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전주, 초남이 교리당 (순례지/성지)
주소: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신기길 121-87
순교자들이 죽음으로 증거한 신앙은 한국 교회 237년 역사의 씨앗이 됐다. 신앙 선조들은 20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모습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발견됐다. 신앙 선조들은 ‘참된 신앙’을 다시 한 번 전하고 순교 신심을 일깨우기 위해 200여 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천주를 큰 부모로 삼다
윤지충은 1759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촌 정약용(요한 세례자)을 통해 신앙에 대해 알게 됐고, 1787년 인척인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은 이후 사촌인 권상연(야고보)과 동생인 윤지헌에게도 교리를 전해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권상연은 1751년 진산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권상연은 학문에 정진했으나 사촌인 윤지충에게 교리를 배운 뒤 학문을 버리고 1787년 유항검에게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廢祭焚主)’는 유교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결국 ‘그들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고, 피신해 있던 그들은 1791년 10월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신앙을 버릴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 터)에서 순교했다. 윤지헌은 1764년 태어났다. 형인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됐고 1787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윤지헌은 1791년 윤지충이 순교하자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윤지헌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체포돼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한국 첫 순교자, 초남이성지 안치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16일 초남이성지 교리당 앞마당에서 순교자 현양미사를 주례하고, 교리당에 윤지충·권상연·윤지헌 복자의 유해를 모셨다. 김 주교는 안치식 중 안치소를 축복하고, 복자들의 유해가 담긴 관을 봉인했다. 이어 복자들의 유해 일부가 담긴 성광도 안치소에 설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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