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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0장 41-42 꼭 필요한 한 가지
약 10년 전 만하여도 한국교회 강단에서 개역이외의 성경을 보는 것은 금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시간에 어떤 교회는 개역을 보고 있고 어떤 교회는 개역개정을 보고 있고 어떤 교회는 새 번역을 보고 있고 어떤 교회는 쉬운성경을 보기도 합니다. 또 개역개정을 보는 교회의 목사님이 다른 성경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개역만이 가장 오류없는 성경이라고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개역자체가 이렇게 개정이 나왔다는 것은 그자체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번역성경이라는 것은 자체적으로 오류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오류가 없는 성경이 원어성경인데 그 원어성경을 다른 언어로 100퍼센트 번역해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번역 성경이 어느 정도로 원어성경의 내용에 가깝게 번역해낼 수 있는 가하는 것이 과제입니다만 아무리 번역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100퍼센트는 없습니다. 그것이 번역 성경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합신의 세 가지 표어가 바른 교회 바른 생활 바른 신학이지만 이 세 가지가 바른 성경에서 출발해야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바른 교회 바른 생활 바른 신학의 기초가 바른 성경입니다. 바른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은 바른 교회와 바른 생활과 바른 신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장로교회 모두가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1장은 성경에 대한 것입니다. 1장 2항은 성경책의 제목들을 열거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책들은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또 이 세상의 생활을 할 것인가를 알려면 성경을 통하여 답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어성경과 관련하여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8항에 보면,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상한 돌보심과 섭리로 모든 시대에 걸쳐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으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신앙적 논쟁에 있어서 거기에 최종적으로 호소해야한다. 라고 합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 신앙고백을 요약하면 우리 성도들의 생활의 법칙은 성경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성경은 번역성경이므로 그 번역 성경 사이에 내용의 논란이 있으면 그 옳고 틀림의 결정은 원어성경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모든 한국성도가 원어성경을 읽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으면 제가 번역을 하지 않고 히브리어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매일 10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히브리어 성경으로 가정예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을 한자 한자 번역하였고 또 번역한 전체를 가지고 일관성작업을 하였고 지금까지 서너번 교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하여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히브리어를 가르치지 않고 번역을 하는 것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히브리어성경을 직접 번역하여 직역성경을 보게 하는 것이 한국성도들이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더욱 간명하고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원어성경과 지금 번역 성경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제가 목회를 그만두면서 까지 번역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존 번역성경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점을 처음부터 파악한 것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원문과 조금 달라서 번역을 하였는데 이제 신구약을 모두다 번역하고 나니 이런 문제점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정확성(accuracy)입니다.
정확성은 지금 기존 번역성경이 원어성경을 보고 직접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어의 문장을 충분하게 번역하지 않았고 또 번역할 때 빠진 단어가 많이 있고 또 원어의 뜻을 몰라서 그 원어의 정확한 뜻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데는 성경번역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개역성경이 번역될 때는 그 이 전의 번역과정에서 너무 많은 번역의 여러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원어성경- 칠십인역- 불가타 라틴어성경- 독일어성경- 영어 성경- 중국어 성경 - 개역성경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개역성경은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 표현에 있어서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물론 히브리어 한 단어 한 단어를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단어와 비교도 해보고 하면서 번역하였습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다시 한 단어 한 단어를 씹어보고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아람어-한글 또 헬라어-한글 단어장과 또 히브리어-아람어-헬라어 콘코던스가 나올 것입니다. 먼저 직역성경 통합본이 나오고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단어장과 콘코던스가 나올 것입니다.
둘째는 일관성(consistency)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어근별로 히브리어가 8900개 아람어가 700개 헬라어가 5400개 정도 나옵니다. 이중에는 같은 단어가 여러번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헤세드 같은 단어는 구약전체에 250번 나오는데 개역 같은 곳에서는 17가지의 단어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그 문맥에서 같은 뜻을 가질 때는 그 단어에 가장 가까운 한글대응어로 일관성있게 번역되어야 할텐데 지금 기존 번역 성경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자가 여러 명이라서 그렇고 또 의역의 우세에 기인합니다. 나중에 이런 문제는 콘코던스가 나오면 이 문제를 잘 설명할 것입니다.
셋째는 통일성(unity)입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성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신구약의 문제를 말하는데 구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고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언어의 차이 때문에 구약과 신약이 통일성이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데로 신약이 헬라어로 되어 있지만 신약의 저자들은 모두다 히브리어를 쓰는 히브리인들입니다. 성경전체 중에서 유대인이 아닌 딱 한사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가 헬라인이지만,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어떤 다른 책보다도 구약을 많이 인용한 유대적인 책입니다. 따라서 신약을 번역할 때에 신약의 헬라어를 그대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그 헬라어 이면에 있는 히브리어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발견한 기존 번역성경의 문제점 세 가지는 정확성, 일관성, 통일성입니다. 이중에서 특별히 오늘은 제가 선택한 본문이 신약이므로 통일성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성경은 일단 글로 쓰여져 있으니까 문학 작품이기도 하지만 주로 역사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려면 글을 읽을줄 알아야 하지만 역사적인 지식도 필요합니다. 특별히 역사적인 배경이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거의 일어난 일이므로 이스라엘과 관련한 지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과 관련한 지식이라함은 언어 역사 문화 등입니다. 신약도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거의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으므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특별히 신구약에 있어서 통일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한 가지는 율법이란 단어인데요. 이 단어가 헬라어로는 노모스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율법보다는 토라란 단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라는 모세오경을 말하고 있지만 율법이란 단어는 성경책인 모쉐오경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구약 모두를 다 아울러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6828번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직역성경에서는 여호와란 단어가 200번 정도 나옵니다. 헬라어에서 히브리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신약성경이 있는데 그 성경에서는 여호와란 단어가 200번 정도 나옵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번역해보면 여호와란 단어로 번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유명사의 음역입니다. 이 부분을 오늘 여러분에게 중점적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오늘 나누어주신 본문을 한번 읽어 보십시다.
먼저 개역을 한번 읽어보고
그 다음에 직역을 한번 읽어보십시다.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요.
이름이 조금 다르고 마지막 42절의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먼저 42절의 내용을 보십시다.
42절의 내용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 하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직역성경은 “필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다. 참으로 미르얌은 더 좋은 몫을 택했으니 아무도 그녀에게서 그 몫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개역의 내용은 조금 모호합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라는 뜻은 몇 가지를 하는 것도 좋고 한 가지를 하는 것도 좋다. 마치 반찬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이라는 에 해당하는 원문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어번역본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이 구절에 대한 영어 번역본 두 가지를 예를 들었습니다. 뉴킹제임스버전과 뉴인터내셔널버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똑같이 one thing is needed라고 번역하여서 “한 가지가 필요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 필요한 한 가지는 바로 마리아가 택한 예슈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부엌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엌일 안하고 목사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하는 정신으로 부엌일을 하는데 예슈아께서는 냉정하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인데 내 말을 듣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모님들에게 특히 우리 충청노회 사모님들에게 부엌일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수고가 많으시지만 그래도 목사님은 설교를 잘 준비해서 강대상에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지만 사모님들은 주로 부엌 일을 맡아서 부엌일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목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고 어쩌면 목사님보다도 훨씬 희생적인 일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부엌일이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라고 예슈아께서 말씀하십니다. 음식을 만들어서 성도를 섬기는 일이 중요하지만 사모님들이 성경말씀을 읽지 않는다면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는 것이라고 예슈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슈아께서 지금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그것은 남녀구분 없이 누구나 예슈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이 말씀을 놓치면 안되겠습니다. 예슈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다 성경을 읽어야 하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역과 다른 것은 이름입니다. 여러분, 이름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 이름이 잘못 불려지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을 요구하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다 일본 이름을 갖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손기정이란 이름을 아시지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였습니다. 지금도 아이오씨에 가면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름이 손기정이 아니라 키테이 손(Kitei Son)이라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그 당시에 일본인의 마라톤 대표로 나가서 우승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키테이 손이란 이름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이분이 손기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분을 보고 손기정이라고 하지 키테이 손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은 어떻겠습니까? 그 나라 사람들은 키테이 손이 무엇인지 또 손기정이 무엇인지를 아예 모르니까 아마 아이오씨에 기록된 이름으로 알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의 이름이 어떤 것이고 일본 사람의 이름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 나라의 역사를 알고 그 나라의 문화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성경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잘 모르면 마치 미국사람이나 영국사람이 키테이 손이나 손기정이 아무런 구별이 없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저는 예슈아 마쉬아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은 신구약의통일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헬라어 이름이지요. 본래 히브리어나 아람어로는 예슈아입니다. 예수는 아닙니다. 왜 예수로 번역되었는가 하면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되어있고 헬라어의 알파벳은 예슈아란 이름을 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슈아란 이름은 쉰이란 히브리어자음이 들어가는데 쉰이란 히브리어 자음을 헬라어로는 표기할 자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이름에는 모두다 뜻이 있습니다. 예슈아란 이름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에는 구원이란 뜻이 없습니다. 또 예수란 이름은 구약에 한 번도 나오지 않으므로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예수란 이름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란 이름이 신약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는 그 전부터 예슈아란 이름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구약 안에서도 예슈아란 이름이 30번 나옵니다. 개역에서는 예수아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란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쉬아흐란 단어도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서 구약에는 마쉬아흐란 단어가 30번 정도 나옵니다. 물론 개역성경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가 구약에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어는 사실상 한 단어로서 마쉬아흐란 히브리어입니다. 마쉬아흐란 단어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서 왕이나 제사장을 뜻합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왕을 뜻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란 사실상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는 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슈아께서 마쉬아흐란 명칭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러 오신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예슈아의 잘못된 발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단어이구요. 그리스도는 본래 크리스토인데 마쉬아흐란 단어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개역에서는 그리스도로 번역되었습니다. 키읔이 기윽으로 티긑이 디귿으로 잘못 음역되었지요. 이것이 우리 성경 번역의 문제이지요. 그리스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 신구약에서 키읔 티긑 피읖 지읒 쌍시읏 쉰 발음이 몽땅 없어요. 키읔은 기윽으로 티긑은 디귿으로 피읖은 비읍으로 지읒은 시옷으로 쌍시옷도 시옷으로 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들은 뒤에 한 페이지로 작성하여 붙여 놓았습니다. 잠깐 한번 읽어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개역성경의 마르다를 직역성경은 마르타라고 하였고 개역성경의 마리아를 직역성경은 미르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번역하였나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이 자매는 모두다 베다니에 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베다니 라는 단어도 사실은 벹아니야라는 단어입니다. 벹은 집이란 뜻이고 아니야란 단어는 가난한 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벹아니야란 단어의 뜻은 가난한 집이란 뜻입니다. 아마 예루샬라임 옆에 있었던 이 동네가 가난한 동네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이 동네가 가난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이 벹아니야란 동네에서 살고 있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미르얌은 한 유대인 형제였습니다. 부모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조실 부모하였는지 어쨌든 부모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슈아께서 이 형제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낸 사실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르얌은 라자로의 자매였습니다. 성경에는 이 미르얌 외에도 여러 명이 나옵니다. 6명 정도가 나오는데요. 표를 한번 보십시다. 예슈아의 어머니 미르얌, 막달라 미르얌, 야아콥의 어머니 미르얌, 클로파의 어머니 미르얌, 마르타의 자매 미르얌, 마르코의 어머니 미르얌, 로마서의 미르얌 등 여섯 명입니다. 그리고 이 여섯 명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름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리암입니다. 이 두 가지 이름이 같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원문대로 번역하려면 이 두 가지 음역을 그대로 적용하여 두 가지 이름으로 번역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성경은 메리 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성경은 마리아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헬라어사전을 보아도 마리아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암이란 이 음역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구약원어성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지만 이 히브리어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합니다. 이 칠십인역에 보면 마리암이 나옵니다. 마리암은 결국 미르얌의 헬라어번역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마리암이라고 기록된 것은 구약에 이미 나온 이름인 미르얌의 음역으로서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무엇이냐? 마리암의 잘못된 음역이거나 아니며 헬라어식 이름에 마리아란 이름이 있어서 그렇게 기록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유대인의 이름은 미르얌이지 마리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이름은 본래 유대인들의 이름 그대로 불러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이름이 키테이 손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이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슈아의 어머니 이름은 미르얌이며 구약에 나오는 모쉐의 누이 이름과 같은 이름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많은 미르얌이 있습니다만 모쉐의 누이 이름과 예슈아의 어머니 이름과 같은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이름은 야아콥입니다. 유대인의 이름이 창씨개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신약에 와서 갑자기 야아콥이 야고보로 바뀌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름의 통일성이 성경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 미르얌은 예루샬라임 옆에 있는 벹아니야에 살고 있었으며 마르타와 라자로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미르얌은 자기 형제인 라자로를 예슈아께서 살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예슈아에 관하여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예슈아의 말씀을 집중하여 들었습니다. 자기 자매인 마르타의 불평을 들으면서까지 예슈아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씀을 계속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슈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샬라임으로 들어가기 전에 벹아니야에 있는 라자로 집에 다시 갑니다. 그 때도 마르타는 부엌에서 음식준비를 하였고 미르얌은 매우 비싼 향유를 가지고 예슈아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채로 그의 발을 닦아 드리니 그 집에 향유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그때 예슈아를 팔아넘긴 예후다가 말합니다. “왜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지 않는가?” 왜 이 비싼 향유를 그렇게 써버리는가 아깝다 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이 책의 저자인 요하난은 예후다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돈을 마음대로 썼다.” 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슈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녀를 내버려두어라. 그녀는 내 장례준비를 위하여 그것을 간직했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예후다인들은 귀한 시신을 향료로 처리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야아콥도 그랬고 요셒도 그랬습니다. 이와 같이 미르얌은 예슈아께서 이제 돌아가시는 줄을 알고 미리 그런 장례절차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미르얌은 이런 일을 알고 향유로 예슈아의 장례 준비를 하였을까요? 그것은 에슈아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고 앞으로 생겨날 일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슈아께서 이제 하나님의 왕국에 직접 들어가시는 그 예식을 시중들었던 것입니다. 마르타가 한 일도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미르얌이 한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에서는 예슈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전해져서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 미르얌이 한 일을 성경을 통해서 2000년 이상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에게 이런 미르얌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때로는 부엌일이 시급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항상 기억하여 그 일을 먼저 우선시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르얌이 행한 꼭 필요한 일을 우리도 하면서 살기를 예슈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