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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시죠?
정말 오랜만에 책 추천 및 서평을 적습니다. 그나마 6월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새로운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이것도 너무 오래 스톱하면 좀 그렇잖아요. 명색 도서관인데 자료 수서가 제대로 안 되는 격이니까.
그래도 한 번에 5권이나 들고 왔으니 좀 길었던 잠수는 눈감아주시길.
도서명: 경성 탐정 이상 전 5권
저자: 김재희
* 이 책은 시각장애인 재활 사이트 아이프리 도서관 문학에 추리 코너에 데이지도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오랫동안 기다려온 작품이 마침내 완결이 났다. 《경성 탐정 이상》,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건 EBS 라디오 194.5 채널이었다. 아마 그때가 16년도인가, 17년도인가 그랬을 것이다. 이슈가 된 도서를 소개하고 성우들이 낭독해주는 북카페 코너였는데, 어쩌다 듣게 된 스토리가 내 취향을 확 사로잡았다. 귀로 듣는 것도 좋지만, 하필 방송 시간이 업무 시간과 겹쳤다.
그래서 집에서 느긋하게 직접 읽자는 마음으로 재활통신망 도서관에 신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성 탐정 이상》 전체 5권을 다운받게 되었다.
사실 1권이 제작된 지는 꽤나 됐고, 2~3권도 등록됐고, 4권도 나오고 그랬지만, 소위 완전체가 아니라 독서하는 걸 보류해왔던 터였다. 완결이 나와야 마음을 탁 놓고 읽을 수 있으니까.
《경성 탐정 이상》, 수능 단골인 시인과 소설가가 활약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둘이다. 그것도 우리가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바로 ‘중학생이 꼭 읽어야 할 소설’ 내지는 ‘고등학생이 필독해야 할 시’에 등장하는 작품과 작가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본명 박태원)와 <오감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 등의 시를 쓰고 소설 <날개>의 저자 이상(본명 김해경)이기 때문이다.
“홑적삼 위로 와이셔츠를 갖춰 입고, 그 위에 조끼와 서양식 코트를 입었지만 어딘지 어색하였다. 낡은 모직 단벌 바지 위로는 자그마한 구멍이 보일 듯 말 듯했다. 낡은 구두는 염색물이 든 가죽 사이로 질척한 물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소설의 관찰자이자 2인의 주인공 중 한 명, 구보(박태원)의 용모 묘사 되시겠다. 그는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계형 소설가인데 그를 나타내듯 차림새부터가 조금 후줄그레하다. 구보는 선배 문인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신문사를 찾게 되는데 이곳이 순수문학회 ‘구인회’의 아지트 비슷한 장소기 때문이다.
구보는 구인회에 가입해 인맥도 만들고, 어찌저찌 신문 원고 자리라도 좀 얻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걸음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재 시인 이상을 만났다.
“나무 지팡이가 먼저 들어왔다 . 손잡이 부분이 코끼리 머리 모양으로 조각된, 꽤나 값이 나가 보이는 지팡이 였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베토벤의 그것처럼 구불구불하게 사방으로 뻗은 한 사내의 머리카락이었다. 백구두를 신은오른발이, 그리고 줄무늬가 선명하게 들어간 모직 바지자락이 보였다.”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김해경)의 첫 등장 장면이다. 와, 패션이 아주..... 무슨 태러 수준이다. 소설 읽어보면 알겠지만 성격도 은근 능청스러운 게 괴짜의 면모가 풍긴다.
그런 둘에게 <삼대>로 유명한 선배 문인 염상섭이 구인회 입단 테스트를 낸다. 바로 기이한 살인 사건의 해결 단서를 찾으라는 것.
문학회에서 웬 범죄인가 싶은데, 구인회는 자투리로 시간을 내서 일본 경무국 형사들도 수사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범죄들을 토론하곤 했고, 그러다가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발견해 제보한 일이 적지 않다는 설정이었다.
구보는 구인회에 가입해 일자리와 인맥을 얻기 위해, 이상은 일자리 외에도 호기심으로 기묘한 사건, 분홍색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4월의 어느 밤, 셸리의 시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모던걸 사건에 뛰어든다. 그것이 생계형 소설가 구보와 천재 시인 이상 콤비가 맡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1권의 일명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사건’을 시작으로 2권 《경성 탐정 이상 - 공중 여왕의 면류관》, 3권 《경성 탐정 이상 - 해섬마을의 불놀이야》, 4권 《경성 탐정 이상 - 마리 앤티크 사교구락부》 그리고 마지막 5권 《경성 탐정 이상 - 거울방 환시기》까지 이상과 구보는 욕망과 낭만의 도시 경성 및 통영이나 인천, 일본 후쿠오카 등 곳곳을 무대로 온갖 기이한 사건을 해결해나가게 된다.
《경성 탐정 이상》, 국산 홈즈와 왓슨 이상과 구보
《경성 탐정 이상》은 한 권당 일고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린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여기서 5권은 제외한다. 1~4권과 달리 5권은 이야기 하나로 스토리를 전개해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1권 《경성 탐정 이상》은 시리즈의 시작을 여는 책답게 당시 실존했던 역사적인 유명 인사 여럿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썼지만 이상과 구보에게 수사를 의뢰하는 소설가 염상섭, 한국 최초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간송 전형필, 비록 이름만 나오지만 기이한 행각으로 무수한 일화를 남긴 조선 후기 화가 호생관 최북, 세계적인 곤충학자로 유명한 나비 박사 석주명, 개화기 조선시대의 산부인과 여의사 1호 이덕용, 자전거 영웅 엄복동 등이다. 이상과 구보는 그들과 얽히며 경성 바닥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과 마주하게 되는데, 각 단편이 전부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그중 1권에서 백미로 뽑고 싶은 건 2번째 이야기 ‘류 다마치 자작과 심령사진’, 5번째 이야기 ‘그녀는 살아 있다’, 7번째 이야기 ‘이상의 데스마스크’이다.
사실 옴니버스 형식이라 해도 이야기가 묘하게 연속성을 띠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서로 이어져 있다고도 볼 수있다. 특히 류 다마치 자작은 범죄를 설계하며 직접 알리바이를 만드는 등 배후 흑막으로 암약하는 인물이라 1권 전체를 관통하는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5번째 이야기에서 나온 ‘레이디 황’이란 이름에 숨어 사는 여인의 뒤를 추적하는 것을 후원하기도 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상을 주시하다가 강금 및 협박하며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기도 한다. 1권의 끝에서 류 다마치 자작의 손에 이상이 죽었구나 여겼을 정도였다. 무려 시리즈 뒷권이 있음에도 그랬다.
실제 역사상 시인 이상(김해경)이 요절했던 터라 작가가 픽션으로 구상했다 해도 작품 내에서 살아가게끔 하는 대신 결국에는 살리지 않고 이렇게 죽이는구나 아쉬워했던 것이다. 독서하다가 너무 몰두했는지 2~5권이 있다는 것도 깜빡했다.
과연 류 다마치 자작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왜 이상을 예의주시하며, 그의 회중시계와 시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내 서평이자 감상문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내포되어 있는 것을 잘 안다. MSG가 좀 과하게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점만 적자면, 조선총독부 지하의 방공호와 이상이 한때 건축기사로 일했던 이력, 그의 시에 포함된 암호, 황금과 혈통 인증 문서로 요약하겠다. 덧붙여 어떻게 보면 류 다마치 자작 이 인간도 조선과 일본 황실 사이에 끼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배척당한 불우한 인물이다. 그것에 한이 맺혀서 좀 침착하게 미친 작자가 됐다. 물론 그렇다고 류 자작의 악행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아니, 일본 귀족이면 됐지 뭘 더 바라나 싶은 마음이다. 나 같은 소시민도 아닌데 말이다.
“이십여 년 구속받던 아픈 마음과 쓰린 가슴을 상제주께 호소하고 공중여왕 면류관을 빼앗으러 가나이다.”
2권 《경성 탐정 이상 - 공중여왕의 면류관》에서는 경성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토착민과 갈등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1권에서 이상의 장례식 장면으로 소설가 구보(박태원)뿐만 아니라 내 심장까지 철렁하게 하더니, 어찌저찌 이상은 생존해서 ‘제비 다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모리아티 교수와 홈즈를 라이엔바흐 폭포에서 대결시킨 후, 홈즈를 죽였다가 다시 살린 것처럼 말이다.
우선 2권의 첫 이야기는 ‘귀신의 집 샹그릴라’로 시작한다. 광산 사업을 하는 외국인 부부가 한국에 와서 사는데, 어느 날부터 집과 마을에서 괴이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밤에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마을에서 아이가 죽은 채 발견되는 등의 일들. 부인은 집을 지을 때 마을의 상징인 당나무를 베어버린 일로 인해 정말 저주가 내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내막이 있는지 이상과 구보 콤비에게 의뢰하게 된다. 이상과 구보는 경성대, 위생국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범인을 잡는다.
여기서 경성대, 즉 서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조금은 마음이 그랬다. 이번에 독서하다가 알게 된 건데, 서울대가 일본인들이 세우고 가꾸었더란 말이지. SKY로 통하는 그 서울대의 뿌리가 일제 치하로부터 왔다니, 일전 꽃 관련 이야기 중 금강초롱꽃에 얽힌 학명의 일화처럼 참 씁쓸한 현실이다.
다음으로 2권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악마들’이었다. 작가가 외국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한국 버전으로 변형해 이야기를 썼다고 하는데, 추리 소설보다 공포 괴담 같은 분위기가 물신 풍겼다. 어쩐지 여관이나 여인숙 같은 데 묵기 싫어지는 느낌. 서스펜스, 미스터리, 반전이 있는 이야기였다.
한편 2권에서 세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 ‘경성구락부의 크리스마스’도 외국인들, 그중 한국에서의 상류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거부인 노마님의 파티 준비 과정에서 살해당한 여성, 그를 둘러싼 치정과 갈등, 그리고 배후의 흑막 사이비 종교 단체 백색교까지.
참고로 이 백색교로 말할 것 같으면, 2권의 끝 ‘경성 소년 탐정단’부터 연기를 피우기 시작한 수상쩍은 종교 단체이다.
또 시리즈 2권의 부제이자 작품 내 이야기 중 하나인 ‘공중여왕의 면류관’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여사에 관한 일화를 소재로 한다. 권기옥 비행사의 짐칸에서 시채가 나왔고, 그 일로 그녀는 곤경에 빠졌다. 이상과 구보는 비행기 짐칸을 조사하고 실험도 하며 사건의 내막에 다가가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의열단도 등장해 숨은 배신자를 찾기 위해 협력한다. 두루마기를 입거나 중절모를 쓰거나 나이 어린 소년이거나, 비행기 박사로 통하는 부호 청년까지, 참 다채로운 의열단 단원들의 면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암암리에 활약하는 조직,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다.
“우리는 그렇게 걱정해주지 않아도 되고 다만 미워하지 말기만을, 그것 하나만을 그렇게 바라는데..... 대체 세상은 언제 바뀌려는가.”
3권 《경성 탐정 이상 - 해섬마을의 불놀이야》에서는 그 시절의 성소수자와 갈등을 벌이는 양반들의 모습과 신여성들이 세상에서 받는 편견과 억압에 대해 선보인다. 특히 소설의 두 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인 ‘해섬마을의 불놀이야’가 그랬다.
외나무 다리로만 이어진 외진 마을 해섬에서 있었던 사건의 해결을 의뢰받은 이상과 구보. 1년 전 마을에 피아노를 가지고 들어와 카페를 운영하며 살았던 마담 명자, 그녀는 의문의 죽음을 마지하고 원인은 심장마비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으나, 뒤이어 마을 유지 차씨 종손 차주연의 기행과 죽음, 예전부터 마을에 떠돌던 소문과 저주 관련 이야기 등이 얽히며, 사건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마을에 찜찜한 음영으로 남아 있었다. 구보와 이상은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하며 마담 명자에 얽힌 죽음과 차씨 집안 관련 가정사를 하나하나 알게 되는데.....
여장을 하길 즐겼고, 결혼하길 거부했으며, 여자처럼 행동하던 종손 차주연, 그를 끝내 받아들일 수 없어 굿판에 영혼 결혼식까지 추진한 할아버지, 그 사이에서 어쩌지 못한 아버지 차지수, 차주연과 차지수 부자의 성향과 시간을 공유하고 추억하게 만든 신녀성 마담 명자, 그리고 아들을 떠나보내고 남편과의 관계에도 갈등이 생기자 극단적인 마음을 품은 부인까지. 전통과 인습과 미신과 신식 사고와 개혁이 충돌해 낳은 사건이 해섬마을을 무대로 이상과 구보의 손에 드러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사의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지만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고가 낳은 슬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요즘도 성소수자 관련해서 어른들의 인식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편인 것 같다. 뭐라더라, 자손 생산이 안 되니 인간 생태의 멸종을 가져올 거라는 둥, 종교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는 둥,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니 초기 발견해 수술이든 약물이든 치료해야 한다는 둥, 이런저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때 대화하다가 내 의견도 물어왔었는데, 나는 뭐 중립이었다. 나한테 피해 안 주는데 알아서 하라지 하는 입장이랄까.
예전 대학 시절 장애인지원센터에서 했던 국제시대 융화력 척도 설문지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쪽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나 어떻게 받아들일 건지 묻는 문항이 다수였다. 가령 친구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됐을 때 계속 사귈 것인가, 멀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왔었다.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꺼려하는 이유는 뭘까. 지지하지 않더라도, 굳이 미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왜 얼굴을 붉히는지 원.
한편 3권의 첫 번째 이야기 ‘통영 해저터널에서 살아지다’와 ‘기적 소리와 함께 깨어난 야생화’는 서로 다른 그 시대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화가 오빠 뒷바라지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오빠에게 얽매인 여성. 부친의 학대 탓에 간혹 비관적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여성. 그 두 이야기의 여성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른 길을 걷고 있어 읽으면서 다양한 군상을 접할 수 있었다.
참, 얼마 전 국정 5월호에서 ‘짧은 글 긴 여운’ 지면에 실린 소파 방정환 선생님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다. 일제강점기 버전 아동학대 및 자녀 진로 문제랄까. 예나 지금이나 교육열이란 참 무서운 것 같다.
“문어 같은 두족류는 수컷이 채 자라지 않은 미성숙한 암컷과 교미해요. 참으로 음흉한 요괴들이죠.”
4권 《경성 탐정 이상 - 마리 앤티크 사교구락부》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내포된 이야기로 서사가 전개된다. 1~3권에서는 역사의 인물과 실제 사건이 모티브가 된 거라면, 4권은 작가 후기에서도 밝혔듯 작가 자신의 구상이 최대한 많이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과거의 사회에 오늘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부분은 여전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잔인한 연쇄 살인사건, 어릴 적 학대한 아비에게서 벗어나려는 딸, 앤티크 사교구락부 부인들의 암투 등을 소재로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4권에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는 ‘고래의 꿈’에서 나온 수족관 아가씨 배진주의 사연이다. 부친의 학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던 이야기. 끝이 아프게 마무리되어 더욱 씁쓸했다.
물론 4권의 부제이기도 한 ‘마리 앤티크 사교구락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매일같이 늘어나는 수입 상점으로 화려한 종로에서 고가의 유럽 도자기를 판매하는 마리 앤티크의 사장 하영이 이상과 구보 콤비를 찾아오며 사건이 전개된다. 하영이 단골을 위해 여는 티파티는 명문가 박씨 부인과 벼락부자 성북 부인으로 패가 나뉘었는데, 서로 깎아내리며 분쟁이 커진다. 하영은 화해를 주선하는 티파티를 열지만, 그만 한 부인이 급사하고 투서로 인해 그 사건이 사고가 아님을 인지하게 되어 탐정에게 의뢰한 거였다. 과연 장미 향수와 달콤한 디저트, 우아한 찻잔 속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바닥에 하얀 자갈이 깔려 있어요...... 차가운 자갈을 맨 발로 밟고 작은 의자에 앉아서 나를 봐요. 아무도 없어요. 거울만이 내 얼굴, 옆모습, 앞모습, 가슴과 팔, 다리, 발가락까지 비춰요. 그걸 모두 계속 봐야 해요. 지옥이죠......”
마지막 5권 《경성 탐정 이상 - 거울방 환시기》는 인천 서해의 가상 섬 교동도에 있는 독일 학교 슈하트에서 실종된 여학생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로부터 시작한다. 앞서 밝혔듯 5권은 한 이야기로 내용이 진행되지만, 그 한 이야기에 얽힌 게 제법 많다.
사실 작품의 서두부터 좀 범상치가 않았다. 어둠으로 가득한 바다, 아마 탈출하는 듯해 보이는 두 명의 소년, 그리고 총성과 함께 동생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 철썩 하는 파도까지. 나중에 이 장면이 구보와 이상의 탐정 수사에 더해지면서 제법 스케일 큰 음모가 드러난다.
한편 슈하트 학교는 인도 요가의 수행 방식을 차용해 자연 친화적인 모토로 여학생들을 교육한다. 모든 세속적인 면을 경계하고 정결한 품행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한마디로 근대 교육을 받은 양갓집 규수를 만드는 커리큘럼이랄까.
그런데 소설이 전개될수록 너무 과하다 싶게 정결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무슨 학교에 그렇게 괴담이 많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괴담이란 건 죄다 일종의 반성실로 쓰이는 거울방에 얽힌 내용이었다. 학교가 지어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둥, 그 거울방에 부정한 여자가 갇혔는데 이틀째 되던 날 온몸이 비틀려 죽어 있었다는 둥, 매해 한 명씩 거울방에서 여자애가 죽는데 사실은 방상시가 있는 지하세계로 보내지는 거라는 둥, 방상시 귀신이 사람을 절단하고 녹여서 비누나 램프 기름으로 만든다는 둥.....
이상과 구보는 거울방에 갇혔던 경험이 있고, 실종된 여학생 한영미와 친했던 구소진 학생에게 정보를 얻고, 한밤중 달빛만 비추는 해변에서 열린 슈하트 학교의 비밀 집회를 염탐하며, 사람의 흔적이 있고 갱도 같은 수상한 동굴을 발견해 탐사하면서 학교를 감싸고 있는 수수께끼와 차례로 마주한다. 거울방, 사방에서 내가 보이는 곳, 그 무엇이 진짜이고 환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방을 소재로 한 만큼 사건은 실체가 모호하게 진행된다. 왜 부제에 ‘환시기’라는 표제가 붙었는지 납득될 정도로.
그 와중 이상이 실종되고, 그가 거울방에서 칼에 찔린 한영미와 함께 발견되어 여학생의 살인범이 되고, 구보는 교장과 이사장 등 학교 지도층을 의심하고, 인천 교동도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신비로운 여인 주안나와 함께 진실을 캐기 위해, 그리고 이상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지게 된 진실, 학교 거울방과 이어진 갱도, 그 안의 소년들, 해저 터널 공사, 일그러진 교육 현장에 무기력해진 소녀들, 끝으로 7년 전 마주했던 숙적의 부활과 경성 어딘가를 향한 폭탄 테러까지.
과연 이상과 구보는 이 모든 사건의 흑막을 저지하고 경성의 명운을 건 사건을 막을 수 있을까?
오늘을 비추는 과거의 거울, 《경성 탐정 이상》 시리즈
《경성 탐정 이상》 시리즈는 배경이 일제시대지만 묘하게 오늘날의 사회를 비추는 내용이 많았다. 아동학대는 오늘도 일어나지만 과거에도 있었다. 성소수자 관련 갈등은 현대에도 있지만 개화기 시대에도 있었다. 살인과 치정은 더 논할 것도 없다.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을 비추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혹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시대는 다 똑같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시대만 다를 뿐 사회가 놀랍도록 유사했다. 단지, 그때가 좀 더 어느 면에서는 극단적이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애처롭게 보였다.
시리즈 1~2권은 역사의 인물을 심심치 않게 등장시켜 소설의 사실성과 흥미를 더했다. 마치 그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만은 이상(김해경)은 요절한 비운의 천재 시인이 아니었고, 구보(박태원)는 가난에 허덕였던 소설가가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라 정말로 그 시대에 있었을 법한 다면적인 인물이었다.
《경성 탐정 이상》은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이라 한 권만 읽어도 되고, 꼭 1권부터 펼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왕이면 1~5권을 쭉 독서하길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작가 김재희가 인물들을 활용하는 솜씨가 빼어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2권에서 가도 치과 진료로 등장한 제임스 모턴 박사는 3권에 재출연해 구보와 이상에게 백색교와 얽힌 사건의 힌트를 제공하고 조력자로도 나온다. 또 4권 ‘마리 앤티크 사교구락부’에서 등장한 앤티크 도자기 상점을 운영하는 마인석 사장은 5권에도 나와 그의 비범한 출신을 과시하며 활약한다. 개인적으로 마인석 사장의 과거가 살짝 엿보이는 액션 장면이 참 유쾌하면서도 통쾌했다.
시리즈 5권을 다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독립적인 이야기 가운데 은근히 연속성이 있어 작품의 이해를 높이려면 다 읽는 게 좋다. 예를 들자면 4권 ‘카프 작가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가 5권에서 풀리는 걸 꼽을 수 있겠다.
그렇다고 《경성 탐정 이상》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배경이 일제강점기라 사건이 해결 및 풀리는 것과는 별개로 깔끔한 마무리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뭔가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떤 것이 나아졌다거나 해소됐다거나 하는 분위기가 없다. 가끔은 처벌 같은 거 없이 조용히 묻히는 경우, 또 이상과 구보가 살아남았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게 4권의 ‘조선미인보감 살인사건’이었다. 법정 공방 장면과 용기를 내 증인으로 출석한 여성 피해자가 기억에 남는다.
조금, 2퍼센트 정도 아쉽다는 여백이 남지만 추리물 하면 영국의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던 우리에게 국내산 탐정 콤비 이상과 구보를 제시했다는 부분에서 이 작품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과거의 사회상에 오늘을 비추고, 또 현재의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점도 꽤나 흥미로웠다.
종종 이상이 우울함에 빠지거나, 애용하던 코끼리 머리 지팡이를 구보에게 가지라며 권하는 장면 등이 내 심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대목도 써야겠다. 본래 역사를 알고 있는 바, 작가님이 기어이 이상을 죽이시려는가 하고 두근두근했었다. 특히 5권에서 그랬다.
1권에서 장례식까지 치른 몸인데, 작품 시잒부터 이상은 어딘가 맥이 없어 보이지, 구보는 이상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고 있지..... 아, 거 왜 있지 않은가.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죽을 거라는 암시. 친구가 주인공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거나, 주인공이 아끼는 물건을 친구에게 건넨다든가 하는 거.
다행히도 이상과 구보의 이야기, 《경성 탐정 이상》은 작품의 소재가 된 사진을 찍는 장면으로 끝난다. 어우씨, 작가님, 놀랐잖아요!
여하튼 새로운 느낌의 추리 시대물을 읽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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