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3:12~21)
죽은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처신이 가히 가관이다.
사울가의 기세가 저무는 것을 느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이제는 다윗에게 아첨하는 모양새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가장 큰 가치는 자신의 힘을 어떻게든 유지해서
이 세상, 이생에서 권세와 즐거움을 누리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가.치.관.
가치관은 사람의 마음 중심과 동기를 드러내 준다.
아브넬이 사울의 군대장관이었을 때
사울과 국가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듯이 행동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신이었을 뿐이다.
사울과 대부분의 군대의 핵심 인물이 죽었을 때 그는 살았다.
생존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으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가장 위험한 일을 감당했어야 하는 자리었다.
왕과 군대의 핵심 인물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혼자 생존한 것은, 아마도 국가나 왕보다 자신의 생명을 연명시키고자
노력했을 개연성이 컸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는 영악한 사람이다.
사울이 죽자, 자신의 권세를 이어가려고
사울의 유일한 생존 아들을 앞에 세웠다.
그러나 그 아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아들은 사울처럼 강한 장악력을 전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브넬으로부터 표면적 존중조차 받지 못한 것 같다.
아브넬 같은 사람은 처신의 일부로 사람에게 공손할 뿐이지
그가 섬기는 사람이 힘이 없다 느껴지면 곧바로 무시한다.
가장 의아한 것은
그의 말 속에 하나님의 권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
이 땅에서 실현될 것을 알고 대처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에게 신앙, 믿음이 있다는 말인가?
두 가지로 보인다.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하나님 찾을 만한 기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 1순위에 두지 않을 수 있다는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참 무서운 일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은 지식이나 인정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
내 인생과 생명을 거는 차원으로 깊숙이 박혀야 하는 어떤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가 말했던 절망으로 인해 죽음 가까이에 가서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그 순간에 선택하고 만나는
내 모든 것을 거는 것. 그런 어떤 것이 믿음인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아브넬이
대세인 듯 보이는 다윗을 위해 참 열심히 일한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야무지게 다윗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왕이 되는 일을 성취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무심하거나 불손한 동기를 가진 이를
그 분의 사역을 위해 잠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일을 한다고 하고
선한 일, 악한 일로 구분해서 그 한계 안에서 해석하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계시다. 당연하다.
나도 참 병적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예시를 볼 때마다
지금 우리의 국가 리더십을 떠올린다.
키 크고, 나이 먹었으며 세속적 커리어는 그럴듯하게 갖췄지만
실제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어떤 선량한 것을 선택할 능력도, 지혜도, 지식도, 의지도 없다.
그에게 부여된 엄청난 인적, 물적, 역사적 책임과 권한,
그가 한 발, 한 마디의 어처구니 없는 언행과 조처들을 할 때마다
가장 처참하게 고통 받을 약자들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그러나 이 일도 결국은 아무런 동요 없이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사역의 한 가지 일,
쓴 웃음 짓게 하는 심각한 오시범으로 기능할 것이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