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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감 판관 정공 묘갈명 병서
(軍資監判官鄭公墓碣銘 幷序)
궁촌(窮村) 정공(鄭公)은 휘가 찬휘(纘輝)이고 자가 경유(景由)이고 영일(迎日) 사람이니, 포은 선생(圃隱先生 정몽주)의 11대손이다. 증조 준(儁)은 전첨(典籤)이고 조고 운한(雲翰)은 마전 군수(麻田郡守)이고 선고 원징(元徵)은 현풍 현감(玄風縣監)이며, 선비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도사 정기(正基)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빼어나서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다. 세 살에 모부인이 장난삼아 비단주머니를 보여주며 말씀하기를,
“네가 이것을 갖고 싶니?”
하니,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모부인이 마침내 비단주머니를 주었는데, 여기에 일상 생활하는 물건을 넣어 두었다가 모부인이 찾으면 번번이 올리곤 하니, 어른들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얼마 있다가 부모의 상을 연달아 당하였는데, 자신이 죄역(罪逆)을 저질러 부모가 별세했다고 하여, 스스로 애통하여 몸을 훼손하기를 상례의 예문보다 더하였으며, 작은 어머니를 대할 적에 정성을 다하여 친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약관 시절에 우암 선생의 문하에 속수(束脩)의 예를 행하자, 우암이 특별히 장려하고 깊이 인정하여 원대하게 성취할 것을 기대하였다.
공이 일찍이 포은의 묘도에 비갈이 없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우암에게 묘도(墓道)의 문자를 청하니, 우암은 공의 선조를 향한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즉시 허락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칭찬하기를,
“포은이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
하였다.
평소《대학》에 마음을 쏟았으며,《심경(心經)》과《근사록(近思錄)》을 오로지 공부하니, 세상에서 우암 문하의 돈독한 학자를 꼽게 되면, 공이 일찍이 그 가운데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우암이 해상(海上)에서 돌아와 입대(入對)할 적에 공을 매우 강력히 천거하였고, 노봉(老峰) 민공 정중(閔公鼎重) 또한 똑같이 말씀하여 마침내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봉사와 직장으로 전직하였다가 주부에 이르고, 감찰로 있다가 연산 현감(連山縣監)으로 나갔는데, 3년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평시서 영(平市署令)과 군자감 판관과 익찬(翊贊)을 역임하고 또다시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나갔는데, 또한 3년 만에 돌아왔다.
경종 계묘년(癸卯年, 1723, 경 종3)에 공주(公州)의 병사(丙舍)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2세로 진잠(鎭岑)에 장례하였다. 공에게는 두 배위가 있었으니, 전배(前配)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진사 하성(夏聖)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구(銶)와 거(鉅)이고, 두 딸은 신유(申愈)와 송회원(宋會源)에게 출가하였다. 후배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진사 이현(履賢)의 따님으로 아들 집(鏶)을 낳았으며, 두 딸은 이광제(李匡濟)와 권흡(權熻)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선조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니, 만약 법을 지켜 나라에 봉사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고는, 스스로 일명(一命)의 관리가 되어 삼가고 조심해서 법도를 지켜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고을의 읍재가 되어서는 더욱 몸가짐을 엄격히 하고 사사로움을 끊어서 한결같이 아전을 단속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며 피폐한 고을을 소생시키고 백성들의 병폐를 제거하는 것을 힘쓰니, 토호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해서 온 경내가 안도하였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소부(召父)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모(鄭母)가 있다.”
하였다.
성묘(聖廟 문묘)를 받드는 일에 더더욱 엄격하여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함으로 제사를 거행하였다. 연산(連山)은 스승의 문하와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빈번히 찾아가서 스승을 모시고 일에 따라 여쭙고 아뢰었다.
우암이 편지에서 이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이미 문충(文忠) 선생의 사판(祠版)을 받들고, 문원(文元)ㆍ문경(文敬) 두 선생이 도학(道學)을 강론하시던 지방에 부임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일이다.”
하였다.
또 성묘를 잘 받드는 일을 칭찬하여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이 일이 지리멸렬되었으니, 이는 신명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학대하는 것과 똑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들으니, 내 벗은 이것을 잊지 아니하여 가슴속에 새겨 두고 있다 하니, 선정(先正 선현)의 가르침이 남아 있음을 잘 알겠다.”
라고 하였다.
송공 규렴(宋公奎濂)이 충청도의 도백이 되어서는 언제나 의심스러운 옥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의 결정을 따랐고 항상 우대하는 예로 대우하였으며, 공이 자상하고 치밀하여 순리(循吏)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조정에 칭찬하여 아뢰었다.
관리가 되어서의 훌륭한 행적은 이미 중외에 전파되어 있었는데도 연기(燕歧)로 귀양 가는 것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우암이 화를 당했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때의 작은 허물이었으므로 흉당들도 또한 크게 해치지 못하여 즉시 석방되어 돌아왔다.
우암이 탐라(耽羅 제주도)로 귀양 가고 초산(楚山 태인)에서 사약을 받을 적에, 공은 모두 찾아가서 중도에서 맞이하였다. 공은 윤증(尹拯)의 사람됨을 가장 미워하여, 죄악이 형서(邢恕)보다 더하다 하여 이미 서로 절교하였고 또 종제인 찬조(纘祖)에게도 권하여 절교하게 하였다.
공은 우암을 독실히 믿었고 만년에는 더욱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이하성(李廈成)이 우암을 무함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분개하고 미워하여 글을 올려 강력히 변명하고자 하였으나, 사론(士論)이 통일되지 못하여 중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내심 잊지 못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부평(富平)의 읍재에 제수되었는데도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산음에서 돌아와 마침내 공주의 유성(儒城)에 터를 잡고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고 찬조와 함께 거처하니, 찬조 또한 학식이 있어서 보통 선비가 아니었다. 공은 찬조와 서로 학문을 강론하고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이를 즐거움으로 삼았다.
공은 우암의 문도 가운데 지촌 이공(芝村李公)과 가장 친하였고, 수암(遂菴 권상하)에게 특별히 높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더하였다.
아, 공은 대현(大賢)의 후손으로 화양(華陽)을 심복하여 섬겨서 강한(江漢)과 추양(秋陽)의 생각이 늙어갈수록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우(士友)들이 추앙하고 숭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공과 같은 분은 법문(法門)의 수양한 선비요 혼탁한 세상의 단정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훌륭한 정공(鄭公)이여 / 於惟鄭公
충의백(忠義伯)의 집안에서 나왔네 / 出自忠義伯之家
그 덕이 참으로 훌륭하고 / 其德孔嘉
그 아름다움이 참으로 많도다 / 其懿孔多
후인들이 그의 훌륭한 후손을 보았다고 칭찬하게 하였으니 / 使後人稱之曰吾見其孫
어찌 천 년의 아름다움이 되지 않겠는가 / 豈不爲千載之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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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속수(束脩)의 예 :
수(脩)는 육포(肉脯)로서, 속수는 열 개의 육포 묶음을 말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청할 적에는 반드시 폐백이 있어
야 하는데, 속수는 폐백 중에서 가장 약소한 것이다.
[주02] 병사(丙舍) :
선조를 제사하는 재실(齋室)인데, 대부분 묘소 아래에 있었다.
[주03] 일명(一命)의 관리 :
일명(一命)은 본래 조정으로부터 임명받는 최하등의 관직을 가리키는 말로, 종9품의 관직을 이른다.
[주04] 소부(召父)가 …… 있다 :
주인공이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백성을 자식처럼 잘 다스렸음을 뜻한다. 전한의 원제(元帝)ㆍ성제(成帝) 때에 남양 태수(南陽太守)
였던 소신신(召信臣)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에 남양 태수였던 두시(杜詩) 또한 선정을 베풀었는
데, 뒤에 백성들이 이들을 아버지 같은 소신신과 어머니 같은 두시라는 뜻에서 소부(召父)ㆍ두모(杜母)라고 칭송하였다.《前漢書
卷89 循吏傳》《後漢書 卷61 杜詩列傳》 도곡은 이 고사를 인용하면서, 두모를 바꾸어 정모라고 칭한 것이다.
[주05] 문충(文忠) 선생의 사판(祠版) :
문충 선생은 포은 정몽주를 가리킨 것으로, 문충은 그의 시호이며, 사판은 신주를 이른다.
[주06] 문원(文元) …… 지방 :
문원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시호이고, 문경(文敬)은 사계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시호이다. 연산은 사계
와 신독재의 고향으로, 두 분을 모신 둔암서원(遯巖書院)이 있으며, 우암 송시열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은 이곳에서 두 분 스
승에게 수학하였다.
[주07] 형서(邢恕) :
북송 사람으로 자는 화숙(和叔)인데 명도(明道) 정호(程顥)에게 배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나, 천성이 번복(反覆)을 잘하
여 명도를 배반하고 사마광(司馬光)의 문객이 되었다가 다시 장돈(章惇)에게 붙었으며, 또다시 장돈을 배반하고 채경(蔡京)의 심복
이 되는 등, 배은망덕의 대표적 인물이었다.《宋史 卷471 邢恕列傳》
[주08] 이하성(李廈成) …… 것 :
이하성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손자로,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 있을 적에 홍계적(洪啓迪)ㆍ김창흡(金昌翕) 등이 조부
를 무함했다 하여 이를 변론하는 소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우암을 격렬히 비난하여 노론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肅宗實錄 29年
5月 21日》
[주09] 지촌 이공(芝村李公) :
지촌은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호로, 자는 동보(同甫), 또 다른 호는 간암(艮菴),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월사(月沙) 이정
귀(李廷龜)의 증손이자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손자이고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 6) 유일(遺逸)을 지내고 해주 목사(海州牧使)와 이조 참판 등을 거쳐 1719년 대사헌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신
임사화로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다가, 철산(鐵山)으로 이배 도중 정주(定州)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저서로《지촌집》
이 있다.
[주10] 화양(華陽)을 …… 생각 :
스승인 우암을 사모함을 말한 것이다. 화양은 화양동으로 우암이 강학했던 곳이고, 강한(江漢)과 추양(秋陽) 역시 스승인 우암을 가
리킨 것이다. 본래 강한과 추양은《맹자》〈등문공 상(滕文公上)〉의 “공자가 별세한 다음, 제자인 자하(子夏)ㆍ자장(子張)ㆍ자유
(子游)가 유약(有若)이 성인(공자)과 유사하다 하여 공자를 섬기던 예(禮)로써 그를 섬기고자 해서 증자에게 강요하자, 증자가 말씀
하기를 ‘불가하니, 공자께서는 강한(江漢)으로써 씻으며 가을볕으로써 쪼이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고 깨끗하여 더할 수 없다.’ 하셨
다.〔子夏子張子游, 以有若似聖人, 欲以所事事之, 彊曾子, 曾子曰, 不可, 江漢以濯之, 秋陽以暴之, 皜皜乎不可尙已.〕”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후로 공자를 직접 칭하거나 훌륭한 스승에 대한 존모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주11] 충의백(忠義伯) :
포은의 봉호이다. 포은은 1389년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고, 다음 해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익양군
(益陽君) 충의백에 봉해졌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황교은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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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資監判官鄭公墓碣銘 幷序。
窮村鄭公, 諱纘輝, 字景由, 迎日人。 圃隱先生十一代孫也。 曾祖儁, 典籤: 祖雲翰, 麻田郡守: 考元徵, 玄風縣監。 妣漆原尹氏, 都事正基女。 生而穎秀, 英邁絶人。 三歲, 母夫人戲示錦囊曰: “汝欲之乎?” 卽點頭, 遂與之。 以齎日用物件, 有索輒進, 長老奇愛之。 已荐遭內外艱, 自痛罪逆, 哀毁過節。 待小母盡誠, 無異親子。
弱冠, 束脩尤菴先生門, 尤菴奬許特深, 期以遠到。 公嘗以圃隱墓道無樹爲歉, 請文於尤菴, 尤菴感公向先至誠, 卽許之, 顧謂左人曰: “圃隱有孫矣。” 平生潛心《大學》書, 專精《心經》、《近思錄》, 世數尤門篤學士, 公未嘗不在其中。
辛酉, 尤菴自海上還入對, 擧薦公甚力, 老峯閔公鼎重亦同辭, 遂除恭陵參奉。 轉奉事、直長, 至主簿。 由監察, 出監連山縣, 三歲罷歸。 歷平市令、軍資判官、翊贊。 又出監山陰縣, 亦三歲而歸。 景宗癸卯, 卒于公州之丙舍, 享年七十二, 葬在鎭岑。
厥有二配。 前配昌寧成氏, 進士夏聖女, 生二子: 銶, 鉅。 二女: 適申愈、宋會源。 後配慶州金氏, 進士履賢女, 生子鏶, 女適李匡濟、權熻。
公嘗謂吾以先蔭登仕, 若不守法奉公, 是謂辱先。 自爲一命之官, 卽斤斤以繩墨自厲, 毋敢分毫差忒。 曁爲縣宰, 尤律己絶私, 一以束吏愛民、蘇殘祛弊爲務。 豪右讋伏不敢逞, 一境安堵, 至爲之語曰: “昔有召父, 今有鄭母。”
尤嚴奉聖廟, 必以肅敬將事。 連山距師門近, 頻頻往侍函丈, 隨事咨稟。 尤菴有書奬之曰: “旣奉文忠先生祠板, 來莅元、敬兩先生講道之鄕, 此實斯文盛事。” 又嘉公奉聖廟事曰: “今世此事滅裂, 是不知慢神與虐民同科也。 今聞吾友亦留意, 甚知先正遺敎之有在也。”
宋公奎濂爲方伯, 凡有疑獄, 必歸之公, 嘗待以優禮, 後以 “慈祥縝密, 無愧循吏”, 褒聞于朝。 公之吏績, 固已播在中外, 而亦不免燕岐之謫, 此則尤菴被禍時事也。 然以其爲一時微眚, 故凶黨亦不得深嚌, 卽被放還。
尤菴之赴謫耽羅, 受命楚山, 皆往迎中路。 最惡尹拯之爲人, 以爲惡浮邢恕, 旣與相絶, 又勸從弟纘祖絶之。 公篤信尤菴, 晩年尤加慕用, 見李廈成之搆誣尤菴, 尤憤疾之, 欲上章力卞, 以士論不齊而止。 然其耿耿不但已也。 因此除富平宰, 而亦不赴。
後自山陰歸, 遂卜居於公州之儒城, 仍不復出, 與纘祖同居, 纘祖亦有學識非凡士也, 相與講磨不怠以爲樂。 公於尤菴門徒中, 最與芝村李公善。 於遂菴尊仰有加焉。
噫! 公以大賢遺裔, 服事華陽, 江漢、秋陽之思, 老而益切, 一時士友, 蓋莫不推尙。 則如公者, 其可謂法門之脩士, 澆世之端人也夫!
銘曰:
於惟鄭公, 出自忠義伯之家。 其德孔嘉, 其懿孔多。 使後人稱之曰吾見其孫, 豈不爲千載之姱?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