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잠들어 겨울 청계산은 고요했다
1. 일자: 2021. 12. 18 (토)
2. 장소: 청계산(582m)
3. 행로와 시간
[서울대공원역(07:41) ~ 청계막담(08:00) ~ 옥내봉 갈림(08:18) ~ 갱매폭포(08:44/09:00) ~ 옥녀봉 능선(09:20) ~ 매바위(09:55) ~ 매봉(10:00) ~ 혈읍재(10:14) ~ 전망대(10:29) ~ 헬기장(10:43) ~ (절고개) ~ 전망바위(10:49) ~ 청계사(11:10) ~ 청계사 주차장(11:34) / 11.33km]
해 뜰 무렵, 대공원역 앞 광장에 선다. 아무도 없다. 관악산 뒤로 붉은 기운이 느껴진다. 청계호수에서 바라본 청계산은 검은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서울랜드 후문으로 가는 길에 눈 여겨 보아둔 곳으로 향한다. 표식은 없지만 선명한 등로가 산으로 이어진다.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은 잠시 응달 비탈에 서니 볼이 시리다. 올 겨울 첫 추위다. 다행히 바람이 없이 견딜만하다. 잎을 떨군 앙상한 나무가 비탈에 서 있다. 소나무가 많이 보이는 걸 보니 이곳도 청계산 자락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녀봉 갈림에 펜스가 쳐 있으나 옆이 뚫려 있어 들어 가니, 잘 가꾸어진 오솔길이 이어진다. 고요한 겨울 산의 정취가 싫지 않다. 이어폰을 뽑는다. 더 호젓하게 길을 걷고 싶다. 바람이 잠들어 겨울 산은 고요했다
옥년봉을 올려다 보고 걷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물길을 만난다. 반쯤 언 폭포가 등장한다. 갱매폭포는 좀 더 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호사에 기뻐한다. 잠시 후 또 하나의 폭포가 등장하지만 밑에서 본 건 만 못하다. 폭포를 지나자 호젓하다 못해 으스스한 길을 따라 오른다. 또 하나의 갈림이 등장한다. 좌측으로 가면 매봉으로 직행할 것 같은데, 등로가 희미해 자신이 없는데다 바로 위 옥녀봉 능선에서 뿜어 나오는 햇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대공원 출발 끊어질 듯 희미한 숲길을 100분 걸어 청계산 주능선에 올라선다. 햇살이 내려앉는 편한 등로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긴 계단은 1000개를 넘어선다. 끝이 몇 개인지 하고 묻지만 기억은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길 나선지 처음으로 사람들을 마주친다. 싫지 않았다.
매바위에 올라선다. 서울공항 뒤로 산들이 흐른다. 옅은 코발트빛 하늘 밑으로 서늘한 겨울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오늘도 바라보는 먼 풍경에 반한다. 한참을 서성인다. 청계산 정상에서 이리 시원하게 먼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잠시 후 매봉에 선다. 계단은 1500개가 넘는다. 기억해 두어야지 했는데 돌아서니 또 가물거린다.
정상에서는 북한산과 관악산이 조망된다. 시원하다. 이 큰 도시에 도처에 산이 있음은 축복이다.
이수봉 방향으로 하산하다. 오르며 망설이던 갈림에 닿는 길의 대강을 살펴둔다. 다음을 위해서다. 협읍재까지 편하게 걸었다. 이런 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지워진다. 꿈 꾸듯 걷는다. 오래 걸어본 자만이 아는 힐링의 시간이다.
협읍재다. 정여창이 스승 김종직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은, 늘 음침하다. 청계산 정상을 우회하여 석기봉으로 향하는 길, 잠시 군사도로와 만난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볕이 참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근사하다. 돌아 본 지나온 길 위로 관목 군락의 색도 참 곱다. 춥지만 바람 없는 겨울 날의 여유로운 홀로 산행은 평범해 보이던 풍경에도 눈길을 더 오래 머물게 한다. 동지에 봄이 느껴지는 건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 풍요로운 연노랑 빛이 주는 가벼운 흥분이러니 한다.
절고개에는 어묵과 막걸리를 파는 쉼터가 있다.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다. 누구에게는 반가운 벗일 게다. 오랜 만에 걷는 청계사로 향하는 길, 험로에 계단이 여럿 놓였다. 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에는 지난 달 지났던 서울대공원 둘레길 위 작은 저수지가 있어 더욱 반가웠다. 이곳에서 보니 관악산의 능선은 순하고 육봉은 우람하다.
청계사로 내려선다. 거대한 와불이 눈에 들어온다. 금도금을 한 모습이 흉물스러웠던 곳인데 오늘은 찬찬히 바라보았다. 역시 감흥이 없다. 특히, 몽롱한 표정의 얼굴은 불심과는 영 거리가 멀다. 절답다는 게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불경소리 들으며 법당을 지나 계단을 내려선다. 산사에 퍼지는 맑은 소리가 바로 부처의 마음 아닌가 싶다.
도로에 선다. 길 옆으로 데크가 조성돼 있다. 별 기대 없이 내려서는데 웬 걸, 이곳에 이리 큰 나무들이 있었고, 운치 있는 숲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청계사의 보물은 이곳에 있었다. 그 중 최고는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겨울나무의 비상이었다. 파란 겨울 하늘과 연한 갈색 나뭇가지의 조화는 오늘 최고의 풍광이다. 덕분에 집에 가는 길이 밝았다.
< 에필로그 >
오후에 큰 눈 소식이 있다 했는데, 오전 산에서 본 하늘은 전혀 그럴 기세가 아니어서 기대를 접었는데 잠깐 졸다 일어나 보니 창 밖은 온통 눈 세상이다. 노곤한 행복감이 찾아온다. 찾아보면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많다. 내 마음의 여유로워야 보이는 것들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