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92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여년驢年*, 오두방정’]
여년驢年*, 오두방정
나귀를 돌보기도 지쳤는데,
적토마 외양간이 왠 말이냐
오늘, 서점엘 갔는데
눈꼬리가 찢어졌다
서가에만 일별… 오거서五車書
좌판에 천보天寶 융단, 문자향 넘실대고
내게
고종古宗의 서권기書卷氣를 발우에 담아 준다해도
청산의 선지식善知識 발톱만이라도 뵐까
오그라지게 춥다
서점에서 책 한 권도 못 샀다
쭈삣 꺼내든 소가죽 지갑에 꼬깃한
비닐하우스 재배 배추 이파리,
심검당尋劍堂* 벽력검에 호떡이 되었다.
문득
포장마차 소주 한 잔 속
일렁이는 파랑…
허어 바로 이것이야
오도송悟道頌일 게야
뭣 좀 아는 소惺牛*는 절대 외양간에서
발을 씻지 않는다
오늘 밤 이불 속엔 양말을 신고 들어가야지….
(2003 . 3 . 5)
*사랑, 그리움, 봄, 낙엽, 靑山만 서툰 발성법으로 지줄 대다가, 근자에 소생의 졸시를 일별한 벗으로부터 '오두방정을 떨고 있네'라는 호된 질책과 함께 '소를 찾으라는(尋牛)' 준열한 주문을 받고 서점으로 경전을 사러 갔는데, 숨이 타악 막혀서 한탄만 했다. 이 졸시는 그 친구한테 막막한 심정으로 반항하는 시다.
*여년驢年 ∼ 8세기 중국 선종 위앙종의 선사 영운지근靈雲志勤의 오도송에서 인용된 용어로서, '驢事未去 . 馬事到來' 즉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뜻의 화두話頭에서 빌린 말로 '여년이란 당나귀 해를 뜻하는데, 영원히 오지 않는 해이므로(十二干支에 없는 띠 해) 미망과 집착에 사로잡힌 현실세계를 뜻한다.
*심검당尋劍堂 ∼ 禪의 지극한 경지를 일컫는 말. 곧 영운지근 선사의 칼 같은 선풍을 말함
*성우(惺牛) ∼ 깨우친 소. 즉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를 뜻함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여년驢年, 오두방정」은 선(禪)의 구도적 세계관과 현실 삶의 비속함·자괴감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 자조적 독백이자, 자기 인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시적 각주를 통해 지인의 호된 질책(“오두방정을 떨고 있네”, “소를 찾으라”)에 대한 ‘막막한 반항’이라 명시하지만, 시적 전개는 단순한 반발을 넘어 세속적 무력감과 선적(禪的) 통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독특한 시적 울림을 형성한다.
1. 외양간의 비유 : 무거운 세속적 중압과 미망
시작 부분인 “나귀를 돌보기도 지쳤는데, / 적토마 외양간이 왠 말이냐”는 시인이 처한 현실적·정신적 과부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년(驢年)'이라는 화두가 암시하듯, 자신 하나의 미망(나귀)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지쳐 있는 상태에서 거대한 구도의 길이나 과도한 정신적 요구(적토마 외양간)가 밀려드는 상황에 대한 솔직한 비명이다. 이는 구도의 길이 거창한 이상이나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되는 순간, 도리어 삶의 무게로 작용함을 지적한다.
2. 서점이라는 공간 : 고고한 문자향(文字香)과 초라한 소가죽 지갑의 대비
서점은 경전과 지혜가 넘쳐나는 거룩한 공간(오거서, 천보 융단, 서권기)으로 묘사되지만, 시인에게는 따뜻한 안식처가 아닌 “눈꼬리가 찢어”지고 “오그라지게 추운” 주눅 듦의 공간이다.
⚫문화적·정신적 권위 vs 현실적 빈곤 : 서권기와 선지식의 높고 아득함 앞에서 시인이 꺼내든 것은 '소가죽 지갑' 속 '꼬깃한 배추 이파리(현금)'에 불과하다.
⚫심검당의 벽력검 : 날카로운 선의 경지(심검당) 앞에서 세속의 초라한 재력과 집착은 '호떡'처럼 납작하게 압사당한다. 시인은 관념적인 '문자향'만으로는 현실의 허기와 추위를 채울 수 없음을 뼈아프게 직시한다.
3. 소주 한 잔의 오도송(悟道頌) : 거룩함의 해체와 세속적 깨달음
시의 반전은 포장마차라는 지극히 속되고 평범한 공간에서 일어난다.
⚫파랑(波浪) 속의 오도 : 서점의 고고한 경전 앞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시인이, 포장마차 소주 잔에 일렁이는 파도(파랑)를 보며 “허어 바로 이것이야 / 오도송일 게야”라고 외친다. 이는 거창한 문자나 명분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초라한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그 한 잔의 술 속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음을 역설한다.
⚫외양간에서 발을 씻지 않는 소(惺牛) : 깨우친 소(성우)는 정형화된 틀이나 깨끗한 외양간에 갇혀 있지 않는다. 벗이 촉구한 '심우(尋牛, 소를 찾음)'는 형식적인 경전 읽기가 아니라, 삶의 구질구질함과 서글픔을 정면으로 끌어안는 데서 출발한다는 깨달음이다.
4. 양말을 신고 들어가는 밤 : 헛된 오두방정을 넘어선 삶의 온기
마지막 문장 “오늘 밤 이불 속엔 양말을 신고 들어가야지…”는 이 시의 백미다. 거대한 선적 화두와 세속적 열등감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영혼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소박하고 절실한 행위로 귀결된다. 고상한 척하는 오두방정을 내려놓고, 추운 현실 속에서 양말 한 켤레로 온기를 지키려는 행위야말로 시인이 도달한 가장 인간적인 형태의 '구도'인 셈이다.
♣ 종합평가
「여년, 오두방정」은 선종의 깊은 화두와 시어들을 시적 도구로 끌어들이면서도, 결코 관념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고상한 지식인적 허위의식을 '소가죽 지갑 속 꼬깃한 배추 이파리'로 유쾌하게 자해하고, 포장마차 소주잔과 양말 한 켤레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시어로 부활시키는 한기홍 시인 특유의 해학과 솔직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