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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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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특별한 가문이 살았던 곳 `임청각`
이장희 추천 0 조회 31 14.04.04 1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동에 가면 양반댁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단순한 양반댁이 아닌 고택,

독립 운동가 9명을 배출한 가문이 살았던 곳 임청각을 가보기로 했다

임청각은 16세기 양반들이 살았던 목조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란다

임청각은 본래 아흔아홉 칸으로 왕족이 아닌 평민이 지을 수 있는 집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철도 건설로 헐렸지만 지금은 약 오십 칸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 오래전 양반집을 거닐어 보고 사진에 담아왔다.

 

 

 

 

원래 임청각 앞 골목길이 없어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을 겨냥해서

집 앞으로 초가들이 늘어서 있던 자리에 철로를 깔아 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 주변 풍경이 사라졌고 지금은 임청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중 하나인 임청각은

고성이씨 이명이 1519년에 99칸으로 지은 반가 건물이다

이곳에 가면 군자정이 있는데 임청각의 사랑채다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에서 따온 당호라 한다.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또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그의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종숙 이승화 등도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상룡 일가는 의병항쟁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고

1909년에는 대한협회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면서

다른 곳과는 다르게 군사조직과 군사력 양성에 앞장섰다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일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국내에서 계획하던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를 이끌며,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라 민족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1932년 서란현 소과 전자촌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가족과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광복 45년이 지난 1990년 이상룡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 대전 현충원에 모셨다가

국립 서울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옮겨졌다

나라에서는 2009년 5월 25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아홉 분의

우뚝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분들이 태어나신 임청각을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안내문-

 

 

 

 

 

 임청각은 농민들의 초가집 사이에서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이러한 집들은 가문의 권력과 유교적 가르침의 단순함과 간결함을 동시에 보여주었으며,

예를 들면 불필요한 사치를 막기 위해 왕족이 아닌 평민이 100칸 이상의 집을 짓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99칸으로 평민이 지을 수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임청각은 99칸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약 50칸 정도 남은 상태라고 하였다

돌아보니 정말 어마한 크기의 집이 아닌가 싶었다.

 

 

 

 

 

 

 

 

 

 

마침 문화재청에서 자원봉사자 분들이 나와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잠시 들여다 보고 방해될까봐 한가한 쪽만 담아왔다.

 

 

 

 

 

 

이 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이 집은 방술상 동쪽을 향해 용(用)자 형으로 설계되어 지은 아흔아홉 칸 집으로,

건물 가운데 몇 개의 작은 행랑과 중정이 있는 이런 모양을 양택풍수에서는 길지라고 부른다.

 이 집은 동서 양쪽에 문을 만들었으나 남쪽으로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면부지의 한 스님이 찾아와 이 집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남쪽 벽에 작은 문이라도 내면 도난을 피할 수 있다고 권하였다.

오래전부터 도난 때문에 고심하던 주인은 이 말을 받아들여 작은 문 하나를 남쪽 벽 사이에 달았다.

 그 후 자주 이 집을 드나들던 도둑이 이 작은 문으로 집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눈이 캄캄해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사람들에게 붙잡혀 추방을 당했는데, 금세 눈이 보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근방에 알려지자

‘도둑의 눈을 멀게 하는 이상한 문’으로 소문이 나서 인근의 도둑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또 이 집의 동북쪽 한 귀퉁이에 있는 내방은 세 사람의 정승을 낳는 방으로서

 이미 두 사람의 정승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이곳에서 태어나 상주시 낙동면 류씨 집으로 시집간 딸이 임신한 뒤 몸이 무거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딸이 이 방을 좋아하여 어머니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해산 때까지 기거하였다.

마침내 그 방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영의정을 지내게 된 이야기로, 유심춘이라는 인물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기이한 점은 이 집의 며느리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방에 기거하면서 해산하여 정승을 낳은 두 사람 모두 출가외인의 경우이다.

이것을 보면 외손이 잘된다는 경주 양동마을의 손소와 이언적 가문의 경우와 비슷하다 하겠다.

-신정일의 택리지에서 발췌함-

 

 

 

 

 

군자정 모습은 옆에서 바라봐도 멋스럽다

집안에 사랑채로 사용되었던 군자정은 빙 둘러 난간을 세운 것도 참 특이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옛날부터 내려온 것은 아닐 테지만 물 내려가는 곳에 물받이도

기와로 만들어 이색적으로 보였다.

 

 

 

 

임청각은 이 지방의 수려한 경관에 마음을 빼앗긴 영산현감 이증이 세웠으며,

본채와 별채, 그리고 군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청각에는 다양한 용도 (반 공공적인 공간부터 가장 사적인 공간까지)의 방들이 있으며,

바깥채 건물들은 바깥세상을 차단한다. 그 안으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별채들이 늘어서 있다.

군자정은 남자들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글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바깥쪽으로는 쪽마루를 돌려 난간을 세웠다고 한다.

 

 

 

 

군자정으로 오르는 돌계단에서도 세월의 흔적을 엿보게 되고....

 

 

 

정자 옆에 딸린 방에 난방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반듯하고 멋스러움이 그대로 남아있어

양반가의 옛집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었다.

 

 

 

정말 구석구석 방들이 많았다

아직도 50여 칸이 남아 있다고 하니

99칸이었을 때는 더 어마어마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 고택에서 숙박이 가능하다고 한다

방마다 숙박비가 다르단다

방 하나 크기에 따라 보통 5만 원에서 15만 원까지 받는다고 한다

옛날 집에서 하루쯤 묵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대대로 독립운동가의 혼이 서려 있는 집이란 생각을 하면서

둘러보게 되던 집이었다.

 

 

 

이곳 임청각을 둘러보고 16세기 양반들이 살았던 곳이라니

그때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택도 분류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었다

어찌 보면 그 시절에 권력이 더 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당시 상류층은 유교를 받아들여 성별과 나이, 지위에 따라 가문의 권력이 달랐으며

그런 것들이 주택에도 배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왕족이 아닌 평민으로는 가장 큰 집이었으니 그때 당시는 대단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후손들이 여행 삼아 찾게 되는 곳이지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집으로 부디 보존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청각을 돌아보고 나오면

임청각 바로 옆에 국보 제16호인 통일신라 시대의 칠 층 전탑이 있었는데

돌아보고 오려고 했는데... 지금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아쉽지만 가려진 모습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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