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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 어느 날 강렬한 여름 덧에 걸려들었다. 30도를 육박하는 기온에 노출되면서 덧에 걸려 든 것이다. 여름 중심에 서면 해마다 긴 여행을 다녀온 것이 젊은 날의 대부분이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다녀오는 하계원정등반과 동계원정등반은 장장 15박 16일 정도의 날로 꾸리게 된다. 우선 탐험의 대상지나 산이 선택되면 자연환경과 함께 오를 수 있는 등반 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하게 된다. 접근할 수 있는 교통편, 계곡과 암릉, 숲을 이루는 산림의 밀도와 동식물 종류와 서식지, 계곡의 형태와 물의 속성과 수량, 그리고 적설량과 강수량, 종일 해의 방향과 일출과 일몰 시간, 사계의 기상조건 등을 철저하게 조사를 한 후 탐험이나 등반 계획서를 작성하여 함께 할 동지들에게 배부하는 것으로 원정등반을 시작하는 것이다. 배포된 자료를 보고 동년배, 선후배들이 참가의사를 밝혀 오면 팀을 꾸려 실행단계 계획서를 만들어 다시 배포하고 탐험이나 등반이 완료되면 다시 보고서 형태의 자료를 망라하여 회합을 갖고 정식적인 회단식을 갖으며 회포를 푸는 것이 원정 탐험, 등반 종료 시점이 되는 것이다.
실행 계획서는 대부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짜이게 된다.
1, 참가인원 총수와 인적사항. 비상 연락망
2. 5명 기준으로 1명의 구분 리더를 두고 그 아래 4명의 대원을 편성한다. 그리고 장비, 운행, 취사식량, 막 영, 기록, 의료로 구분하고 의료 2명과 기록 1명을 제외한 나머지 4팀은 5명으로 구성되니 약 25명의 대부대가 구성되는 것이 원정 대원들이었다.
3.이를 기반으로 출발지 공항부근이나 버스 터미널 부근에 합숙서를 정해두고 약 한 달 내내 물품을 준비하고 짐을 꾸리는데 그 장소는 여관의 빈방을 얻어 두고 시간 틈이 나는 대원들이 조별로 만난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된다.
3. 총괄 리더와 서브리더는 대외적인 대표자 역할을 비롯하여 섭외와 책임감을 갖고 통솔하며 모든 위험을 극복하며 안전하게 대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기억을 반추하며 늦은 봄 어느 날 설악산을 살피고 있었다. 나이가 익으면 추억을 생명 빛 즈음으로 여기며 산다고 하였던가! 요즈음 반추라는 의미가 일상 속에서 자주 재현되는 것 같다. 설악 동선 마다 깃든 추억은 설악이 품고 있는 수많은 계곡처럼 많다. 설악은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愛鄕이나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설악을 찾던 길은 동마장을 출발 화양리- 구리- 덕소- 국수- 양평-용문-홍천-인제-원통- 한계리에서 길이 갈렸다. 한계령을 넘어 오색 - 양양- 물치- 설악동으로 가거나 한계리에서 남교리- 용대리- 진부령- 고성-속초- 대포- 설악동 또는 늦게 미시령이 뚫리면서 용대리 - 미시 령 - 학사 평 - 설악동으로 그리고 영동고속도로가 열리면서 강릉 - 낙산- 양양-물치- 속초 터미널에서 버스로 설악동으로 들어 가 외설악 주 무대인 천불동과 화채봉, 천화대 설악골 양폭 천당폭 등을 즐겨 찾았으며 내설악의 주무대인 남교리 십이선녀탕 서북 주능을 용대리에서 백담계곡을 거슬러 올라 수렴동에서 오세암 마등령을 넘어 비선대ㅡ 와선대를 경유하거나 가야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 봉정암 소청, 중청, 대청을 오른 후 오색으로 나가거나 화채봉을 넘어 권금성을 통해 설악동으로 아니면 수렴동에서 백운동 계곡을 선택하여 쌍폭 봉정암 소청, 중청, 대청을 오른 후 다시 중청 희운각 , 양폭, 귀면암, 비선대, 와선대 설동악으로 내려왔으며 종주등반으로는 진부령에서 미시령, 황철봉, 저항령, 마등령, 공룡능선, 희운각, 중청, 끝청, 한계령으로 또한 백담계곡에서 저항령을 넘어 신흥사로 내려오곤 했었다. 설악은 청춘 이념의 지도와 나침반이었다.
노산 이 은 상 선생님께서는 산악관을 아래와 같이 선서로서 매듭지어 주셨었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추억의 의미를 되 새기며 늦은 봄 5월 후반에 주혁이와 함께 할 여행지로 설악을 들여다보며 몇 장의 계획서를 만들었다
마음 가는 대로 계획을. 잡아 본다면 함께 내설악을 출발하여 외설악으로 넘어가는 길을 잡아 나가는 등반을 선택하고 싶었다. 둘만이 떠날 수 있는 기회라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오랜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이 녀석과 꼭 넘고 싶은 길이 있는데 용 대리를 출발하여 내설악 안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옛적 그 길은 백 개의 담(潭)이 몰려 있는 계곡이라 하여 백담 계곡이란 지명을 얻게 된다. 백담계곡(百潭 溪谷)은 수렴동 부근에서 시작되어 영시암, 백담사를 지나 용대 마을 안으로 흘러 남교에서 십이선녀탕 물 마중을 한 후 다시 한계리에서 장수대 물과 합수 되어 강폭을 너르게 만든다. 계곡물은 꼬리를 이어가며 아름다운강물 열수로 꽃을 피우다 서해로 흘러 든다. 진부로 넘어가는 길목 용대 마을 입구를 지나 두어 마장 들어서면 백담계곡 물을 배웅하며 서 있는 너와 지붕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 집으로 다가 가려면은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였지만 한 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내리는 폭우는 징검다리를 흔적도 없이 지우기 일 수였다. 봄부터 늦 가을까지 온 갖 야생화에 포위된 집 정경과 모순되지 않은 넓은 창 앞에는 늘 야생화 꽃 묶은 다발이 놓여 있었다. 꽃 다발이 시들거나 없으면 집 주인이 비우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집 주인이 오랜 시간 머무는 시기는 방학 때였다. 모여대 교수였던 주인은 친동생처럼 아껴주어 늘 하루정도 머물다 산을 오르는 것이 당시 나 만의 불문율이었다. 온갖 약초와 꽃으로 담근 술은 농익어 기가 막힌 술 맛을 느끼게 해 주었는데 ... 마주 앉아 술을 나누다 보면 일경(一更)에 시작한 술은 삼경(三更)이나 가서야 끝을 맺곤 하였다. 어느 날은 일정을 핑 개로 술상을 정리한 후 산을 올라야 하다고 집을 나선적이 많았다. 약 8km의 길을 두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고작 백담 산장까지였지만 나무로 만든 침상 2층으로 올라 매트리스를 깔고 누운 후 장방형 창문을 열어 놓으면 밤새 숲에서 파도를 모으는 듯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어 항복했었다.
서울에서 좀 늦은 시간에 출발하게 되면 당시 교통환경인 버스나 도로사정이 열악하여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용대리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그 때 백담계곡 끝물 거리에 있는 백담제는 요긴한 집이었다. 여유롭게 마주 않아 설악의 정취를 느끼며 서울에서부터 들고 온 식재료를 꺼내 음식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산방정담으로 교분을 나누며 자정 앞 뒤 무렵까지 지내는 시간은 지금 생각하여도 행복한 사유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행복한 기억이 주혁군과의 여행의 경유지로 선택한 동기인 것이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친 후 제노와 함께 설악을 넘었던 기억도 나를 이곳으로 소환하 게 된 동기이다. 첫 기착지로 정한 후 인제, 원통을 경유한 후 한계리와 남교리를 지나 용대리 막국수 집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챙긴 후 버스 승차권을 구매하여 차에 올랐다. 백담제가 있던 자리를 찾아보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 건너 국립공원관리공단 백담 분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차를 이용하여 오르지만 당시에는 kissling bag 부르던 Backpeack이 있었다. 키스링을 잘 다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키슬링 패킹이 서투르면 둥글게 되어, 오랫동안 짊어지고 걷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짐을 꾸리는 요령은 먼저 가벼운 물건은 아래에, 무거운 물건은 위의 앞. 딱딱한 물건은 앞에 패킹 대신 의류를 넣어 등을 보호한다. 그래서 최고의 완성은 얇은 직사각형으로 한눈에 아름답게 생긴 키슬링을 짊어지는 것이다. 사이드에 등산 구두가 들어가도록 공간이 컸다. 키슬링의 단점은 패킹의 어려움 외에 끈을 다루는 일이다. 가늘고 죄고 확실히 묶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학교 산악부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등반 운행장비로 키슬리을 사용하였었다.
백담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공사로 인하여 임시 철교를 놓아 사용하는 곳을 지나자 옛 추억이 더욱 더 나를 설악은 반겨주고 있었다. 오늘 함께 여행을 시작하는 제노와의 설악 추억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4.19혁명으로 새정부가 탄생되어 대통령직으로 선출된 윤보선 대통령, 그에게는 윤 두선이란 동생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서울 살림을 떠나 백담계곡 서쪽 방향 산기슭에 있는 백담사 대각선 풍광 좋은 곳을 찾아 들어온다. 그리고 산판에서 종횡무진 달리던 GMC 트럭에 건축자재를 부지런히 실어 나르더니 산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백담사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암자를 조금 벗어난 수준의 규모였다. 개운 건너 절집이라 표현하긴 빈 한 생각이지만 절규모가 단출하고 울타리는 싸리문 수준이었으며 입구로 접근하는 길도 징검다리 수준에 불과하였다. 수많은 석탑이 쌓여 진 시멘트 길 그곳에 징검다리가 있었다. 등산로에서 보면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접근해 보아도 인적이 거의 안 느껴질 정도의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산사에 불과했던 곳이다.
지금 내설악 명찰 백담사는 만해 스님이 저술한 사적기에 적어 놓은 것을 살피면 647년 신라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한계리에 비금사를 창건하여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한다. 다시 조선 영조51년 1772년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이름 바꿔 달았다. 이는 화재로 손실되어 화마로 피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이어진 화재는 절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이에 고심하던 주지는 용대리 내설악으로 이전하려고 청봉에서 흘러내리는 물 줄기 살펴 처음부터 백 번째 담 위치에 절을 세우고 백담사로 하여 화마를 피하였지만 국가의 큰 변란 중에는 또 화마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일곱번의 화마가 옛 전각이나 유물이 거의 없는 산사로 만들어 버린 이유이다. 백담사는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이 출가 머물수행하던 1910년 님의 침묵을 집필한 곳으로 유명한 장소다. 이러한 역사가 백담사에는 만해 기념관을 짓게 하고 흉상이 절마당에 있으며 님의 침묵과 나룻배와 행인의 시비가 서 있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이 부인과 함께 유배된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백담사와 오세암은 등산객에게 아주 유용한 대피처와 휴식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던 곳이다. 봉정암 역시 많은 도움을 받던 곳이다. 이 때 즈음 윤두선 산악인이 사비를 들여 백담 산장을 신축하여 산악인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된다.
위의 사진속에 세 분은 산악계 유명한 원로로서 좌측으로부터 지리산 함 태식, 백담 산장 건축한 윤 두선, 권금산장 유창서이다. 직접 지어 약 8년간 운영하던 윤두선은 인제군청에 위하여 강제로 불법건축물로 간주되어 쫓겨난 후 삼둔으로 자리를 옮겨 새 건물을 신축한다. 순수 목조건물로서 2층으로 올린 것은 독특한 양식으로 간주된다.
산악인들에게 로망의 집이 되었으며 아는 산악인들만 자주 찿던 곳이다. 마당이 넓어 내실에 손님으로 가득 차면 텐트를 치고 머물다 오곤 하였다.
백담산장은 헐리고 다시 이 모습으로 신축되어 산장으로 이용되다가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백담사로 유배되면서 경호, 경비 건물로 변경되어 사용된다. 해금되어 서울로 돌아가면서 백담 산장에 운명은 다시 바뀌게 된다. 용대리 백담사 소유토지내에 주차장이 생기고 백담사까지 왕래할 수 있는 셔틀버스가 생기면서 산악인들의 숙소 겸 대피소로 사용되던 산장 효용성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장기 임대 형식으로 빌려 부활을 꿈을 꾸며 새로운 출발을 하였지만 실패였다. 결국 관리권이 국립공원 관리공단으로 넘어 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추억이 많은 나에게는 지금도 소중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버스에서 내려 다리 난간에 걸려 있는 연등 사이를 걸어 백담사로 향해 걸어 보았다.
연등(燃燈) 은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반야 등불이다. 불가에서는 등 공양을 포함하여 육법 공양의 시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향은 해탈을 의미하고 꽃은 육바라밀의 만가지행을 상징하는 만행 화이며 차는 열반의 의미가 깃든 감로수이다. 과일은 깨달음의 상징인 보리 과이고. 쌀은 기쁨을 뜻하며 선열미를 상징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육법 공양이 뜻하는 것은 탐욕에 찬 자신의 본연에 모습으로 회귀하는 수행의 의미와 이웃을 향한 자비의 보살 행위 인 것이다.
산문을 나서려다. 다른 산문을 만났다. 인연이 통제되는 공간이다. 무엇보다도 열림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버릴 수 없어 문의 높이는 배꼽 아래에 있다. 마음 결심이 독하면 얼마든지 경계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해 선사의 시를 노래로 불러 보았다.
나룻배와 행인(行人)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 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며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 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성역과 속세를 구분하듯 걸려 있는 연등, 그 아래에는 삼라만상의 존재들이 가득하듯 보이는 수많은 돌 사이를 씻으며 유유히 흐르는 물은 성수를 닮았다.
곧 다가올 장마철 폭우에 순 시간에 사라져버릴 돌 탑. 허울은 소중한 것이 아니다. 복을 짓는 일이 불가에서 소중한 이치다. 그리고 쌓는 것 보다 비우는 일이 최선의 삶이다.
드디어 아주 작은 돌 탑을 완성해 놓았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자신의 건강을 소원하였으면 좋을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며 관절에 무리가 따르고 그래 걱정이다.
물 수제비를 날리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봉정암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불 자들이 세워 놓은 소원 성취의 탑은 불자 수 만큼이나 많이 쌓여 있다. 백 번째 담이 있는 이곳에 있는 것이 돌탑의 전부가 아니다. 저 앞에 숲을 거슬러 오르면 흑선동 계곡이 나온다. 백담계곡 중 가장 넓은 담은 그곳에 있다.
님의 침묵 시비를 옛 백담사 산문 입구에 세워 놓았다. 잠시 서서 읽어보면서 학창시절이 떠 올랐다. 산장으로 가는 길, 옛추억을 떠올리며 옛 길을 선택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숲에서는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그리고 보이는 것 또한 선하게 다가선다.
한가롭게 느껴지는 것은 보기 참 좋다.
걸으며 볼 수 있는 야생화들, 늘 말하지만 화초는 사람이 키우지만 야생화는 하늘에서 보살펴 주시며 키워 주신다. 모양과 색감이 다정하게 다가온다. 순수라는 단어를 빌려 표현하여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생태의 모습은 본색 중에 본색이란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산장의 외관은 그대로 그 모습이지만 창호와 내부는 새롭게 리모텔링을 하였다. 숲 속의 빈터만 큼이나 여백이 살아 있다. 휴식공간에 안내하여 잠시 쉬도록 한 후 주혁군만 데리고 나와 각 실 모습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50여년 전 할머니와 설악산을 찾아 등반을 즐기며 외설악으로 넘어가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더니 놀라는 모습이다.
설악산이여
내가 사는 동안 무슨 슬픔이 또 있으리요.
아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통분할 일이 겹칠 적이면
언제나 사랑의 세례를 받으러
당신 만을 찾으리이다.
누군가의 설악을 찾는 마음을 정리해 놓은 글이다. 이 즈음 설악가를 듣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트리오의 리더격인 이영수군은 북부동맹 핵심 동지인 김의정 군의 산악부 동기이다.
피켈, 설피, 아이젠, 카라비너,와 확보 줄, 아이스바일, 하강기를 걸어 놓았다.
확보용 매듭 짓는 그림도...
시계를 보니 늦은 오후 시간으로 접어 들고 있었다. 우선 숙소로 가 여장을 풀고 다음 일정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미시령 옛길을 찾아올라 정점에 서면 울산바위가 한 눈에 들어 차는 곳이 있어 그곳으로 행선을 정하며 백담사 주차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볕이 따갑다.
울산바위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웅장하면서도 내밀한 구석이 많은 거암이다. 하루의 빛, 참 짧다. 어느새 빛은 저녁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바닷가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호텔 C 동 1119호로 배정받았다. 모든 것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깔끔하였다. 사용하기에 부담이 갈 정도다. 내부는 거실과 두 개의 침실과 화장실 두 개로 구성된 호텔이다. 딸과 손주에게 침대 사용을 권하고 온돌방을 선택하여 짐을 부렸다. 옷장에 옷을 걸고 카메라는 가방을 열어 조립을 해 두었다. 그리고 전자제품 충전을 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콘세트에 충전기를 걸어 두었다. 내가 충전이 필요한 여행기록 장비는 다음과 같다. 노트북, 표준 카메라, 망원 접사 카메라, 그리고 촬영 위주로 사용하는 핸드폰과 일반 핸드폰이다. 수영복도 꺼내 준비해 놓고 여벌 옷들은 Backpack 그냥 놓아 두었다. 그 사이 때는 저녁 때가 되었다. 여행 중 먹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숙면과 취사가 좋으면 바른 건강을 유지하며 활기차게 보낼 수 았지만 수면과 섭취가 부실하고 동행자끼리 부딪치면 불편한 여행이 된다. 팀워크도 중요한 부분이다.
여행 첫날이라 에너지 보충에 중점을 두어 육류를 선택해 두었다. 그리고 숙소에서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곳을 선택하였고 식사 후 가볍게 산책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두었다. 식사시간 전에 한 시간 여유가 있어 손주와 호텔 사우나를 이용하기 위하여 지하 사우나 실로 내려 갔다. 50% 할인이다. 그리고 코로나 발생 이후 사우나 이용을 금했었다. 손주와 3년만에 함께 가는 사우나다. 사우나 로비에 설치된 자동판매기로 가 때 타올을 구매하여 함께 사우나를 즐기며 등 때를 밀어주었다. 3년 만에 만지는 손주의 등 상당히 면적이 넓어졌다. 속성수 나무를 닮아가는 듯하였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증거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슬쩍 물어보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며 웃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 아껴 주신다고 한다. 세신을 끝낸 후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탁 배기 먹을까? 말까? 하는 사이 딸이 시켰다. 속으로 좋으면서 내색없이 검정 잔에 듬뿍 담아 들이켜는 순간, 첫 잔부터 자신도 모르게 칵 하는 희열음이 터져 나왔다. 광풍처럼 다시 입맛을 다시며 다시 또 한 잔을 마셨다. 이 때 손주가 추임새를 넣는다. 할아버지께서는 소주를 마시는 것을 본적이 없단 다. 나이 들면서 맥주나 막걸리리 선호하기 때문이다.
부위별도 시켜 많이 먹어 두었다. 불판이 여러번 바뀌도록 먹어 두었다
식사 후 약 4.5km를 걸어서 산책을 나섰다.
달 의자에도 앉아보고
정자에 올라 야경도 즐기며
정자에서 바라본 속초 야경이 너무 근사하다.
계수나무 그늘에서 토끼의 깡총깡총 거리는 모습도 흉내 내며 모자는 마냥 즐겁다!
그늘막 의자에서도 한 컷을~~
달에 기대어 놀다가 돌아와 간단하게 후식을 챙긴 후 하루 일정을 마감하였다. 내일은 DMZ에 서서 통일을 소원하는 기도를 드린 후 위도에 따라 차근차근 살피며 속초로 돌아올 계획이다. 오전에는 사우나와 수영을 즐기다 11시에 속초 중앙시장으로 가 점심거리를 사서 차에서 싣고 다니다 점심대용으로 먹으려 한다. 저녁은 바닷가에 왔으니 회를 먹으려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