섬서(陝西), 사천, 호광(湖廣), 산동(山東), 산서(山西), 직례(直隷) 등 지역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모두 퍼져 있습니다. 수사를 계속하고 있지만 끝이 없습니다.”7)라고 밝혔다.
결국 조정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널리 퍼져 있어 수색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할 수밖
에 없었고, 각 지역에 정부의 금교령을 널리 퍼트려 신자들이 스스로 자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이 금교령에 겁을 먹고 배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천주교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예를 들어, 1836년(도광 16)에 직례(直隸) 선화부(宣化府) 선화현(宣化縣)에서 체포된 유서림(劉書林) 등은 조상 대대로 천주교 신앙을 이어왔었는데, 1817년(가경 22)과 1824년(도광 4)에 지방 관아에 적발되어 “배교하면 죄를 면해 준다.”고 했으나 다시 신앙생활을 이어오다가 체포된 것이다.8)
금교 시기에 민간에서의 이러한 천주교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청나라 금교 시기 천주교 전파의 이러한 특징은 신자 수의 증가로 나타난다. 최근 서양 문헌을 바탕으로 작성된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신자 수의 증가를 수치화한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청조의 금교 시기 동안 오히려 신자 수가 서서히 증가했음을 보여준다.9) 가경 연간에는 천주교가 엄격히 금지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천주교 신자 수는 20만 명을 돌파하고 있다.
1724년에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금교를 시작한 지 한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천주교 신자 수는 급감하기는커녕 적지 않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금교 시기에도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 활동이 계속 진행되었으며, 천주교 신자 숫자의 증가로 볼 때 여전히 전례 없는 정점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2) 가족을 통한 전파
금교 시기 천주교 전파의 또 다른 특징은 상당수의 교인들이 조상 대대로 신앙을 유지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즉 청조의 엄격한 천주교 금지 정책으로 인해 조상 대대로 가족을 통한 전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가족들의 신앙 기간으로 볼 때 천주교 신앙의 역사가 짧아 조부 때부터 입교한 2~3대에 속하는 가문이 많았다가 시기가 지나서는 이들 가족의 신앙이 계속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784년에 체포된 서안(西安) 사람 초진강(焦振綱) 가족은 5~6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0) 이 가문은 명나라 말기부터 신앙을 유지한 천주교 가문이었다.
또한 금교 시기의 특성상 비밀리에 신앙이 유지되기 때문에 천주교 신앙생활을 유지한 가족의 규모가 작은 경우들이 많았다. 건륭·가경 시기에 사천성 파현(巴縣)의 하씨(何氏) 가족은 조부 하종명(何宗明)이 천주교에 입교한 후 아내와 자녀, 손자들이 모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이다. 이들이 관아에 발견되었을 때 약 20여 명의 가족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물론 신앙생활을 유지한 규모가 큰 가문도 있었다. 1823년 관아에 적발된 사천 낙지현(樂至縣) 유씨(柳氏) 종족이 그 예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수는 약 70~80명에 달할 정도로 비교적 큰 가문이었는데, 조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져 왔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모두 유씨 가문이며 다른 외부 가족은 없었다. 선조가 남겨준 경권(經卷)과 성물 등 천주교 의례에 필요한 물품은 가문의 연장자 유사곤(柳嗣坤)이 관리하였고, 그의 주관 하에 가족들은 경권과 성물을 이용하고, 매월 7일째 되는 날의 1, 2일에 집에서 경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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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Ⅱ, 911쪽.
8)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Ⅲ, 1210~1212쪽.
9) Nicolas Standaert, e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China, Volume One: 635-1800, Leiden; Boston; Koln; Brill,
2001, pp. 382-383(張先淸, 앞의 논문, 56~57쪽 재인용). 일반적으로 1700년의 중국 천주교 신자는 3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 데, 이 연구에서는 20만 명으로 잡고 있다.
10)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Ⅰ, 404~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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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예배하며 천주교 신앙을 이어갔다.11) 금교 시기 이러한 가족 중심의 천주교 신앙생활을 유지한 사례는 농촌 지역의 천주교 신앙을 공고히 하고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의 유지는 만주 기인(旗人) 사회에도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 진 소노(蘇努) 가문이 대표적이다. 소노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4세손으로 옹정제와 형제 항렬이다. 소노가 천주교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아들들이 입교한 것으로 고초를 당하자 천주교를 원망하며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12) 그 자신은 천주교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족은 대다수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옹정·건륭·가경 시기의 금교 시기동안에도 천주교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다. 예를 들어 1805년 소노의 증손인 도흠(圖欽), 도민(圖敏)이 몰래 천주교를 믿다가 붙잡혀 징계를 받았다. 아편전쟁이 발발했던 1840년에는 소노의 4세손 도흥아(圖興阿), 5세손 문관(文寬), 문총(文寵), 문경(文磬), 문서(文瑞), 문귀(文貴), 문령(文齡) 등이 평소에 천주교
를 믿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13)
소노 가문 외에도 청나라 기인들 중 대대로 천주교 신앙을 유지한 가문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1805년(가경 10) 동란(佟瀾)이 체포된 사건이다. 동란은 정남기(正藍旗) 소속으로 그의 공술에 의하면, 자신의 선조 동사상(佟士相), 아버지 동복구(佟福俱)가 모두 천주교를 믿었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입교하여 늘 천주당에 갔으며, 자신의 아내와 딸도 모두 입교했는데, 출교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14)
동란 가족은 적어도 4대에 걸쳐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에, 천주교는 그 가정에 깊이 파고들어 붙잡힌 후 엄중한 처벌을 받고도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3) 선교의 자립성 강화
청나라 금교 시기 천주교 전파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선교의 자립성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선교 주체인 사제가 점차 외국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청조가 금교 정책을 실시한 후 서양 선교사들은 대부분 추방되었다. 비록 일부 서양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내지에 들어가 선교했지만, 중국에서의 서양 선교사들의 수는 이전 세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옹정제가 천주교 금지 정책을 실시했을 때 북경의 천주교는 “신자가 병이 위독할 때 오로지 중국인 신부 라(羅), 진(陳) 두 사람만이 비밀리에 병자성사를 했을 뿐이다.”15)와 같은 상황이었을 정도로 금교 초기에 중국인 신부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또한 1728년 북경에 남은 사제는 외국인 주교 1명, 신부 6명이었는데, 그중 중국인 신부가 3명이었다. 건륭 후기였던 1780년 이후 사천 지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 라자로회,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했는데, 당시 중국인 신부가 33명이었다.
또한 1804년에 18명의 중국인 신부가 있었지만 서양인 선교사는 4명에 불과했다.16)
금교 시기에 중국인 사제들은 선교 활동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국 천주교회 내 성직자 구성도 초기 외국인 신부 위주에서 점차 중국인 신부 위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서양 문헌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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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Ⅲ, 1177~1178쪽.
12) 嚴嘉樂 著, 從林·李梅 譯, 『中國來信(1716~1735)』, 鄭州: 大象出版社, 2002, 58쪽.
13)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Ⅲ, 1010·1276쪽.
14)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Ⅱ, 844쪽.
15) 樊國梁(Favier), 『燕京開敎略』 中篇, 北京: 救世堂, 1905, 64쪽.
16) 賓静, 「雍乾禁教時期的華籍天主教神職人員」, 『世界宗教研究』, 2007-2, 124~125·128쪽. 1781년(건륭 46)에 3명의 중국 신학생이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그들은 조영(趙榮), 장약한(蔣若翰), 양안덕(楊安德)이다. 이들은 모두 사천(四川)과 귀주(貴州)에 배치되어 선교에 나섰다. 그중 조영 신부는 1815년에 순교하여 2000년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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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에 의하면, 옹정·건륭 시기에 중국 각지에서 선교에 나섰던 중국인 예수회 신부가 108명이고, 수사가 24명이었다.17) 예를 들어 1815년에 중국에 있던 77명의 사제 중 중국인 신부가 56명에 달한 반면에, 서양인 신부는 21명에 불과했다.18)
중국인 신부들은 외국인 신부들과 달리 현지 사회의 규범과 문화를 잘 알고 있으며, 선교 과정에서 대중과의 소통이 편리하고 교리를 잘 이해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중국 신부는 숨기도 쉬웠는데, 금교 시기에 큰 교안이 발생해 신변이 위험에 처해 있었지만 성사를 행하고 신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인 신부들의 덕분이었다.
중국인 사제들은 외국인 선교사를 돕거나, 혹은 단독으로 선교했는데, 금교 시기에 중국 천주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힘이 되었다.
따라서 이 특별한 선교 기간 동안 지역 성직자 양성이 점점 더 시급해졌다. 중국 천주교회는 서양 선교사의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인 성직자의 양성 및 훈련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경 천주당, 마카오와 사천, 복건(福建) 등지에는 중국인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개설되어 있었다. 또 일부 중국인은 시암(Siam, 현재의 태국), 루손(Luzon, 현재의 필리핀 마닐라), 심지어 유럽의 수도원에서 신학생 교육을 받았다. 이들 본토 및 해외에서 양성된 중국인 사제들은 금교 시기 중국 천주교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이들은 천주교의 현지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9)
당시 일부 중국인 사제들은 라틴어를 알고 외국에서 신학생 교육을 받아 외국인 선교사와 쉽게 교류할 수 있고 중국 상황도 잘 알고 있어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각지에서 선교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파트너였다. 예를 들어, 건륭 시기에 나폴리 성가정(聖家庭)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중국인 채(蔡) 베드로(Peter Zay)는 여러 차례 장방(賬房, 사무처) 신부가 그에게 부탁한 선교사를 안전하게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데 성공했다.
같은 신학교에서 온 또 다른 중국인 이(李) 필립(Philip Licu)은 유럽인 4명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섬서(陝西)의 수도인 서안(西安)으로 데려다주는 임무를 수행했다.20) 또한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로 임명된 여항덕(余恒德, 유 파치피코) 신부 역시 나폴리 성가정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준비하기 위해 사전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Penang) 신학교의 중국인 신학생이었던 왕 요셉을 안내자로 삼아 조선을 향해 떠날 수 있었다.21)
반면 중국인 성직자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맡는 막중한 임무를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옹정제가 금교 정책을 선포할 때 흠천감에서 봉직했던 선교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추방했다. 당시 북경에 남은 서양 선교사가 외지로 나갈 수 없어 중국인 예수회 신부들을 보내 신강(新疆)으로 유배된 천주교도 종친 소노(蘇努)의 가족을 찾아가 받은 구호금을 전달하고 그 가족에게 성사를 집전하도록 했다.22)
이 밖에 중국인 사제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을 도와주거나 교회와의 관계, 즉 서신 전달, 그들이 내지로 진입하여 선교하는 것 등을 도와주는 등 간접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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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賓静, 위의 논문, 128쪽.
18) 張先淸, 앞의 논문, 62쪽.
19) 賓静, 「清朝禁教時期華籍天主教神職人員的國外培養」, 『世界宗教研究』, 2015-6 참조.
20) 龍思泰(Anders Ljungstedt) 著, 吳義雄 等譯, 『早期澳門史』, 東方出版社, 1997, 207쪽.
21) 이영춘,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문제 및 조선 대목구 설정에 관한 연구」,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엮음, 『민족사와 교회사』,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93~199쪽.
22) 費賴之(S.J. LE P. Louis Pfister) 著, 馮承鈞 譯,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下, 北京: 中華書局, 1995, 6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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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신부들은 단독, 혹은 사람을 데리고 각지로 선교하러 가서 현지의 새로운 신자를 위해 세례를 주고 각종 성사를 주관하고 천주교 교리를 전파함으로써 교인들을 안위하고 독려하였다. 내지 선교의 과정 중에 중국인 신부들은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의 고해를 받았으며, 혼배식을 주관했다.
이 밖에 교회의 세속적 사무의 직책을 책임졌다. 이러한 일들은 외국인 선교사가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교 시기 중국인 성직자들이 본국의 선교 사업을 활발히 전개할 때인 1795년(건륭 60)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야고보)가 조선에 들어와 선교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 성직자라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선교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개된 성당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 선교 활동은 비밀스럽게 지하활동으로 전환하여 현급(縣級) 이하 사회 기층에 숨어 신자들의 자택에서 성사를 올리고 미사를 지냈다.
한편, 천주교 신자들은 탄압을 피해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로 집단 이주하여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호북(湖北) 양양부(襄陽府) 곡성현(穀城縣)의 마반산(磨盤山) 공동체가 있다. 마반산 천주교 공동체는 양양부 일대의 천주교도들이 탄압을 피해서 산악지대로 집단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 파르냉(Dominicus Parrenin, 巴多明, 1665~1741) 신부는 마반산 천주교 공동체를 확장하기 위한 토지 매입 임무를 현지 천주교도 생원에게 맡겼다.
이곳의 천주교도들은 매우 곤궁하게 지냈지만 공동 노동으로 산비탈 경작지 개간 작업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갔다. 교리 교사가 파견되어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고 공동체의 규칙을 제정하게 하여 노동과 신앙에 질서가 생기게 했다. 공동체가 커지자 천주교 가운데 몇 명이 교리 교사의 인도를 받고 공동체 지도자로 육성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도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자 1731년에 예수회 선교사 라브(Joseph Labbe, 胥孟德) 신부가 1년간 상주하며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했으며, 또한 1740년에 예수회 선교사 노이비알레(Neuviale, 紐若翰) 신부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며 함께 거주했다. 천주교도들은 『일과(日課)』를 사용하면서 매일 저녁 천주교당에 모여서 공동으로 기도 경문을 외웠다.
라브 신부가 활동했을 때 마반산 천주교 공동체의 구성원은 600여 명에 달했다.23)
옹정·건륭 시기 중국인 사제들은 선교 활동을 위해 외국 교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았다.
1784~1786년 건륭 대교안(大敎案) 때 체포된 중국인 신부들은 대부분 외국 교회로부터 선교 비용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1785년 1월, 섬서에서 체포된 유서만(劉西滿)은 지난 10여 년 동안 마카오에서 서안(西安)으로 자금을 부치면 유슬약(柳瑟約)에게 전달했다고 자백하였다. 또한 1785년 산동에서 체포된 주행의(朱行義)는 35세에 복건으로 돌아와 서양인이 주는 은(銀)을 가지고 살았으며, 산동 덕주(德州)에 도착한 후 매년 강서(江西) 공주(赣州)에서 곡물선 조타공 마서만(馬西滿)으로부터 보내준 돈을 받았다고 밝혔다.
감숙(甘肅)에서 체포된 중국인 신부 유(柳) 도미니코는 매년 서양인이 보내준 돈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점차 외국 교회들은 선교 비용을 현지 천주교 신자들이 내도록 권고하기 시작했다. 이미 1781년에 이르러 중국인 신부는 중국 천주교도의 자금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선교회 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다.24)
중국인 선교사 외에도 금교 시기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 사람들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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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준갑, 『건륭제와 천주교』, 서울: 혜안, 2021, 130~132쪽. 중국 천주교회의 첫 성인품에 오른 페르부아르 신부도 마반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마반산의 천주교 역사에 대해서는 康志傑, 『磨盤山天主敎歷史硏究』, 宗敎文化出版社, 2019 참조.
24) 賓静, 앞의 논문, 2007, 131~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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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전도원(傳道員)이었다. 전도원들은 선교 및 교인들의 신앙 안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금교 시기에는 지역사회의 천주교 지도자로서 그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고정 거주하는 전도원은 하루 하루 천주교 공동체의 지도자 일을 담당하고, 신부를 도와 새로이 입교한 신자와 어린이를 지도하였다.
또한 신부가 부재할 때 신자들을 지도하고 교리를 가르쳤다. 순회하는 전도원은 한 마을에서 다
른 마을로 다니며 복음 전도지와 비천주교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만리장성의 어느 관문 밖의 한 선교구는 전도원의 열렬한 포교 아래 “그의 형제, 인척, 그의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설득하지 못한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했다.”25)고 말했다.
전도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정주하는 경우와 순회하는 경우이다. 고정적으로 거주하는 전도원은 더 정확히 말하면 선회(善會)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신자들의 일상 지도 사무를 책임진다. 순회하는 전도원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그들은 비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개종하는 일을 했으며, 금교 시기에는 종종 큰 개인적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금교 시기에 들어 선교의 핵심이 서양인 선교사 중심에서 중국인 신부, 전도원, 선회 지도자 등으로 옮겨가면서 중국 천주교는 선교가 단절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자립성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4) 19세기 초 천주교 박해 양상의 변화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천주교 박해 양상의 중대한 변화는 뒤프레스 사천대목구장 처벌에서도 명확히 구분된다. 뒤프레스 주교는 건륭 시기의 ‘대교안’이 발생했을 때 사천에서 체포되어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건륭제의 ‘은혜’를 입어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그 후 다시 사천으로 잠입하여 선교 하다가 1815년(가경 20)에 체포되었는데, 이번에 그를 기다린 것은 황제의 ‘은혜’가 아니라 가혹한 ‘참수’였다.26)
사실 금교 정책을 엄격히 실시했던 건륭제가 1799년에 죽자 선교사들은 그의 뒤를 이은 가경제(嘉慶帝)에게 천주교 해금에 어떤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후의 사실들은 선교사
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가경 초기에도 서양 선교사의 흠천감에서의 봉직 전통이 계속 이어지기는 했다. 1800년 10월 군기처(軍機處)는 흠천감 감정 알메이다(Joseph-Bernard d’Almeida, 索德超), 감부(監副) 로(Nicolas Raux, 羅廣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의 문의를 받아 가경제에게 보고하였고, 양광(兩廣) 총독에게 유지 내리기를 라자로회 선교사 페레이라(Dominicus Ferreira, 福文高), 히베리오(José Nunes Ribeiro, 李拱宸), 피레이라(Cayetano Pires Pireira, 畢學源) 세 사람이 상경하여 흠천감에 근무하도록 명령했다.
피레이라는 몸이 좋지 않아 잠시 동행하지 못하였다. 페레이라와 히베리오 두 사람이 북경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페레이라는 가경제로부터 흠천감 감부로 임명되었다.
1803년, 피레이라는 세라 (Serra, 高守謙) 신부와 함께 북경에 도착하여 흠천감에 봉직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흠천감에서 의무적으로 봉직하면서 북경의 4대 성당에 거주하였다. 남경교구는 1787년 예수회 선교사 라임베크호벤(Gottfried Xaver von Laimbeckhoven, 南懷仁) 주교가 세상을 떠난 이후 북경교구 주교인 구베아에 의해 관리되었다. 피레이라가 북경에 도착한 후 1804년 8월 20일, 교황 비오 7세는 피레이라를 남경교구의 주교로 임명하였고, 그 후 구베아가 축성식을 주관하였다. 황제가 재경 선교사에게 사사로이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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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杜赫德(P. du Halde) 編, 朱靜 譯, 「殷弘緖神父致本會杜赫德神父的信」(1726年 7月 26日), 『耶穌會士中國書簡集 : 中國記憶 錄』 Ⅲ, 鄭州: 大象出版社, 2001, 203쪽.
26) 이준갑, 앞의 책, 308~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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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1838년 피레이라가 북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끝내 남경에 가서 취임할 기회를 찾지 못하였다.27)
1801년에 사천 선교로 돌아온 뒤프레스(G.-T. Dufresse, 徐德新)28)는 사천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운남(雲南)과 귀주(貴州)의 선교 업무를 대리하였다. 1803년 9월 2일부터 9일까지 뒤프레스 주교는 사천 숭경주(崇慶州) 황가감(黄家坎)에서 ‘사천대목구 회의’(사천 시노드)를 소집했다.
천주 교리 우선이라는 선교 노선을 지키기 위해 뒤프레스 대목구장이 현실에서 선택한 방편은 중국 전통의 철저한 부정이었다. 그는 중국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유교 경전에 대한 교육을 비난하고 배척하면서 경전 교육은 미신이나 방종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유교 전통뿐만 아니라 민간 신앙 전통, 경제 전통, 문화 전통 등도 배척했다. 1832년 교황청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나 사제들뿐만 아 니라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모든 선교사와 사제들에게 사천대목구 시노드 교령을 준수하라고 명령 했다.29) 이 문서들은 모두 참고할 수 있도록 각지의 선교사에게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한과 문서의 전달은 가경 연간에 금교 대재앙을 일으켰다. 당시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공부시랑(工部侍郎) 총관내무부대신(總管內務府大臣)이 직접 관리를 맡았다.
황제의 유지에 따라 북경의 선교사와 마카오 선교사의 서한 왕래는 모두 양광 총독과 총관내무부대신을 거쳐 전달 되어야 하며, 사적으로 위탁하여 전달해서는 안 된다. 1804년 광동의 천주교 신자 진약망(陳若望)이 마침 북경에 와서 사천 시노드에 관한 문서와 선교사 개인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당시 북경의 서당(西堂)에 거주하며 시계 제작과 수리를 담당하며 원명원에 봉직했던 이탈리아 국적 의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 아데오다토(Santo Agostino Adeodato, 德天賜)는 직례와 산동 지역의 선교 상황의 보고, 재무 지출과 지도를 첨부하여 북경 선교사들의 개인적 편지와 함께 진약망에게 유럽으로 보낼 수 있도록 마카오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진약망은 이 편지 자료를 지니고 강서(江西)를 지나갈 때 지방 관리의 검문에서 보고서, 지도 및 개인 서신이 발각되었다. 1805년 1월 29일 자 강서순무(江西巡撫)의 상소에 따르면 진약망은 서양문 편지 19통, 중국문 편지 7통을 지참하고 있었 다.30)
이 사건을 계기로 가경 연간 전국적 범위의 또 다른 금교 정책이 개시되었다. 비록 진약망이 가지고 있던 서신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 아데오다토는 몇 년 후 석방되어 추방되었지만,31) 이 사건은 가경제에게 청조 내에서의 천주교 선교 활동이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고, 북경에서도 한족들뿐만 아니라 만주 기인(旗人)들도 천주교를 믿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경제는 천주교 선교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라는 명령과 함께 다음의 네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32)
첫째, 북경의 선교사를 엄중히 단속한다. 둘째, 천주교 도서를 불태운다. 셋째,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여 처벌한다. 넷째, 선교사가 북경에 진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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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趙建敏, 『天主敎在華史話』,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20, 276쪽.
28) 뒤프레스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777년 사천(四川)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이다림(李多林)이라는 중국명으로 활동하다가 1785년 청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1789년에 비밀리에 다시 사천으로 돌아와 서덕신(徐德新)으로 개명하였고, 1801년사천대목구장 겸 운남·귀주대목구장 서리가 되었다. 1803년 사천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사와 선교사 처신에 관한 천주교령을 제정했다. 1815년 청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성도(成都)에서 참수당했다. 그의 유해는 1857년 파리외방전교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90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9) 이준갑, 앞의 책, 308쪽.
30) 아데오다토에 관한 사건에 대해서는 吳伯婭, 「德天賜案初探」, 『淸史論叢』, 2008 참조.
31) 편지를 보낸 陳若望과 북경 신자 10여 명은 신강(新疆) 일리 지역에 유배되어 노예로 삼게 했다.
32) 趙建敏, 앞의 책, 281~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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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1806년, 가경제가 실시한 네 가지 엄격한 금교 조치는 중국에서 천주교의 생존 공간을 완전히 없애고 천주교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가경제가 반포한 「서양당(西洋堂) 사무관리 규약」으로 선교사의 출경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비록 북경을 거닐더라도 병사들이 따라다녔다.33) 남경교구 주교 피레이라는 도저히 남경에 가서 취임할 수 없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부주교를 임명하여 비밀리에 남경에서 남경교회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 밖에 북경 선교사로는 예수회 선교사 부르즈와(François Bourgeois, 晁俊秀), 아미오(Joseph-Marie Amiot, 錢德明), 페로(Louis Poirot, 賀淸泰), 라자로회 선교사 히베리오,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 아데오다토 등 유럽 선교사 11명이 있었다. 몇 년 후, 사천 시노드를 조직한 뒤프레스는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었고, 라자로회 선교사 레지스(Jean François Régis, 劉方濟) 등은 호광(湖廣)에서 비밀리에 선교하였다.
1808년, 구베아 주교가 사망하자, 포르투갈인 라자로회 선교사 수자-사라이바(Souza-Saraiva,
沙賴華)가 북경교구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청조는 이때 이미 선교사들에게 더 이상 상경하여 조정에 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사라이바는 공개적으로 북경에 와서 취임할 수 없었다. 북경교구의 사목은 결국 흠천감에서 봉직하는 라자로회 선교사 히베이루가 대리했다.
1811년 3월 7일 중국인 신부 장탁덕(張鐸德)이 섬서성(陝西省) 관청에 붙잡혔다. 장탁덕은 자신이 북경교구 주교인 구베아에 의해 신부로 서품되어 섬서에 파견되어 선교했음을 인정했다. 구베아가 사망한 지 이미 3년이 지나 처벌을 할 수 없었고, 장탁덕은 신강 일리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 노예로 삼게 했다. 같은 해 섬서성 감찰어사 감가빈(甘家斌)은 「천주교치죄전조(天主敎治罪專條)」를 제정하여 천주교 신자를 엄벌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근거하여 청조는 교안을 처리하는 새로운 법적 기준인 「천주교치죄전조」를 제정했다. 이때부터 청나라에서는 천주교를 금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34)
가경의 엄중한 금교에 즈음하여 북경 동당 선교사가 책을 옮길 때 부주의로 등잔불을 엎어 화재가발생하였다. 흠천감 감정 페레이라가 가경제에게 교회를 새로 수리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 나 동당의 선교사들에게 남당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였고, 동당은 폐당되었다.
1813년 12월 13일, 북경의 마지막 예수회 선교사 페로 신부가 병사했다. 청조가 선교사의 북경 진입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의 서양 선교사의 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1824년 흠천감 감정 페레이라가 사망하자 라자로회선교사 히베리오가 흠천감 감정을 이어받았으나 병으로 결원이 생기자 세라 신부가 좌감부, 피레이라 주교가 우감부를 맡았다.
세라는 귀국하여 노모를 모셔야 된다는 이유로, 피레이라는 늙어 쇠약하다는 이유로 다른 선교사들이 흠천감에 봉직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도광제(道光帝)는 가경제의 정책을 이어받아 다른 선교사들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라 신부와 피레이라 주교 두 사람이 다른 선교사를 추천해 북경에 오도록 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도광제가 세라의 귀국을 허락하자 세라 신부는 북경을 떠나 마카오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카오로 돌아갈 때 황제는 지방관에게 명령 을 내려, 세라의 귀국 과정을 인계하고 호송하며, 연도에 머무르거나 다른 사람과 왕래해서는 안 된
다고 명령했다. 세라 신부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히베리오는 사망했다.35)
결국 1827년 북경에 남아 있는 남경교구 주교 피레이라가 신분이 공개된 유일한 서양 선교사였다. 같은 해, 피레이라는 북경교구장 서리에 임명되어 북경교구의 선교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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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淸中前期西洋天主敎在華活動檔案史料』 Ⅱ, 852~855쪽.
34) 이준갑, 앞의 책, 248~253쪽.
35) 趙建敏, 앞의 책, 292~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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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북당(北堂)은 중국인 라자로회 신부인 설(薛) 마태오가 관리했다가 청조의 북당 폐쇄로 다른 중국인 신부들과 함께 변경의 서만자(西灣子)로 옮겨 선교를 계속하고 교우들을 돌보게 되었다. 서만자에는 1,000여 명의 백성 가운데 700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있었다. 이 신자들은 대부분 박해를 피해 피난을 가거나 관청에서 귀양 보낸 사람들이었다. 설 마태오의 도착은 후에 몽골대목구를 설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36)
1840년 8월 23일, 몽골대목구가 설립되어 프랑스인 라자로회 선교사 물리(J.-M. Mouly, 孟振生, 1807~1868)가 대목구장을 맡았고, 서만자에 거주했다.
1838년 11월 2일 북경에서 신분이 공개된 최후의 선교사 피레이라 주교가 병사했다. 피레이라 사망 후인 1839년 9월 3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북경교구에서 산동성을 분리해 산동대목구를 설립하고, 이탈리아인 선교사 베시(Louis-Théodore de Bési, 羅類思 혹은 羅伯濟, 1805~1871)를 산동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이미 공석이 된 남경교구장 서리에 임명하였다.
같은 해 포르투갈인 라자로회 선교사 모우라(João de França Castro e Moura, 趙若望)가 북경교구 교구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모우라는 남경교구 부주교로 재직하면서 청나라의 금령으로 남경에 갈 수 없었던 피레이라 주교를 대신하여 남경교구를 관리했다. 모우라 주교가 임명된 후에도 청나라의 금지령으로 인해 그는 공개적으로 북경에 올 수가 없었다.
8년 후인 1846년, 북경교구는 몽골대목구장 물리에게 대리하게 했다.
1839년 9월 16일 4년 전 호북 마반산 교우촌에 비밀리에 들어가 선교하던 라자로회 선교사 페르 부아르가 체포되어 무창(武昌)으로 압송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40년 9월 11일 페르부아르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3.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과 수도회와의 분쟁
19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천주교 선교 활동의 공식적인 보호자였다. 포르투갈은 선교사들의 선발권과 배치권뿐만 아니라 파견지에서의 교회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그리고 선교사들의 전반적인 보호의 임무를 가졌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1493년에 포르투갈 국왕에게 동아시아의 선교 보호권을 부여했고, 1534년에 교황청은 포르투갈 소속의 인도 고아(Goa)에 주교좌를 설립하여 동아시아의 선교 업무를 관할케 했다.37) 1553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조차하고, 1576년 1월 23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마카오교구를 설립, 중국·일본·베트남 등의 선교 업무를 관할하도록 했다. 이로써 마카오교구는 인도 고아대교구에 소속되었고,38) 중국의 선교는 마카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교황이 부여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선교 보호권에는 많은 권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출발하는 모든 선교사는 동아시아로 가기 전에 반드시 리스본을 거쳐, 포르투갈 국왕의 비준을 받아야 하며, 선교사는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이외에 국왕의 보호권을 승인하는 선서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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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1827년 북당이 청조에 의해 폐쇄되자 중국인 라자로회 신부 설 마태오는 프랑스 소신학교를 몽골 서만자(지금의 河北省 崇禮 縣)로 옮겼다. 몽골 서만자 선교구는 프랑스 북경 선교구의 연속이었다(耿昇, 「試論遣使會傳敎士的在華活動」, 『基督敎文化學刊』 17輯, 2007, 162쪽.
37) 羅光, 『敎廷與中國使節史』, 臺北: 傳記文學出版社, 1984, 176쪽.
38) 羅光, 「中國天主敎歷代分區沿革史」, 羅光 主編, 『天主敎在華傳敎史集』, 臺北: 光啓出版社·徵祥出版社·香港眞理學會 聯合出版, 1967,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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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교황은 동아시아의 주교를 인선할 때에는 반드시 포르투갈 국왕의 추천을 받아야 했고, 동아시아의 선교 업무와 각국 정부와의 교섭도 포르투갈 국왕이 사절을 파견해 처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갖는 동시에 포르투갈은 선교 경비를 보조하고, 선교사를 파견하는 의무를 져야 했다.39) 이 같은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선교 보호권에 근거하면, 교황은 단지 포르투갈 국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선교 업무를 관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이후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됨에 따라 동아시아의 선교 보호에 전력을 다하기 어렵게 되자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보호권 약화를 틈타 1608년에 바오로 5세 교황, 1633년에 우르바노 8세교황은 모든 수도회의 선교사가 동아시아로 갈 때 포르투갈 국왕의 요구대로 리스본에서 승선할 필요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40)
이 성명은 아시아에 대한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1622년 6월 22일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직접 전 세계의 선교 사무를 관할하는 포교성(布敎省)을 창설해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제한하려 했다. 1658년에는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은 중국과 기타 동아시아 국가를 위해 대목구(代牧區)를 설치하고, 포교성 소속의 팔뤼(François Pallu), 모트 (Pierre Lambert de la Motte), 코톨랑디(Ignace Cotolendi) 신부를 파견하여 동아시아 선교지를 관리하려고 했다.41) 이들의 파견은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MEP)의 시작이었다.
이들 중 처음으로 대목구장에 임명된 팔뤼는 안남(安南)·통킹[東京] 대목구장으로 중국의 운남(雲南)· 귀주(貴州)·호광(湖廣)·광서(廣西)·사천(四川) 등의 선교지를 겸임 관리하게 했다. 모트는 코친차이나[交趾] 대목구장으로 중국의 절강(浙江)·복건(福建)·강서(江西)·광동(廣東) 등의 선교지를 대리했고, 1660년에 코톨랑디가 중국 남경(南京)의 대목구장으로 강소(江蘇)·하남(河南)·산서(山西)·산동(山東)·섬서(陝西)와 조선의 선교 업무를 관할하도록 했다.42)
이것은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적어도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는 적용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사실 동아시아에 대목구를 설치하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로드
(Alexandre de Rhodes)였다. 그는 오랜 기간 인도, 중국 특히 베트남의 코친차이나에서 선교해는데, 코친차이나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추방당한 전력이 있었다.
로드는 1649년에 로마로 돌아와 교황에게 본지의 성직자를 배양할 필요성에 대해 상소하고, 동시에 스페인·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이 천주교 선교 사업에 대해 방해가 될 뿐이며, 포교성이 대목구장의 명의로 직접 포교성과 교황의 명령을 받아야 하며, 아울러 대목구장은 선교구에서 토착 성직자를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1660년 11월 27일, 포르투갈 국왕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선교 보호권을 침해한 것에 대해 불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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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羅光, 『敎廷與中國使節史』, 176쪽 ; 龍思泰(Anders Ljungstedt) 著, 吳義雄·郭德焱·沈正邦 譯, 章文欽 校注, 『早期澳門史』, 北京: 東方出版社, 1997, 174쪽.
40) 羅光, 『敎廷與中國使節史』, 177쪽.
41) H. Cordier, Historie des Relations de la chine avec les puissances occidentales 1860-1900, vol. Ⅱ, Paris: Félix Alcan, 1902, p. 625 ; 羅光, 「中國天主敎歷代分區沿革史」, 301쪽.
42) 羅光, 「中國天主敎歷代分區沿革史」, 301쪽. 고톨랑디는 1662년 8월에 인도에 도착해서 사망했다. 팔뤼는 파리외방전교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1665~1666년에 태국에서 신학교를 창립했다. 이후 팔뤼는 1680년 복건(福建)대목구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되어 1684년 복건성에 도착했지만, 그해 10월에 사망했다. 팔뤼는 죽기 전 매그로(Charles Maigrot, 顔璫)를 그의 후임으로 지정했으며, 1687년 교황은 그를 복건대목구장에 임명했다. 매그로 주교는 1693년에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금령을 반포하여 이른바 의례 논쟁을 일으킨 중요 당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43) 顧衛民, 『中國與羅馬敎廷關係史略』, 北京: 東方出版社, 2000, 40~41쪽 ; 조현범, 「세계 교회의 흐름과 교계제도의 설정―동아시아 선교 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0, 2012, 13쪽. 이후 로드는 프랑스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창건에 참여했다(費賴之[P. Louis Pfister, S.J.] 著, 馮承鈞 譯, 『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 北京: 中華書局, 1995, 189~190·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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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고 국왕 통행증 없이 동아시아로 가는 모든 선교사를 체포하여 교황의 명령에 대항하도록 명령했다. 교황청의 대목구 설립으로 파리외방전교회가 부상한 뒤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갈등은 불가피해졌다. 프랑스는 무역과 선교 관할권에 늦게 뛰어든 나라로서 동아시아에서 그 주요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자신의 선교 보호권과 무역을 지키고자 프랑스 선교사들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은 동아시아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그들에게 선교하는 프랑스 선교사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면 자신들의 무역을 통제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포르투갈이 여권과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를 공격하고 체포했을 때 팔뤼는 프랑스 정부가 포르투갈에 항의하기를 원했다. 프랑스 정부는 포르투갈이 교황에게 파리외방전교회의 철회를 요구할 의사가 있을 때 단호히 반대했다.44)
교황청과 프랑스가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깨는 데 연합한 파리외방전교회는 양측의 협력의 집중적인 표현이지만 모순도 있다. 교황청은 대목구장이 세속권이든 종교권이든 교황에게만 복종하도록 조치해 프랑스에 유리한 선교 보호권이 더 이상 형성되지 않도록 했고, 프랑스는 파리외방전교회가 교황에게 복종만 하고 국왕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또 1680년 포교성이 선교사들에게 대목구장을 향해 선서하도록 명령했다가 다른 수도회의 반대에 부딪혔고,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선서 금지를 명령했다.
파리 예수회 총회장의 설득으로 명령을 철회했지만 선서하기 전에 프랑스 국왕의 허락을 받았다고 선언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 국왕은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예수회를 지지해 왔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이 프랑스 교회의 수호자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예수회 신부들을 더 신뢰하였다.45)
사실 교황청이 팔뤼를 대목구장으로 파견할 때, 프랑스 정부는 팔뤼가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의 명예를 드높일 것으로 보았으며, 실제로 팔뤼를 이용해 프랑스의 무역 발전을 꾀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팔뤼가 파견되었을 때, 교황청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명령해 교황 클레멘스 9세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고, 도움을 약속했다.
그러나 팔뤼는 대목구에 포함되는 모든 선교사에 대해 대목구장에 대한 복종의 선서를 명령해 루이 14세는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프랑스가 1685년에 예수회 선교사 5명을 직접 중국에 파견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46) 동아시아의 선교 보호권을 둘러싸고 17세기 내내 교황청과 포르투갈 왕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국력이 약화된 포르투갈이 선교 분야에 인원을 배치할 수도 없었고, 재정적 지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이를 이용해 더욱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1673년 11월 10일에 클레멘스 10세 교황은 포르투갈 통제 아래 있는 고아 대주교의 태국·통킹·코친 차이나에 대한 관할권을 폐지하는 칙서를 반포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정복하거나 정복할 수 있는 지역에만 선교 보호권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상술한 지역이나 중국을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 범위 밖에 둔 것이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 교황은 대목구장이 리스본을 경유하지 않고 동아시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자 포르투갈은 1677년 교황청에 항의하고, 프랑스인에게 대목구장을 맡기지 말 것을 건의 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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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范若蘭, 「‘保敎權’之爭 : 16-18世紀天主敎在南海區域初期傳播的多重矛盾及影響」, 『縱橫東南亞』 2021-4, 34쪽.
45) 范若蘭, 앞의 논문, 35쪽.
46) 張雁深, 『中法外交關係史考』, 北京: 史哲硏究社, 1950, 7~11쪽.
47) 維吉爾·畢諾(Virgile Pinot) 著, 耿昇 譯, 『中國對法國哲學思想形成的影響』, 北京: 商務印書館, 2000, 24~25쪽 ; 顧衛民, 앞의 책,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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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1678년 10월 10일에 칙서를 내려, 모든 대목구 관할 아래 있는 동아시아 선교사들은 대목구장 앞에서 교황의 절대적 권력을 승인할 것을 맹세하도록 했다.48) 이에 예수회 선교사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수도회에 속하지도 않는 주교에 대해 복종하는 맹세는 실로 수도회의 기본 준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49) 대목구장에 대한 복종 선서 문제는 수도회를 넘어서 국가가 개입하게 되면서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우선 국가가 직접 나서 맹세 행위를 반대하는 경우이다. 프랑스 국왕이 프랑스 선교사인 팔뤼의 행위에 반대했고, 고아 총독도 태국의 각 수도회 고위직이 이 선서에 복종을 금지한다고 하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선교 보호권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비준하지 않은 어떠한 대목구장 혹은 주교에 대해 복종을 거절하도록 하였다.
다른 하나는 선교사가 본국인이 담임하고 있는 장상(長上)에게만 복종하는 것이다. 포르투갈은 교황 이 프랑스인을 대목구장으로 파견하지 않는다면, 복종할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스페인도 프랑 스인 대목구장을 임명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포르투갈 주교 아래에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이러한 체제는 언제나 주교 혹은 대목구장이 관할 구역에 종사하는 선교사들이 본국 동포
들일 때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운행되었다.50)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19세기까지 지속된 문제였다. 이와 같이 17세기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정치적·경제적 교두보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던 포르투갈은 기껏해야 중국으로 오는 선교사를 마카오에서 제지함으로써 그들의 선교 보호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포르투갈은 유럽인이 중국 내지의 항구로 들어가는 것을 억제하려 했고, 특히 프랑스 선교사에 대해 각종 제한을 가했다. 포르투갈 국왕이 제기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으로 가는 프랑스 선교사는 반드시 먼저 마카오에 와야 한다. 마카오 주교는 그들의 행동을 제한할 권리가 있으며, 그들을 마카오에 머물게 하거나 그들을 다른 지방에 파견할 권리가 있다.
둘째, 중국에 오는 프랑스 선교사는 절대로 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아서는 안 된다. 셋째, 중국
에 오는 프랑스 선교사는 단지 포르투갈 국왕만이 그들의 정치 지도자임을 승인해야 한다.
넷째, 중국에 오는 프랑스 선교사는 단지 포르투갈 국왕의 보조금만을 받아야 한다. 다섯째, 마카오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다.51) 프랑스 루이 14세는 1685년에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를 중국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포르투갈 국왕의 비준을 받지 않은 선교사였기에 포르투갈은 이들의 마카오 입항을 제지했다. 결국 이들은 1687년 6월 19일에 태국을 출발해 7월 23일 영파(寧波)에 도착했고, 1688년 2월 7일에 북경에 도착했다.52)
이미 당시 북경의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페레이라(Thomas Pereira, 徐日昇)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북경에 오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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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K.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New York: The Macmililan Company, 1932, p. 125 ; 維吉爾·畢諾(Virgile Pinot) 著, 앞의 책, 26~27쪽.
49) 維吉爾·畢諾(Virgile Pinot), 앞의 책, 28~29쪽.
50) K.S. Latourette, op.cit, pp. 125-126.
51) 閻宗臨, 「十七,十八世紀中國與歐洲的關係」, 閻守誠 編, 『閻宗臨史學文集』, 太原: 山西古籍出版社, 1998, 30~31쪽. 마카오에서의 비포르투갈 국적의 선교사(특히 프랑스 선교사)에 대한 제한은 마카오 포르투갈 정부의 일관된 행태였다. 한 세기가 지난1788년에도 프랑스 선교사 오뱅(R. Aubin)과 아일랜드 선교사 한나(R. Hanna)가 마카오에 온 후 그곳에서 3년을 기다린 후에도 중국으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오뱅은 기다릴 수가 없어 몰래 호광(湖廣) 등지로 들어가 활동했다(張力·劉鑒唐, 『中國敎案史』, 成都: 四川省社會科學院出版社, 1987, 232쪽).
52) 杜赫德(P. de Halde) 編, 鄭德弟·呂一民·沈堅 譯, 「耶穌會傳敎士洪若翰神父致國王忏悔師, 本會可敬的拉雪玆神父的信』(1703年 2月 15日), 『耶穌會士中國書簡集 : 中國記憶錄』 Ⅰ, 鄭州: 大象出版社, 2001, 25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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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포르투갈 국적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미묘한 신경전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북경에 안착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천문 관측 기기를 몰수하려고 했고, 여행할 때는 어떠한 관측도 금지시키려고 했으며, 그들이 보유한 과학기술을 황제 에게 보이지 못하게 했다.53) 또한 포르투갈은 마카오의 통제를 이용해 계속적으로 프랑스 선교사를 방해했다.
그들은 프랑스가 자국의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책과 경비를 차단하고 억류해 프랑스 선교사들을 매우 궁핍하게 만들었다.54) 궁정에 남아 있던 부베(Joachim Bouvet, 白晉)와 제르비용
(Jean-François Gerbillon, 張誠)도 끊임없이 페레이라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독립된 성당을 원했고, 그러한 희망은 결국 북당(北堂)의 건립으로 나타났다.55)
이렇게 동아시아 선교지에서 선교 보호권이 위축되는 상황에 이르자 1689년 포르투갈 국왕은 교황에게 항의하며, 중국에서 남경과 북경 두 교구를 건립하여 포르투갈이 관리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알렉산데르 8세 교황은 포르투갈이 군함을 파견하여 베니스를 원조해 주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국왕의 요구를 비준하였다.56) 그러나, 남경교구는 강남·하남 2성, 북경교구는 직례·산동·요동 3성을 관할하는 데 그쳤다.57)
이렇게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은 이미 교황청에 의해 쇠약해지기 시작했지만, 북경교구와 남경교구의 재치권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보호권을 아편 전쟁 이후인 1857년 교황청과 포르투갈이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을 폐지하고, 단지 마카오교구만 포르투갈이 보호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기까지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58)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파리외방전교회 등의 수도회는 로마 교황청의 산하이자 다국적 조직으로 각기 다른 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에도 복종하고 소재한 나라의 왕실에 충성을 다해야 했다. 그리하여 교황청과 국가, 국가와 국가 간의 복잡하고 경쟁적인 관계는 수도회와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같은 수도회라도 국적이 다를 경우에는 국가와 국가 간의 경쟁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북경에서 포르투갈과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 사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예수회가 해산된 이후 1784년부터 1832년까지 중국에 진출한 포르투갈인 라자로회 선교사는 21명으로 마카오, 북경, 남경, 강남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에는 최후의 흠천감 감정이자 남경교구 주교 및 북경교구를 관할했던 피레이라(Pireira), 1808년 북경교구 주교로 임명된 사라이바(Saraiva), 1841년 포르투갈 국왕에 의해 마카오 주교로 임명된 보르자(Pereira de Borja), 북경에 오지 못해 사라이바를 대신해 북경교구를 책임졌던 히베리오(Ribeiro), 흠천감에서 봉직하며 오랫동안 북경에서 활동한 세라(Serra), 포르투갈 국왕이 북경교구 주교로 임명했지만 교황청에 의해 거부된 모우라(Moura)등이 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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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魏若望, 『傳敎士·科學家·工程師·外交家 南懷仁(1623-1688) : 魯汶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1, 620쪽.
54) 포르투갈의 선교 자금 차단으로 남경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퐁타네는 부득이하게 비즈루를 남경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광주로 가서 포르투갈의 행위에 대해 항의하였다(『在華耶穌會士列傳及書目』 上, 429쪽).
55) 「耶穌會傳敎士洪若翰神父致國王忏悔師, 本會可敬的拉雪玆神父的信」(1703年 2月 15日), 『耶穌會士中國書簡集』 Ⅰ, 287~294쪽.
56) 李師洲, 「帝國主義列强在華保敎權的沿革」, 『山東大學學報』, 1990-2, 96쪽. 이리하여 1690년 중국에는 3개 교구, 즉 마카오 주교구(광동·광서 관할 겸임), 북경 주교구(직례·산동·산서·몽골·하남·사천 관할 겸임), 남경 주교구(강남·절강·복건·강서·호광· 귀주·운남 관할 겸임)가 건립되었다(方豪, 『中國天主敎史人物傳』,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7, 482쪽).
57) 마카오 주교의 고아 대주교 대리권 행사와 중국 각 대목구장의 반대로 인해 1695년 포교성은 북경교구와 남경교구의 관할 범위를 축소하고, 나머지 지역에 9개의 대목구를 설립하였다(顧衛民, 앞의 책, 44쪽).
58) 羅光, 『敎廷與中國使節史』,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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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들은 1801년 북경에 도착해 동당(東堂)을 점거한 뒤 1812년에는 남당(南堂)을 강제로 차지해 북경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것은 그들이 중국 선교구를 쟁취하고 프랑스 라자로회 회원들의 중국 진출에 온갖 방해를 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중국에 진출한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도 차츰 마카오를 우회하여 각각 광주, 상해, 영파(寧波)를 통해 중국 내륙으로 진출 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과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대치하고 쟁탈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당시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리세네(J.F. Richenet, 李士奈)와 두마젤(L.M. Dumazel) 신부가 마카오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오는 황실의 허가증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포르투갈의 마카오 정부는 광주의 중국 상인 공행(公行)과 결탁하여 이들의 중국 내지 진입을 최대한 지연시키고자 했다. 포르투갈의 통제를 받는 마카오 정부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선교사에 대한 추천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종종 이들의 중국 내지 진입을 억제하고자 했다. 결국 당시 포르투갈 국왕은 1799년 1월 16일 마카오 총독이 프랑스 선교사 보호를 금지하는 조서를 발표했고, 마카오 정부도 중국 지방관에게 프랑스 선교사 추천을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 페레이라(D.J. Ferreira)와 히베리오 신부는 1801년, 피레이라와 세라가 1804년 무사히 북경에 입성하여 동당을 점거했을 때, 프랑스 선교사 리세네와 두마젤 신부는 여전히 마카오에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결국 거절당하여 마카오를 우회하는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60)
비슷한 시기(1784~1800)에 중국에 들어온 프랑스인 라자로회 선교사는 11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주로 북경, 호광(湖廣) 및 마카오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예수회 해산 후 프랑스 국왕은 프랑스 라자 로회 선교사 로(Raux), 기스랭(Ghislain), 파리(Paris) 신부를 중국에 파견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 출발 하여 1784년 8월 23일 마카오에 도착했고, 다음 해 4월 29일에 북경에 도착해 예수회 선교사들을 대체했고, 로 신부는 프랑스 중국 선교구 장상이 되었다.61)
로 신부가 북경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임시 협정’을 제정하여, 라자로회와 예수회 및 기타 수도회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했는데, 예수회 유산 분할 및 북경 천주교 부동산 재산 등민감한 문제가 포함되었다. 로 신부는 이러한 문제를 큰 무리 없이 잘 조정해 내었다. 또한 로 신부는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주에 회계 책임자를 두고 프랑스 선교구와 중국 당국의 교섭을 담당함으로써 마카오 포르투갈 당국의 개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했지만, 이 역시도 마카오 당국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로 신부는 뇌졸중으로 1801년 11월 16일 북경의 북당에서 사망했다.62)
1801년에 북당에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기스랭, 라미오(Louis François Marie Lamiot, 南彌德), 그리고 중국인 신부가 3명으로 사제가 5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 해부터 포르투갈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북경에 도착하여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1800~1829년 사이에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인 라자로 회 선교사는 아무도 없었다. 1829년에 토레트(Jean-Baptiste Torrette, 陶若翰) 신부가 중국에 와서 마카오 라자로회의 장상이 된 이후인 1829~1850년에 프랑스인 라자로회 선교사는 32명이었다. 이 중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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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耿昇, 「試論遣使會傳敎士的在華活動」, 『基督敎文化學刊』 17輯, 2007, 149쪽.
60) 耿昇, 앞의 논문, 150~151쪽.
61) 劉志慶‧尙海麗, 앞의 책, 257쪽
62) 耿昇, 앞의 논문, 152~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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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 인물이 물리 주교이다.
물리 주교는 1834년 8월 14일 마카오에 도착하여 1835년 7월 12일 몽골 서만자에 도착하였다. 1840년 8월 23일 몽골 최초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2년 살베티(Joachim Salvetti) 주교에 의해 산서 홍구자(紅溝子)에서 축성되었다. 그는 1846년에 북경교구를 관할하게 되었다. 1856년 1월에 북경교구 주교에 임명되었고, 5월에 마침내 포르투갈 보호권 하에 있던 북경교구가 폐지되어 3개의 대목구로 나누어졌을 때, 물리 주교는 북직례북경대목구장(北直隸北境代牧區長)에 임명되었다.63) 1857년 교황청과 포르투갈은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을 폐지하고, 단지 마카오교구만 포르투갈이 보호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었다.64)
4. 맺음말
조선대목구는 1831년 9월 9일에 설립되었다. 그날 브뤼기에르 주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과 싱가포르를 거쳐 1832년 9월 30일에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10월 12일 마닐라를 떠나 마카오로 갔으며, 12월 19일 마카오를 떠나 1833년 3월 1일에 복건성 복안(福安) 항구에 도착했다. 그는 그해 10월 10일 산서(山西) 주교관에 도착했으며, 1834년 9월 서만자를 향해 출발했고, 10월 7일에 장가구(張家口)를 통과하여 10월 8일 서만자에 도착했다. 서만자 교우촌에 서 한 해를 보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5일 변문을 향해 출발하여 10월 19일 마가자(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했으나 고된 여정을 버티지 못하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으로의 여정은 당시 상황에서 보면 이미 대단히 고통스러운 여행이 될 것 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청조의 금교 정책은 이전 시기와 달리 매우 엄격해졌으며, 박해의 양상은 더욱 가혹해졌고, 법률로 천주교 금지가 제정되어 사교(邪敎)로 비정되기까지 하였다. 천주교 신자로 관청에 의해 발각되는 경우 중국인들은 신강(新疆)이나 흑룡강(黑龍江) 지역으로 유배 보내져 노예가 되어야 했다. 서양 선교사는 국외로 추방되기도 했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을 횡단했던 시기에는 발각될 경우 지방 당국에 의해 처형되기도 하였다.
당시 청조의 금교(禁敎) 상황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중국 선교 보호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었다. 17~18세기를 통해 교황청은 중국에서 기존 교구의 재치권을 축소하면서, 동시에 포르투갈 보호권의 구애를 받지 않는 교황청 직속의 대목구를 증설하는 방향으로 선교 지역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황청의 방침에 대해 포르투갈 선교 사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대목구 신설에 저항하거나 신임 대목구장의 부임을 방해하는 일들을 벌였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 그는 북경교구와 남경교구의 재치권을 행사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외면으로 남경을 우회하여 험난한 여정을 거쳐 북경 부
근까지 왔다가 다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가 관할하던 산서대목구로 갔다. 그리고 프랑스 라자로회 회원들이 활동하던 서만자로 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온갖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조선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한 노력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념과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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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劉志慶‧尙海麗, 앞의 책, 260쪽.
64) 羅光, 『敎廷與中國使節史』,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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