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편적인 노래
모짜르트가 죽었다. 세상의 많은 살리에르가 그렇듯 결국 나도 모짜르트가 되지 못했다. 왜 천재들은 빈틈을 보이지 않을까. 아주 흔한 결점, 건망증이 심하다든지 배려를 안 한다든지, 그들이 품으면 왜 그것마저 천재성의 일부가 되는가. 왜 97%의 천재성에 공평성을 기하기 위한, 신의 3%가 되고 마는가. 왜 그가 죽어도 살리에르는 영원히 살리에르일 수밖에 없는가. 불태우고, 증오하고, 가족을 파멸시키고, 뒷담화를 하고, 무시하고, 그 꽁무니를 쫓던 수많은 살리에르는, 왜 끝끝내 그가 되지 못하고 참회 아닌 참회를 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릴까. 그 후회는 평생을 모짜르트의 탄생에 저주를 퍼부었던 자신의 탄생에 바치는 뒤늦은 저주요, 그가 떠나버린 세상에 던지는 증오다. 허망과 탄식. 떠나버린 그가 남긴 허상만을 좇던, 나의 손가락들이 오래된 부품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5살의 나를 안다. 뻗친 머리로 정신없었던 꼬마는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을 보지 못했다. 수염이 덥수룩했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나는 처음으로 몸을 움츠렸다. 수년간 중국과의 무역 루트를 개척하던 아버지는 앵무새 수입으로 돈을 버는 데 성공했다. 처음으로 번 돈. 그것만으로 아버지는 5년 만에 집에 올 면목이 생겼다. 아버지는 양 겨드랑이에 요란한 새장을 낀 채 내 볼에 까칠한 얼굴을 비볐다. 난 얼굴을 찌푸리고서 후다다 방으로 뛰어갔다. 아버지는 새장을 내려놓고서 엄마와 잠깐 마주 봤다. 5년 동안 엄마는 주름이 조금 늘었고 쌍꺼풀 수술을 했으며, 눈 감고도 된장찌개를 끓일 줄 알게 됐고 출판사에 일하는 워킹맘이 됐으며, 주량이 맥주 두 병으로 늘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 마디 툭 내뱉고서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볶았군.
사실 한 지 4년이 됐다고 말하고 싶었다던 엄마는 아무튼 그때는 아버지를 말없이 노려봤다. 아버지는 일주일 뒤에 떠났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건 백만 원짜리 수표와 구관조 한 마리, 그리고 내 동생이었다. 타클라마칸인지 어딘 지로 떠난 아버지는 동생 관주가 걷기 시작할 무렵 돌아왔다. 아버지 대신 현관에 나타난 건 반질반질한 피아노 한 대였다. 건장한 남자 두 명은 영차 내려놓더니 아버지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난 월트 디즈니의 '라이언 킹'을 보고 있었다. 사자들끼리의 암투, 사투, 결혼, 음모, 뭐 웃기지도 않은 그런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등 뒤에서 날 끌어안더니 또 얼굴을 비볐다.
"선물이다."
난 '응 안녕 아빠'라고 대답하고서 거실에 자리 잡은 피아노로 후다다 달려갔다. 의자 위 하얀 시트에는 이미 다른 이의 궁둥이가 찰싹 붙어 있었다. 야구 방망이보다 작았던 관주가 뚜껑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광경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와 엄마는 다시 대치 중이었다. 아버지가 '사장님'이 돼서 돌아오기까지 엄마는 닭발과 곱창을 먹을 수 있게 됐고 주량이 소주 3병이 됐으며, 몸무게가 7킬로그램 늘었고 전공했던 한국 무용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아버지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한 마디 내뱉었다.
늙었군.
엄마는 말없이 노려보는 대신, 거실 구석에 쭈그려 있던 걸레를 집어던졌다. 걸레는 아버지의 이마에 철썩 달라붙었다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엄마는 꽥 소릴 지르고서 안방으로 씩씩거리며 들어갔다.
"나가 죽어!"
아버지는 멋쩍게 웃더니, 작은 방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7살의 나는 뚜껑을 열고서 동생의 자리를 뺏었다. 관주는 늘 그렇듯, 엉엉 우는 대신 헤헤거리며 의자 밑으로 들어가 페달을 꾹꾹 눌렀다. 나는 처음으로 '레'를 쳤고, 관주는 댐퍼 페달을 눌렀다 뗐다 했다.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 몰랐다. '레'는 곧 끊어질 듯 죽는소리를 내다가 관주가 누른 페달 덕에 날개를 얻고서 붕붕 날았다. 고래의 울음처럼, 높고 긴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내가 낸 소리에 감탄하여 으헤헤 웃음을 냈고, 관주는 그 순간에도 쥐 잡듯 페달을 누르고 있었다. 이름이 '판사'였던 앵무새는 늘 그랬듯 그날도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기각한다.
처음 집에 오던 날 마침 TV에서 나오던 게 무슨 첩보물이었는데, 더빙판에서 주인공은 궁지에 몰린 악당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기각한다."
화면 페이드아웃, 맹렬한 총소리가 울리며 영화는 막을 내렸다. 레레레, 나는 낄낄댔다.
기각한다.
흑단빛의 능선은 매끄럽게 뻗어 있고, 그 밑으로 상앗빛 계곡이 아가리를 벌린다. 축축한 바람에 실려오는 젖은 모래알, 그리고 낮은 허밍 소리. 나는 작은 점이 되어 오래된 풍경화 속에 박혀 있다. 회색 구름이 뚝뚝 떨어진다. 몇 송이 눈이 되어 좌우로 자맥질한다. 끊임없이 증식하는 색의 향연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은 나 하나다. 티끌 하나로만 온전할 수 있는 나는 새삼스레 소름이 끼친다. 아무도 없는 우주를 나 혼자 보고 듣고 한다. 난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던 듯 몸을 떤다. 메자뷰mejaview다. 시리게 푸른 도깨비불이 내 얼굴을 싸고돈다. 나는 그것을 떨쳐내려다,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이 세계에는 나를 봐줄 누구도 없다. 바람이 내 발치에 머물다 검은 물방울이 되어 뚝, 떨어진다. 흩어진 물에 비친 내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등이 끈적끈적하다. 몇 달째 악몽이다. 꿈은 떠오를 듯 말 듯 맴돌기만 한다. 잊힌 조각들이 벽지를 타고 흐른다. 연두색 야광은 몇 번 깜박이다가 흐릿해지며 벽으로 스며든다. 벽지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난다. 꿈의 기억이 부패하고 있다. 눅눅한 이불을 개다가 난 그 자리에 언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를 너의 이름을 나는 중얼거린다. 너는 먼지에 싸여 있다. 동면을 맞은 짐승의 자란 털 같다. 나를 도도하게 내려다본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나는 발을 쓸며 너에게 다가간다. 식은땀, 중얼거림, 낮은 코골이, 몇 번의 뒤척임, 네가 밤새워 지켜보았을 그 모든 것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너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난 결을 따라 한 일一자를 쓴다. 검지에 묻은 먼지를 허벅지에 문지른다.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나의 다짐을 되새겨본다. 내가 말을 걸기 전까지 너는 입을 열지 않을 거다. 너의 목소리는 여전히 청명할 거다. 내 손가락은 너의 허리에서 곡예를 할 거다. 너의 노래에 맞춰, 내 손은 끝나지 않는 춤을 출 거다.
19살의 나를 안다. 14살의 관주는 그날도 피아노에 앉아 애드립을 치고 있었다.
"야."
고음에서 방방 뛰는 관주의 손가락 사이로 내 낮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관주는 돌아보는 대신 발랄하게 되물었다. 왜?
"시끄럽다."
큰 눈의 천재가 돌아봤다. 손은 여전히 뛰노는 중이었다.
"정말?"
하이톤으로 되묻는 동생에 나는 짜증이 났다. 묘하게 비꼬는 듯한 그 표정을 나는 뭉개버리고 싶었다. 내 연주가 시끄러워?
"그래."
그가 양팔을 들어 황당하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뭐. 그렇다면."
관주가 손바닥을 탁탁 비비며 방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그의 온기가 남은 자리에 앉아 건반에 손을 얹었다.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게 이어지는 끊임없는 선율 바흐 샤콘느… 는 20초도 못 가 끝나버렸다! 발밑인지 벽 너머인지 꿈틀꿈틀 기어와 감옥을 탈출하듯 그 좁은 선율 사이를 비집고 나온 음音. 어느 악보에도 없고 어느 CD에도 없고 어느 공연장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나를 미치게 하는 음音. 아이가 뛰놀 듯 노인이 지팡이를 짚듯 순수와 연륜 사이를 넘나드는 음音. 천재의 음音.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닥쳐! 좀!"
관주의 방에서 소리가 뚝 끊겼다. 툭 하더니 피아노 소리 대신 손가락으로 건반 퉁기는 소리만 작게 들려왔다. 형편이 되는 데도 디지털을 고집한 것부터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난 이거면 충분해요, 라던가. 아무튼 녀석은 그 쓸데없는 고집의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분명히 헤드셋을 꽂았을 것이었다. 퉁탕퉁탕. 하늘을 난다면 저런 리듬일까. 내 아르페지오의 음표들은 처참히 무너져 바닥에 뒹굴었다.
16살의 나를 안다. 내가 받아온 트로피와 상장은 현관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용지물이 됐다. 엄마는 좋다고 광을 냈다. 귓속말로,
"관주 저거 잘 치는 거니."
물으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혀."
쩝. 입맛 다시는 소리가 크게도 울렸다. 관주의 블루 노트blue note는 환상적이었다. 공부한 적도 없는 재즈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15살의 내가 코드 공부를 끝마칠 때쯤 녀석은 오가며 들은 것으로 그 자리에서 한 곡을 뚝딱 만들었다. 그런데도 음악에 대한 갈망이나 욕심이 없었다. 반면 나는 끊임없는 욕망에 시달려야 했다. 죽이고 죽여도 시간이 지나면 빳빳이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는 나를 기계로 만들어갔다. 바흐 스카를랏티 비발디 모차르트 베토벤 베르디 도니제티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쇼스타코비치 비에나프스키 브르후… 한 명 한 명 고전의 정수를 마시면서도 나는 늘 목말라했다. 머지않아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 주어진 재능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그건 오로지 우리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가축 같은 자유라는 것을. 성이 날 대로 난 18살의 나는 꾸벅꾸벅 조는 판사에게로 향했다. 13년을 살았지만 아직 팔팔했다. 새장은 신발장 앞에 놓였다. 나는 현관문을 활짝 열고서 굳게 잠겨 있던 새장의 문을 마찬가지로 열었다. 잠에서 깬 판사는 눈알을 한 바퀴 굴리더니 터벅터벅 전진했다. 그의 걸음걸음에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발가락이 차가운 현관 바닥에 닿고, 그가 잠이 확 달아난 듯 소리를 꽥 지름과 동시에 내 다리는 풀려버렸다. 판사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서 그 멍청한 대가리를 몸에 처박고서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지만 감히 곱씹을 수 없었다. 되돌아가기 너무 늦어버린 나에게 바치는. 그건, 뭣도 아닌 동물에게마저 말뚝이 박혀버린 내 한계란… 나는 허허 웃고 말았다. 기각한다. 기각한다. 기각한다.
"어여. 뭐라도 먹어야지."
엄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발밑으로 기어온다. 배고픔은 없다. 가장 큰 욕구가 사라지자 그 밑에 딸린 사사로운 것들은 유혹 축에도 끼지 못한다. 거실을 지나면서 굳게 닫힌 방문을 본다. 그 앞에만 서도 벌써 그의 냄새가 난다. 오렌지와 레몬의 중간쯤, 조명처럼 늘 밝았던 그 냄새가. 멀리 식탁에 엄마가 앉아 있다.
"…아버지는?"
의미 없는 물음이란 걸 나도 엄마도 알고 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를 보러 갔군. 식탁에는 조촐한 밥상이 올라와 있다. 몇 달 새 나는 식성이 바뀌었다. 고기나 기름진 음식은 몇 걸음 앞에만 서도 헛구역질이 난다. 젓가락을 들어 밥에 김을 싸지만 입에 들어가는 건 음식이 아니다. 그저 모래나 시멘트 덩어리 정도로 느껴진다. 힘들게 삼키는 건 엄마를 위함, 그리고 거의 시체가 된 내 몸을 위함이다. 시침이 10과 11을 지나고 있다. 엄마는 내가 먹는 꼴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 눈가에 검은 그림자가 짙다. 엄마는 구역질을 하 듯, 힘겹게 단어 단어를 토해냈다.
"복학. 그… 해야 하잖겠니."
나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는다. 물론 거기에 어떤 감정이 실린 건 아니다. 다만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한 내 나름의 표현이다. 당신의 아들은 그 얘기를 들으면 꽤 화가 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제발. 나에게 그 말만은 하지 마십시오.
"그, 래. 미안하다."
먹고 가지 그러니. 엄마의 말이 뒤에서 들려오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다시, 수십 번 다시, 너와 마주한다. 이제 너는 하나의 표식이 된 것만 같다. 살육을 저지른 군인에게 주어진 훈장, 다시는 펴보고 싶지 않은. 나는 자리에 눕는다. 천장을 본다. 초점을 모으자 벽의 무늬가 마구 화끈거린다. 보라색 곡선이 둥글게 이어지다가 하나의 원이 되기 직전에 한쪽으로 삐져나와 또 다른 원의 형태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완성되지 못한 원이 온 방 안을 빽빽이 채우고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와중에 다시 선잠이 든다.
그래, 꿈은 결코 달지 않다. 난 멀리서 들려오는 후욱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눈을 뜨기 전에 한동안 차곡차곡 정신을 쌓아 올렸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잠을 깨운 게 어딘가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인할 필요도 없이, 저쪽 방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간간이 욕설도 섞여 있는 처절한 울음이었다. 엑엑, 거의 숨 넘어갈 듯 토해내는 필사의 절규가 사방에 가득했다. 난 잠들고 싶었다. 내가 말했지, 꿈은 꿈이라고! 난 눈을 감은 채로 의식의 저편을 보려 노력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끝없는 어둠. 그 어둠은 현실의 일부였다. 잠들려면 현실의 티끌마저도 버려야 했다. 난 눈을 감은 채로 검은자를 뒤집었다. 어둠을 뚫고 빛이 보였다. 잠의 저편이 보였다. 난 잠들고 싶었다. 이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미명도 없었다. 단지 멀리서 후욱대는 어떤 중년 남자의 중얼거림이 들릴 뿐이었다. 난 현실의 어둠 대신 가상의 빛을 봤다. 결코 눈을 뜨지 않으려 했다. 눈을 뜨면 천장의 흰 벽 대신 비명 지르는 여자의 허상이 보일 것 같았다. 난 현실이 두려워 차라리 내 안의 허상을 찾고자 했다. 난 자고 싶었다.
"젠장."
악몽 속의 악몽이다. 어제를 내일로 하고 싶다. 난 눈을 한껏 치켜들다가 주저앉듯이 감아버린다. 그 한순간이 3일로 느껴진다. 다시 눈꺼풀을 여는데 나흘이 걸린다. 한껏 치켜들다가, 그야말로 2분 정도 치켜뜨고는 다시 사흘에 걸쳐 눈을 감는다. 어제를 내일로 하고 싶다.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일도 어제로 하고 싶고, 그렇게 해서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없었으면 한다. …눈을 비비다가, 내가 눈물을 흘렸음을 깨닫는다. 눈곱일 리 없는 감촉에 혼자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다가 화살에 맞은 듯 가슴이 쌔하다. 내 안의 허상으로만 남겨두고 싶었던 그날의 기억이 매섭게 달려든다.
나는 모른다, 20살의 나를. 겨울이었다. 판사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기보다 아직 늙은 티도 나지 않았다.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도 늘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날 아침 엄마가 꺼내놓은 양파가 식탁을 굴러 판사 앞에 떡 하니 당도했다. 모든 일은 거기서 시작됐는지 몰랐다. 앵무새에게 양파를 치명적이다. 그 사실을 엄마도 모르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그날은. 어쩐지 그날의 엄마는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11%쯤 나갔었다. 그랬었다. 고작 양파 하나. 변명처럼 들리는 이야기… 판사가 아주 발악을 하는 통에 관주는 몇 년째 하는 일이면서도 새장에 쩔쩔맸다. 초록 바탕에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건너가세요. 흰 블록과 검은 블록을 나는 가볍게 밟았다. 등 뒤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20살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시니컬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확실할 수 없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게, 열다섯의 어린 관주를 죽이고 말았으니까. …관주의 깨진 머리통을 보고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10년 된 경차가 낼 수 있는 위력에 새삼 놀랐다, 는. 정말 쓸데없는 자각밖에 할 수 없었다. 새장은 멀리 굴러갔다. 판사의 날개가 접혔다.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못했다. 정신없이 구급차 소리가 들렸고 마찬가지로 몸을 발발 떠는 차주가 보였다. 나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입 모양으로 그에게 말했다. 흰머리가 지긋한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이 떠올랐다. 괜찮아, 괜찮아…
한밤중에 잠에서 깬 나는 춥다. 한기가 느껴져서 차라리 밖을 나서기로 한다. 6월의 도시는 적막하다. 가로등 불빛이 끔뻑인다. 오후에 비가 온 모양이다. 아스팔트가 신발에 쩍쩍 달라붙고, 걸음이 느려지다, 축 처진다. 난 코를 만지작거린다. 눈앞이 불편하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것은 비틀거리며 걷는다. 팔이 다리만큼 길어지다가 머리통이 가랑이 사이를 지나간다. 코가 피노키오의 것이 되더니 몸을 한 바퀴 횡 돌아 가슴팍에 꽂힌다. 난 손을 뭣이라도 쥔 듯이 하고 뛰기 시작한다. 그것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난 숨을 고른다. 얼마 남지 않은 숨이 뒤통수에 머물러 있다가 젖은 바람을 타고 휘난다. 난 뭣이라도 쥔 듯 손을 오물거린다. 검은 그것은 몇 발자국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담담히 걷고 있다. 흔들흔들. 나는 남은 손톱만큼의 숨을 사납게 들이마시고 손을 앞으로 내미는 모양을 한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형."
젠장. 난 밀치듯이 검은 것의 어깨를 스치며 뛴다. 뒤를 보지 않고 뛴다. 거기에 어둠 대신의 검은 것이 있다. 어둠 대신의.
"형! 나야, 형."
가는 목소리가 뱀처럼 꿈틀대며 달려든다. 땀이 흐른다. 어둠 대신의. 내가 알던 그의 실체에 대한 내가 보는 허상이 죽여버린 그의 시체가 만들어낸 허상이 괴롭히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여버린 것일까. 버릴 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져갈 수도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목소리가 떨린다.
"기각한다."
나는 허공에 발악한다.
"기각한다."
장송곡이 울린다.
"기각한다."
앵무새는 접힌 날개로 새장을 빠져나와, 15년만에 하늘을 날았다.
"기각한다."
뒤돌아 본 그곳에, 어둠 대신 네가 서있다. 너의 목소리는 여전히 청명할 거다. 내 손가락은 너의 허리에서 곡예를 할 거다. 너의 노래에 맞춰, 내 손은 끝나지 않는 춤을 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