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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여행》 - 신동기 저 《카잔차키스즘과 칸티즘》
* 飛龍비룡 辛鐘洙신종수 總務총무님 提供제공.
《카잔차키스즘과 칸티즘》
* 출처: 신동기 저 《생각여행》(티핑포인트, 2014년 12월 출간) p278-290
국가나 공동체가 정하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와 같은 ‘제도적 자유’가 ‘개인의 자유’를 위한 ‘환경’이라면, ‘개인적 자유’는 그런 제약된 환경 속에서 개인이 즐길 수 있는 ‘선택’이다. 따라서 ‘구속받지 않음’, ‘마음 편안함’과 같이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그런 자유는 바로 이 ‘개인적 자유’에 속한다. 그렇다면 주어진 환경, 즉 ‘제도적 자유’ 속에서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개인적 자유’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카잔차키식 자유’
유럽 문명의 시발인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출세작인 ‘그리스인 조르바’에서의 주인공 조르바처럼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꿈꾸었다. T.V. 광고에서 선남선녀가 스포츠카를 타고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하와이 해변을 마음껏 질주하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런 몸과 마음의 자유로움을.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짧고 굵다. 짧은 것은 소설 아닌 묘비명인 만큼 그리 길 까닭이 당연히 없고, 굵다는 것은 짧은 문장에 ‘고통과 쾌락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 개념이 완벽하게 드러나 있다는 이야기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쾌락과 고통의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아니 굳이 ‘동물로서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이, 대부분의 경우, 대부분의 인간은 쾌락과 고통의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인간이 만들어낸 공동규칙인 법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제도와 시스템이 이 쾌락과 고통의 법칙에 깜짝 놀랄 정도로 단순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을 해치거나 사회에 피해를 주면 국가는 그 사람에서 ‘고통’을 준다. 반대로 다른 이에게 유익한 행위를 했거나 사회적 유용성을 높이는 행위를 한 사회 구성원에게는 ‘쾌락’을 준다. 그렇게 ‘고통’과 ‘쾌락’을 이러 이러한 경우에 주겠다고 사전에 정해 놓은 것이 바로 ‘법’이고 ‘제도’이다.
현대인들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회사에서의 회사와 그 구성원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생산성을 올리면 ‘쾌락’(보너스, 승진, 휴가 등)을 주고 자기 밥값도 하지 못하면 ‘고통’(감봉, 승진 탈락, 해고 등)을 준다. 선진국의 훌륭한 시민이든 어떤 유수한 기업의 지위가 높은 임원이든 모두 이 ‘쾌락과 고통의 원칙’ 적용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묘비명에서 바로 이 ‘쾌락’을 찾지 않겠다는 의미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였고, 그 어떤 ‘고통’도 겁내지 않는다는 의미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 어떤 ‘쾌락’도 원하지 않고 그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은 결과는 당연히 ‘나는 자유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어떤 ‘쾌락’도 바라지 않고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법이, 국가가 또는 타인이 그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자신의 뜻에 반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그 강제 수단이 바로 ‘쾌락’과 ‘고통’인데, 그에게는 ‘바라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이 없으니 그 대상인 ‘쾌락’과 ‘고통’은 아예 원천적으로 존재 의미 자체를 갖지 못한다. 그 결과는 당연히 자유로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쾌락과 고통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류로 따져본다면 두 부류 정도이다. 하나는 실성한 사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지가 매우 강한, 심지어 기인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실성한 이는 제정신도 없고 감각도 온전치 않으니 최소한의 생리적 현상 이상의 고통과 쾌락 수단은 그들에게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한 이들로 물질적 또는 인간적 유혹과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다. 그리고 기인은 ‘개처럼 살자’ 는 모토를 갖은 고대 그리스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나,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 시대, 번잡을 피해 자연에 은거하며 청담을 즐긴 죽림칠현과 같이 일상이나 시대의 모습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에 갖다 맞춘 사람들이다.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견유학파는 물질 추구는 물론 정신 추구까지 포기함으로써 쾌락과 고통의 굴레를 던져버린 이들이고, 죽림칠현은 세속을 벗어남으로써 쾌락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물질과 정신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곧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고, 또 물질과 정신에 집착하지 않으면 빼앗기고 말 것도 없으니 당연히 고통스러워할 일도 없다. 쾌락과 고통의 대상을 애초부터 무시하고 의식하지 않으니 쾌락과 고통 자체가 자리틀 곳이 없고 그 결과는 당연히 자유스러움이다. 최소한 자유스러움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이 즐겨 말하던 신의 경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칸트식 자유’
칸트의 묘비명은 그가 쓴 명저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로 되어 있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칸트는 경탄과 외경의 대상을 별이 빛나는 하늘과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도덕법칙 두 가지로 인식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도덕법칙을 최상의 것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두 가지를 같은 수준의 존귀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압축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가슴 벅차게 하는 이 짧은 선언을 통해 칸트는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관통하고 있는 그의 명저 「실천이성법칙」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로 인간이 도덕법칙을 갖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별이 빛나는 하늘과 같이 높고 귀한 존재, 즉 신적 영역에도 이를 수 있다는 도발적이기까지 한 중대 선언이다.
회사에 세무감사가 나왔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런 동요도 없고 특별한 긴장도 없다. 회계를 분식하거나 세법을 어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을 어겨 세금을 포탈한 것이 없으니 걸릴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세무감사 받는 것이 떳떳하고 당당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는데 부인에게 당당하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2차, 3차 장소 바꿔가면서 술을 왕창 마시기는 했지만 배우자에게 부끄럽게 생각되거나 감추어야 할 만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행위에서 비롯된 인간의 자유로운 모습이다.
칸트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보았다. 자유로운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 이외의 존재인 자연과 달리 인간은 이성이 있어 외부의 자극에 상관없이 자신 내부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인간 이외의 존재는 모두 자연의 속성인 인과 법칙의 적용을 받는데,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고, ‘선하다’는 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는 의미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선한 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유로운 의사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환경인 ‘제도적 자유’ 상황에서 개인이 선택하는 ‘개인적 자유’는 ‘감성적 자유’와 ‘이성적 자유’ 둘로 나눌 수 있다. ‘감성적 자유’는 인간의 육체적 특성인 오감을 통해 향유하는 자유이고, ‘이성적 자유’는 인간의 정신적 특성인 사고와 의지를 통해 향유하는 자유이다.
따라서 ‘감성적 자유’는 주로 자유를 느끼는 ‘개인의 몸과 그 개인의 외부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일반적으로는 ‘물질적 소유 정도’, 일시적으로는 ‘감정의 상태’에 의해 존재한다. 이에 반해 ‘이성적 자유’는 주로 자유를 느끼는 ‘개인과 그 개인 정신의 내부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도덕적 고양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이 두 구분 외의 개인적 자유로 ‘신앙적 자유’를 추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적 자유’는 신앙 선택에 대한 자유가 아닌 신앙을 통해 얻는 자유스러움을 말한다. ‘신앙적 자유’는 속성상 자유의 근원을 물질 또는 감성에서 찾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성적 자유’와 흡사하다. 그러나 종교에 따라 선함이나 도덕보다 ‘믿음’을 훨씬 더 중요시하는 경우, 이때에는 이성적 자유와 상당히 거리가 있게 된다. 이 경우 ‘이성적 자유’는 ‘이성’을 활용한 ‘도덕적 행위’에 그 근거를 두는 반면에, ‘신앙적 자유’는 ‘믿음’을 통한 ‘신에 대한 헌신과 확신’에서만 자유로움을 느낀다.
‘카잔차키시즘(감성적 자유)과 칸티즘(이성적 자유)’
근대 사회과학과 정치철학의 문을 연 홉스는 ‘자유란 반대가 없음을 의미하며, 반대란 운동을 가로막는 외적인 방해를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개인의 몸과 외부와의 관계’에서 자유 여부를 판단하는 ‘감성적 자유’를 말하고 있다. 카잔차키스의 자유관은 이 ‘감성적 자유’에 바탕하고 있다. 쾌락과 고통의 원인을 거부하고 있지만 그런 쾌락과 고통의 원인에 대한 거부 자체가 이미 자신의 자유가 쾌락과 고통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쾌락과 고통은 바로 물질과 오감을 통한 육체적 특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자는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게 하고 누워 있더라도 거기에 편안함이 있으니, 의롭지 않으면서 부하고 귀하기만 한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飯疏食飮水반소사음수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 於我어아 如浮雲여부운)라고 말했다.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야기하면서 두 번째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고 땅을 내려 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즐거움이다’(仰不愧於天앙불괴어천 俯不怍於人부불작어인 二樂也이락야)라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바로 ‘개인과 개인 내부와의 관계’에서 자유 여부를 판단하는 정신적 자유, ‘이성적 자유’를 말하고 있다. 바로 칸트의 도덕적 자유관이다.
칸트는 ‘패악을 저지른 자가 그의 범죄에 대한 의식으로 인해 마음의 불안에 시달리는 것’과 ‘의무에 맞는 행위에 대한 의식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를 말하면서, ‘후회는 고통스러운, 도덕적 마음씨에서 생긴 감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덕적 행위가 자유를 낳는다는 이야기이다.
카잔차키스적 자유와 칸트적 자유 사이에는 이와 같이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카잔차키스적 자유는 쾌락과 고통을 벗어나는 자유 선언이지만, 묘비명 내용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쾌락과 고통의 법칙을 의식하고 있고, 이에 반해 칸트적 자유는 도덕적 행위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하는 ‘정언명령’으로, 순수이성적 도덕법칙을 스스로에게 명령 내림으로써 처음부터 ‘쾌락과 고통의 원칙’은 아예 배제하여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
‘개인적 자유’에 해당되는 이 두 가지 자유는 기본적으로 그 배경과 속성에 차이를 두고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이성적 자유’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반면, ‘감성적 자유’는 생물에게 고유하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행동과 관련된 ‘이성적 자유’는 인간만이 향유 할 수 있는 자유이지만, 고통과 쾌락의 원칙에 좌우되는 ‘감성적 자유’는 인간을 포함한 개나 소, 말 심지어는 식물에 있어서까지 공유하는 자유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완견을 훈련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이 고통과 쾌락의 원칙이다. 배변을 잘 가리면 먹이(쾌락)를 주고 그렇지 못하면 벌(고통)을 준다. 소나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동물들을 대하는 모든 경우 언제나 쾌락과 고통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동물들한테 항상 사용하고 있는 그 쾌락과 고통이라는 수단을 우리 인간에게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또 나 자신이 바로 그 동물적 법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을 한다.
법에서, 제도에서, 교육에서, 회사의 일에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많이 배운 이나 덜 배운 이나, 사람으로 제구실을 할 성인이나 배변도 못 가리는 유아나. 따라서 쾌락과 고통이라는 수단, ‘감성적 자유’는 냉정히 말해 ‘인간적’이지 않다. ‘생물적’이다. 잘 봐주더라도 ‘동물적’ 정도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행동 이유와 나 자신의 행동 이유가 정확하게 동일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면, 활동 면에서 볼 때 내가 애완견보다 질적으로 나을 이유는 전혀 없다. 직립 보행을 못해 손을 사용하지 못하고 사고력이 떨어질 뿐이지,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정신활동과 육체 활동을 하는 것인데 그 정신활동과 육체 활동의 작동 메카니즘에서 직립 보행을 하고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나와 기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칸트적 자유는 매우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는 이유는 일단 ‘이성적 자유’가 ‘인간’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성적 자유’는 인간을 제외한 일반 동물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어볼 수 없는 영역이다. 아무리 온갖 고통과 쾌락의 수단을 동원해 이 도덕적 행위에 바탕한 이성적 자유를 그들에게 이해시키려 애써도,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고통과 쾌락이라는 자연 법칙적 영역에만 머무를 뿐 여기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칸트를 높이 평가한다. 인간을 동물의 세계로부터 건져내 신이 존재하는 곳 바로 그 옆으로 이동을 시켰기 때문이다. 거의 신과 붙어 앉을 정도의 존귀한 존재로.
‘현실적 자유’
그렇다면 칸트와 같이 심오한 이성을 가지지도 못하고 일상 속에서 부대끼면서 겨우 삶을 추스르고 사는 우리들은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할까? 칸트가 안내한 도덕적 자유, ‘이성적 자유’ 로 샤워를 하고 더 나아가 그 속에 풍덩 빠져 헤엄을 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그런 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답은 항상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현실 환경은 먼저 두 가지 차원으로 따져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속성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이 대전제이다. 경쟁 속에서 분업화된 작은 범위의 기능을 평생 수행하는 현대인들이 시간과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꿈일 뿐 현실적으로 난망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카잔차키스적 자유를 꿈꿔왔지만 만족스럽게 이룰 수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될 확률은 매우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칸트적 자유만 오로지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서 당당할 수 있었던, 마음에 아무런 구속을 느끼지 않았던 그런 칸트적 자유를 매우 작지만 누구나 경험한 바가 있다. 진짜 당당함을 넘어서 희열까지 느끼면서. 그야말로 마음은 평화 몸은 자유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법적 의무를 훨씬 넘어서면서까지 항상 그렇게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현실 속에서의 인간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신이다.
조물주는 왜 인간에게 신적 속성만이 아닌 동물적 속성까지 함께 주었을까. 신도 질투심, 경쟁심이 있어 자기와 동급은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가 작용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간은 동물적 속성도 함께 받고 태어난 이상 현실에서 그 동물적 속성을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국 평균적인 인간에게 있어 ‘개인적 자유’는 칸트적 자유와 카잔차키스적 자유를 섞는 수밖에 없다. 아니 섞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제약과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니는 속성의 한계 상 그럴 수밖에 없다. 칸트적 자유, 도덕적 자유를 원칙으로 세우고 살면서, 제한적으로 가끔은 카잔차키스적 자유를 소중하게 즐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가끔은 제한적이나마 돈과 시간을 들여 감성적으로 나를 시간과 돈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작은 호사를 누려보는 것이다.
항상 인과 예를 강조하고 성인군자만 입에 올리던 공자가 제자인 증석의 ‘늦은 봄 따뜻한 날에 새로 마련한 봄옷을 입고 어른 5·6명, 아이들 6·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지내는 제단 옆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고 싶습니다’(莫春者모춘자 春服춘복 旣成기성 冠者五六人관자오육인 童子六七人동자육칠인 浴乎沂욕호기 風乎舞雩풍호무우 詠而歸영이귀)라는 대답에 탄식을 하면서 뜨겁게 공감을 나타냈던 것도, 어쩌면 칸트적 ‘이성적 자유’의 긴장 속에서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카잔차키스적 ‘감성적 자유’에 대한 본능적 희구의 편린은 아니었을까.
보수주의의 원조로 프랑스 대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에드먼드 버크는 ‘지혜가 없고, 미덕이 없는 자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해악 중 최대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독이나 규제가 없는 채로 어리석음, 죄악, 광기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머리가 나쁜 자들이 고상하게 들리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자유의 품격을 손상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도덕적 행동에 바탕한 ‘이성적 자유’가 배제된 ‘감성적 자유’는 해악을 가져올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해악이 타인이나 사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까지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손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동물적 속성인 육체와 신적 속성인 정신을 함께 가진 존재로 태어났다. 따라서 어느 한쪽의 속성만 충족된 상태에서 인간은 온전하게 살 수 없다. 양쪽 다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이 둘 중 한쪽은 충족시키는 데 한계가 있을뿐더러 그 한계가 그리 높지 않고, 그리고 다른 한쪽은 기본적으로는 그 충족에 물질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먹고 입고 잠자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재산이 수천 배, 수만 배 차이가 나는데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데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서로 간에 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필수 부분이 아닌 부수적인 영역에서일 뿐이다. 부수적인 영역은 삶에 필요한 핵심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감성이 아닌 이성에 맡기면 상당 부분 그 차이의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정신 영역은 충족시키는 데 한계가 없다. 채워도 채워도 계속 허기진 상태일 수 있는 것이 이 정신 영역이다. 또 이성의 협조가 없는 상태에서는 물질을 아무리 갖다 퍼부어도 충족되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정신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정신을 채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물질이 아니다. 바로 그 정신 자체이다. 따라서 정신을 채우는 일에는 돈이 안 들거나 들어도 먹고 입고 잠자는 비용에 비해 매우 적을 수 있다. 당연히 이성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을 때는 투입되는 비용에 비해 그 채워지는 것은 매우 매우 크다.
21세기 민주주의 환경에서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인류 역사상 가장 괜찮은 환경이다. 이런 제도적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개인적 자유’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면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일이다. 현명하게 ‘감성적 자유’와 ‘이성적 자유’를 잘 조화시켜 볼 일이다.
* 출처: 신동기 저 《생각여행》(티핑포인트, 2014년 12월 월 출간) p278-290
*****(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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