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1세(고대 페르시아어: 𐎭𐎠𐎼𐎹𐎺𐎢𐏁 - Dārayava(h)uš, 페르시아어: داریوش 다리유슈, 기원전 550년경 ~ 기원전 486년경)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세 번째 샤한샤이다. 다리우스는 제국을 전성기에 올려 놓았고, 그리스의 일부와 이집트를 차지했다. 제국은 그의 죽음과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의 즉위 직후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함께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의 다른 여섯 귀족 가문의 도움으로 약탈자로 알려진 가우마타를 제거함으로써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제국 도처에 걸쳐서 일어난 반란들에 직면하였으며, 그때마다 이를 진압하였다. 다리우스의 주요한 사건은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징벌하고 그리스를 병합하기 위해 나선 원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를 병합하기 위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다리우스는 메디아 왕국을 침략하여 키루스 2세(=키루스 대제)를 죽였던 이란 계의 부족들인 사카를 공격하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제국의 판도를 넓혔다.
다리우스는 제국을 여러 주로 나누어 그곳에 지방관이 다스리도록 배치하는 등 국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제국의 표준어로 아람어를 채택함에 따라 새로운 통화 시스템을 조직하였다. 또한 다리우스는 수사,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제국에 걸친 건설 계획을 세웠다. 다리우스는 이집트의 법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언덕의 벽면에 베히스툰 비문(=비시툰 비문)을 새겼는데, 이는 현대 언어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기본 사료[편집]
페르시아 사료[편집]
베히스툰 비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비시툰 비문)
다리우스는 자신의 즉위기간 동안 베히스툰 산(비시툰 산)에 엘람어, 고대 페르시아어, 바빌로니아어 등의 세 가지 언어로 기념 부조를 새겨놓았다. 먼저 이 비문은 다리우스의 족보와 혈맹과 관련된 그의 간략한 일생을 다루고 있다. 또한 키루스 대제의 죽음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남겨져 있다. 다리우스는 자신이 조로아스터 교의 신인 아후라마즈다의 후광을 받은 정당한 황제라 수 차례 언급하고 있다. 추가적으로,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고대 페르시아의 조각들과 로마 시대에 그리스 어로 보존된 다리우스의 편지 등을 포함하여 페르세폴리스에서도 더 많은 글들과 기념비들이 발견되었다.
헤로도토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헤로도토스입니다.
역사 또는 페르시아 전쟁사의 저자이자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과 페르시아의 여러 황제를 설명한다. 그는 다리우스에 관해 더 많이 기술하고 있다. 다리우스 이야기는 3권의 절반과 4, 5, 6권 전체에서 서술하고 있다. 다리우스 이야기는 찬탈자로 알려진 가우마타를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다리우스의 통치 끝까지를 다루고 있다.
구약성서[편집]
구약성서에는 두명의 다리우스가 나온다.
다리우스 1세 : 구약성서의 에즈라에는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하는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신전은 다리우스 6년인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다. 이것은 기원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신전이 파괴된지 정확하게 70년 후의 일이다. 이리하여 예레미아(예레미야 29:10-14)의 70년 예언이 실현되었다.
느헤미야 12:22의 바사왕 다리우스도 다리우스 1세이다.
메디아사람 다리우스: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는 다리우스에 대해서 메데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로서 그가 62세에 통치를 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120인의 태수를 배치했다고 적혀있다. 메디아사람 다리우스라고 표기된다.
삶[편집]
탄생과 유년기[편집]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50년에 히스타스페스의 장자로 태어났다. 히스타스페스는 페르시아 인들의 고향인 파르사 지방의 유력자였다. 다리우스의 베히스툰 비문(비시툰 비문)은 히스타스페스가 기원전 522년 경에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다고 적어놓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게 오류라고 지적받고 있지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히스타스페스는 파르사 지방의 사트랍이었다고 한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권력을 잡기에 앞서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에서 창병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집권과정[편집]
다리우스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하나는 다리우스가 직접 새긴 비시툰 비문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헤로도토스와 같은 그리스 역사가들의 설명에 있다.
일단 양쪽 기록의 공통적인 부분을 정리해보면 전임 국왕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다)를 몰래 살해했는데, 가우마타/스메르디스(죽은사람과 동명이인)라는 사람이 암살당한 동생을 사칭하며 캄비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캄비세스는 사망 혹은 패배하여 반란진압에 실패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은 가우마타가 차지하게 된다. 이후 캄비세스의 측근이었던 다리우스가 역습을 시도해 가우마타를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후손이 없던 캄비세스를 뒤이어 아케메네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된다.
베히스툰 비문[편집]
베히스툰 비문에 적혀 있는 다리우스의 설명은 캄비세스 2세가 그의 형제인 바르디야를 죽였는데, 이 살해가 페르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찬탈자로 의심받는 가우마타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거짓말하였다. 이에 페르시아 인들은 캄비세스의 통치에 반발하였고, 결국 기원전 522년 3월 11일에 캄비세스가 부재한 사이에 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7월 1일, 페르시아 인들은 "바르디야"로서의 가우마타의 지도 하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아케메네스 가문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우마타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서지 못하였다. 탄핵받은 캄비세스 2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창병으로 봉사했던 다리우스는 누군가의 지원을 바랐고, 그는 오타네스, 인트라프레네스, 고브리아스, 히다르네스, 메가비수스, 그리고 아스파티네스와 함께 시카야우바티의 요새에서 가우마타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다리우스가 황제임이 선포되었다.
그리스 역사가들[편집]
그리스 역사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서 동생 스메르디스를 살해했는데, 당시 수도에서 전쟁중인 국왕을 대신해 국정을 맡던 파티제이테스가 닮게 생겼던 자신의 형제스메르디스(동명이인이다)를 캄비세스의 동생으로 속인 뒤, 황제의 동생을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캄비세스 2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 오던 중 병사하고 파티제이테스의 세력은 아케메네스 제국을 차지하게 된다.
오타네스는 새로운 황제가 황족을 사칭하는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어, 다리우스를 포함한 다른 여섯 명의 페르시아 귀족들과 함께 자칭 바르디야라고 하는 세력들을 축출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파티제이테스, 조로아스터 교 신봉자들과 가우마타를 죽이고 난 다음날, 다리우스는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