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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보르지긴 쿠빌라이(孛兒只斤 忽必烈, 패아지근 홀필렬,ᠠ/Боржигин Хубилай). 몽케 칸의 동생으로 툴루이의 아들. 고려 충렬왕의 장인, 충선왕의 외할아버지. 충선왕의 왕비인 계국대장공주의 증조할아버지. 묘호는 세조,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생몰년 1215 9월 23일 몽골 ~ 1294 2월 18일 대도
칭기즈 칸의 손자. 칭기즈 칸의 4남인 툴루이의 4남이자 전대 카간(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동생.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카간[1]이자 원나라의 시조.
1260년 카간 자리에 올라 카간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부카와의 내전을 벌여 1264년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 아리크부카 세력[2]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3] 그래도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 이러한 영광이 있지만 카미카제 대삽질로도 유명하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추진력이 없어졌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칸이기도 하다.
몽골 울란바토르의 칭기즈 칸 광장에서는 오고타이 칸과 함께 앉아있는 칭기즈 칸의 동상을 양 옆에서 호위하는 식으로 쿠빌라이의 기마동상이 서 있다.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뒤 오고타이 칸은 툴루이계에게 화북 지역을 주었다. 쿠빌라이도 이때 한 지역을 받았는데, 통치 경험이 없어서 몇몇 관리들에게 통치를 완전히 맡기고 영지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부패한 관리들이 세금을 쥐어짜서 백성들이 달아나고 영지가 황폐화되는 지경에 이르자, 쿠빌라이는 영지로 돌아가 한동안 고생하며 영지를 복구하였다. 영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쿠빌라이는 중국의 여러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중국 승려를 카라코룸으로 불러 아들 친김의 교육도 맡기는 등, 친중국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카간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 대총독에 올라 내몽고 지역에 자리 잡았다. 몽케는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과 페르시아의 정벌을 결심하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 전선을 그리고 다른 형제인 훌라구에게는 페르시아 전선을 맡겼다. 쿠빌라이가 북중국을 잘 다스려 화남 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늘고 서민은 삶의 질이 올라갔다. 이러한 성공으로 북중국의 장수들과 관리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지지는 이후 원 제국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253년 쿠빌라이는 몽케 칸의 명령을 받고 운남지방의 대리국(大理國, 937 ~ 1254)을 정벌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쿠빌라이는 먼저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대리국의 단씨 왕조는 사자를 죽이고 항전하였다. 사망 플래그 쿠빌라이는 1254년 대리국을 멸망시켰는데, 대리국에서 몽골의 사신을 죽였음에도 몽골 제국의 전통과는 달리 대량 학살을 안 했다.
다만 이것은 결국 대리국이 쿠빌라이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 측 사료에는 그의 참모 중 한 명인 요추의 건의로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과장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쿠빌라이 그 자신이 다른 칸들보다는 호전적이지 않은,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훗날 남송 정벌 과정을 생각하면 과하게 피를 흘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때문에 굳이 학살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절 살해에 관여한 관리들은 처형했다. 가장 큰 관여자였던 재상, 고태상은 사형당했지만 그 자손들은 처벌받지 않고 차별도 받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리 원정을 통해 군사적인 역량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4]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힐러로써의 능력을 높이 사서, 티베트 불교/정치적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사실 쿠빌라이는 불교를 편애하였다. 도교의 도사들이 절을 빈번히 약탈하자 몽케 칸이 쿠빌라이에게 두 종교의 분쟁을 풀도록 시켰는데, 1258년 쿠빌라이는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 입배틀을 시켰다. 도사들이 승려들에게 지자 쿠빌라이는 강제로 237개 도장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 경전을 불태웠다. 리얼 캐삭빵 완전 도장깨기
그러나 그의 지지기반 세력이 북중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친중국적인 정책을 펼쳤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형, 뭉케와 초원에 있는 몽골의 보수세력의 의심을 받게 된다. 이 갈등은 제법 심각해서 1257년에는 세무조사를 받았고, 상당수의 가신들이 제대로 변호조차 하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이때 쿠빌라이는 아직 세력이 미약했다고 생각했기에 형인 뭉케를 카라코룸에서 직접 만남으로써 갈등을 봉합했다.[5]
뭉케와 보수 세력의 견제는 계속되어, 1258년 남송 원정 초반에는 원정군에서 제외되는 대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좌익군을 이끌고 있던 옷치긴 가문의 타가차르가 약탈 문제로 뭉케와 갈등을 빚다가 그냥 자기 영지로 되돌아가자, 결국 그 자리에 임명되어 원정에 참여한다. 뭉케는 1258년 3월에 성도를 점령하며 사천 지방 일부를 점령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전진을 하지 못했으며, 끝내 1259년 8월에, 쿠빌라이가 전장에 도착하기 이전에 사망한다.[6]
쿠빌라이는 뭉케의 사망 소식을 알았음에도 계속 양쯔강 변의 주요 도시 우한(武汉 무한)을 공격한다.[7] 송의 장군 가사도는 비밀리에 쿠빌라이에게 접촉하여 양쯔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는 대신 매년 남송이 막대한 세폐를 바치는 것을 제안하였다.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곧 가사도와 평화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쿠빌라이는 막내 동생 아리크부카가 군대를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오기 전에 아리크 부카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대칸에 올라 버렸다.[8] 몽골족 중에 쿠빌라이와 그의 다른 형제 훌라구(일 칸국의 칸)만이 아리크 부카의 카간 즉위를 반대하는 형세였는데,[9] 북중국의 중국인 장군과 만주의 과거 금나라 출신의 만주족 장군들은 쿠빌라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1260년 쿠빌라이는 자신의 본거지인 내몽골의 개평부로 돌아가 자신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고 카간을 칭했다.
내전이 나자 쿠빌라이는 배후를 든든히 하러 남송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가사도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아리크 부카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카간으로 추대받았을 뿐더러 본래 몽골의 관습에서는 막내 아들이 세습했기에 정통성에서 앞섰으나, 쿠빌라이는 군사력 측면에서 앞서 있었고 중국 화북이라는 물량빨 쩌는 배후 기지가 있었다.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 양 군세가 본격적으로 붙었을 때 쿠빌라이군이 승리하였으나, 아리크 부카는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후 쿠빌라이가 수도 카라코룸으로 가는 물량을 막자 아리크 부카의 진영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끝내 1264년 8월 아리크 부카는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를 지지했던 인물들은 죽였지만 아리크 부카는 용서했다.[10][11] 이후 쿠빌라이는 새로 쿠릴타이를 열고 카간에 올랐다.
한편 이 내전 도중인 1262년 쿠빌라이의 한족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쿠빌라이가 가장 신임하던 한족 관료도 끼어 있었다. 이후 쿠빌라이는 한족을 신임하지 않았다.
허나 과연 이것이 맞는 말일지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한다. 쿠빌라이가 이 일로 인해 한족을 신임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왜냐하면 쿠빌라이는 처음부터 한족 관료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 몽골 칸들이 그러했듯이 다국적으로 가신들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다만 쿠빌라이가 역대 칸들 중에서 한족을 가장 신뢰한 사람은 맞다. 그가 원하는 중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도 한족들의 지지와 그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 했기 때문에 그가 한족을 신임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사건은 그의 남송 정벌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아무리 신임하던 한족 가신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자신을 배신하고 남송과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후에도 쿠빌라이는 한족 관리들을 신임했다. 당장 남송 정벌 당시에도 사천택, 유정과 같은 이들이 최고위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1271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중국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이라고 정했다. 그 김에 할아버지 칭기즈 칸을 성조(成祖)에 추증했다. 이후 복식이나 의례도 죄다 중국식으로 바꿔 중국식 황제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칭기즈 칸이나 다른 유목 제국들이 정주민족과 엄격하게 선을 긋고 문화적으로 섞이는 것을 꺼렸던 것과는 정반대 행위다. 당시 중국의 인구와 경제력이 워낙 킹왕짱이었기에 안정적으로 중국을 정벌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인 듯하다. 그게 싫으면 싹 다 밀고 초원으로 만들든지
즉위 초에는 반대파 몽골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느라 제대로 남송 정벌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 외도 상당히 오랫동안 남송 정벌을 위해 수군을 준비하고 훈련하는 등 전쟁 내내 준비 기간도 길었다. 실제로 별 수를 다써도 양양을 공략하지 못했고 결국 훌라구에게 도움을 요청해 파견된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 병기로 점령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군대는 양양 공략전에서 일부러 힘을 온존하면서 포위전만 질질 끌어 물자를 바닥내려는 작전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투 중간중간에 중단된 적도 있으며 서로 시장을 연 적도 있고, 성 안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부녀자들을 내보내는 것을 승인하고 보호해준 적도 있었다. 한 마디로 처음부터 몽골군은 많이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육로&수로를 철저하게 봉쇄해서 상대를 말려죽이는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반면 남송 쪽은 정반대의 입장이라 어떻게든 양양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수많은 장군들이 몽골군의 포위를 뚫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들의 포위망을 뚫어 물자와 병사를 전달하곤 했다.[12] 이런 필사적인 남송군의 의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몽골군이 완벽한 포위망을 유지하지 못하게는 했지만 이것도 후반에 가서 수군을 제대로 구축한 몽골군에 의해 실패하는 횟수가 높아지게 된다.
결국 쿠빌라이는 동생이 보내 준 이슬람 기술자들의 공성 병기에 힘입어 번성을 함락시키고 양양성에 마지막으로 항복 권유를 하여 양양 성주였던 여문환의 '항복'을 받아냈다.[13] 양양의 함락 뒤 남송의 방어 체계가 무너져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송 영토를 차례차례 정복한다. 실제로 몽골군은 포위전을 하면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남송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전멸하고 물자를 써야 했기 때문에 몽골군의 포위 전략이 효과를 거둔 셈이다.
1276년, 마침내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를 함락해 멸망시키고 조씨 황족을 대도로 불러와 나름대로 후대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잔당 세력이 어린 황자(남송 소제)를 데리고 도주했다. 남송의 잔당은 홍콩 근처 애산(涯山)이라는 섬에 요새와 행궁을 짓고 자리를 잡았는데, 1279년의 몽골 수군의 소모전을 견디다 못한 남송 수군이 궤멸하면서 남송은 사라졌다.
이로서 원나라는 순수 이민족 왕조로서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한족이 세운 통일왕조로는 수나라나 당나라가 있었지만, 순수 이민족 혈통의 왕조가 세운 통일왕조는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에 학교, 무역항, 운하를 세우고 과학과 예술을 지원하면서 원 제국을 크게 융성시켰다.
쿠빌라이는 미얀마, 베트남, 사할린 등을 침공했지만 완전히 정벌은 못하고 속국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특히 인도네시아 자바 섬 침공과 2차례 일본을 공격한 것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4] 쿠빌라이와 일 칸국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어 중동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려 들기도 했다. 쿠빌라이 통치 아래 원 제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에 올라, 쿠빌라이의 연회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신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몽골 제국은 끝내 나뉘었다.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하이두)가 반 쿠빌라이 세력을 규합하며 아리크 부카의 계승을 선언, 쿠빌라이 칸을 찬탈자로 비난하고 난을 일으켰다. 1276년 쿠빌라이는 4남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고 원정을 보냈지만, 친 아리크 부카 장수들이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자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카이두에게 붙었다.
1277년 카이두가 카라코룸으로 진군해 오자 쿠빌라이는 명장 바얀을 파견하여 카이두를 격파했다. 1287년 카이두가 동몽고 지역의 왕가들과 결탁하여 또 쳐들어 오자 쿠빌라이는 먼저 동몽고 왕가들을 개발살 내고 카이두를 상대하러 갔다. 쿠빌라이가 동쪽에 있는 사이 카이두는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쿠빌라이의 본군이 오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카이두의 세력이 점차 위축했지만 동서 두 칸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죽은 뒤까지도 이었다.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15] 등이 모두 반(反)쿠빌라이였기 때문에 지금의 중동지방을 지배한 일 칸국과만 친교를 이었다.
이세민을 존경했으나 성군이 되지못한 쿠빌라이 칸의 일생(출처)
그는 점차 재정정책을 위한 색목인 관료를 대거 키우면서 몽골인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쿠빌라이 치세 후반부터 원 제국은 슬슬 번영이 끝나기 시작한다. 대규모 원정으로 재정이 악화했을 뿐더러, 유목민 특유인 후계제도의 약점[16]과 티베트 불교에 물들어 명나라 F4 급의 양태를 보여 더 문제였다. 그리고 엄격한 한족 차별로 인구의 90%가 넘는 한족을 적으로 돌린 점도 있을 것이다.
당시 색목인 관료들로 그들의 대표 주자격인 권신 아흐마드 파나카티(또는 阿合馬, 아허마, 아합마)가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었기에 '회회인' 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들은 돈 불리는거에 아주 뛰어나서 몽고 귀족들이 너나 할거없이 이들에게 돈을 맡기고 싶어했다. 1냥을 맡기면 10년후에 천냥이 되는 수준이었다고...
그들이 돈 버는 방식은 사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는데 그냥 관아에 가서 "제가 가다가 도둑맞아서 백냥을 잃어 버렸어요" 라고 하면 관아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백냥을 그냥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목인은 몽고에서 2등급 국민이었기 때문이기 때문. 이렇게 2등 국민인 색목인들은 여러 혜택을 받았고 이같은 수법으로 돈을 불리고 또 모두 한족들을 착취했다. 게다가 색목인들이 한족 마을을 도적 소굴이라 신고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한족마을은 그냥 몰살. 아무리 항변해봐도 몽골인들 눈에는 한족은 벌레나 마찬가지였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색목인들은 몽골 왕공귀족들의 마음을 얻고 대칸에게 "우리는 재물은 좀 탐하지만 한족들처럼 반란은 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로 점점 조정의 중추를 장악한다. 아흐마드 파나카티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처음에는 궁에서 잡일이나 하던 자인데 워낙 민첩하고 영리해서 쿠빌라이 칸에게 중용되어 중서 평장정사(부총리) 로 파격적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 역시 돈불리는데 귀신이어서 각지의 세금의 세율을 제멋대로 정하고 각종 광산 사업을 독점하고 농기구나 생필품 값을 올려 백성들에게 강매해 폭리를 취했으며 일부러 화폐가치를 폭락시켜 인플레를 조장하는 수법으로 경제를 박살내 자신의 배를 불렸다.
하지만 방법이야 어찌되었건 국고 수입을 올려 놓았기에 쿠빌라이 칸은 아허마를 총애했고 대칸의 비호아래 아흐마드는 조정에 붕당을 조성하고 대저택을 지어 수백명의 미녀를 첩으로 삼는등 권력을 농단한다. 점점 못할짓이 없게 된 아흐마드는 아예 조정 인사까지 주무르려하고 심지어 군권까지 넘보았으며 중서 좌승상(국무총리) 허형은 "아흐마드가 이미 민, 재, 군정 중 이미 두가지를 장악했는데 군정마저 아허마가 가지게 되면 매우 우려스러울 것" 이라 상주했는데 쿠빌라이 칸은 "아흐마드가 반역할까봐 그러는가?" 라고 질문했고 허형은 "증거는 없지만 이미 모두 갖추었습니다" 라고 하며 아흐마드를 경계해야 한다 말한다.
아흐마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앙심을 품었고 "네가 뭔데 증거도 없이 날 모함해? 모반자는 너같은 놈이다! 권력과 여자를 탐하지 않고 깨끗한척 하며 인심을 매수하는 것이 모반의 증거가 아니냐!" 라는 어처구니 없는 항변을 했는데 어이없게도 쿠빌라이 칸은 이 궤변을 옳게 여겨 허형을 귀양 보내고 만다. 또한 최빈이라는 신하가 아흐마드의 악행을 고발하자 모함해 죽였고 병부상서 장웅비에게는 자신의 정적을 모함해달라 부탁했는데 장웅비가 "무고한 사람을 모함해 얻는 벼슬자리는 필요없소이다" 라고 거절하니 장웅비를 모함해 사직시킨다.
이렇게 아흐마드가 자신의 반대파. 특히 한족 관리들을 대거 모함해 죽이기를 일삼자 몽고 왕공귀족들 사이에서도 아허마를 꺼려하는 움직임이 생기는데 바로 쿠빌라이 칸의 장남 친킴이 대표적 이었다. 친킴은 중국어로는 '진가' 라고 하는데 유교적 정치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한족 대신들을 존중했기에 아흐마드를 아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어느날 친킴이 아흐마드의 악행을 지적하며 그를 때린적이 있었다. 조회때 쿠빌라이 칸이 아흐마드 머리의 상처를 보고 무슨일인가를 물으니 아허마는 차마 태자가 때려다고 할수가 없어서 넘어져서 다쳤다 말했으나 친킴은 "아닙니다. 이자가 하도 간악해 제가 때렸습니다." 라고 하며 쿠빌라이 칸이 보는 조회 자리에서 아흐마드에게 "이 죽일 간신배놈! 죽일놈!" 이러며 또 두들겨 팼다고...쿠빌라이 칸도 사실 내심 아흐마드의 악행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도 그 돈버는 재주가 아까워서 내치질 못했는데 이러다 보니 친킴 태자부터 대신들 백성들까지 모두 아흐마드를 증오하는 지경이었다.
아흐마드는 명장 바얀을 모함하기도 했다. 아흐마드는 쿠빌라이 칸에게 바얀이 남송에서 압류한 재물과 미녀를 자신이 모두 가졌다고 모함했고 화가난 쿠빌라이 칸은 바얀의 저택을 압수수색하지만 나온 재물은 전부 쿠빌라이 칸이 하사한 것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책... 나중에 쿠빌라이 칸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하필이면 충신을 죽일뻔했다" 며 후회했다고.[17]
1282년 쿠빌라이 칸. 그리고 태자가 도성을 비웠는데 무관 왕저와 고씨성을 가진 승려가 아흐마드를 암살하려는 거사를 꾸민다. 그들은 80여명의 무사들이 태자부의 사람들인것처럼 꾸며 아흐마드의 집으로 들어가 아흐마드에게 태자가 왔으니 맞을 준비를 하라 소식을 전했고 태자의 조서를 위조해 추밀원 부사(합참 차장) 장역이라는 자에게 군대를 대기시키라 지시했는데 장역도 아흐마드를 증오하던 사람이라 태자가 아허마를 죽이려는 것인줄 알고 이에 따른다.
그날 저녁. 왕저는 무사들을 이끌고 아허마의 집으로 가 "태자께서 오시니 영접하라!" 라고 명령한다. 태자라면 오금을 저리는 아흐마드는 밖으로 나와 꿇고 고개를 숙여 대기했고 그틈에 왕저가 망치로 아흐마드를 내리쳐 그자리에서 즉사, 장역이 보낸 병력들은 이건 태자와 무관한 일이라는걸 눈치채고 왕저의 무리를 공격했고 왕저는 도망가거나 저항하지 않고 의연히 포박되어 왕저와 그 무리들은 처형되었는데 처형장에서 왕저는 "나 왕저는 천하를 위해 해를 제거했다! 오늘 비록 죽지만 내일 사람들이 나의 사적을 기술할 것이다!' 라며 당당하게 스물 아홉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아흐마드가 죽자 조정 대신으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축제 분위기가 되어 모두 덩실덩실 춤추며 기뻐하고 술을 마시는 통에 대도(북경)의 모든 술이 다 거덜날 정도였다고, 민심이 이런 지경이자 쿠빌라이 칸은 그제서야 뭔가 느끼는게 있었던지 "왕저가 아허마를 죽인건 뭔가 까닭이 있는거 같다" 라며 아허마가 간신이었음을 인정했고 그의 시신을 버려두어 짐승의 먹이가 되게 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끝난게 아니었는데 그를 죽였지만 그의 붕당은 처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는것이다. 잔당은 반격을 준비하여 바로 황태자 친킴에게 황위를 물려주라는 상소를 올렸고 권력욕이 아주 강한 쿠빌라이 칸에게 이런 상소를 올리는건 그야말로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격이라 잘못하면 친킴까지 연류되 요절이 날수도 있는 상소였다.
이 상소의 폭발력을 우려한 어사대(감사원) 와 우승상(국무총리) 안동(참고로 이사람은 징기스 칸의 용장인 무칼리의 후손) 은 상소를 감춰놓고 올리지 않았는데 아흐마드의 잔당들은 이걸 알고 쿠빌라이 칸에게 보고하고 쿠빌라이 칸은 대노하여 안동에게 추궁하니 안동은 아허마의 잔당들이 꾸민 음모와 모함이니 들으면 안된다고 간절히 항변하나 쿠빌라이 칸은 안동에게 "그럼 그대의 죄는 없단말인가!" 라고 말했고 안동은 "죄는 인정하지만 이건 태자를 모해하기 위한 음모이며 이거에 속으신다면 천하가 혼란해질 것입니다" 라 답하였다.
안동의 간절한 충언에 쿠빌라이 칸은 분노가 어느정도 풀렷고 아허마의 잔당들을 모두 처벌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친킴 태자는 병을 얻게되어 오래지 않아 43세의 나이로 죽었다. 쿠빌라이 칸 이후 황실의 내부분열 양상을 생각하면 소양이 뛰어났던 친킴의 죽음은 참 안타깝게 된 일이었다.
또 쿠빌라이 치세의 몽골은 남송 지역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그들을 최하위 단계로 두었는데 몽골인을 살해하면 무조건 사형, 색목인을 죽이면 중국돈 은 80냥, 하지만 한족을 죽이면 나귀 두마리만 물어주면 끝. 또한 물자를 징발할때도 한족은 색목인 보다 두배 이상 많이 징발당했고 이때문에 한족 지역에서 키운 말이 씨가 말라버려 오히려 한족이 기르는 말은 아주 희귀해 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또한 한족은 무기소지 금지, 종교집회 금지, 무술교육 금지, 야간통행 금지, 시장개설 금지, 사냥 금지 등 각종 제약을 걸고 20가구를 하나의 '갑' 으로 묶고 몽고인 '갑주' 를 두어 한족들을 감시했는데 이 갑주가 명령하면 그 안의 백성들은 음식이던 돈이던 여자던 간에 모두 바쳐야 했다. 훗날 한족들의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원나라를 붕괴시킨것도 시작은 이 갑주들의 횡포 때문, 그런 주제에 몽골은 남송을 정벌하고 나서도 남송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며 결국 남송이 망한지 70여년 만인 1350년대부터 대대적인 남부 홍건적의 반란에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쿠빌라이는 79세에 죽었는데 장수왕처럼 어찌나 오래 살았는지, 황태자 친킴이 죽고 손자 성종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쿠빌라이는 원나라의 증흥을 이끌었지만 반대로 원나라가 몰락하게되는 원인들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간신을 믿었고 권력때문에 자기 아들마저 불안하게 만들었고 불교를 지나치게 중시해 대대로 원나라 황제들이 라마승에 빠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루이 14세의 경우는 증손자라지만, 왕이 죽자 전성기가 막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성기의 무리한 원정의 폐해로 나라도 막장선을 타는 면에서 많이 닮았다.
고려 원종은 내전 도중 즉위 전의 쿠빌라이에게 접근했다. 항복하러 가던 중에 몽케 칸이 죽었는데, 쿠빌라이가 즉위하리라 보고 일부러 쿠빌라이에게 접근하였다는 말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종은 쿠빌라이와 여몽전쟁을 끝내고 강화조약을 체결하며 돌아와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권을 되찾았다. 흥미롭게도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를 고구려(고려) 그 자체(후신)로 생각하여, "당태종도 못 정복한 고(구)려의 후손이 제발로 항복했다"며 좋아했다고. 당시만 해도 아리크 부카와 대권경쟁 중이었고, 정통성 측면에서 아리크 부카 쪽이 좀 더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40년이나 저항(...거의 본토 방치 수준이었지만)하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와서 항복해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보태서였다. 대외적으로 쿠빌라이 쪽을 계승자로 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고려가 속절없는 모습인 듯하자 "고구려는 짱 쎘다고 들었는데 너희들은 지금 왜 이렇게 비실거림?"이라고도 말했다. 전자의 고구려 관련 발언에 비해 사람들이 이 말은 잘 모르는 듯.
쿠빌라이는 딸 제국대장공주를 고려 충렬왕에게 시집보내 고려의 왕비가 되게 했다. 제국공주는 충선왕을 낳았다. 충선왕은 외가인 원나라에서 오래 지내며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쿠빌라이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고려 왕비의 자리는 원나라 공주만이 차지했다.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면,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가 대단했다고.
이때 쿠빌라이가 고려에 약속한 세조구제(世祖舊制)로 고려는 몽골에 40년이나 대항하고서도 직할통치를 안 받은 유일한 나라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서양쪽 역사책의 지도에서, 고려는 원나라와 같은 빛깔이다. 아예 국경선 표시도 없이, 원나라의 영토로 취급한 지도책도 수두룩하다. 세계사적인 입장에선 볼 땐 형식적인 국가틀은 유지했지만 왕조 건국과정의 문제 때문에 로마 제국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헤로데 왕가 치하 유데아 왕국 및 조공을 바치고 신칭을 한 동로마 제국, 헝가리, 폴란드 등의 사례나 국체를 유지한 노브고로드 공국 등 러시아 제공국들도 있기 때문과 정도의 차이이지 원에 예속되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왕위 계승에 몽골 제국이 직접 관여한 점, 여몽연합군에 군대를 동원당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외국에서 몽골의 속방이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해외에서 발행된 역사관련 지도는 모두 고려를 몽골 제국의 영토, 혹은 속국으로 표기한다. 당장 오스만 제국에 경기병을 공급해 주었으며 오스만의 황통이 단절되었을 경우 황위를 이어받도록 되어있을 정도로 우대를 받았던 크림 칸국도 오스만 제국의 영역 하에 포함시키는 사례도 있고.
어쩄든 이때 고려가 비록 직할통치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대가도 상당했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원종과의 약속을 뒤집어 고려를 직할령으로 만들었다면명나라의 한 성(省)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당시 원종의 입장에서 쿠빌라이에게 귀순한 일은 잘한 선택이었다. 실수로 편을 잘못 들었다면 분명 쿠빌라이 칸이 보복했을 테고, 이미 국력이 기울대로 기운 고려가 과연 버틸 만 했을까? 다른 나라들 다 망할 때 그 정도 결과를 이끌어낸게 오히려 기적이었다. 그리고 '세조구제' 는 그 뒤로도 원나라에 고려를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이즈음에 일어난 대삽질이라면 역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전통적으로 몽골군의 약한 수군을 뻔히 알면서도 고려군만 믿고 남송 정벌과 병행으로[18] 원정을 추진했는데, 1274년 1차로 원정할 때 고려군이 바다를 더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바다를 생판 모르는 몽골군 지휘부가 총지휘를 맡았던게 문제였다. 이래서야 안 봐도 비디오다(...). 포에니 전쟁 초기에도 해운국이었던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를 제치고 농경국가인 로마군이 연합해군 총지휘를 맡았다가 비슷하게 발린 일이 있었다.
상륙해서 막부군에게 꽤나 강력한 타격을 몇 번 주지만, 끝내 태풍에 쓸려 원정함대의 1/5이 침몰하고 말았다. 나머지 군사로도 그냥 지르면 끝인데, 몽골군은 장기전을 예상하고도 이를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철수하다가 또 태풍을 만나 살아남은 함대의 절반 이상이 또 침몰해버렸다.
하지만 일본원정이 그 시절판 임진왜란이란 설도 있다. 남송이 항복하자[19] 당시 50만에 달하던 항복병들은 몽땅 기병위주의 몽골군에 합류시키기도, 먹여살리기도 어렵고 써먹을 데도 없었고... 그래서 일본원정이 나왔다는 주장.
하여튼 이 때문에 고려에선 병선 제조하고 군량미 모으느라 등골 빠졌다. 1~2차를 대차게 말아먹었지만, 쿠빌라이 칸은 3차 원정을 또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3차 원정은 베트남 공격을 위한 부대를 편성하면서 취소했다. 베트남 공격도 말아먹지만... 게다가 이런 원정을 수행하기 위한 재정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신하들이 죽기살기로 반대하여 끝내 쿠빌라이는 뜻을 꺾고 만다.
참고로 1차 일본 원정 실패에 이런 얘기도 있다. 사실 규슈 상륙했을 때까진 되려 여몽연합군 측의 기세가 엄청났고, 일본인 다 죽을 뻔했다는 것.[20] 그러나 고려군을 믿지 못한 몽골군은, 고려군이 배타고 떠날까봐 겁먹어서(...) 여러 번의 삽질(낮에 진격하고 밤이 오면 진격한 걸 다 무르며 배로 되돌아오는 등)을 하며 몇날 며칠을 보내다가 끝내 태풍 만나 다같이 저승갔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적어도 '우연히 태풍을 만나 망했다'기보단 '태풍이 올 때까지 기다린' 셈이다. 이 경우 우연한 원정 실패가 아니라 언제든 필연적으로 망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뒤이어 1281년, 투항한 남송군 10만 명을 강남 ~ 큐슈 루트로[21] 몽골군, 고려군과 함께 원정을 보냈다. 일본 또한 1차 원정처럼 정예 사무라이 일기토하러 내보냈다가 돌격에 발리지 않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한판 크게 일어날 듯했지만...
1차 원정보다 더 안습하게 강력한 태풍의 힘에 수천척의 함대가 수장당했고, 가까스로 열도에 상륙한 군대는 막부군에 개털렸다. 이때 고려의 배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데 남송산 배들은 피해 작렬이었다고. 남송 사람들의 사보타지도 한몫한 듯하다.
신이 난 일본은 자연현상에 '신푸(神風, 신풍)'라는 이름까지 붙였고, 이후 일본은 신이 수호하는 나라라서 결코 패망하지 않는다는 불패(不敗)와 신국(神國) 사상이 생겨났다. '신주불멸(神州不滅)'도 같은 표현. 태평양 전쟁 때 미국에 지기 전까지는 '본토가 점령되어 패배한 적은 없다'는 뜻에서 불패, 신국 떡밥이 횡행했다.
사실 이 때의 일본은 덴노가 일본 구해달라며 기도나 했고,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들은 우왕좌왕했으니 막장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실제로 가마쿠라 막부는 이 침공의 여파로 더더욱 빨리 쇠퇴해 불과 50년 뒤 무너졌다. 이렇듯 무신란 직후로 혼란스럽던 고려 정부만 막장이 아니었다. 어쩌면 귀찮은 골칫덩이들을 이렇게 자연의 힘을 빌려 처치했을 수도 있다. 야! 신난다~
그리고 일본의 피해도 무시할 바는 아니었다. 규슈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규슈 지역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본토 사무라이 등도 겁에 질려 패닉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렸다. 이 때의 공포를 일본에선 '무쿠리고쿠리'(몽골, 고려)라 불렀고, 이것은 뒷날 미증유의 공포 등을 일컫는 표현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용례는 일본의 모 작가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무쿠리고쿠리의 구름'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3차 원정까지 계획했으니 욕심은 장난 아니었던 듯하다. 하긴 조그만 섬나라 주제에(1280년 시점에 원나라와 그 혈족 칸국들이 지배한 면적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거다) 감히 천황 운운하면서 카간의 제국에 굴복하지 않으니 쿠빌라이 칸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쿠빌라이 칸은, 거짓말 조금도 보태지 않고 (그때까지 유라시아 세계에 알려진 영역을 기준으로) '세계의 지배자'였으니까.
쿠빌라이의 굴욕은 일본 원정 실패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에도 3차례의 원정을 기획했으나 1차는 질병으로 철수했다. 사실 이건 애초에 대리주둔군이 남송 뒷치기하려고 찔러본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베트남군을 개발살냈지만, 후퇴할 때는 베트남의 게릴라전으로 고전했고 피해도 꽤 입었다. 2차와 3차 원정은 베트남 영내로 상당히 깊숙이 밀고 들어갔으나 국토 사수를 결의한 베트남군 25만 군사와 그들을 지휘한 명장 쩐흥다오의 청야전술에 말려들어 막심한 타격을 입고 철수했다. 이 전쟁으로 베트남은 이집트, 일본과 함께 몽골의 침입에서 국토를 지킨 소수의 국가로 역사에 남았다. 끝내 쿠빌라이의 대외 원정 사업은 다 죽어가던 남송에게 카운터 일격을 먹인 업적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남송의 부를 죄다 대도로 끌어들여 이룩한 원나라의 어마어마한 번영은 백만 떡밥의 창시자인 마르코 폴로와 그의 책 동방견문록으로 잘 드러난다. 궁전의 한 전각에 통째로 엄청난 양의 금은을 저장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 전각 크기는 아주 컸다고...[22] 그러나 원 말기에 그 전각에 저장한 금은들은 다 날아갔다. 하지만 정작 원나라 사료에는 이 마르코 폴로의 언급이 없다니 흠좀무. 오죽하면 동방견문록이 죄다 줏어들은 떡밥 견문록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에 갔다고 믿는 사람들은, 원나라에 색목인 관리가 많아 마르코 폴로를 특별히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사실, 다른 방문자들의 견문기를 보아도 분명히 많은 서양인이 몽골의 궁정에 있었지만, 누구의 이름도 원나라 기록에 없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 스스로가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았다고 적어 문제인데... 이에 대해선 당시 서양인들의 과장과 뻥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