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가을은 깊게 들어와 있었다.
능선, 서리 맞아 홀연히 훤한 숲, 햇빛에 부서지는 검푸른 백두대간의 산그림자, 한여름 녹음에 들끓던 숲은 오간데 없다.
서북능선에 바람이 불었다. 차고 시리다. 마른 나뭇잎이 서걱거리며 날린다. 이제 바람이 잦아들어도 능선에 남은 잎새와 꽃잎은 스스로 떨어지리라. 시절을 어찌 거역할 수 있으리오.
맑음, 최저 1도, 최고 13도, 한계령 일기예보다. 오늘은 "장수대 - 대승폭포 - 대승령 - 12선녀탕 - 남교리" 길을 밟는다.
내게 등산은 방랑이다. 발걸음은 정해진 길을 가지만 사유(思惟)세계는 정해진 길이 없다. '훨 훨' 자유다. 모든 건 지금 이 순간. 방랑자는 지난간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때 좋았던 장소에 뿌리를 내리려 안달하지도 않는다. 그 시간과 장소를 언제라도 손 흔들어 작별을 고한다.그리고 다음 길로 떠난다. 길에서 길(道)을 만나러.
급경사 돌길 철계단을 거친 숨소리로 올라 대승폭포 전망대에 섰다. 88m 물기둥의 자유낙하, 폭포수 물보라는 볼 수 없었다. 절벽에 촉촉한 물길은 검게 보였다. 여름장마 땐 쏟아지던 폭포는 장엄하겠지만, 가을 가뭄엔 단풍과 푸른 솔, 달콤한 바람과 하늘 흰구름, 그리고 언뜻언뜻 쏟아지는 햇살의 놀이터였다.
장수대 출발 한 시간 오십분만에 대승령에 도착했다. 높이 1,210m. 인제 용대리와 한계리에 걸쳐있다.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첫고개다.
바람이 불었다. 싸늘하다. 배낭에서 자켓을 꺼내 입었다. 대승령에 올라 먼 하늘과 설악의 백두대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이 순간은 충분히 행복하다. 행복이 꽃이면 사랑은 흙이 아닐까. 사랑 없는 행복이 있을까? 사랑은 상대를 감탄하는 마음이 아닐런지.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자발적 노예가 된다. 하여 짐승은 상대의 상처를 혀로 핥아 치유해 준다.
사랑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오늘 서북능선 대승령에서 바라본 설악이 그러하다. 저 가을설악을 바라보며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배운다. 햇살 쏟아지는 설악의 가을은 미치도록 곱고, 환장하도록 화려하다. 아, 가을로 꽉찬 설악이여!
안산삼거리 바위에 걸터 앉았다.
잠시 쉬면서 간단하게 빵, 과일, 따듯한 커피로 요기를 했다.
내리막 탕수동계곡길로 향한다. 탕수동계곡은 12선녀탕의 다른 이름이다. 내리막 경사가 급하다. 길이 좁고 거칠고 억척스럽다. 돌, 돌길이다. 계곡 상류, 물흐르는 소리는 들리는데 물은 보이지 않는다. 바위 밑에 숨었다. 흐르는 물따라 내몸도 흐른다. 협곡을 한참 내려왔다.
두문폭포 용탕 응봉폭포 그리고 이름모를 탕과 폭포들.
물길에 절벽이 있으니 폭포요. 물길이 쉬어가는 곳이 있으니 탕이었다. 물방울들이 세월을 거스르며 흐르고 만지고 다듬고, 또 깍고 갈아 바위에 깊은 구멍과 주름을 만들었다. 작렬하는 태양과 억센 바람, 거친 물살과 아픈 시간, 차디찬 바람과 눈보라, 그리고 찬란한 가을과 이별의 상처로 빚어진 작품이 여기 있다. 십이선녀탕 계곡은 시간이 빚은 살아있는 예술의 전시장이었다. 더 말하여 무엇하랴. 와서 보고 느끼시라.
목욕하는 열두선녀는 없었고, 단풍이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탕에 누워있었다. 오늘밤 나무지게를 지고 몰래 올라볼까? 저 차디찬 물에 선녀가 목욕을 할 수 있으려나? 헛되고 유쾌한 상상을 펼치며 발길을 옮겼다.
"고이 잠드시라 젊은 산악의 용사들이여! ..."
1968년 폭우로 희생당한 젊은 넋을 위한 비문이 여기 계곡길 있다. 생명은 언젠가 반드시 자연으로 돌아가겠지만 젊음의 이별에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잠시 두 손을 합장 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얻기 위해, 쾌락을 얻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애를 쓰고 괴로워하다가 어느날 백발이 눈에 든다.
그 때 "아, 이게 아닌데 ..."
그후 나는 산을 배우기 위해 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이승의 번뇌를 초극하고 윤회의 바퀴를 멎게한 인물 붓다도 죽음, 즉 열반에 들었다. 열반에 들기전 붓다가 지나온 삶을 후회했는지, 만족했는지, 삶의 답을 찾았는지 나는 알지못한다. 구태여 알고싶지 않다. 다만 남은 생, 후회를 덜 남기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오늘 설악의 가을빛과 십이선녀탕계곡에 육신은 씻고, 그 향기에 영혼은 취했다. 더 무엇을 탐하랴. 이젠 긁어도 긁어도 또 긁고 싶어지는 가려움증을 앓듯, 찾아가고 찾아가도 또 찾아가고 싶은 게 저 산길인걸 어찌하랴. 고맙게도 내게 산중독은 아주 짙다
하산 후 산벗들의 산행후담을 귀동냥하며, 용대리 황태구이를 안주로 한 잔 술 취하고 싶다.
인생의 길, 걸어볼 가치가 충분하지 않던가?
오늘만 같아라.
2023. 10.29
첫댓글
아름답습니다
글귀가 멋지네 친구여
도전하는 새돌님ㅡ그러셔요 오늘만 같아라~^^
글솜씨 좋은 새돌님
덕분에 설악의 가을을 함께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