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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목사의 <참으로 예배하는 자입니까?> 라는 책에서 진정한 예배에 태도를 촉구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외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목사님이 예배 중에 선교 보고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었죠. 사람들은 그날따라 더욱더 뜨겁게 찬양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감동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에 영철이라는 어린 학생이 선교사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장차 허드슨 테일러나 언더우드 같은 훌륭한 선교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으로 흐뭇해 했습니다. 선교사가 영철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래, 너는 나이가 어린데도 예배를 잘 드리는구나. 그리고 선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나. 내가 무얼 도와 줄 수 있겠니? ” 영철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선교사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셨는데, 혹시 외국 우표를 많이 가지고 계시면 저에게 좀 주실 수 없나요? 저는 우표 수집이 취미거든요.”
예배는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통로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추방이후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를 통해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의 통로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하나님과의 관계의 통로로 생각하지 않는 신앙 생활은 사교 모임에 다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어떤 형태의 모임을 갖든지 먼저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훈련이 되야 합니다.
축구를 해도/ 등산을 해도 모이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속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감격적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배에는 참석하지만, 진정으로 예배 드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영철이라는 아이처럼 우표 수집을 목적으로, 즉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냥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찬송하라면 찬송하다가 축도하면 나가는 것은 참된 예배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왜 지금 예배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는 예배에 관한 중요한 관점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동방박사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배를 위한 갈망- 은혜를 위한 목마름.
인생을 살아가는 두 종류의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품고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과 즉 목숨을 걸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고, 적당히 하다가 안되면 포기하고 또 다른 것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적당히 되는대로 살아서는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적당히 공부하는 학생, 작당히 일하는 회사원, 그리고 적당히 예수를 믿는 신앙인.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와 세상의 징조를 실피던 어느날 그들은 한 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징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아기를 경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살던 페르샤와 상관없는 나라요, 굳이 어렵고 힘든 먼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페르샤에서 존경받고, 부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당시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왕을 경배하기 위함도 아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태어날 아기를 경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아온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페르샤로부터 팔레스타인까지 긴 여행을 위해 적어도 3달 이상의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동시에 그 여행을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들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 자기들의 지위를 불안하게 할수 있다는 두려움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시간, 물질을 들여서라도, 자리를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마저도 그들의 경배를 위한 긴 여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수로보니게라는 지역에 귀신들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외로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마을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쉬기 위해 어느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여인은 수소문해서 그 집을 알아냈습니다.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딸을 고쳐야 하겠다는 갈망은 제자들의 만류를 거뜬히 이기에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도록 도와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부탁을 하는 그녀는 가장 겸손하고 애절한 표현과 음성으로 예수님께 당부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자기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뜻밖의 반응을 하셨습니다. 막7:27절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렇게 자비로운 예수님이 자기앞에서 엎드려 간절히 호소하는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고 개라고 모욕하셨습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춘 요청이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욕하며 돌아서는 대신 그녀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다며 다시 엎드려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먼 여행에서 혹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갈망’입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 모두 갈망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단 한번의 예배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그들의 갈망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시편42:1절에 이런 다윗의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시의 배경은 그가 사울에 의해서 궁정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기회를 빼앗겼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강가의 광야로 도망쳐야 했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찾는 일을 갈망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제 기억속의 가장 감동적인 예배 또한 영동세브란스 병원 원목실에서 있었던 한 여름날의 주일예배였습니다.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 제 형편에 예배는 찾아와 기도해주시는 분들의 예배가 전부였을 때 한 친구가 예배를 드리러 가자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때까지 침대를 끌고 예배를 드리러 가는 일은 생각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머리를 감기고 새 옷을 입고 환자복이지만 침대를 끌고 예배당 뒤편으로 들어가 누워서 드린 그 예배의 감격은 지금도 가슴 설레이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찬송가 작사자 제인 크로스비 여사는 태어난지 6주만에 실명했지만 그녀의 귀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망의 빛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녀는 고백하기를 “나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는 희망의 유일한 끈이었기에 나는 그 끈을 잡지 못하면 내가 영원한 어둠속에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생명을 얻기 위해 그 끈을 붙잡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단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각오했던 동방의 박사들처럼, 단 한번의 만남을 위해서 스스로 개가 되었던 수로보니게의 한 어머니처럼 단 한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타는 목마름을 예배하는 갈망이 담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신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배를 위한 헌신 - 가장 귀한 것을 드림.
예배를 서비스라고 할 때 그 의미 가운데는 섬기는 사람의 최상의 것을 드려서 봉사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이런 하소연을 할 때가 많습니다. “더럽고 치사한 꼴을 참 많이 본다.” 손님으로 와서 종업원을 하인 대하듯이 하는 비인격적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라도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섬김을 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헌신입니다. 우리 예배에 반드시 담겨야할 태도가 헌신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던 벳세다 광야에 저녁이 되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뭔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으셨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사람을 먹이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해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떡을 구해야 하고, 이곳이 마을에서 멀기 때문에 그들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는가?’ 그러자 ‘한 소년이 내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 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사람들을 50명, 100명씩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게 하신후에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5천명의 남자들이 먹고 그 부스러기를 거두었는데 12광주리가 가득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 작은 양식은 한 아이의 배를 불릴 수 있는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주님께 드려짐으로서 수 많은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헌신’은 큰 역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년의 헌신이든지, 작은 것을 헌신하는 것이든지 그 전부를 드리는 헌신의 가치는 놀라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윤자라는 교통사고로 사지 마비가 된 여자분이 있습니다. 마우스 스틱으로 컴퓨터 자판을 움직여 소설을 쓰는 분입니다. ‘우리들의 숨은 이야기’라는 중편소설이 15회 대한민국 장야인 문학상에 당선이 된 작가입니다.
이 분의 뒤에 남편 이현수씨란 분이 있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남편은 장애인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를 돌보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컴퓨터 부품 매장을 차려 자주 집에 들러 아내의 손과 발을 역할을 했습니다. 아내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아기를 가졌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내 아들이 그런 결혼을 한다고 하면 어떤 부모가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엇이 더 이익인지만 계산하는 우리 시대에 깊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헌신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위해서 거름이 되는 일이 헌신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풍성한 열매도 썩어 영양분이 된 거름의 헌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왜 우리들의 예배에는 아름다운 향기도, 풍성한 은혜의 열매도 볼 수 없을까?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최고의 것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적당히 헌신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최고의 예배가 무엇일까요? 최고의 것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가지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예물은 귀한 것들입니다. 황금은 왕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유향은 아름다운 향기를 담은 것이고, 몰약은 썩음을 방지하는 귀한 물질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바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가장 가치있는 것을 드렸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 드렸는가?에 주목하지 말고 가장 귀한 것을 드렸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 마음을 드립니다. 그 마음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드립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얘야 나는 내게 어떤 시간을 드렸는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남는 시간, 써도 괜찮은 시간을 드렸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내게 가장 귀한 시간을 드렸다고 말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어떤 물질을 드렸는가? 내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한 물질을 드렸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헌신이 담겨야 합니다.
100년이 넘는 구세군위 역사상 가장 많은 1120억원의 후원금을 기부한 사람은 맥도널드 창업주의 부인 조안 크록 여사였습니다. 그녀의 남편 크록은 원래 종이컵 행상을 하였습니다. 52세가 되던 1955년 맥도널드사를 설립해 자산 가치 3백 30조원, 114개국에 24,500개의 매장을 가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맥도널드사의 경영철학은 열정과 봉사입니다.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열정을 다하고, 최선의 봉사를 다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갈망과 최고의 것을 드리는 헌신을 담아내는 예배를 회복함으로서 오늘 동방박사들처럼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