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50) 초선
현산에서 뒤따라 오던 손견군을 매복 작전으로 몰살시킨 여공이 반격을 가하니, 그에 호응하여 형주성 에서는 황조, 괴량, 채모등의 장수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마다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손견군의 후방을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한편, 손견의 장수 황개는 점령지에 있다가 형주성 쪽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군사를 몰고 형주성으로 달려왔고, 또 다른 손견의 장수 정보는 손견의 맏아들인 손책을 보호하고 적진으로 나와, 유표의 여공을 만나 한바탕 싸워서 그를 죽이고 유표의 수장 황조를 사로잡는 전공을 올렸다.
이렇게 밤이 가고 새벽이 되자, 손견군은 자기네 맹주인 손견이 지난밤 싸움에서 전사해 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에 맏아들 손책이 목을 놓아 울었다.
그러자 정보가 손책에게 말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빨리 회군하는게 좋을 것 같소."
그러나 손책은 머리를 흔든다.
"아버지의 사체를 적의 수중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내가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면 우리가 적장 황조를 사로잡았으니, 황조와 주공의 사체를 서로 교환하도록 강화를 맺으면 어떠하리까?"
"저들이 들어 줄까요?"
그러자 군리 환해(軍吏 桓楷)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유표와 안면이 있으니, 강화 교섭을 해 보겠소."
환해가 사명을 띠고 형주성으로 유표를 찾아가 그 뜻을 전하였다.
"손견의 시체는 우리가 보관하고 있으니 황조를 돌려보내면 언제든지 사체를 내주리라."
유표가 대번에 강화에 응하였다.
그러자 대장 괴량이 이렇게 간한다.
"주공! 강동군은 이미 지리멸렬하게 되었는데, 이제 강화가 무슨 필요요? 손견의 시체를 돌려보내고 강화를 맺으면 일시는 무사할지 몰라도 머지않아 그들은 원수를 갚으려고 덤벼들 것이오. 그러니 차제에 강동군을 완전히 쳐 버려야 합니다."
그러자 유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심사숙고하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황조는 나의 오랜 충신인데, 그를 죽게 내버려두면 나로서는 면목없는 일이오. 아무래도 강화를 맺어야겠소."
"사로잡힌 장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손 안에 다 들어 온 제국 하나를 거절한단 말씀입니까?"
괴량은 안타까워 부르짖었다.
그러나 유표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므로 괴량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아아, 대사를 기어코 그르치게 되는구나!"
손책은 황조를 돌려 주고 부친의 사체를 돌려받자, 조기(弔旗)를 달고 강동으로 돌아가 장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때 손책의 나이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으나, 아버지의 위업을 물려받아 인재를 널리 모아 제국의 힘을 기름으로써 심중의 타산을 기하고 있었다.
얼마후, 장안에 있던 동탁은 손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손견의 아들이 몇 살이냐?"
"열일곱 살이라고 합니다."
"아직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구나!"
동탁은 그후로 더욱 교만하여 스스로 <상부(尙父)>라 부르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우인 동민(董旻)을 좌장군으로 삼아 병권(兵權)을 장악케 하고, 조카 동황(董璜)을 시중(侍中)으로 삼아 정권을 휘두르게 하는 등, 동씨 일문을 중요 요직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장안에서 백여 리 떨어진 경치 좋은 미오에 자신의 성을 짓게 하였다.
그곳은 황실의 궁전보다도 호화로운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하였고, 성안의 건물들은 금과 옥으로 장식했고 그 안에는 삼만의 군사를 배치해 놓고, 이십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까지도 비축해 놓았다.
또 십오 세에서 이십 세 사이에 미녀 팔백 명을 후궁으로 들이고 천하의 보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어느 날, 동탁이 미녀들과 연락을 막 시작했을 무렵에 여포가 황망히 달려 들어왔다.
여포는 동탁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동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지금 당장 잡아 없애라!"
그러고서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좌중은 또 누구의 목이 달아나는가 겁에 질려 모두가 떨었다.
그러자 여포는 좌중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니 사공 장온(司空 張溫)의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말없이 밖으로 끌고 나간다.
연락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흥겨운 줄을 몰랐다.
이윽고 잠시 후에 시종 하나가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장온의 머리를 소반에 얹혀 들고 들어와 동탁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연락에 참석한 백관들은 몸서리를 쳤다.
그러자 동탁이 껄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공들은 과히 놀라지 마시오. 장온이 원소와 내통하여 나를 해하려 한다는 정보가 있어서 마침 내 아들이 알고 참한 것이오."
백관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동문 일족의 중상모략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날 사도 왕윤(司徒 王允)은 그 광경을 보고 나니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리하여 깊은 밤에 달을 우러러보며 혼자 뜰을 거닐고 있노라니까, 문득 가까운 곳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냐!"
왕윤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늪가에 있는 모란정(牡丹亭)으로 걸음을 옮겨가 보니, 뜻밖에도 어려서부터 얻어다 기르는 초선(貂蟬)이가 울고 있었다.
초선은 방년 십칠 세의 처녀로서 가무에 능한 여자였다.
"네가 무슨 연유로 밤중에 이곳에서 울고 있느냐?"
"저는 대인(大人)이 불쌍하여 울고 있사옵니다."
"뭐? 내가 불쌍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왕윤은 적이 놀라며 반문하였다.
"대인께서 나라 일로 항상 근심에 싸여 계신 것을 보옵고, 저는 눈물이 절로 나옵니다."
"음 .... 그러나 그런 일은 네가 걱정할 일이 못 된다."
"대인의 은혜로 살아온 몸이 어찌 근심을 아니할 수 있겠사옵니까? 제가 비록 천한 출신이오나 대인을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간절하오니, 혹시 소녀가 도와 드릴 일이 있사오면 신명도 아끼지 않고 나서 보겠사옵니다."
"음....."
왕윤은 의외의 초선의 뜻 깊은 말에 내심 놀라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팡이로 땅을 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초선아! 네 뜻을 알았으니 나를 따라 오너라. 꺼져가는 한나라가 너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느냐!"
왕윤은 초선을 화각(畵閣)으로 데리고 들어가 상좌에 앉혀 놓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경건히 절을 하였다.
"대인님!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아니다, 초선아! 나는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를 구해 주시려는 천인(天人)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왕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녀를 쓰실 곳이 있사오면 백 번 죽어도 사양치 않겠사오니, 무슨 말씀이든지 알려주시옵소서."
"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할 사람은 오로지 너밖에 없다. 동탁이 역심(逆心)을 먹고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데, 그를 죽일 사람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너밖에 없구나!"
"제가 분부대로 해보겠사옵니다."
"아니다. 그렇게 함부로 덤벼서는 안 된다. 동탁을 죽이려면 먼저 여포를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런데 여포는 천하의 장사이기 때문에 힘으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구나."
"그러면 어떤 방법을 쓰면 좋겠사옵니까?"
초선은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듯이 결연히 묻는다.
"동탁이나 여포가 모두 다 계집을 좋아하므로 여포를 죽이는 데도 네 힘을 빌려야만 할 것 같구나."
왕윤으로서는 차마 말하기가 거북했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릴 수가 없었다.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나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그러면 너를 여포에게 준다고 속여 놓고 실제로는 동탁에게 주어서 두 사람을 이간시키는 것이 상책일 것 같은데, 네가 과연 그 일을 감당해낼 수 있겠느냐?"
"소녀가 지혜를 다해 보겠습니다."
"그대신 몸을 더럽힐 각오가 있어야 할 터인데?"
"나라를 위하고 대인을 위해서라면 천녀의 몸이 무엇을 사양하겠나이까? 만약 실패를 하는 날에는 웃으면서 그들의 칼에 죽겠나이다."
초선의 결심은 이미 보통이 아니었다. 왕윤은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초선 앞에서 또 한 번 큰 절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