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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법문: 마음 챙김 명상이란 무엇인가?
금주의 법사: 동국대 겸임교수 신진욱법사님
오늘 일요법회는 지장재일. 평생위패봉안 합동천도재와 함께 진행됩니다.
불광법회.불광사 50주년 기념세미나(10/6)에 이어 지난주에는
50주년 기념법회를 하고 많이 피곤할텐데도 불광법회 식구들은 신심가득한 열정으로 오늘도 많은 분들이 법회에 동참하셨습니다.
사무국에서는 회장단 회의를 하시고, 현관로비에서는 형제들을 맞이하는 등 여여한 모습들입니다.
이번 주 떡과 생수 보시는 광진1.2구,노원구,송파3구에서 준비하시고
직접 나누어 드립니다.
엘리베이터 봉사팀,보광당 안내팀,새법우 안내팀 언제나 밝고 친절한 모습이 한결 같습니다.
불교기본교육 접수를 받습니다.
개강일 : 2024년 10월 27일 수료일 : 2024년12월 15일
이번에는 외부의 전문 강사님들을 초빙하여 더욱 업그레이드 된 기본교육이 될 것입니다. 수료식날에는 수계식도 함께 진행됩니다. 주변에 많이 홍보하여 불법인연을 맺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천수경 봉독과 타종 사회자 혜안팀장님의 멘트로 법회시작을 알리고 헌향과 헌다를 올립니다.
보현행자의 서원 중
6. 수희분(수희분)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겠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로부터 무상지(무상지)를 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복덕을 닦을 새,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무한겁이 다하도록 난행고행을 행하시면서 가지가지 바라밀문을 닦으신 그 모든 공덕을 기뻐하겠습니다. 가지가지 보살도를 원만히 닦으시고,마침내 무상도를 성취하시며,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를 분포하시는 그 모든 공덕을 기뻐하겠습니다.....
"마음챙김 명상"을 주제로 법문 하시는 동국대 신진욱교수님! 복잡다난한 현대사회에서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마음챙김 명상이 매우 유용하게 다가옵니다. 자신과 세계를 자기 생각대로 보지않고 "있는 그대로"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기도이고 명상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방금 소개받은 신진욱입니다. 제가 큰 법회는 잘 안 서보고 조그만 강의는 해봤지만 법문이라고는 예전에 어릴 때 군법사할 때 법문이라는 형식으로 했지만 그 이후에는 법문이라는 형식으로는 잘 안 했습니다. 법회 들어오기 전에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생각할 때 저는 근현대의 큰스님 중에는 광덕스님이, 제가 깨닫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가장 깨달음에 가까이 갔거나 깨달으신 분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본인이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잖아요. 행이나 실천을 보면 저희같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짐작해볼 수 있거든요. 그 시대에 이런 법회를 만드시고 법등을 만드시고 한글화를 다 하시면서 저도 오늘 법회에 처음 참석했지만 어릴 때 군 법사 가기 전에 육화정사에서 수련도 받을 때 천수경을 광덕스님이 한글화하시고 반야심경도 오늘 한 것처럼 한글화했거든요. 제가 그때 20대 후반인데 천수경은 한글로 했지만 반야심경은 한문으로 했는데 오늘 해보니까 거의 8~90%는 안 보고도 따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씨앗을 심어놓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오늘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건 명상에 대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 좀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 계시는 분들은 제 설명 없이도 잘 아실 테지만 그래도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명상을 하든 깨닫든 현재 이 몸을 가지고 나중에 법신화가 되든지 이 몸으로 출발햐셔야 되거든요. 우리가 이 몸을 당연히 받아서 건강하니까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이 몸 받기가. 저는 어릴 때 경전을 보고 몸을 귀하게 표현한 것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공부를 조금 더 해보니까 절대로 이 경전에 나와 있는 이 몸을 받은 인연이 상당히 과학적이라 생각합니다.
경전에 보면 눈 먼 물고기가 망망대해에서 삼천 년 만에 한 번씩 올라와서 조그만 널빤지의 구멍에 만날 인연이라고 이야기하셨잖아요. 그리고 티벳 불교에서는 밥을 지은 것이 아니라 생쌀을 벽에 던져서 붙을 확률이 거의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물 위를 걸을 확률이 0.000 무한대까지 가서 어쨌든 확률로서는 존재할 수 있잖아요. 어떤 서양의 과학자가 빅뱅이 일어나서 우주가 어느 정도 식고 아주 단순한 생명체부터 진화한 생명체까지 그 다음에 지구가 어느 정도 대기권이 형성되어서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이런 것을 수학적으로 다 계산을 해봤대요. 그리고 정자와 난자가 만날 확률을 다 해봤더니 물 위를 걸을 확률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이 더 희박하다고 합니다.
일본 학자가 최근에 말하길 우리가 태어나려면 최소한 두 분이 계셔야 되고 그 두 분에서 다시 네 분이 계셔야 되는데 이것을 수학적으로 거듭 제곱이라고 하는 건데 계산을 해보니 최소한 10대 조상만 해도 1,024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1,024분이 결혼을 하고 옛날에 먹고 살기 어려울 때지만 애들을 잘 돌보고 성실히 키웠을 때 제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1,024분의 아주 성실하고 건강한 조상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제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백만 명 정도가 필요하고 30대만 올라가도 약 10억 명, 40대 올라가면 10조 정도의 우리 조상님이 계셔야지만 그 중에 한 분도 결혼 안 하셨다든지, 결혼 전에 돌아가셨든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현재 제가 여기에 있을 수가 없어요. 10대 20대 30대 40대가 금방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10조 분의 조상이 계셨어야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게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어떻게 보면 존귀한 거죠.
오늘 지장재일 평생위패 시식을 한다고 하시던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무라 생각하면 저는 나무 줄기이고, 조상은 나무의 뿌리이고, 태어난 자손들은 나무의 잎이나 꽃이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멀쩡하니까 잎도 생생하고 꽃도 피어 있어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런데 조상한테 끊임없이 제사를 지내거나 생각을 하거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은 조상한테 끊임없이 거름과 물을 주는 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끊기면 물이 없어도 나무가 한두 달, 일이 년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게 지속적으로 안 되면 결국 몸이 시들고 나무가 시들어서 자식이라는 열매가 제대로 안 맺히거나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옛날식으로만 고집하면 젊은 여성분들이 싫어할지 모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시대는 바뀌더라도 끊임없이 조상에 대한 감사함이나 넓어지면 조상 아닌 분까지도 넓어질 수 있겠지요. 그런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명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제 경우만 생각해도 최근에 바뀌었지만 불교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별로 바뀐 게 없어요. 왜 그러냐하면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는 하나의 좋은 지도를 발견하거나 지도를 읽는 법을 아는 거에 불과해요. 그거 모르면 지도 없이 가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고 지도를 잘 안다고 해서 산에 가는 것이 목표라면 산에 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는 제가 어디 가서 얘기할 때 교리를 완벽히 해도 낙제점이다. 그 이유는 불교의 교리를 안다는 것은 완벽하게 알기도 어렵지만 알아봤자 50점밖에 안 됩니다. 실천, 여기에서 실천이란 물론 여러 가지 기도와 염불도 있고 자기 성찰과 발원도 있겠지만 그때 핵심적인 실천은 참선이나 사띠, 명상, 알아차림이라고 할까요?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결국은 그런 걸 통해서만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불교의 교리마저도 정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냥 이론적으로 열심히 머리로 아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아는 것은 완벽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상계나 보이는 대로 열심히 해석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다 설명드릴게요. 불교는 그만큼 실천이 중요하다. 실천 중에서도 물론 염불이나 기도를 통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메카니즘은 같은 겁니다만 그래도 더 널리 보편적으로 오래 내려온 것은 정념 수행, 요즘 말로 참선이나 명상이라 해도 됩니다. 그 수행을 해야지만 변화된 나를 볼 수 있고 변화된 것은 내 행동이나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그게 내가 맺는 내적인 나와 대상 세계의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뀝니다. 절대로 외부 세계를 내 마음대로 바꾸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는 지금 단순히 이론만 하는 것은 좋은 지도를 가지는 거라 생각하시면 되고 지도를 가졌으면 자기의 방법으로 꾸준히 가면 됩니다. 그런데 갈 때 혼자 가는 것보다는 정직한 도반 바른 도반이랑 같이 가는 게 좋겠죠. 저는 옛날에 마라톤을 풀코스로 여러 번 뛰었는데 혼자 뛰면 상당히 힘듭니다. 그러나 옆에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같이 뛰면 훨씬 멀리 잘 갈 수 있거든요. 그랬듯이 이 법회에서 모여서 하든지 주변 도반이랑 같이 가면 또 지도를 제가 잘못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선지식과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유식삼성(唯識三性). 변계소집성적인 그걸 인식체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변계, 두루 계산하여 집착하는 성질, 성품, 인식체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보면 각자 다 떨어져 있잖아요. 옆 사람과도 떨어져 있고 의자도 떨어져 있다고 보니까 내 생명은 따로 있고 다른 생명도 다 떨어져 있는 것처럼 다 개별적인 것처럼 인식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것, 나라는 생각이 더 강해집니다. 물론 이것을 복잡하게 더 해야 설명이 되시겠죠. 우리 보면 다 그렇게 보이잖아요. 뚝 떨어져 있고 책상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이렇게 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것 말고 전문적인 용어를 써서 연기적으로, 조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조상이 선행해서 계셨고 관계적으로, 이 설명이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약간 짧게 설명할게요. 관계적으로 연기적으로 동글동글한 구슬이 딱딱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그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게 없으면 이게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을 의타기, 타자 남에게 서로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게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이것 말고 수행해서 깨달으면 똑 떨어져 있는 것에서 연결되어 있는 그림처럼 뒤에 동그란 원이 있는 것처럼 한 번 상상해보시면. 탁자 위의 것이 있기 위해서는 다리가 있어야 되고, 다리가 있기 위해서는 바닥이 있어야 되거든요. 바닥이 있기 위해서는 건물의 바닥이 있어야 되고 크게 보면 지구가 있어야 되잖아요. 지구가 있기 위해서는 은하계 같은 우주가 있어야 되죠. 이거 하나가 있으려고 해도 다리가 바닥이 있어야 되고 지구와 우주가 있어야 되는구나. 그게 다 연결되어 있고 큰 그 위에 개별성이 있구나. 원성실성(圓成實性)적으로 보여진다고 할까요, 본다고 할까요 그런 것은 고통이 없다고 말하잖아요.
본래 의타기성적으로 있는데 더 강해서 변계소집성적으로 가면 자아가 딱딱해지고 내 것, 나 중심적으로 개별성이 더 우선하는 겁니다. 아만이나 아치라는 번뇌가 생겨서 괴롭거든요. 그게 아니고 원성실성적인 인식체계가 된다면 고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지만 고통이 있는데 고통을 없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할까요? 고통이 있다는 자체를 모르면, 나한테 병이 있는 줄 모르면 병을 고칠 생각도 안 하듯이 고통이 있으면 고통이 왜 생기느냐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집착과 갈애 때문에 생기는 거야,
그건 쉽게 생각하면 본래 잡으면 잡히는 것처럼 되어 있으면 잡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본래 잡히도록 안 되어 있는데 잡으면 잡히는 줄 알고 계속 잡는 겁니다. 물을 이렇게 잡아보면 물은 절대 안 잡힙니다. 그런데 착각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잡으면 잡히는 것처럼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기 때문에 계속 잡으려 하는 겁니다. 집착하고 갈망하고 갈애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기에 고통이 있어. 그런데 고통은 집착 때문에 생기는 거야. 그 고통이 끝이 없다면 부처님도 해결할 수 없겠죠. 이렇게 하니까 끝이 있더라. 끝은 해탈, 니르바나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행복이라고 하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있더라. 그런데 거기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게 8가지 바른 길을 가면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하신 겁니다.
명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에 얘기하신 겁니다. 이걸 서양에 가서 짧게 말씀드리면 마음챙김 명상 이런 건데 구조는 기본적으로 이런 겁니다. 여래장이나 아뢰야식이나 양자물리학을 더 이해하면 좋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리가 여래장이나 아뢰야식에서 함장식이다, 종자로 되어 있다, 요즘 서양 철학에서는 기호화되어 있다고도 표현하거든요. 여래장에서 생각은 거기서 나올 수 있지만 이런 탁자도 거기에서 나온다는 거야 하면 이해하기 어렵죠. 양자역학이나 물리학에서는 상당 부분 그런 것도 짐작해 볼 수 있거든요.
어쨌든 부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진리라 생각하고 얘기하자면 여래장,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데서 모든 게 연기생한다 보고, 연기생하기 위해서는 주객이 분리되어야지만 내가 하는 생각, 주가 있어야 객체인 사물을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생각도 알아차릴 수 있잖아요. 주객이 분리되어서 자아, 나라는 생각. 대표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거는 아뢰야식 위에 있는 말라야식, 마나식이라고도 하는 여기에서 자꾸 자아감을 생성하고. 요즘 뇌과학에서 말할 때는 디폴트모드 네트웍이라고 하는 머리 뒤 뇌에서부터 앞까지의 깊이가 있는 그 부분이 자아감을 계속 생성하는지도 모른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계속 나라는 생각, 자아감을 생산하고 우리가 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되는데 그게 고통스럽거든요.
그래서 명상을 통해서 쭉 들어가서 일단은 멈춰봅니다. 일단은 주객이 분리되는 것을 생각으로 아니고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보면 본래 텅 빈 마음, 언어 이전의 표현들이라서 좀 어려운데 그 상태를 아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봐야지만 기본적으로 철저히 무아구나 무상이구나. 우리가 머리로 교과서에서 무상하다, 무아라고 저도 20대 때부터 수없이 듣고 해도 제 귀에 박힌 게 없거든요. 명상을 하다 보면 한 45분이 1분처럼 느껴지는 단계가 있어요. 그 단계가 지속적으로 저 같은 경우에는 6개월에서 1년 이상 매일 하면 제가 볼 때는 변성이 되는 것 같아요. 쉽게 하면 저 같은 경우는 아까 얘기했던 아뢰야식에 있는 종자가 전문 용어로는 오염된 식이 청정식으로 바뀌는 건데 그게 완벽하게 바뀌면 원성실성적인 인식체계처럼 바뀌는 것 같아요.
저는 완벽하게 안 바뀌었는데도 그렇게 체험한 저와 체험하지 않은 저는 겉으로는 똑같아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제 내적으로는 많이 바뀌고 일단 두렵거나 불안하지가 않아요. 사실 미래로 생각이 좀 가면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수행을 통해서 그것을 보면 무상 무아인지가 체득이 되는 것 같아요.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하고 자기가 경험해서 아는 것하고의 차이가 있어요. 그게 계속적으로 되어서 완전히 이 아뢰야식 자체가 청정식으로 전환된 게 부처님이 된 상태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바뀌기 시작해야 불교가 보이기 시작하고 무상 무아가 작동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멈추면 안 돼요. 저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복이 거기까지 안 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멈췄던 것 같아요. 멈추면 쭈루룩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더라고요.
어쨌든 그렇게 된 구조를 가져가서 서양 사람들이 만든 프로그램들이 MBSR, 마음챙김을 근거로 한 스트레스 감소법 프로그램 같은 거라든지 1979년도 즈음에 존 카밧진이란 분이 한국에도 다녀가셨습니다. 저의 불교방송 법당에서도 초청했는데 그 분이 만든 프로그램들이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MSC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사띠, 정념이 되면 많은 고통이 사라지는데 그게 되기 전까지는 힘들더라.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손으로 따뜻함을 보내보고 상대방 친구한테는 실수를 하면 보듬어주거나 이해를 해주는데 자기한테는 상당히 엄격하지요. 자기가 실수를 하면 비난하는데 그러지 말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본능적으로 연필 깎다가 베이면 어떻게 해요? 헤집거나 소금 뿌리거나 하지 않죠. 그냥 본능적으로 이렇게 감싸안거든요. 자기가 실수한 것도 비슷하거든요. 물론 성찰은 해야겠지요. 거기다 소금 뿌리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죠.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데 따뜻하게 안 하죠. 우리가 소금 뿌려서 빨리 낫는다면 다 소금 뿌리겠죠. 왜 본능적으로 따뜻하게 감쌀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빨리 낫고 더 보호해주는 거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자기 내면에서의 실수는 비난하거든요. 그런 것도 따뜻하게 해보자 하는 것이 마인드풀 셀프 켐패션 (mindful self compassion) 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말로는 자애명상, 자비명상 이런 것을 지금 미국에서는 하거든요.
그런 것은 전부 불교에서 가져간 겁니다. 존 카밧진에게 제가 여쭤봤거든요. 본인은 초기에는 숭산스님께도 교류하며 배웠고 달라이 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다 불교에서 가져갔다. 왜 그러면 종교성을 다 뺐느냐?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불교 하면 신비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 불교를 폄하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게 더 좋고 부처님도 그런 방향을 바랐을 거라 생각했다는 겁니다. 불교는 교주주의적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본인이 말기암 환자나 힘든 사람에게 처음에 그렇게 실행했거든요. 마침 그 분이 그래도 의사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의사가 아닌 상태에서 했으면 병원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개설 못하게 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천 개 이상의 세계 기관에서 하고 있거든요.
불교에서 아까 얘기했던 주객이 분리되는 걸 보고 거기 들어가서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은 신수심법 (신은 몸이고, 수는 느낌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하고, 심은 생각이라 해도 되고 법은 다르마 진리이기도 하고 대상 세계 전체 일체이기도 하지요) 신수심법을 지관쌍수하는 겁니다. 단순히 멈춰서 제가 아까 45분이 1분처럼 느껴지는 단계가 지속되는 것을 통해서도 저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부처님도 그걸 하셨어요. 선정주의를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니까 여전히 괴롭더라는 거죠. 거기에 있을 동안은 선정의식 상태, 극도의 몰입상태에 있을 때는 시간도 멈춥니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죠. 선정의식 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고 선행되어도 훌륭한 거지만 그것만으로는 고통이 다 해결되지는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정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멈춰야죠. 그런데 계속 생각이 왔다갔다 하죠. 멈추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극도로 몰입감이 생겼을 때를 선정의식 상태, 쉽게 생각하면 여기에 부처님이 계시면 저기에 서치라이트가 있어서 부처님을 지속적으로 좍 비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상태도 필요하고 그 선정의식 상태가 되지 않으면 나중에 위빠사나도 안 돼요. 그것이 40~60% 깔린 상태에서 위빠사나라고 하는 쉽게 생각하면 우리가 연극을 할 때 요즘 관찰 카메라가 있는데 하나는 서치라이트를 항상 비추는 거라 생각하시고 관찰 카메라가 여러 개 있어서 그것을 조명이라 생각하시고 여기에 있는 여러 가지 사람이나 물건이 움직이면 관찰 카메라봉이 따라 가죠. 가서 조명을 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정의식 상태에서 나와서 하는 생각과 행동들을 보고 놓고 보고 놓고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을 은유적으로 위빠사나라고 생각해보셔도 돼요. 물론 학문적으로 위는 뭐고 빠사나는 뭐라고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쉽게 생각하면 지는 선정상태, 극도의 몰입상태에 들어간 것이고 위빠사나는 세속에 있는 모든 것을 무상 무아 상태로 본다고 할까요, 보여진다고 할까요? 내 상태가 바뀌어서 그거라 생각하시면 돼요. 그 두 가지를 통해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불교이거든요. 이런 불교의 수행구조, 정념의 구조를 고스란히 가져가서 현대화 실용화한 것이 서양에서 말하는 마음챙김 명상이고 마음챙김 명상을 중심으로 더 구체화한 것이 MBSR 마음챙김을 근거로 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입니다.
(보리광보살님 녹취)
그게 서양에서 말하는 마음챙김 명상, 마음챙김 명상을 중심으로 더 구체화된 스트레스를 감소하는 프로그램을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에서 마음 챙김을 근거로 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 또 우울증 재발 방지를 위해서 만든 프로그램, 이런 다양하게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했을 때 어떻게 되느냐, 명상이 그런 기본적으로 불교에서 가져간 구조 속에서 명상을 직접 실천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첫번째는 명상을 하면은 고도의 집중력이 생깁니다.고도의 집중력이 생긴다는 소리는 우리가 상징적으로 여기 화이트보드 판에 글씨를 이렇게 쓴다고 했을 때 글씨를 쓰는 순간 사라진다고 상정을 한번 해볼게요. 글씨를 이렇게 쓰면은 잉크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꼭 눌러쓰면 어떻게 돼요? 종이에 꼭 눌러쓰면 잉크는 사라져도 그 자국이 남아서 이렇게 읽을 수 있거든요.
그게 명상을 하면 고도의 집중력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예요. 그래서 명상을 하면은 특히 젊은 사람들, 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게 돼요.
그 이유는 저도 완벽하지 않지만 5~6년 전 서류도 직원들하고 대화하다가 그 서류가 제 머릿속에 떠오르거든요. 떠오르면 우측에 완벽하게 했지만 아마 붉은 글씨로 이렇게 해 놨을거야. 나도 이제 뇌는 확실히 우리가 믿을 수가 없잖아요. 내가 맞다라는 게 확실히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본 것을 불러내는 구조는 아니에요. 기억할 때마다 재구성해 내는 개념이거든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직원들한테 우측에 몇 년 전에 서류, 막 대화하다가 빨간 글씨로 이렇게 써 놨을거야 하면 여지없이 빨간 글씨로 써 져 있거든요. 그 정도로 옛날 생각을 하면 떠올라요. 그래서 명상을 하거나 이러면은 고도의 집중력이 생기고 집중된 상태에서 책을 보면 그게 영상처럼 이렇게 떠올라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암기력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구글에서는 얼마전에도 왔다 갔지만 차드 멍탄(Chade Meng Tan)이라는 사람이 ‘내면 검색’이라는 책을 쓰고, 그분이 구글에서 4~5년 전에 퇴사를 했어요. 그분이 원래는 엔지니어 출신인데 그 명상 프로그램을 오거나이즈하고 존 카밧진 박사 이런 사람을 불러서 교육하고 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 일 하다가 자기도 명상가가 되고 책도 쓰고 이렇게 했는데 왜 구글에서 명상을 가르칠까요?
구글이 무슨 불교를 포교해주기 위해서 명상을 가르치지 않거든요.
구글은 왜 가르쳤냐, 창의성 때문이에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창의성 있는 사람이 한사람 나오면 수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거든요. 그럼 창의력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우리 사람은 상당히 이 뇌를 뇌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죠. 우리는 어릴 때는 시간이 천천히 갑니다. 나이 들면 시간이 빨리 가요. 그 이유는 어릴 때는 내가 틀을 만들어야 돼요. 우리가 자전거 배우고 이럴 때, 자전거 탈 때마다 모든 과정을 다 내가 프로세싱하지 않거든요.
우리는 어른이 되면 많은 틀을 가지고 있어요. 틀을 대입해 보면 이게 맞구나 이거는 뭐구나 이렇게 금방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어릴 때는 그 틀을 만들어서 많은 정보를 흡수를 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천천히 가고 우리도 뭐 다운로드 받거나, 한 번 다운로드 받은 것을, 다운로드 받을 때는 빨리 되지만 처음 다운로드 받을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어린애는 한글을 해서 틀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천천히 가요. 어른은 이미 있는 틀 가지고 대입하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가요. 우리 여행 가 보시면 있잖아요. 여기는 야자수 같은 거 없지만 동남아 있을 때는 2~3일은 시간이 비교적 천천히 가다가 2~3일 지나면 또 시간이 비슷하게 빨리 가요.
2~3일 동안 새로운 거를 제가 받아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천천히 가거든요. 그래서 시간은 절대적으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우리 뇌는 효율성을 좋게 쓰기 때문에 기존의 조합하던 단어 편한 것들끼리 조합해서 생각도 하고 편리하게 이렇게 살아요. 그런데 명상을 하면은 자아 개념이 상대적으로 말랑말랑 해 집니다.
자아 개념이 딱딱하면 딱딱할수록 그 사람은 내적으로는 힘들거든요. 덜 행복하거든요 자아 개념이 좀 말랑말랑해져요. 그러면 ‘Default Mode Network’ 라고 하는 것이 적정화 될 때는 어떤 형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기존에 쓰던 단어끼리 조합하지 않아요. 안 쓰던 단어, 우리가 생각이라는 걸 문득 났다고 하잖아요. 생각은 경쟁해 가지고 이긴 놈이 일어난 걸 우리가 그 생각나서 이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명상을 하면은 자아감이 말랑말랑해지면서 고정관념이나 선입관념 같은 게 많이 해체돼요. 그리고 뭐든지 처음 같은 느낌도 좀 있어요. 우리가 안 쓰던 내면에서 안 쓰던 단어 편리하게 막 하던 것끼리 조합을 안 해요. 그러면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창의적인 기존 뻔한 생각 아닌 게 일어나요. 거기서 창의력이 생기는 거거든요. 그래서 명상을 하면은 창의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명상을 하면은, 내 내면하고 또 어떤 관계 속에서의 내 내면이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내 내면에 일어나는 생각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지혜로워진다고 할까요?
무아성을 바탕으로 관계 맺는다고 할까요?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와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뀝니다. 그리고 대상 세계나 다른 관계 속에서 있는 어려움이나 사물을 인식하거나 할 때,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뀝니다. 내가 세상을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어렵잖아요. 그러나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뀌면 내가 훨씬 더 행복해지고 훨씬 더 달라지기 시작하거든요. 명상을 하면 세상을 내 마음대로 막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안에 있는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명상은 생각을 바라보는 연습이다라고도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시골에 저는 살았는데, 큰물이 나면은 스티로폼 같은 것도
떠내려 오고 어떨 때는 돼지도 떠내려 오고 이랬거든요. 나무도 뽑혀 가지고 둥둥둥 떠내려 오고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내가 그 생각의 강이라고 할까요? 둥둥둥 떠내려가는데 한복판에서 살아요. 감정의 한복판에서 살아요. 그거 떠내려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열 받으면서 뭐 하면서 막 살아요. 그런데, 탁 어느 순간 그래도 세월이 많이 지난 다음에는 내가 너무 이랬었구나 라고 아는 거를 강둑에 이렇게 탁 뛰어오르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연습하는 거 다 처음부터 생각을 생각으로 나는 강둑에 이렇게 앉아가지고 생각을 생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게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생각이 조금 이렇게 떠내려가다가 강둑에 강 위에서 이렇게 떠내려가다가 탁 뛰어 올라와서 여기서 그냥 바라보는 거 그거를 생각해 놓으시면 명상하실 때 큰 도움 받으실 수 있어요. 생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생각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내 내면의 마침, 사람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이만한 공간이 생긴 듯한 느낌이 와요. 우리가 뭐든지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잖아요. 누가 나를 칭찬하고 뭐 이런 거 막 얼굴에 또 좀 표정도 좋아지면서 이 가슴속에서 즉각적으로 기쁨이 확 일어나잖아요. 또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이러면 나보다 권력이 더 있거나 높은 사람이 하면 말은 못하지만 속에서는 막 이렇게 나쁘게 막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그 반응 속도가 느려집니다. 어떤 감정에 대해서는 뭐에 대해서는 저는 감정은 일종의 연기(煙氣)라고 생각하거든요. 시골에 보면 구들 불 때문에 거기 금이 가면 연기가 좀 올라오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 연기를 그냥 꽉 찼다고 상정해 보면 가만히 문 닫아놓고 잊어버리고 밖에 가서 갔다 오면 연기 없어져 있거든요. 밑에 불을 계속 안 때면, 그런데 계속 밑에서 불을 때면 어떻게 돼요? 연기는 계속 일어나거든요. 감정이나 이런 거는 90초 이상 자기가 버틸 힘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계속 열받는 것은 내가 계속 연기에 불을 때, 군불을 때가지고 연기를 일으킨 거나 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바라보는 힘이 분리하는 힘이 생기면 훨씬 더 늦게 반응하고 나중에 반응을 안 하고 그래서 저는 살면서 여러 가지 결정을 해야 될 때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결정을 꼭 실패한다고 생각을 해요. 저희 회사도 젊은 직원한테도 퇴사하고 싶고 뭐 할 때, 내가 일시적으로 열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남이랑 관계가 안 좋은 상태 때문에 하려고 하면 일단 참아봐라.
너가 편안해진 상태에서도 정말로 다른 좋은 비전이나 다른 회사가 좋을 것 같으면 그때 움직이는 거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 감정에 휩싸여 사는 거는 실패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명상을 하면은 제가 볼 때는 훨씬 지혜로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명상을 하면은 2009년도인가요? ‘엘리자베스 블랙베리’ 라고 하는 분이 2009년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분이 계세요. 이분이 무엇 때문에 생리의학상을 받았는지는, 물론 이제 잠깐만요. ‘젠 쇼스텍’이라는 분과 공동 수상을 하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뭐 때문에 받으셨냐 이분이 최근에 누구랑 같이 명상책도 하나 썼거든요.
‘늙지않는 비밀’인가 하는, 우리가 이제 염색체에 보면은 우리가 구두를 보면 구두 끈이 이렇게 여러 올로 돼 있는데 풀리지 말라고 플라스틱으로 탁 집어놓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 염색체도 여러 가지가 꼬인 상태로 이렇게 돼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이 풀리지 말라고 밖에 이렇게 우리 구두를 그는 플라스틱으로 탁 찍었듯이 그렇게 한 것이 텔레비어 라고 합니다. 이제 이것이 한 번마다 이렇게 분열하거나 할 때마다 조금씩 줄어든대요.
그게 다 줄어들면 이제 그 염색체 입장에서는 없어지는 거죠. 죽는 거죠. 그런데 이 세포 입장에서는 텔레미어를 발견해 가지고 이분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으셨거든요. 그런데 이분이 저희도 명상을 해보고 그러니까 근데 왜? 덜 줄어드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연구를 해 보니까 텔레블라제라고 하는 이 효소, 효소가 이렇게 나와 가지고 그 줄어드는 거를 늦추더라는 거예요. 그게 늦추어지면 오래 사는 거거든요. 또 태생적으로 그게 늦춰 천천히 닳도록 하거나 긴 사람은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명상을 하니까 어떤 메카니즘인지 모르지만 텔레블라제라고 하는 효소가 나와서 이걸 천천히 줄어들게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건 물론 초기 연구 단계이기 때문에 확실히 명상만이 장수다 이건 아니지만 명상이 장수랑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안전 교육이라고, 저희 회사도 이제 무슨 법이 바뀌어서, 제가 책임자 돼서 안전교육을 받아야 된대요. 6시간 받았거든요. 엄청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 어디 강의 다닐 때, 재주는 없지만 좀 즐겁게 하려고 노력을 해봐야 되겠다. 두 번째 그걸 못하면 시간이라도 잘 지켜드려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명상은 불교에서 나왔다. 그리고 매일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불교를 위해서도 머리로 아는 거 말고 실천을 해야 된다. 그리고 특히 우리 같은 사람도 열심히 해야 되겠지만 젊은 사람, 그리고 제가 생각할 때는 명상은 마음의 근력을 쌓는 거다. 그리고 특히 옛날에 우리 70년대에는 노동은 했지만 운동은 안 했거든요. 운동은 엘리트 선수들이 하는 거 보통 사람, 우리는 노동만 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운동을 전 국민이 다 하잖아요.
걷고 저는 명상은 우리가 운동을 안 하면 근력이 없어지잖아요. 그렇듯이 명상은 마음의 근력을 세우거나 근력을 튼튼하게 하는 거나 어떤 근력이나 내려놓을 힘, 우리가 잡는 것보다 내려놓는 게 더 어렵습니다.
그 힘을 키우는 게 명상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월광화보살님 녹취)
매주 일요법회에 동참하여 법문을 듣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를 서원하는 거룩한 불광형제님들이십니다.
마하보디합창단:" 그 마음 그 대로" (대행스님 작사. 박이제 작곡)
물이 맑으면 달은 나타나 보이지만
물이 흐리면 달은 숨어 버리고 만다.
맑은 물 따라 달이 오는 것이 아니고
흐린 물 따라 달이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번뇌와 망상을 깨끗이 여의고
맑고 청정한 마음이 마음이 생기면
부처는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부처가 나타나고
마음이 어두우면 부처가 보이지 않는다.
부처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부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육진의 도적을 여여히 막아내고
육근의 작용이 걸리지 않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후렴
청산은 말이 없고 유수는 터가 없는데
자연과 같이 마음이 정중하여 변치 않으면 그 마음 그 대로 부처이시네! 부처이시네! 부처이시네!
대학입시및 각종고시 수험생들을 위한 학업성취발원문을 혜담스님께서 불광형제들과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봉독합니다
불광법회 불광사 정상화 발원문 : 대원3구 명등 범해거사님!
매주 현안보고 하시는 현진법회장님!
오늘 불광법회에 처음오신 새법우님들이 많습니다.
부모님, 자녀, 손자녀 3대가 법회에 오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불광법회에서 재사를 모시니까 자연적으로 자녀들도 참여하게 되고, 조상님과 일가족이 모두 경전독송,예불, 법문, 영단시식 의식,찬불가까지 법회의 모든 것을 함께하니 이보다 더 좋은 재사의식이 있을까 싶습니다.
혜담스님과 연화부 거사님들의 집전으로 보문부 식구들, 기재사 신청한 가족들, 회장단,합창단,구법회 가족들 순으로 질서 정연하게 시식에 동참합니다.
"무상게" "빛으로 돌아오소서" 3절을 부르며 지장재일.평생위패봉안 합동천도재 의식을 잘 마무리했습니다.
영단시식이 끝난 후 보문부 봉사 보살님들께서 전체 대중에게 골고루 배분해서 모든 제물을 다 소진 시킵니다.
법회때마다 방송실에서 노심초사하며 수고하시는 도안 법회팀장님과 거사님들!
그리고 상단의 무거운 제물을 발빠르게 영단으로 옮겨주시는 거사님들! 불광법회형제님들 모두가 광덕 큰스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보현행원의 실천자들입니다.
매월 지장재일법회에는 많은 울력이 필요합니다. 위패를 출력해서 붙이고 벽에 거는 작업에도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회장님들의 노고가 크십니다.
오늘은 종무소측 지장재일법회가 늦어져서 연화당에서 금강경독송을 진행하였습니다.
이번주에도 조계사,봉은사,화광사,동명사에서 1인 시위 정진이 이어졌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했습니다. 스님들께서 아무리 외면하고 무시해도 부처님 진리는 이 땅을 비추는 영원한 광명이며 위신력이므로, 불광법회 형제님들의 간절한 원력으로 불광사.불광법회는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청정도량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사측에서 50주년 기념 세미나를 두번씩이나 열더니, 주지 동명스님께서는 우리 불광법회 형제님들을 치워야 하는 돌덩이로 말했다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불광법회 식구들이 모연해서 법회 전용도량으로 지었고, 다시 재건축 불사까지 법회 식구들이 보시해서 지은 불광사 도량에서 스님들의 탐욕심으로 오늘날 대치 상황이 된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억지주장까지 하면서 자신을 수행자라 자처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2시 보현행자님들의 부지런한 손길로 지하4층 보광당은 정갈하고 빛나는 법당으로 변화됩니다.
님들의 공덕을 수희찬탄드립니다.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 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하자!
법등오서(法燈五誓)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바른믿음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무상공덕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최상의 보은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정토를 성취하겠습니다.
첫댓글 역사적인 불광법회가 이어지기 위해 수많은 보현행자님의 헌신이 돋보이는 법회 모습입니다
환희심으로 일지 작성하신 비로자나불님,
법문 녹취하신 월광화님, 법회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신 지일심님 모두 보현행자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_()()()_
우주법계중생 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나무아미타불 마하반야바라밀 숙연의일대사인연 덕분에 행복합니다
현산김봉현 합장 ㅅㅎㅅ
이법 二法
모든사회적개혁 모든종교적개혁 동시 발원성취 덕분에 감사합니다.
붓다의 선심으로 욕계의욕망을 녹이는 공부방식으로.
우주법계중생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빤야지혜로 포교전법가득한
(아닛짜 제행무상. 둑카 일체개고. 아낫따 제법무아).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는 (빤야해탈.열반적정) 미타의 무량광불 우주에너지로 코끝아래 위입술 삼각속 범위안에서 들숨날숨 알아차리고 평정심으로 우주법계중생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나무 아미타불 !
나무 석가모니불 !
나무 관세음보살 !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숙연의삼세대인연 덕분에 감사합니다.
재가자"만"의 포교사단"법인"설립 발원성취 덕분에 감사합니다.
포교 전법자.
현산김봉현 합장ㅅㅎㅅ
https://m.cafe.daum.net/bulkwangsa.org/AWQt/499?svc=cafeapp
법회일지 작성에 많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보현행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진 및 영상 촬영, 편집, 녹취,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은 일에 묵묵히 동참하시는
여러분들께 무한한 감사와 찬탄을 드립니다.
법사님께서 법문에서 말씀하시던 한 부분이 마음에 닿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은 크나큰 수행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불교의 교리를 안다는 것은 완벽하게 알기도 어렵지만 알아봤자 50점밖에 안 되고,
교리를 완벽히 해도 낙제점이다.
수행을 해야지 변화된 나를 볼 수 있고 변화된 것은 내 행동이나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다.
불교는 그만큼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깊은 동감을 합니다.'
절에서 하는 명상 중에서 염불선은 가부좌를 한 채 앉아서만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이루어집니다.
앉을 때나 누을 때나, 걸을 때나 멈출 때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혼자 실천할 수 있도록 서로 돕기 위해 우리는 광륜사에서 한 달에 한 번 철야 정진을 하고, 새벽 예불로 회향하고 있습니다.
밤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맑은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몸, 생각, 감정, 감각 그리고 바깥 세계를 하나하나 낱낱이 비추어 봅니다.
‘나’를 대상화하여 바라보고, 우리가 바쁘게 휩쓸려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거울에 비친 그림자로 비추어 봅니다.
절대로, 행복을 미루지 않아요.
지금 당장 보고 듣고 향기 맡고 맛보고 만지고, 호흡합니다.
하찮은 나, 시시한 나, 몸이 아팠던 나, 마음이 아팠던 나 또 절망도 했던 내가 실은 얼마나 신성한지를.
도봉산 광륜사에서 도반으로 참여하실 분들은 아래 밴드를 참조해 주세요.
https://band.us/@vajra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 오직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