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 가면 다른 전각들과는 특이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띕니다. 목조 2층 건물에 단청을 하지 않은 이른바 ‘백골집’입니다. 왜 단청을 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선조(宣祖)가 겪었던 절체절명의 어려웠던 시기를 결코 잊지 말자는 후대 왕들의 각오가 숨겨져 있습니다.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궁궐은 모두 불타버리고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었습니다. 어렵사리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게 됩니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으로 부르다가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덕수궁입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경운궁에서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리고는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며 사실상 경운궁을 해체하였으나 선조가 사용하던 건물 중 두 채는 남겨두게 합니다. 바로 즉조당(卽阼堂)과 석어당이지요.
석어당은 또한 《계축일기(癸丑日記)》의 주된 무대이기도 합니다. 《계축일기(癸丑日記)》는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궁중 수필 중 하나입니다. 광해군 5년(1613)에 광해군이 어린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가두었을 때의 정경을 일기체로 적은 글입니다. 이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 바로 경운궁 석어당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흔적만 남았으나, 임진왜란 때 선조가 고생한 것을 상기하려 조선 후기 임금들이 경운궁을 이따금씩 찾았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왕은 영조와 고종이었습니다.
영조는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한양으로 환어한 지 3주갑(周甲, 180년)이 되는 1773년에 즉조당과 석어당에서 국란을 치른 선조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추모의식을 가졌고, 고종 역시 1893년 5주갑(周甲, 300년)이 되는 때를 맞아 왕비와 왕세자, 대신들을 대동하고 참배하며 종묘사직의 보전을 기원하였던 곳이 즉조당과 석어당이었을 만큼 이곳은 조선왕실로서는 소중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호칭으로 경운궁과 덕수궁, 어느 쪽이 맞느냐’ 하는 혼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