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교자(背敎者) ‘율리아누스’
背敎者란 “교회를 배신한 者”라는 뜻일 것이다. 성경을 포함한 역사의 모든 자료 에는 ‘율리아누스’를 “율리아누스 아포스타타/Julianus Apostata”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스語에서 유래한 라틴어 “Apostata”는 “신앙을 버린 者”라는 뜻이다. 그래서 “배교자”라는 표현으로 짧게 번역한 것이다. AD313년 “콘스탄틴누스+ 리키니우스” 두 황제의 “밀라노 칙령”은 모든 종교인에게 평등하게 신앙의 자유를 준 것이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우월
하게 대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후세의 기독교 측으로부터 “大帝” 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기독교에 대한 진흥책과 여러 가지 우대정책을 편 것 때문이었다. 이 정책은 반세기 이상 지속된다.
큰 아버지와 4촌 형의 체제 아래 자신의 색깔을 숨겨온 ‘율리아누스’는 背敎者라는 칭호가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그는 이전에 기독교도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앞의 두 황제도 정식 기독교도가 되는 세례를 죽기
직전에 받았고 자신은 세례를 받은 적이 없다. “배교자”는 기독교를 진흥시킨 집안에서 반대로 갈 수 있느냐는 기독교 쪽의 비난과 경멸의 산물인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와 이교(異敎)가 항쟁한 마지막 세기의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다.
‘율리아누스’는 모든 신앙의 존재를 다시 공인하고 로마제국 국민의 종교를 “밀라노칙령" 당시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스/로마의 신, 이집트, 시리아, 유대, 두 기독교 종파를 인정하고 공평하게 대하라는 뜻이었다. 一神敎(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모세의 십계에도 나와 있다.) 다른 종교를 “異敎”로
보는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300년 전에 로마 제국이(Titus 황제) 파괴한 유대교 신전을 재건해주고 기독교도들이 반 세기 전에 파괴한 그리스/로마 신전을 복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50년간 누려온 기독교의 특혜가 폐지되어야 했다.
그러면 1,000년 가까운 국가의 전통을 버리고 기독교 공인을 통해 나라의 정체를 바꾸는 어마어마한 정책을 ‘콘스탄티누스’는 왜 택했을까? 앞서도 著者가 얘기 했지만 다시 정리해 보자.
▶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나기(AD275) 전부터 제국은 황제의 피살이 빈발하고 국경이 뚫리고 경제가 흔들리 는 위기가 계속 되었다.
▶ 이를 막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頭, 4頭 등의 정치체계의 변화를 도모해서 응급조치를 취했다.
▶ 그 정책의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누스 大帝’는 피 튀기는 경쟁을 거쳐 황제가 되었다.
▶ 이 체제는 인민과 원로원에 의해 황제가 권위를 얻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축출(살해)될 수 있다.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 권위를 神과 그 전달자(主敎)를 통해 얻어내는 것이며 그런 종교체제를 도입하면
쉽게 권력의 승계도 이루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속세에서 주교만 내편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고방식이 中世에 종교에 의한 암흑기를 불러온 단초가 된 것은 아닐까?
▶ 성직자의 사유재산과 교회에 대한 세금면제, 주교에게 관구(管區) 사법권 (司法權)부여, 교회건설 및 기증
을 통해 황제 자리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율리아누스’는 前 황제의 누이인 아내가 죽은 뒤 재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30살인데도 여자를 가까이 한 흔적도 없었다. 후계자를 고르는 데 자유로웠을 것이다. 나라의 안정보다 세습을 지켜내기
위해 머리를 굴린 ‘콘스탄티누스’ 大帝의 아들들을 보면 맏아들은 추접스럽게 막내 동생한테 징징거리며 싸우러 가다가 일개 부대장에게 잡혀 시신도 못 찾는 개죽음을 맞았고 그렇게 큰 형을 죽인 막내도 반란을 일으킨 야만족 출신 장군에게 잡혀 들판에 버려지는 처참한 꼴을 당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24년씩 황제 자리를 지켰던 둘째 ‘콘스탄티우스’는 공포정치 끝에 ‘율리아누스’의 叛起에 속이 뒤집혀 병사했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은 “신의 뜻”이나 “신에 의지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기독교에 대한 선전포고
★ 교회신축, 교회자산의 기부는 폐지
★ 비과세 혜택 폐지
상대가 높고 낮고를 떠나 자신들이 누리던 혜택이나 이익이 박탈되면 인간은 그를 비난하거나 저주하게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중 ‘율리아누스’가 죽은 것이 내부의 암살일 수도 있다. 국고로 지은 교회나 시설을 몰수하지는 않았다. 적극적인 조치는 그리스-로마 신전의 재건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大帝’ 와 그 세 아들이 통치한 50년의 세월 동안 행해진 여러 가지 정책으로 망가진 옛 로마 문화를 복구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신앙이 아니라 세제혜택 등 얍삽한 이익을 위해 기독교 진흥책으로 기울어진 기득권층이 생겨난 탓도 있었다. 그들의 Sabotage와 현대의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자행하는 것과 같은 로마 지방행정가들의 번문욕례(繁文縟禮-Red Tape)와 복지부동(伏地不動)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라는 것이 있다. AD43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편찬한 법령이다. ‘콘스탄티누스 大帝’ 부터 자신까지 1세기 동안 발령된 법률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法典은 다시 100년 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 당시는 기독교 외에는 모두 사교(邪敎)로 단정된 시기였다. 그런 시기의 법전이니 ‘율리아누스’의 反기독교적인 법령이나 정책은 아예 실려있지 않다. 하지만 그 외의 일반 법령은 52개나 실려있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와 경쟁하기 위해 그리스-로마 신전에 사제(司祭) 계급을 신설하는 방안을 실시했으나
로마인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금욕생활 등 폐단으로 실패했고 복지사업도 실패했다. 지방자치단체와 개인의 협력을 얻지 못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미 로마 사회도 개인주의 물이 들기 시작했고 옛날과 같은 응집력이나 감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50년~100년 지속되어온 기독교의 관행과 기득권층이 된 사람들의 체계를 무너뜨리기에는 ‘율리아누스’의 단독 돌파가 어려웠다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다.
(*이런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적인 제도나 정강이 아무리 좋고 국가대계를 위해 바람직해도 일반 대중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혹해 거기다 표를 던지고 있다.)
● 안티오키아
AD362년 4월 취임 이듬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때문에 4세기의 지도에 있는 로마제국의
3대 도시는 “로마(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 오키아”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오스만 터키가 점령한 후 “이스탄불”로 바뀌고 지금은 터키의 엄청난 관광도시로 남아있다.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인 ‘셀레우코스(Seleucos)’가 大王이 죽은 후 장군들끼리 지역을
나눠먹으면서 지은 도시였다(현 시리아 지역). 오리엔트의 물류 중심지였기 때문에 로마가 점령한 뒤에도 화려한 大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터키의 작은 변방도시일 뿐이다. 그리스人, 유대人, 셈族이 같이 어울려
살았고 당시 인구도 100만명이 넘는 매우 큰 도시였다. 현재로 보면 1,000만명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이 도시에 망조가 든 것은 100년후 페르시아의 침입과 지진 때문이지만 재력과 주민의 재건의욕이 쇠퇴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그러다가 AD638년 아랍인이 정복하고 나서 양 세력의 경계점이 되자 도시로서의 기능이 죽고
말았다. (※ 이때는 우리의 백제 말기다. )
오리엔트로 간 황제는 두 사건으로 상.하의 민심을 다 잃었다. 이는 이익사회로 변환된 로마/오리엔트의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점도 있다. 밀의 매점을 자행한 원로원과 결탁세력을 겁박하여 문제를 해결했으나 상류층이 반발했고 안티오키아 근처 “다프네” 라는 도시의 “아폴로 神殿”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도와 충돌을 일으켜 중.하층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결과를 놓고 보면;
O 非기독교도(이교도)들이 그 동안의 설움을 털어내려고 기독교도를 공격
O 기독교 측의 기득권층은 황제에게 적개심을 가졌고 유대교를 증오했다.
또한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은 동질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派”는
4세기에 이미 "가톨릭"이라는 명칭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 Jesus Christ가 계시(啓示)한 하느님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및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을 가지며, 이 세 위격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고, 유일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교리이다. 하느님 아버지(聖父)인 유일신(唯一神)은 그의 독생자(獨生者: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성령(보혜사)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 교의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서 교회의 정통
신조로 공인되었으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추인됨으로서 기독교의 정식 교의(敎義)로 확립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非주류(?)에 속하는 “아리우스派”는 기독교의 우위를 깨려는 ‘율리우스’황제의 정치에 덕을 보고자 했다. 이는 정치력을 보유하는 主敎의 자리도 중요했다. 교회재산 행사와 관구(管區) 사법권을 갖고 있으니 대단한 자리다. 어찌되었든 주민들은 황제를 탓하고 황제는 “배은망덕”하다고 시민들을 비난하는 가운데(그의 저서 “미소포곤/ Misopogon”에도 나온다.) 페르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인류역사의 큰 강물인 기독교/카톨릭의 흐름에 맞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첫댓글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교회 헌장」 16항. 가톨릭 아닌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선언한 교회헌장. 반면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거나 이슬람 극단주의자 같은 편협한 신앙인들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율리아누스’는 모든 신앙의 존재를 다시 공인하고 로마제국 국민의 종교를 “밀라노칙령" 당시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스/로마의 신, 이집트, 시리아, 유대, 두 기독교 종파를 인정하고 공평하게 대하라는 뜻이었다. 율리아누스의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었더라면 종교간의 갈등이 없어졌을 텐데. 그는 결코 기독교의 배교자가 아니다.기독교 신앙에 따라 세례받은 적이 없는 그를 배교자라 부르는 건 억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헌장에 저런 말이 있는 줄은 몰랐네. 뭣이든지 초심을 잃거나 무시하면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흘러가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지... 또한 '율리아누스'가 택한 정책방향이 옳아도 이미 맛을 들인 사람들에게 원래대로의 삶을 요구하면 무조건 반항하게 되지... 뒤에 나오는 율리아누스의 죽음을 보면 참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역사에는 항상, 정말 억울한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네,....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나신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을 거라는 가까이 지내는 개산교도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었네. 조상들 중에 착하게 산 분들이 있을지라도 기독교 신앙 없이 살다가 죽었으니 당연히 지옥행이라는 그의 말이 어찌 그리 답답하던지. 그에게 가톨릭 교회헌장을 설명해 주었더니 "그래서 가톨릭이 이단이라는 걸세"라는 반응을 듣고 그렇게 편협한 하느님을 믿느니 신앙없이 사는 게 낫다고 쏘아붙였지만, 정말 언짢았다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는 신앙 얘기를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 체험을 했다네. 종교라는 게 다 착하게 살자는 건데, 사소한 차이를 서로 인정하지 못하고 목숨 걸고 싸우며 사느니 차라리 세상에 종교가 없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곤 한다네. 나는 우리 딸들이 세례받도록 했지만, 이제는 "니들 마음대로 해라"라며 잔소리 하지 않고 지낸다네. 신앙을 갖고 못 되게 사느니, 신앙 없이 착하게 사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