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바람부는 쪽으로 귀기울여봐 [제1편]
당신의 1주기를 맞는 첫가을, 유리창 너머 하늘은 파란 심연이다. 이 가을에 반짝이는 재화(財貨)인 이슬들은 햇빛에 잘 마른다. 계절의 권능이 골고루 미치니 세상은 살 만하고 다 괜찮다. 초본식물은 마르고 모과나무는 제 열매들을 풀밭에 슬며시 놓아버린다. 어떤 약속은 깨지고 잃어버린 물건들이 돌아오는 법은 없다. 건강한 자들은 제 건강함을 아파하고, 지병을 가진 자들은 제 지병과 더불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음에 안도할 테다. 동지에 가까워질수록 밤은 빨리 온다. 동지 지난 뒤 마른 풀밭에 드리워진 달그림자는 더 차가워진다. 밤은 수천 마리의 까마귀들마저 재우는데, 이는 밤이 까마귀의 깃보다 더 어둡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흰 눈썹을 하고 깨어난다. 아침마다 끝난 것들은 끝나고, 끝나지 않은 것들은 끝나지 않은 채 의연하다. 이 아침 내가 안도하는 것은 이제 내 삶으로 그대의 죽음을 견딜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 속에서 익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막아줄 방식이기 때문이다.
월트 휘트먼의 『풀잎』을 몇 달째 읽고 있다. 휘트먼은 1855년긴 서문과 12편의 시가 담긴 『풀잎』을 내놓은 뒤 새로 쓴 것들을 보태면서 같은 제목의 시집을 계속 고치면서 보완한다. 휘트먼은 평생 풀잎이라는 시집 단 한 권만을 남겼다. 수많은 질문들과 함께 신비주의적 계시와 영혼의 고양감을 보여주는 12편의 시로 구성된 『풀잎』은 강렬하고 명료한 어조로 독자를 그 세계로 초대한다. 이 시집은 실로 삶의 모든 부면을 들춰내고,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사내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사유하면서 천 개의 주제를 다룬다. 시인 메리 올리버는 『풀잎』을 두고 “진실로 하나의 설교요 선언이며 유토피아의 기록, 사회계약, 정치적 진술, 그리고 변화에의 초대다.”라고 쓴다. 휘트먼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시는 풀밭에서 빈둥거리며 짐작한 것, 침대에 홀로 누워 짐작한 것, 아침 별 아래서 해변을 걸으면서 짐작한 것의 전부다. 그는 직관으로 ‘풀잎’ 한줄기에서 모든 것에 대한 은유, “아름답고 기이한 숨쉬고 웃는 육체”의 일들, 그리고 육체의 관능에 꿰어본 사랑과 연민을 다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은 모래 한 알, 풀잎 하나, 바람 한 줄기에서 시를 얻는다. 보라, 아득히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에 귀기울이는 시인을.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마종기, 「바람의 말」) 바람은 참 아득히 멀리서도 오는구나! 가끔 바람부는 쪽으로 귀기울여봐. 누군가 먼 곳에서 당신에게 속삭이잖아. 당신보다 먼저 죽은 자들의 말들에 조용히 귀기울여봐.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2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