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 생활의 시작
정경희
누군가는 나에게 일생 살면서 삶의 분기점을 만들어준 ‘내가 만났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끝이 보이지 않은 가파른 등산길에서는 오직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만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아니하였다.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애처로운 인생이라 여겼다. 하산길에 접어든 지금은 숲을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마을에서 처음으로 객지 생활 시작한 나의 이십 대 초반 시절이 아른거린다. 모두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직장생활하는 동안 인사발령 따라 이곳저곳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첫발령 받아 익숙해져 갈 때쯤 계장님이 나를 불렀다. 승진하려면 집 떠나 멀리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만 하여도 직장 여성 대하는 시선이 곱지 않을 때이다. 집에서 편하게 다니다가 결혼하면 그만둘 것인데 객지까지 갈 필요 있느냐는 것이다. ‘평생 직장생활 할 것이니 어디든 보내 달라.’고 하였다. 오 남매 북적거리는 집 떠나 혼자 폼 잡고 살고 싶었다. 많은 동료는 ‘온실 속 화초’인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염려하였다는 말을 나중에야 들었다.
제법 사람으로 북적이는 바닷가 마을에서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 인사 이동하게 되면 계장이나 선배직원이 새 근무지까지 데려다주는 관행이 있었다. 결혼한 신부가 시댁에 처음 들어갈 때 친정 어른이 따라가던 ‘상각’같아 참으로 든든하다. 내륙지방에서만 생활하던 나에게 12월 초순의 바닷바람은 겁나도록 무서웠다. 운동장 지나 건물까지 가는데 세찬 바람이 우리를 훑고 지나간다. 발걸음 떼는 것조차 힘이 든다. 겨우 정신 차리고 귓바퀴 만지는데 날아온 모래가 손가락 끝에서 서걱거린다.
그 먼 길까지 동행하여 준 계장은 낮선 곳에 나를 혼자 두고 돌아서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며 두고두고 애처로워하였다. 시집간 딸 떼어놓고 오는 기분이었단다. 지금도 만나면 그날의 아픔이 떠오르는지 감탄사 연발하며 회상에 젖는다. ‘이제는 술 한잔해도 되지?’라며 내 잔에 소주를 따른다. 어린 날 회식 자리에서는 술을 권하며 ‘들고만 있어라.’고 당부하던 양반이다.
요즘처럼 승용차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다. 성주에서 대구, 대구에서 포항, 포항에서 직장이 있는 바닷가 마을까지는 참으로 먼 길이다. 가끔 집에 다녀오는 날은 눈물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다. 성주에서 버스 타면서부터 갈아타는 동안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포항에서 바닷가마을까지는 비포장도로이다. 버스가 덜컥거리는 길에서 급 브레이크라도 잡으면 뒤쪽에서 떨어진 좌석 시트가 앞으로 쭈~욱 밀려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마가 싸준 파김치 통 잡은 손에 힘주며 눈물을 멈춘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자주 가지 못하는 이들과 주말이면 몰려다녔다. 산 아래 저수지에서 낚시 하고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동료 옆에서는 숨죽이고 올라올 물고기를 기다렸다. 낚싯대 주인과는 상관없이 잡힌 물고기는 구경꾼인 우리의 횟감이다. 회라고 하면 오징어 삶아 초고추장 찍어 먹는 숙회밖에 몰랐던 나에게바닷가 생활은 또 다른 신세계이었다. 빙긋이 웃으며 회 떠주던 토박이 직원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장날에는 몇 명이 짝을 이루어 시장에 몰려간다. 그 당시 상인들이 파는 각종 채소는 큼지막한 단으로 묶여 있다. 조금 덜어서 팔라고 하면 흘낏거리기만 할 뿐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시장 한구석에서 채소 한 단을 여러 명이 나누어 집으로 돌아간다. 가족 떠난 객지에서 서로 감싸고 위로해주는 이들이 있어 바닷가 생활은 그런대로 따뜻하였다. 가까운 곳 놓아두고 나를 멀리 보낸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큰 탓에 아름다운 이들 모습을 잘 몰랐다.
정월 대보름이 되었다. 엄마 옆에 있었으면 눈 비비고 일어나면서 부름을 깨물었을 것이다. 오곡밥에 갖은 나물과 통으로 구운 청어 한 마리, 자르지 않은 김구이로 아침밥 먹고 있는 동생들을 생각하였다. 참으로 초라한 내 밥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부득부득 올라오는 고향 생각 억누르는 내 마음을 읽었을까? 나보다 한참 어린 직원이 점심때 찰밥 가져오겠다고 한다. 제법 큰 키에 유난히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예쁜 여성이다. 몇 살 차이나지 않는데도 깍듯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참 좋다.
근무처 뒤편을 지나면 좁은 길이 있고 낮으막한 언덕이 시작된다. 경사진 골목 따라 올망졸망 모인 집들이 따스한 햇볕 받으며 하나같이 바다를 향하여 앉아있다. 이곳에 사는 직원은 대보름 음식 가득 차린 알루미늄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왔다. 얌전하게 덮은 보를 걷어내는데 감동이 밀려온다. 따뜻한 오곡밥과 국, 갖가지 나물이 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텐 밥그릇 하나 가득 채운 밥은 장정이 먹어도 충분한 양이다. 딸의 직장 동료를 위해 밥 차려준 엄마의 푸근한 인심이 고맙다. 무거운 쟁반 들고 헐레벌떡 걸어오던 순수한 그녀의 눈빛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실컷 먹고도 밥이며 반찬이 많이 남았다. 쓰윽 지나가며 밥상 본 총각직원이 거리낌 없이 남은 밥을 다 먹었다. 완전히 빈 그릇이 되었다. 요즘 같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 되살리지 않으면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바닷가 산책하던 동료들이 총각직원과 나를 남겨둔 채 황망히 사라져버린 사건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좀 어울리는 남녀였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객지의 외로움과 감상에 젖어 안 좋은 길로 빠질까 하는 두려움에 마음 문을 닫고 살았다. 청춘의 감정이 시키는 대로, 마음 열고 세상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처음으로 겪어보는 내 이십 대 초반의 객지 생활은 여섯 달 만에 끝났다. 바닷가 마을의 여러 동료 덕분에 객지의 외로움을 버티었다. 그들도 때가 되면 떠나고 새로운 이들로 채워진다. 나를 멀리 보낸 그 누군가에게 직접 하소연하였다. ‘향수병이 생겨 못 견딜 것 같으니 나를 고향으로 보내 달라’ 징검다리처럼 한 곳을 더 거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내가 만났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남편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니면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첫 아이를 꼽을 수 있다. 그래도 순수하였던 스물두 살에서 스물세 살 시절, 바닷가의 여섯 달은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은 나의 청춘이었다. 직장생활에서 ‘상각’이 되어준 계장님이 고맙다.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 들고 와준 예쁜 여인과 티 없는 모습으로 함께 해 준 동료는 내가 만났던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20260119)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