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학, 정여창의 그림자
by최원돈
Jun 3. 2026
일두학, 정여창의 그림자
― 김윤승 수필 선집을 읽고
최원돈
초여름 문턱, 지리산에서 책 한 권이 도착했다. 봉투를 열자 묵직한 제목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 두 학. 책등에 손끝을 얹는 순간 오래된 선비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듯했다. 지리산문학관 관장 김윤승 선생이 보내온 수필 선집이었다.
‘일두一蠹.’
왜 하필 일두일까.
일두-좀은 오래된 옷장을 파고들고, 책장을 갉아먹고, 사람이 아끼는 것에 흔적을 남기는 작은 벌레다. 누구도 자기 호를 좀이라 짓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대학자 일두 정여창은 스스로를 ‘천지간 한 마리 좀’이라 불렀다.
처음엔 이상했다. 겸손이라기엔 지나치고, 자조라기엔 결기가 있었다.
김윤승 선생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그 뜻이 서서히 열렸다.
정여창은 열여덟 살 무렵, 송나라 학자 정이천의 글을 읽었다. 세상 모든 이의 수고 속에서 살아가면서 아무 공덕도 남기지 못한다면, 천지간에 한 마리 좀이 될 뿐이라는 경계였다. 그는 그 말을 평생의 채찍으로 삼았다. ‘나는 과연 세상에 무엇을 남기는가.’ 스스로를 다그치는 이름, 그것이 일 두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이 갈아놓은 밭에서 먹고, 누군가 세운 길 위를 걷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노동 속에서 하루를 산다. 그러나 젊은 날에는 그것을 잘 모른다. 세상이 내 힘으로 굴러가는 듯 착각하며 살아간다. 정여창은 열여덟에 그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에게 겨눈 채찍으로 삼았다.
김윤승 선생은 말한다.
일두를 단순히 겸손의 호칭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좀 같은 존재이니 낮춘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간 한 마리 좀으로 살지 않겠다’는 결기와 다짐이어야 한다고.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한 사람의 학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신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윤승 선생은 마치 일두 정여창에게 사로잡힌 사람처럼 보인다. 아니, 사로잡힘을 넘어 오래된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에 가깝다. 선친에게서 유불도 삼교회통의 사상을 배우고, 고운 최치원 선생의 사유를 탐색하며, 끝내 중국 사천대학까지 건너가 도교를 연구한 삶. 그는 학문을 책 속에 가두지 않았다. 삶으로 끌어와 길 위에서 다시 묻고 있었다.
그가 2019년 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된 뒤,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원을 세우고 기록을 엮어가는 모습 또한 그러했다. 한 사람을 연구하는 일이 아니라 한 정신을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김윤승 선생은 책상 앞 학자만은 아니다.
지난4월 영월 문학행사에서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진 일정표를 따라 움직였지만, 그는 달랐다. 청령포와 장릉, 장판옥과 낙촌비각, 보덕사와 금몽암까지, 단종의 숨결이 남은 곳이라면 한 군데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디를 가든 먼저 자료를 읽고, 현장을 확인하고,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길을 따라다녔지만, 그는 시간을 따라 걷는 사람 같았다.
청령포에서 왕방연의 시조비 앞에 섰을 때였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그는 오래 비석 앞에 머물렀다. 단종을 호송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정말 충신이었는지, 왜 후대에서 제대로 현창 되지 못했는지를 조용히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지나치는 비석 하나였지만, 그에겐 아직 풀리지 않은 역사였다.
창절사에서는 충신들의 위패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단종을 향한 충절과 무오사화의 비극, 점필재 김종직과 일두 정여창의 절의를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엔 학문 이상의 떨림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 해설자의 설명이 아니라 오래 품어온 학자의 신념에 가까웠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왜 이토록 일두를 천착하는가를.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일두 선생이 평생 자신을 경계하며 살았듯, 김윤승 선생 또한 삶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리산문학관 관장으로 지역문화를 일으키면서도 문학 행사의 현장을 부지런히 오가고, 연구하고, 쓰고, 만나고, 다시 길 위로 나서는 사람. 유유자적해 보이면서도 실은 누구보다 치열한 사람.
그는 자유분방했다. 때로는 돈키호테 같았다. 그러나 허공을 향해 창을 겨누는 사람이 아니라, 잊혀진 정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에 가까웠다.
몇 해 전 함양에서 열린 일두 선비아카데미가 떠오른다. 마지막 날, 그는 서울서 내려간 우리를 데리고 고운 최치원과 일두 정여창의 유적지를 안내했다. 오래된 비석 하나 앞에서도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고, 바람이 스치는 산길에서도 역사는 그의 입 안에서 다시 숨을 쉬었다.
그날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김윤승 선생의 얼굴 뒤로 자꾸 다른 얼굴 하나가 겹쳐 보였다.
천지간 한 마리 좀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그쳤던 선비, 시대의 절의를 붙들고 살았던 사람, 일두 정여창.
어쩌면 그는 일두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두의 정신을 오늘에 이어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내 삶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과연 천지간 한 마리 좀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작은 공덕 하나라도 남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초여름 햇빛이 책장 위로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일두학이라는 제목이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한 자만이 끝내 그 정신을 닮아간다는 듯이.(2026.06.02.)
일두 정여창의 그림자
― 정여창의 시대정신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이름은 때로 한 시대의 양심이 된다. 일두 정여창. 그는 스스로를 ‘천지간 한 마리 좀(一蠹)’이라 불렀다. 겸손이라기보다 경계의 이름이었다. 세상 모든 이의 수고 속에 살아가면서 아무 공덕도 남기지 못한다면 한 마리 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책, 그것이 그의 삶을 떠받치는 뿌리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권력과 양심이 자주 등을 돌리던 시절이었다.
세조 이후 조선은 겉으로는 태평해 보였으나, 안으로는 단종의 상처와 절의의 기억이 깊게 흐르고 있었다. 정여창은 스승 김종직의 가르침 속에서 학문보다 먼저 사람의 도리와 의(義)를 배웠다. 권력에 순응하는 삶보다 옳음을 지키는 삶을 더 높게 여겼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선비를 오래 품지 못했다. 무오사화는 한 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죽은 왕을 애도하는 글 속에서 권력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읽어냈다. 결국 제자들까지 화를 입었다. 정여창 역시 유배 끝에 생을 마쳤고, 죽어서도 부관참시의 비극을 겪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정치의 희생자라기보다 양심의 희생자였다. 시대는 때로 칼보다 침묵을 강요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속 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문득 묻는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세상에 작은 공덕 하나라도 남기는 삶인가, 아니면 천지간 한 마리 좀으로 스쳐 가는 삶인가.
일두의 이름은 오래된 비문처럼 묵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지금도 조용히 우리를 꾸짖고 있는 듯하다.(202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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