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국립박물관은 우리 손으로 첫 발굴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대상은 경주 시내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인 노서동 140호분이었습니다. 당시 발굴조사 대상지의 선정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신라 최대 고분이었던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일부 의견이 있었으나, 첫 발굴은 파괴가 많이 되어 머지않아 사라질 위기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140호분을 선정하였습니다. 140호분은 경주 시내 고분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노서동 고분군에 위치합니다. 1930년대 경주 시내 고분 중 봉분이 남아 있던 고분을 대상으로 일련번호가 부여되었는데, 그 때에 지표에서 확인된 고분이 모두 155기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마총이 마지막 번호인 155호이고, 황남대총이 98호입니다.
경주 돌무지덧널무덤 전경.
1946년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를 했던 한국 고고학계의 기념비적인 곳입니다.
140호분은 고분의 번호가 부여될 때 이미 봉분이 결실되어 지표로부터 약 2m 내외로 남아있었고, 그 위로 2채의 민가가 들어선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하나의 고분으로 인지된 것 같습니다. 1946년의 발굴 결과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잇대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남쪽의 고분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청동그릇이 출토되어 ‘호우총(壺衧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북쪽의 고분에서 은방울이 출토되어 ‘은령총(銀鈴塚)’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호우총 봉분의 지름은 16m, 높이는 4m 내외로 추정됩니다. 다행히 덧널[木槨]을 포함한 매장주체부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덧널은 칸막이로 시신을 두었던 칸과 껴묻거리[副葬品]를 넣은 칸을 나누었습니다. 장신구는 대부분 시신에게 채워졌던 것으로 보이고, 고리자루칼과 청동호우 등이 널[木棺]의 내부에서, 기타 금속용기와 토기류는 껴묻거리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속용기류는 피장자의 머리쪽에 따로 마련된 껴묻거리칸에서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청동호우는 널[木棺] 내부 시신의 머리 오른쪽 편에 뚜껑이 덮인 채 바르게 놓여져 있어 이채롭습니다.
호우총 유물 출토
호우는 반구형의 몸체에 납작한 모양을 한 뚜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몸체는 높이 10.3㎝, 입지름 22.9㎝, 바닥지름 15㎝, 몸체 최대 지름 23.8㎝이고, 뚜껑은 높이 9.1㎝, 입지름 22.8㎝, 꼭지 높이 3㎝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합(盒) 모양의 청동용기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합니다.
굽이 있는 바닥에는 글자가 돋을새김 되어있는데, 그릇을 만드는 거푸집 자체에 포함되어 함께 주조된 것입니다. 4행 4자씩 이루어진 16자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와 상부 중앙에 ‘井’가 있습니다. 서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데, 비문과 호우에서 모두 乙, 年, 國, 罡, 開 등에 간략한 글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글자의 내용은 의미를 기준으로 나누면, 乙卯年 / 國罡上 廣開土地 好太王 / 壺杅 / 十 ‘시기 / 왕명 / 그릇이름 / 숫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國罡上 廣開土地 好太王(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의 시호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광개토대왕의 시호를 전하는 금석문은 더 있습니다. 집안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國罡上 廣開土境 平安 好太王’으로 되어 있고, 집안의 모두루총의 묵서에는 ‘國罡上 大開土地 好太聖王’으로 되어 있습니다.
‘국강상(國罡上)’은 왕의 무덤이 위치한 지명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는 당시까지 고구려 왕호를 짓는 일반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광개토지(廣開土地)’는 영토를 널리 개척한 업적을 강조한 명칭이며, ‘호태왕(好太王)’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왕에 대한 최대한의 존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國罡上 廣開土地 好太王’이란 호칭은 광개토대왕 사후에 올린 시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우 바닥의 명문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 만든 호우’라고 풀이할 수 없으며,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대왕이 서거하신 412년 이후가 되어야 합니다. 청동호우 자체의 양식편년을 통하여 을묘년을 475년으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415년(고구려 장수왕 3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명 청동그릇, 고구려 415년, 높이 19.4 cm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와 바닥에 쓰여진 명문. 명문을 풀이하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입니다.
한편 이 호우를 통해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그릇을 ‘호우(壺杅)’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끝에 나오는 ‘十’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①별 의미가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 ②집기(什器)의 什자의 약자 ③불교사상의 원만, 끝없음을 나타냄 ④종지부 ⑤길상구 ⑥열 개 혹 열 번째를 의미, 이는 곧 같은 그릇을 적어도 10개를 만들었음을 의미 ⑦호우 제작에 사용된 청동의 중량 등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각각의 논의는 어떠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며, 일종의 추정에 속합니다.
상부 중앙의 井에 관해서도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①우물 정(井)자 ②무엇인가 주술적 기호 ③제작자와 관련된 표식 ④벽사(辟邪)나 제마(除魔)의 기호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물 정자로 보기에는 다른 글자들과 달리 중심축이 오른쪽으로 45도 가량 기울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백제나 신라, 가야 토기들에서 종종 이와 같은 표식이 보이고 있어 주목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만든 그릇이 어떻게 신라 무덤에 묻히게 된 걸까요? 호우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415년은 신라 18대 실성왕 14년으로, 왕 자신도 내물왕 37년(392)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내물왕 46년(401)에 신라로 돌아와 다음해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11년(412)에는 내물왕의 아들 복호가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눌지왕 2년(418)에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로 볼 때 고구려의 영주인 광개토대왕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이 신라에 보내질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호우총에서 출토된 여타 유물들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이 사라지기 직전쯤인 6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호우총은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이 청동호우는 5세기 초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이후 제작시기와 가까운 시점에 경주로 반입되었고, 100여년의 전세(傳世) 기간을 거쳐 무덤에 묻히게 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광개토대왕을 장사지낸 일년 뒤인 415년에 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그 기념으로 호우를 만들었고, 그 때 제사에 참가하였던 신라인을 통해 경주에 반입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호우총의 발굴은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조사로서 우리나라 고고학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국립박물관과 우리나라 고고학의 오늘이 있게 한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의 다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비해 빈약하지만, 청동호우, 청동이형동기, 목심칠면(화살통), 물고기와 용이 상감된 고리자루칼 등은 신라의 다른 고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조사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주목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