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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미라 동굴 벽화
120년 전, 우연히 선사 시대의 뛰어난 예술 작품이 발견되었다.
1879년 여름, 에스파냐 북부 산탄데르 교외의 어떤 동굴에서 향토 고고학자인 사우투라는 5세 된 딸 마리아를 데리고 발굴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가 동굴 입구 부분을 조사하고 있는 동안 마리아는 아버지의 작업에 실증을 느끼고 몰래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수 m 정도 안으로 들어가자 돔 모양의 천장에 기묘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이것 보세요. 소 그림이 있어요.” 그것은 몇천 년의 시간을 거쳐 구석기 시대의 예술이 현대인의 눈에 띄게 되는 순간이었다. 딸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뛰어들어간 사우투라는 그들 그림을 램프로 비춰 보았다.
거기에는 뛰어오르거나 달리거나 지면에 웅크리고 있는 들소(bison)들의 모습이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금세 그 그림이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고 확신하였지만, 그러한 생각은 좀체로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의 과학자에게는, 동굴에 사는 원시인에게 그렇게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 차례로 동굴 벽화가 발견되고,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솔뤼트레 문화와 마들렌 문화기에 걸치는 시대에 크로마뇽인에 의하여 그려진것임이 밝혀졌다.
더욱이 방사성 동위 원소 탄소 14(14C)의 연대 결정으로 알타미라동굴의 대 홀(大 Hall)의 그림은 약 1만 4500년 전의 작품임이 판명되었다. 오늘날 알타미라 동굴은 미켈란젤로의 벽화로 유명한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견주어 ‘선사 시대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화 유산의 하나가 되었다.
대 홀의 작품은 단 한 사람의 뛰어난 아티스트에 의하여 그려졌다.
대 홀의 돔 모양의 천장에는 크기가 2m를 넘는 많은 들소를 비롯하여 말·소·멧돼지 등의 동물이 다양한 색깔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바위의 갈라진 틈이나 자연히 융기한 부드러운 바위 표면을 이용하여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그림 속의 동물들에게 넘치는 약동감을 주고 있다. 동굴 안의 다른 그림과는 달리, 모든 그림에서 보여지는 붓의 놀림이 한결같다는 것이 이 홀에서 볼 수 있는 회화의 특징이다.
목탄으로 그려진 선의 두께, 바위에 대한 그림의 압력, 그리고 그림의 윤곽을 잡는 방법이 모든 그림에 공통되어 있다. 윤곽은 항상 머리에서 꼬리, 이어서 뒷다리로 내려가고, 다시 머리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앞다리와 배를 향한 다음 끝낸다. 필치는 힘이 넘치고, 아무런 수정의 흔적도 없다. 이처럼 일관된 작풍에서 이들 그림은 단 한 사람에 의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지금부터 약 1만 4500년 전의 구석기 시대 후기에 존재한 그야말로 선사 시대의 미켈란젤로였다. 대 홀에는 바깥의 빛이 들어오기는 해도 그림을 그리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이장소에서는 연기나 불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닥 특히 벽 가까이에서 많은 뼈와 따개비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
처음에 이것은 식사의 흔적으로 생각되었는데, 나중에 밝기를 얻기 위한 연료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1만 4500년 전의 제작자는 동물의 골수와 식물 섬유로 만든 심을 넣은 점토로 만든 램프 등을 사용하여 연기를 내지 않고 동굴 안을 비추었을 것이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는 뷔름 빙기 끝 무렵으로, 유럽의 넓은 범위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사람들은 동굴을 주거지로 하여 수렵과 어로, 식물의 뿌리와 줄기, 숲의 여러가지 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혹독한 기상 조건 때문에 오늘날과는 다른 두꺼운 털로 덮인 매머드·들소·순록 등이 살고 있었음을 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장려한 작품은 이러한 선사 시대의 인류가 우리 현대인과 똑같이 생각하고, 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1만 4500년 전과 같은 기법으로 알타미라의 예술이 재현되었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이 귀중한 예술을 감상하려고 알타미라 동굴을 찾아왔다. 1964년부터 동굴을 찾는 사람의 수는 연간 10만 명을 웃돌았고, 1973년에는 17만 3000명의 기록이 달성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림은 매우 손상되기 쉽고, 특히 온도와 습도가 급격히 상승하면 색소가 분리되면서 씻겨 내려가는 사태가 일어난다. 또 하루에 몇천 명이나 되는 견학자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증기의 산성화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응결하여 석회암을 침식한다.
이러한 원인으로 벽화의 보존이 어려워진 알타미라 동굴은 1979년부터 1982년까지 폐쇄되고, 그 사이에 동굴을 완벽하게 복제시키는 일이 검토되었다. 한편으로 1993년에는 거대한 에스파냐의 테마 파크가 일본에서 건설되었는데, 그 곳에서의 전시를 위하여 에스파냐 전문가들에 의하여 알타미라 벽화가 복제되었다. 복원대상으로 대 홀의 천장화 일부가 선정되었다.
천장화를 연구한 결과, 그림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융기한 바위의 표면, 바위의 갈라진 틈이나 감촉 등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인공적 벽면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제작자와 같은 순서대로 벽화의 제작을 진행하였다. 우선 조각용 도구로 에칭을 하고, 이어서 흑색으로 윤곽을 그린 후 채색하였다. 색깔은 혼합시키지 않고 단순히 겹쳐 칠하기만 하였다. 그림 물감도 당시와 똑같이 산화철과 황토에 물을 섞은 것이고, 이를 손이나 무두질한 가죽 등으로 칠해 나갔다. 흑색으로는 목탄이 사용되었다. 이로써 알타미라 제작자의 솜씨가 멋지게 재현된 것이다.
알타미라 벽화는 현재 보존을 위하여 동굴 안으로의 입장이 제한되어 몇 년을 기다려야만 볼 수 있다. 그러나 동굴에 인접해 있는 박물관에 훌륭한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누구나 선사 시대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훌륭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1만 4500년 전에 그려진 실물 그대로를 재현할 수는 없다. 이 선사 시대의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인류의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 < Grotte de Lascaux >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가 그린 최초의 회화는 라스코 동굴과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든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동굴 깊숙한 벽면에 질서 없이 무리 지어 그려져 있는 이 동물 그림은 매우 능숙한 솜씨이고, 그 짐승들은 하나같이 아주 힘세고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라스코 동굴은 프랑스 중부의 몽띠냑이라는 시골마을에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있다. 이 동굴은 1940년 9월 12일 4명의 소년 등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은 숲으로 개를 데리고 놀러 갔다가 개가 갑자기 사라져서 사라진 근처를 찾다가 풀덤불로 가려진 자그마한 굴을 발견하였다. 굴 입구는 약간 경사졌으므로 6-7m쯤 기어 들어갔는데, 갑자기 10m 가량 미끄러 떨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상당히 넓은 굴이었다고 한다.
다음날 램프와 밧줄을 갖고 와서 굴을 탐험한 결과 개를 찾았고, 아울러 굴의 벽에 그려진 벽화도 발견하게 되었다. 동굴의 암벽에 묘사된 그림들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큰 동물은 550cm, 작은 동물은 100cm 내외의 여러 동물상이 100점 이상 묘사되어 있다.
그려진 동물에는 말이 가장 많고 다음이 소, 그리고 사슴과 돼지, 이리, 곰, 새, 상상의 동물과 인물상도 묘사되어 있다. 동물화는 대개 크게 표현되었으며, 주동굴에 있는 검은 소 등은 가로가 5m 이상이나 된다. 동물상은 어느 것이나 약동적이며 생기에 넘치고, 기법도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브뢰유는 벽면의 연대를 오리냐크기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마들렌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작품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구석기인들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큰 짐승을 잡고자 몹시 갈구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작은 짐승들은 별 위험이 없이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먹고살기에는 부족하였고 큰 짐승을 잡으면 몇 주일씩 충분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음식이 되는 큰 짐승의 사냥과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들짐승에 대해 그토록 많은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동굴의 그림은 거의 짐승들이었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서로 다른 그림이 겹쳐져 그려졌다.
이런 점은 이 그림들이 무엇을 위해 그려진 것인가에 대해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것은 일종의 사냥 마술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에는 화살이나 창이 꽂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림을 죽임으로써 살아 있는 짐승의 영혼을 죽였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짐승 그 자체를 죽이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은 그림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창으로 찔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더 강해지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사냥에 나갈 경우에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냥을 하게 되었다. 한번 그림을 죽이면 그들은 더이상 그 그림에 유의하지 않았다. 다음에 사냥을 갈 때에는 그들이 잡으려는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그림이 실제 모습과 똑같게 그릴수록 이 마술의 효력이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의 출발은 이와 같이 인간이 생존을 위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에라 데 라 산 프란시스꼬Sierra de la San Francisco의 라 삔따다 원시 동굴벽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계속 이어지는 길쭉한 반도 바하 깔리포르니아Baja California는 스페인어로 ‘캘리포니아 아래’라는 뜻으로 깔리포르니아는 깔리다calida(더운)와 포르낙스fornax(불가마)가 합친 뜻이다. 지명만 봐도 얼마나 더운 곳인지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신화 속의 깔리피아califia 여왕이 살았다는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연결되어 폭 100km에서 280km, 총 길이 약 1200km로 세상에서 가장 긴 반도다.
반도 서쪽은 태평양을, 동쪽은 멕시코 본토 사이에 900여개의 무인도를 가진 꼬르떼스 해를 두고 있다. 너무 길어서 남북으로 나뉜다. 크게 위도 28도선에서 북부인 바하깔리포르니아 주와 남부인 바하깔리포르니아 수르Sur 주로 나뉜다. 1973년 반도를 관통하는 횡단 고속도로로 2차선인 멕시코 1번 도로가 놓였다. 미-멕 국경 띠후아나에서 반도 끝인 까보 산 루까스Cabo San Lucas까지 총 1743km 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은 도로뿐 자연 그대로의 풍경 속을 그대로 지나간다.
바하 깔리포르니아는 온통 커다란 기둥 선인장만 죽죽 뻗어 있는 반사막지대다. 양쪽 바다로는 긴 해안선이 펼쳐진다. 건조한 사막기후로 사막과 대비되는 푸른 바다, 산맥들 사이의 풍요로운 만, 기둥 선인장이 빽빽한 높은 구릉, 신비스런 수도원, 산양과 사슴을 비롯하여 회색고래, 야생 돌고래 등 다양한 생물들, 원시 동굴 벽화, 광물, 진주, 와인, 해산물 등으로 독특한 풍경과 풍부한 자연을 가진 생태계의 보고다. 인구가 많지 않아 아직 전인미답의 처녀지와 해변이 많다.
미국과 육로로 연결된 데다 지나친 개발로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운 해변으로 휴양지가 발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휴양지가 라 빠스La Paz의 로스 까보스Los Cabos. 로스 까보스는 2003년 12월에 세계 정상 회담(APEC)이 열린 곳이다. 우리나라 김 대중 대통령도 참석하셨다.
이 바하 깔리포르니아 수르에 우리나라의 귀신고래 즉 회색고래(2003년에 쓴 회색고래 칼럼 참고)의 성소가 있다. 작년에 귀신고래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1년만에 고래를 다시 찾아갔다. 그때 우리나라 울산에 고래 암각화가 그려진 반구대가 있듯이 바하 깔리포르니아 깊은 계곡에도 고래가 그려진 동굴 벽화가 있어 이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벽화가 그려진 동굴을 찾아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바하깔리포르니아에서 최초로 사람이 살았던 시기는 기원전 9500년에서 7000년 사이로 멕시코에서는 가장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지역이다. 기원전 5500년경부터 초기 원시 동굴 벽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바하 깔리포르니아의 시에라 데 산 보르히따Sierra de San Borojita의 산 보르히따 동굴과 라 트리니닫 동굴의 원시 벽화가 아주 유명하다.
그리고 바하 깔리포르니아 수르의 시에라 데 라 산 프란시스꼬, 산따 로살리아와 로레또 사이의 시에라 데 라 히간떼Sierra de la Gigante 그리고 라파스의 또도스 산또스에서 시작하여 로스 까보스까지 그 사이에 있는 Reserva de la Biosfera de la Laguna에도 원시 동굴 벽화가 있다.
게레로 네그로에서 150km 거리에 있는 고래 투어로도 유명한 산 이그나시오San Ignacio 마을에서도 산 프란시스꼬의 원시 동굴 벽화 투어를 한다. 산 이그나시오 마을을 들어서면 강이 하나 흐르고 그 주변은 온통 대추 야자들 천지다. 아름다운 오아시스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가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다. 조그만 마을 광장에 들어서면 현란한 장식이 없는 소박하지만 장엄한 성당이 하나 있다. 1716년에 세워진 도미니카 파 성당이다.
이 한적하고 작은 오아시스 마을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 고래 투어와 원시 동굴벽화 투어를 하기 위해서다. 사막위의 오아시스답게 겨울은 몹시 추우며 여름은 47도를 오르내린다. 따라서 방문 시기는 고래가 오는 11월에서 4월 사이가 좋다. 그 이후에는 아주 덥다. 동굴 벽화 투어는 사실 혼자서 찾아 가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꼭 그룹을 지어 투어로 가는 것이 좋다. 1인당 하루 150달러로 차량, 노새, 텐트, 식사, 가이드가 다 포함이 되어 있다.
2004년 2월 어느날. 다 낡아서 폐차장을 가야 할 듯한 지프차를 타고 먼지를 마시면서 덜덜거리는 비포장도로를 2시간에 걸려 달린다. 지금까지 눈에 익은 것처럼 온통 기둥선인장인 까르돈Cardon 밭인 평원에서 산지로 오른다. 중간 중간 비포장도로를 가로지르다 차를 만난 멕시코 토끼 리에브레liebre나 사슴을 마주치기도 한다. 리에브레는 도로 한가운데 서서 우리 지프차를 빤히 바라보다 종종거리며 제 갈 길을 간다.
산지는 또 다른 풍경을 만난다. 수목원을 연상시키는 각종 선인장 수십 종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산을 올라가니 아주 독특한 모양의 나무들이 눈을 끈다. 마치 하늘을 향해 하늘하늘 춤을 추며 오르는 듯한 길쭉한 시리오Cirio(부줌Boojum 나무)들이다. 시리오 나무는 100년이면 20m에 이른다.
그 밖에 삐따야 선인장la pithaya, 땅에 딱 붙어 자라는 둥근 선인장, 여기도 선인장, 저기도 선인장 온통 선인장뿐이다. 때마침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눈 아래 아득히 태평양이 보인다.
두어 시간을 달려오니(44km 지점) 갈림길이 있는 조그만 마을이 하나 나온다.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곳에 마을이라니. 그래도 학교가 보이고 마을회관도 있는 제법 마을다운 마을이다. 몇 가구 되지 않은 마을에 INAH(국립 역사 고고학회) 사무실이 있다. 동굴벽화에 가려면 항상 이곳에서 허가를 받아야한다. 멕시코시에서 받은 동굴 벽화 촬영 허가서를 보여준다.
마을을 나서면 두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22km 길이의 산따 떼레사Santa Teresa 계곡으로 다른 길은 35km의 산따 마르따Santa Marta 계곡으로 간다. 이곳에서 짐을 부릴 당나귀와 사람이 타고 갈 노새, 짐꾼 등을 빌려서 이곳에서부터 동굴 벽화까지 32km로 장장 5시간의 거리를 들어가야 한단다.
당나귀보다는 크고 말보다 조금 작은 노새를 탄다. 타고 보니 제법 높다.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돌투성이의 산길을 가려면 노새를 꼭 타야 한단다. 우리의 길을 안내할 가이드는 길이 아주 험하므로 내리막길에서는 최대한 등을 뻗어 뒤로 젖히라고 하고 오르막길에서는 최대한 노새 등에 몸을 붙이라고 요령을 일러준다. 당나귀들 목에 걸어준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출발이다.
시작부터 돌투성이의 길 아닌 길을 내려간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노새 위에서 균형을 잡기가 그리 쉽지 많은 않다. 하지만 노새들은 그저 순순히 자기 앞에 가는 노새 엉덩이만 쫓아간다. 무성하게 자란 가시나무 메스끼떼스 사이로 난 길을 가니 가시에 발을 긁히기도 하고 얼굴을 맞을까 고개 수그리기 바쁘다. 메스끼떼스는 12m까지 자라는 사막의 나무다. 발목이 나오는 짧은 청바지를 입어서인지 가시나무에 발목이 죄다 긁히게 생겼다. 노새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묵묵히 제 갈 길을 갈뿐.
계속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필자가 보기 안타까웠는지 짐꾼이 다가와 자신의 발에 차고 있던 각반을 내게 내어준다. 아하. 각반을 차고 나니 더 이상 가시나무가 두렵지 않다. 아까보다 씩씩하게 가시나무를 헤치고 간다.
30여분을 가니 평원이 나온다. 무릎에 닿을 만큼 자란 낮은 관목들. 평원 끝에 안내 표지판이 있다. 안내판이 서 있는 자리 아래로 펼쳐지는 장관이란! 끝도 없는 깊은 계곡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왼쪽 산자락에 구불구불 뱀처럼 휘돌아가는 가느다란 길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말은 길이라고 하지만 형편없이 좁은데다 돌투성이의 땅이다.
노새는 익숙한 듯 내려가기 시작한다. 불규칙한 돌을 밟고 가느라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그 등에 탄 필자는 간이 콩알만 해졌다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반복한다. 고삐를 꼭 잡고 등을 있는 대로 젖혀서 노새와 함께 몸의 균형을 맞추는데 정신이 없다. 좀 전에 안내 표지판이 있던 곳에서 봤던 그 멋진 장관 속을 가고 있지만 내 눈은 노새 모가지 아래로 보이는 앞발굽을 보느라 미처 경치를 즐길 여유가 없다.
노새가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은 비쭉비쭉 서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온몸에 진땀이 난다. 아아니...이런 길을 도대체 몇 시간을 이러구 가야한단 말인가. 게다가 나중에는 다시 이 길을 올라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유~ 죽갔네 소리만 계속 나온다.
온 신경을 노새 앞발에 집중하다보니 어디선가 당나귀 방울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머리를 들어보니 어느새 평탄한 길을 걷고 있다. 아마 산 중턱을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제야 제대로 주위가 보이고 소리가 들리나보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깜빡 잊게 할 만큼 장관이다.
계곡으로 내려오기 전에 보았던 파노라마는 더욱 웅장하고 깊은 모습으로 눈이 미치는 한 멀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치 별 세상이라도 온 듯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서부활극의 무대에라도 온 듯하다. 어느덧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머리위에 올라있다.
가시나무 메스끼떼스 사이로 굵직한 초록색 기둥들이 쑥쑥 뻗어 있다. 사구와로Saguaro 선인장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하늘로 하늘로 양 팔을 뻗어 오르듯 자라난 초록 기둥들이 길에도 발아래 계곡에도 산위에도 온통 거인처럼 솟아 지천으로 자라고 있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까.
밑둥치는 이미 바위처럼 회색빛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는데 그 위로 뻗어있는 가지들은 푸르디푸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왕관처럼 생긴 앙증맞은 하얀 꽃들이 달려 있다. 6월이면 이 자리에 씨가 가득한 열매가 열려 사막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사구아로는 40년이 되면 4~5m가 되고 100년이면 10m, 200년이면 12m 이상이 된다. 즉 다 자라면 보통 16m 정도다. 선인장이 아니라 나무네 나무. 멕시코의 사막에서만 자라는 독특한 나무 선인장이다. 서부 활극의 상징이 된 선인장 나무. 솜브레로에 총만 차면 딱 카우보인데. 가지 중간에는 딱따구리와 꼬마 부엉이들이 홈을 파서 둥지로 삼고 있다. 마르면 아주 단단한 나무로 목재로 또는 연료로 쓸 수 있다.
푸석푸석 마른땅에 박아논 듯한 덩치 큰 선인장들은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지만 사막의 동물들에게 먹거리와 집을 제공하고 사람들에게 목재와 연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평지를 지나며 선인장 꽃도 보고 앞서가는 당나귀 떼도 보고 멀리 펼쳐지는 계곡 풍경도 감상할 만큼 노새에 적응도 되고 여유까지 생겼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노새가 앞발을 내딛는 대로 몸을 맡겼더니 아까보다는 훨씬 두려움이 가신다. 역시 사람은 적응이 빠르다. 좀 여유로워지다보니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노새가 너무도 사랑스럽고 안쓰럽기도 하다. 도대체 이곳에는 비도 안 오는지. 노새의 발이 미끄러져 내릴 때마다 흙먼지가 풀풀 인다. 까딱하다 길 아래로 굴러 내리는 돌처럼 노새와 내가 함께 저 아래 계곡으로 구를 것만 같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내리막길이 끝나는 그곳에 거짓말처럼 집이 한 채 있다. 사람도 있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있던 솜브레로 아저씨 둘이 반긴다. 여기가 목적진가 했더니 이제 반쯤 왔단다. 집 앞으로는 물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밭이 보인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구먼. 잠시 휴식한다는 말에 노새에서 내렸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두 다리가 아프고 후들거리고 온 기운이 다 쭉 빠진다. 걷지를 못하겠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인솔하는 사람들과 잘 아는 사이인지 무척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저씨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평생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로 가족이다. 그러고 보니 맞은편 산 중턱쯤에도 집이 보인다. 아니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해먹고 사나했더니 소, 양, 염소 등 가축을 방목하고 자급자족하며 산다고 하신다.
가끔 필요한 물품을 사러 바깥세상으로 나가는데 우리가 오는 길 말고 집과 좀 더 가까운 마을로 연결된 다른 길로 다닌다고 한다. 1시간 정도면 간다는데. 아니 그러면 왜 우린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와야 하냐고 했더니 INAH에서 그렇게 룰을 만들었다고 한다. 계곡 보호와 관리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방문객들을 통제하는 루트를 만든 것이다. 사실 안내자들이 없으면 들어가기도 힘든 곳이다. 하지만 경치하나는 정말 장관이다. 사람의 손이 덜 타면 덜 탈수록 자연이 그대로 잘 보존되는 것이 사실이다.
충분히 쉬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제 좀 전에 내려온 것 같은 내리막길은 없다고 하니 힘을 내야지. 물이 흐르는 내를 따라 가기도 하고 건너기도 하면서 평지를 간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야자수가 인상적이다. 수 천 년 아니 수 만년을 그 자리 그대로였을 주변의 경치에 그저 감탄 또 감탄. 인간의 일생이란 얼마나 하잘것없이 짧기만 한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새소리, 야자수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파란 하늘, 뭉게구름, 붉은 산, 붉은 암벽, 온갖 선인장들, 예쁜 꽃들. 이 모든 풍경이 너무나 낯설면서도 아름답다.
한참을 그렇게 물과 함께 가더니 아뿔사! 이제는 오르막길이다. 내리막이 없다더니.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어지러운 건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한 고삐를 꽉 잡고 노새 등에 몸을 착 갖다 붙인다. 발이라도 헛디디는 날에 끝장이다. 노새야 제발 잘 가자구.
내려온 만큼 그렇게 한참을 오르고 내리면서 서서히 지쳐갈 즈음 한 사람이 손으로 오른쪽 건너편 산을 가리킨다. 고개를 돌려보니 산 중턱에 커다란 바위틈이 보인다. 저것이란 말인가.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원시 동굴이. 멀리서 보니 동굴이라기보다는 산허리를 갈라놓은 커다란 틈 같다.
감개무량하여 이젠 다 왔겠구나 했더니 그곳에서도 한참을 다시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가는 것이다. 오전 10시경 마을을 출발하여 오늘 우리가 야영을 할 장소에 도착하니 오후 3시경. 꼬박 다섯 시간이 걸린 것이다.
양 옆으로 커다란 절벽이 있고 그 사이에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계곡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산따 떼레사 계곡의 한 곳이다. 동굴은 맞은편 절벽위에 있다. 계곡이라 해가 빨리 떨어질 것 같아 짐을 풀어놓고 요기를 하자마자 동굴로 향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야자수가 빽빽이 있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먹을 것과 물이 있고 짐승을 피할 높은 곳에 동굴이 있으니 원시인들은 분명히 만족해했을 곳이다. 절벽위로 오르는 좁은 길을 올라 동굴까지 약 20분 정도 걸었다. 발아래로는 무성한 야자수와 계곡이 흐르고 그 맞은편 절벽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다. 구름다리가 있었다면 한달음에 동굴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을.
이처럼 사람이 쉽게 오기 힘든 곳에 있는 원시 벽화를 볼 수 있다니 이곳까지 힘들여 온 고생길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란 말인가. 나를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다 준 노새에게 감사하는 마음까지 든다.
총 면적 약 800km 평방의 산 프란시스코 산맥에는 총 11개의 캐넌이 있다. 그중에서 산따 떼레사 캐넌Caon de la Santa Teresa에는 약 5000개의 동굴들이 있고 이중에서 330개의 동굴에 크고 작은 원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동굴 벽화는 지금 보고 있는 라 삔따다La Pintada에 있다. 이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터널식 동굴이 아니라 절벽을 따라 움푹 팬 커다란 틈이 가로로 계속 176m로 이어지는 큰 바위 절벽아래의 틈새 동굴이다.
벽화가 있는 동굴의 입구는 허술하다. 하지만 일년 내내 이곳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계신다. 카우보이 차림의 멋쟁이 아저씨. 위 아래로 절벽 사이에 난 틈의 동굴이라 아슬아슬한 절벽 바위 길은 위험해 보인다. 그래서 나무판자와 가드레일을 설치하여 기다랗게 외길을 놓았다. 길을 따라가며 동굴의 벽과 천장에 빽빽하게 그림을 그려놓았다.
넓은 동굴 벽을 도화지 삼아 그린 벽화는 전체적으로 붉은 톤에 검은 색이 눈에 많이 띈다. 원시인들이 남겨놓은 메시지를 살펴가며 끝까지 간다. 절벽 동굴 끝의 바위는 훨씬 넓어서 5m는 되어 보인다. 그 넓은 면에 커다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때 당시에도 사다리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2~5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절벽위에 저렇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이 원시 벽화의 하이라이트가 이곳인듯 하다.
벽화에는 사람의 모습은 물론 자연 동물들 즉 육지 동물과 바다 생물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두개의 고래 그림을 비롯하여 코요테, 거북, 물고기, 새, 사슴 등등 약 천 여개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어떤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선명하거나 큰 것이 있는가하면 어떤 것은 희미해지고 있는 것도 있다.
정면을 보고 팔을 들어 올린 역동적인 모습의 인간들과 옆모습의 다이내믹한 동작의 사슴들 등이 금방 그려진 듯 하다. 산 프란시스꼬의 원시 동굴 벽화는 아메리카 최초의 벽화 예술의 장이었다.
선으로 그린 그림도 있고 온 면을 다 칠한 것도 있고 반쪽을 다른 색으로 칠한 것도 있다. 그림에 사용한 색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썼다. 빨강, 검정, 갈색, 노랑과 하얀색이 주 색상이고 아주 조금씩 파랑과 초록을 썼다. 문자가 없었던 원시나 고대에서 색의 상징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원시나 고대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붉은색은 생명을 유지하는 피빛이라 삶을 상징하는 색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중남미 고대 국가에서는 신전과 피라미드 그리고 건물을 온통 피빛 붉은색으로 칠했었다. 특히 멕시코의 고대 마야에서부터 떼오띠와깐, 아스떼까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물들은 붉은색으로 단장하였던 것이다. 원시와 고대에서의 이러한 색상들은 자연에서 얻은 광물가루 색소에다 물과 교착 물질로 주변에 널려있는 선인장에서 나오는 끈적이는 수액을 섞어 물감을 만들었다.
벽화 아래의 바위위에는 돌을 갈아서 가루를 내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 붉은색이 선명한 가루들이 담겨진 팔레트처럼 움푹 들어간 흔적들이다.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했으면 돌이 달아서 그렇게 움푹 파여졌을까. 하루 이틀 걸리는 것도 아니고 수없이 많은 날들에 걸쳐 그렸을 이 그림들을 연구한 끝에 학자들은 이곳이 이 꼬치미 부족들이 의식을 치르던 장소라고 결론지었다.
이 주변에는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동굴 벽화들이 있다. 중간 크기의 라스 플레차스Las Flechas와 라 솔레닫La Soledad, 좀 작은 라 보까 데 산 훌리오La Boca de San Julio 그리고 가장 작은 로스 무시꼬스Los Musicos가 있다. 동굴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라스 플레차스에선 화살 모양이 로스 무시꼬스에서는 음표 모양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다른 동굴 벽화 라 솔레닫
누가 이곳에다 그림을 그려서 몇 천 년이 지난 후 후손들이 찾아오게 만들었을까? 그게 누굴까? 누가 처음으로 이를 생각해 냈을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던 꼬치미cochimi 부족들이 화강암 혹은 화산암 바위틈의 벽을 따라 놀라운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남긴 벽화는 매우 다양하다. 바닥에서부터 14m까지 이르는 대형 그림도 있다. 그 벽화들 중의 일부는 멕시코시티 인류학 박물관에 복제되어 있어 볼 수 있다. 양팔을 높이 들고 기도를 하는 듯한 포즈의 사람들, 반은 검정 반은 빨강으로 칠해진 사제들, 창에 찔린 동물들. 이는 아마도 희생 제사를 지내는 듯하다. 다양한 머리장식은 남녀를 구분하기도 한다.
그림으로 남겨진 형상들은 다양해서 사슴, 산양, 푸마, 코요테, 리에브레 등의 육지 동물들과 바다사자, 고래, 어류, 가오리, 참치 등의 바다 생물 그리고 펠리칸, 물수리 등의 새와 거북이, 뱀 등의 파충류도 있다. 어떤 형상은 반인반수 또는 바다와 육지를 상징하는 사슴머리의 뱀도 보인다.
고래-루세로 구띠에레스 사진
벽화가 그려진 동굴에서 약 50~60m의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물을 따라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등이 자라고 하늘을 찌를 듯이 야자나무가 숲을 이룬다. 물이 흐르고 먹을 것이 있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이 있다면 이는 아주 완벽한 피난지일 것이다. 이곳의 경치는 가장 장관 중의 하나다. 찾아 가기 정말 힘든 곳이지만 경치가 아주 좋고 먹을 물이 있어 뿔뿔이 흩어져 살던 부족민들이 매년 한번씩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었을 것이다.
라 삔따다 동굴은 1960년대 초 이곳을 다니던 한 목동이 발견한 후 1962년 얼 스탠리Earl Stanly Gardewer 라는 미국인이 헬기를 타고 이 계곡을 확인하였다. 그 후 1980년부터 동굴들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굴은 아주 덥고 아주 춥고 폭우에 강한 바람까지 부는 기후가 불순한 야외에 노출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동굴벽화들은 자연 현상에 의해 서서히 침식당하는 중이고 일부는 훼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