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 후 지친 몸으로 아이를 봐야 진짜 ‘리얼’(프로그램)이죠. 하루 종일 작가가 짜주는 일정표 따라 수족관도 가고 발레 학원도 다니는데 누가 애를 못보겠어요. 게다가 연예인들은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방송 보면 부럽죠.”
일곱 살, 한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오경환씨(39·가명)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잘생기거나 부유해 보이는 연예인 아빠가 아이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에 어깨가 움츠러들기도 한다. 오씨는 “요즘 아이 돌보는 아빠가 대세인 것 같다. 하지만 일하면서 가족을 위해 뭔가 더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반면 결혼 6년차인 황지은씨(36)는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삼둥이’만 보면 절로 미소를 짓는다. 황씨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돼 아이를 갖지 않았지만 TV에서 아이 키우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고 흐뭇하다. ‘남편도 애를 낳으면 저렇게 잘 놀아줘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곱 살, 네 살 아이를 키우는 노유진씨(39·가명)는 “다른 사람들이 아이 키우는 것을 볼 기회가 전혀 없다보니 육아 예능을 보면서 ‘다른 집은 어떻게 하는지’ 눈여겨본다”며 “솔직히 첫 애를 낳기 전까지 기저귀 가는 방법도 몰랐다. 산후조리원에서 배우고 인터넷 뒤지고…. 지금 돌이켜보면 ‘육아’라는 걸 전혀 모르고 아이를 키웠다”고 했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송일국 부자.
SBS ‘오마이 베이비’의 슈 모녀.
tvN ‘엄마사람’의 이지현과 아이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SBS의 <오마이 베이비>, 케이블TV tvN <엄마 사람> 등 육아 예능 프로그램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시선은 다양하다. 성별 따라 다르고, 아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시선이 다르다. 방송이 끝나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삼둥이’ ‘추사랑’ ‘라둥이’ 등 방송 관련 검색어가 상위에 오른다. 네이버 그룹별 검색어를 보면 시선차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싱글녀 그룹의 검색어에서 삼둥이는 3~4위를 차지하는 등 톱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싱글 남성들이 찾은 검색어에는 이름조차 오르지 않는다.
남성이 육아에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는 단지 성적 특성 때문만은 아니다. 돌봄 참여가 어려운 현실을 무시한 채 ‘재미있는’ 모습만 TV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기태씨(38)는 “육아 예능은 넓은 집, 다정한 남편, 화려한 육아용품 등 여성이 보기에 좋은 육아환경만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TV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만 한다”며 “방송을 봐도 ‘아이’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시큰둥해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육아 예능 프로그램의 범람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역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육아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람들이 대리 충족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방송 등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을 넘어 요리와 육아도 도맡는 다양한 남성상을 요구한다”며 “사회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아빠 역할만 더 요구하다보니 대다수 남성들이 현실과 방송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아빠에 대한 롤모델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해미 육아정책연구소 연구기획팀장도 “한국 사회에서는 맞벌이라 하더라도 남성이 1차 생계 부양자인 경우가 많다. 노동시장은 더욱 불안정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는데 남성들은 가정에서도 더 많은 역할을 부여받는다. 남성의 육아 문제를 개인의 갈등과 고뇌로만 밀어붙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육아’ 자체가 불편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1년 전 결혼한 김소희씨(33·가명)는 육아 예능 방영 시간이 되면 슬며시 집을 나온다. 아이를 가지라는 가족의 종용을 피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방송이 시작되면 시어머니가 ‘아이들이 예쁘지 않냐’ ‘애는 언제 낳을 거냐’고 말한다”면서 “우리 부부는 결혼할 때부터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는데 방송에서 마치 아이가 있는 부부만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육아를 경험한 여성들은 육아 예능과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김지민씨(42)는 “방송에 보이는 것처럼 아이들이 항상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지만은 않는다”면서 “아이는 예쁘지만 ‘부모가 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육아 예능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놓고도 학자·전문가의 평가가 갈린다.
권미경 육아정책연구소 육아지원연구팀장은 “연예인 육아 프로그램이 주는 경제적 위화감은 있지만 아빠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남성이 육아를 하면서 아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이 프로그램에 잘 묻어난다. 연예인처럼 해줄 수 있는 아빠가 많지 않더라도, 아빠의 육아를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크다”고 말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교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야말로 픽션(허구)의 절정”이라며 “웬만한 픽션도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재밌다고 보는 프로그램이 ‘리얼리티’ 쇼”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편집’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다. 100% ‘실제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게다가 부모가 동의하더라도 24시간 카메라에 아이가 노출되는 것에 부정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