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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감상과 해설 스크랩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실황 연주와 이해,Tchaikovsky Violin Conceto Op.35
행복 그리고 건강한 세상 추천 0 조회 133 13.10.03 19: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

1878년에 작곡된 차이코프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는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Tchaikovsky Violin Concerto op.35 는 
베토벤,멘델스존,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불리워진다.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 찬사 받고 있는 것은 선율미때문인데 아마도 차이코프스키만큼 바이올린을 하나의 동체처럼 느껴지게 하는 사랑스런 곡을 남긴 작곡가도 드물 것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는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중 최고의 곡은 브람스의 협주곡이었다. 물론 이는 독일 전통주의를 따른 형식미 때문인데 D장조로 된 이 곡은 바하 이후 독일이 낳은 최고의 아름다운 곡으로써 선율미 뿐 아니라 예술성, 스케일등 모든 면에서 찬사 받고 있다. 베토벤의 협주곡 D장조는 바이올린의 아름다움보다는 오케스트라의 협주가 일품이고 장엄한 교향곡처럼 들려온다는 점에서 찬사 받고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중 가장 웅장하면서도 주도 면밀한 형식미, 풍부한 악상등은 악성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 협주곡으로 소문이 높다.

멘델스존의 E단조의 경우는 톡톡 튀는 눈부신 선율미가 인류의 영원한 유산으로 찬사 받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 찬사 받고 있는 것은 선율미때문인데 아마도 차이코프스키만큼 바이올린을 하나의 동체처럼 느껴지게 하는 사랑스런 곡을 남긴 작곡가도 드물 것이다


우수에 젖은 듯 하면서도 톡톡튀는 선율은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매우 반항적이었다. 이 때문에 발표된 직후 시장바닥에서나 연주하면 딱 알맞겠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북극의 고독하면서도 이국적 감상을 내포한 이 곡은 독일이 내세우는 형식미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두우면서도 내면에 호소하는 관능미 충만한 이 곡은 곧 유럽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최고 인기곡일 뿐 아니라 베토벤, 브람스와 더불어 세계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바이올린 협주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곡입니다.영화 " Le concert" 더 콘서트 에서 마지막에서도 이곡이 나온다.


1878년 어느 봄 저녁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차이코프스키를 방문했다. 그는 당대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제자인 코텍이었다. 그날 차이코프스키에게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는데 그 중에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날 저녁 차이코프스키는 이 색채감이 풍부한 랄로의 바이올린 음악과 코텍의 연주에 깊이 매료돼 그로부터 사흘 뒤에 당장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작곡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차이코프스키는 창작의 기쁨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그는 단 25일 만에 초고속의 스피드로 이 협주곡의 작곡을 마쳤는데 당시 그가 얼마나 의욕에 불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가장 연주회수가 많은 협주곡의 하나이나
그것이 완성된 당시에는 아주 대접을 못받았다.
그 점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의 경우와 매우 비슷해서
이 곡도 초연 때 말썽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이코프스키는 항상 그 시대의 음악가나 청중보다 50년,
아니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안토니나 밀르코바와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탈리아,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1878년(38세)에 작곡되었다.

브람스 베토벤과 함께 차이코프스키도 바이올린 협주곡은 
평생 단 한 곡씩 밖에 작곡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는 1878년에 작곡되어 당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

였던 레오폴트 아우어 에게 헌정되었으나, 처음에는 기교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연주

되지 않고 있다가 라이프찌히 음악원 교수인 아돌프 브로즈키 에게 재헌정,

그에 의해 1881년 비엔나에서 초연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인 레오폴드 아워(Leopold Auer)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아워는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초연이 거부되었다.


당시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은 피아노 협주곡으로 크게 상심한 적이 있어 이번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은 그런 비평을 피하기 위해 바이올니스트 코텍의 충고에 열심히 귀 기울이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드디어 완성되자 코텍에게 초연을 부탁하였으나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는 당대 바이올린 `음악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었던 거장 레오폴트 아우어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아우어는 “당신이 이 작품을 바이올린에 맞게 고치지 않는 한 그대로 연주할 수는 없다”며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이 완성되자 곧 초고를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우어에게 보였다.
아우어는 짐발리스트, 하이 페츠, 엘만 등의 스승이 되는 대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런데 아우어의 회답은 냉랭한 것이었다.
[기교적으로 보아 연주불가능]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곡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3년 동안 이 악보는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드스키가 채택하여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니 연주회에서 공연함으로써 빛 을 보게 되었다.

 1881년 빈의 아돌프 브로즈키의 바이올린 솔로와 빈 필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그러나 그 날 오케스트라와 단 한 번의 리허설로 악보가 익숙지 않았던 단원들은 소극적이고 자신 없는 연주로 독주자와도 앙상블이 삐걱거렸다. 결국 비평가들은 “야만스럽고 불쾌한 음악”, “황당한 러시아 니힐리즘”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초연자 브로즈키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곡을 모스코바, 독일, 미국 등의 연주 여행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고 결국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받게 되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의 필수 레퍼토리로 정착되었다. 아우어마저도 몇 년 후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연주를 하였다. 이 곡을 마스터하려면 상당히 높은 기교를 필요로 한다.
여담이자만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한결같이 D장조인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D장조는 바이올린이 가장 잘 울리는 조성이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Tchaikovsky, Violin Concerto D Major Op. 35)

 

1878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근교의 클라렌스에서 결혼의 상처(1877년 여름에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밀류코바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석달 만에 파경을 맞았다)를 달래고 있었다. 3월 14일, 자신의 제자였던 요시프 코테크가 찾아왔다. 그 때는 차이코프스키가 한창 [피아노 소나타 G장조]를 작곡하던 시기였다. 베를린에서 요제프 요아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던 코테크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의 악보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이 곡을 함께 연주했다. 그리고 차이코프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불타는 영감으로 써내려간 바이올린 협주곡
며칠 후, 메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들리브나 비제의 작품처럼 랄로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형식을 찾아냈고 대부분의 독일 작곡가들처럼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음악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아침 나는 불타는 영감 안에서 한없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작곡한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작곡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1악장은 완성되었고, 내일부터는 2악장을 시작할 겁니다. 이 협주곡은 작곡하는 내내 즐거웠고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하루종일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런 식의 속도라면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코테크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차이코프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던 인연으로 그와 오랫동안 교류해왔다.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을 알게 된 것도 코테크를 통해서였고, 차이코프스키는 코테크를 위해 [왈츠-스케르초]를 작곡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깊었다. 마침내 4월 4일 모든 작업을 끝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여전히 2악장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국 처음 작곡했던 2악장(두 달 후 [명상곡]으로 출판된다)을 버리고 하루만에 새로운 안단테 악장을 썼다. 그리고 4월 11일에 악보의 초고가 나왔다. 차이코프키가 [4번 교향곡]과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을 막 끝냈을 때였다. 출판은 모스크바의 표트르 위르겐슨이 맡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악보가 그 해 10월에, 오케스트라 파트보는 1879년 8월에 나왔다.


연주 불가능, 바이올린을 모르는 작곡가라는 잘못된 평가

초연을 향한 길은 멀고도 험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코테크가 초연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 연주자로 경력이 많지 않았던 코테크는 이 작품의 연주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차이코프스키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1878년 10월, 차이코프스키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당대 최고의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바이올리니스트 악보를 주면서 초연을 부탁했다. 아우어는 자서전에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차이코프스키가 내게 보여준 협주곡을 우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나는 작곡가에 감사하다고 말했고, 우리 둘은 곧바로 연습을 해보았다. 첫 번째 연습에서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1악장 2주제 선율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슬프게 변화하는 2악장 칸초네타의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초연하겠다고 약속했고 차이코프스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보를 주었다. 그런데 악보를 자세히 보니까 이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손을 보아야 했다. 작곡가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년을 기다리다 지친 차이코프스키는 넌더리를 냈다. “우리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우어는 나의 협주곡을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유명한 비르투오조가 ‘연주 불가능’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애꿎은 나의 협주곡만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 마치 영원히 잊혀진 것 같았다.”






초연의 실패와 혹평, 성공을 향한 집념


그러다 마침내 구원자가 찾아왔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1881년 12월 4일, 빈 필하모닉 협회의 콘서트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하게 된 것이다.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악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콘서트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벌써 2년 전 일이었죠. …(중략) … 러시아에 돌아와서 몇 달 째 하루종일 당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습했습니다. 거의 미친듯이 매달렸는데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토록 오래 연습했는데도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물론 테크닉적으로 쉬운 작품은 아니었습니다만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 작품을 이제 알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빈에서 초연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된 거죠.”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음악이 이토록 심한 악취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증명했다”고 혹평했다. 또다른 비평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야유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허무주의’(테오도르 헬름), ‘괴이한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막스 칼베크). 초연자 브로드스키는 절망하는 대신 몇 개월 후인 1882년 4월 런던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다시 협연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8월 20일 이폴리트 알타니의 지휘와 브로드스키의 협연으로 모스크바 초연을 했고 여기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아돌프 브로드스키란 이름을 떼어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인식한 차이코프스키는 원래 예정되었던 헌정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브로드스키에게 이 작품을 헌정했다.


1875년 2월 파리에서 사라사테가 연주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자극을 받아서 작곡하였기에,
이 두 작품 사이에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우어는 초연을 부탁받았지만 연주 불가능이라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드스키(1851~1929)에 의해 초연 되었으며, 점차 각광을 받게되어

마침내 이 곡을 혹평했던 아우어도 하이페츠, 자이델 같은 제자에게 직접 이 곡을 가르쳤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

1878년에 작곡된 차이코프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는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차이코프스키.
차 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제자이자 아홉 살이 어린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Ivanovna Milyukova)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았고, 비참한 결혼생활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갔던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근교의 클라렌스 리조트에서 작곡하였다. 차이콥스키는 거기에서 그의 제자이자 바이올린 연주가인 요지프 코테크(Yosif Kotek)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인 랄로의「스페인 교향곡」을 함께 연주했고, 그 후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이 협주곡을 작곡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바이올린 연주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곡의 바이올린 독주 부분 작곡은 요지프 코테크의 도움을 받았다. 이 곡은 매우 빨리 작곡이 이루어져, 비록 2악장은 나중에 다시 쓰여졌지만, 거의 한 달 안에 곡이 완성되었다.

차 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인 레오폴드 오어(Leopold Auer)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초연이 거부되었다.

실 망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3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었는데, 모스크바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였던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에 관심을 보이면서 발표할 것을 적극 권하여 1881년 12월 4일, 빈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빈 필하모니와 협연함으로써 초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현대 음악비평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당시 빈 음악계를 주름잡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는 “차이코프스키의「바이올린 협주곡」은 악취를 풍기는 음악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고 혹평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가치를 굳게 믿고 있던 브로드스키는 연주 여행 때마다 이곡을 연주하여 청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그 후 아우어 교수도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여 직접 연주함으로써 점차 유명해 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원래 헌정할 예정이던 레오폴드 아우어 대신, 초연과 이 곡에 알리는데 공로가 많은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됐다.

이 작품의 특색은 바이올린 독주의 눈부신 근대적 연주기교를 충분히 발휘하였고 오케스트라에 있어서 풍부하고 색체적인 면을 볼 수 있으며, 러시아 민요의 정서와 그가 지닌 독특하고 애수에 젖은 아름다운 선율 등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독창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한 곡만 작곡했지만, 세 개의 다른 피아노 협주곡도 작곡했다. 그 중 특히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유명하다.

이 곡은 다음과 같이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Allegro moderato)
제 2악장  칸초네타 -안단테 (Canzonetta -Andante)
제 3악장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Allegro vivacissimo)

제 1악장, Allegro moderato - Cadenza
소 나타 형식의 악장이다. 일반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이 오케스트라가 먼저 제1, 2주제를 연주한 다음 바이올린이 그것을 받아서 연주하게 되는 반면, 이 곡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서주에 이어 바로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연주하게 된다. 전개부에서 화려한 바이올린의 테크닉이 펼쳐지고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질주하는 선율은 가히 폭발적이다. 카덴차(Cadenza,독주자가 반주 없이 자신의 기교를 최대한 과시하는 즉흥 연주 부분)가 끝나면 다시 처음의 주제가 반복되고 곡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끝나게 된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독주 사이의 대비감이 잘 표현 되어있다.




제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4/4박자  

소나타 형식. 여느 협주곡은 처음에 오케스트라가 제1, 제2주제를 연주한 다음에
독주 바이올린이 그것을 받아 연 주하는데, 이 곡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서주 다음에
대뜸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연주한다.
제2주제의 제시에 이어 전 개부는 제1주제만으로 펼쳐지며,
작곡자 자신이 쓴 카덴짜를 거쳐 재현부가 따른다.

조용한 서주와 함께 두 개의 주제가 제시되는데 여리게 도입 선율을 연주하고 10마디부터 제1주제를 다시 연주한다. 그리고 바이올린 카덴차가 연주되는데, 대단히 화려한 특징이 있다.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파워는 차이코프스키의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에 힘입어 폭발적인 파워를 느끼게 한다. 중요한 점은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독주 사이의 미묘한 균형인데, 차이코프스키는 기교적인 카덴차와 질주하는 듯한 오케스트라의 대비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상급의 작곡가였다. 

난해한 기교로 가득 찬 제1악장 allegro moderato에서도 두 개의 주제만큼은 매혹적인 서정성을 풍기고 있기 때문에 솔로 바이올린의 노래하는 듯한 특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

빠르면서도 느리고, 서늘하면서도 격정이 넘치는 1악장은 전 악장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다. 즉각적으로 빠져들기에는 다소 이질적이고 거절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이 곡은 마치 외로운 한 떨기 장미화같다고나할까. 어딘가 고독한 이방적인 요소, 북방이면서도 동쪽에서 불어오는 듯 동풍의 서늘한 신비야말로 차이코프스키의 거절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일반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이 오케스트라가 먼저 제1,2 주제를 연주한 다음 
바이올린이 그것을 받아서 주제를 연주하게 되는 형식인데 비해서
이 곡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서주에 이어 바로 바이올린이 제1주제를 연주하게 됩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제1악장은 바이올린의 화려한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장쾌함이 절묘하게 어울린 소타나 형식의 악장으로 
서주에서 시작되는 주제 부분이 카덴짜(즉흥 연주부분)와 서로 밀고 당기며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절정에 이르게 되면 
숨가쁘게 전개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연주들이 정말 눈부신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제2악장 칸쪼네타, 안단테, 3/4박자
<칸쪼네타>(작은 노래)라고 씌어 있는 3부형식. 흐느끼듯 아름답게 떨리는
제1주제의 매력은 한 번만 듣고 말 수 없는 황홀감을 안겨 준다.
슬라브적 비애감에 젖어 있는 악장이라 하겠다.관악기의 서주가 흐른 후 서정적인 주제를 바이올린이 노래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감수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음색 조절은 연주자의 능력을 가늠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슬라브적 애수 어린 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악장입니다.
'칸쪼네타(Canzonetta)' 로 되어있는 A-B-A의 3부 형식인데,
'칸쪼네타'는 이탈리아의 포퓰러송을 뜻하는 칸초네(canzone)의 축소형으로 
주로 16~17세기에 유행했던 가벼운 기분의 작은 가곡작품을 뜻하는 말로, 
그냥 '작은 노래' 라고 하면 된다는군요.

흐느끼듯 아름답고 애수어린 멜로디가 곡전체를 지배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데,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황홀한 매력에 빠지게 하는 이 2악장은
차이코프스키만의 매우 슬라브적인 정서가 풍부하게 나타나는 선율이라고 평가됩니다. 

이 곡은 명확히 끝나는 부분이 없이 첼로 등 현악기들의 저음을 바탕으로 
혼(Horn)과 함께 애절함을 장식하다 끝난 것 같지도 않게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이어서 깜짝 놀랄만큼 강렬한 음량이 터지면서 
곧바로 열광적인 3악장 연주와 연결됩니다.                




제3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2/4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 제2악장에서 중단없이 계속되는데,
앞의 악장과는 달리 매우 열광적이고 웅장하다.
제1주제 는 러시아의 민속춤곡 트레파크의 음형이며, 제2주제는 씩씩한
러시아 농민들의 악곡 가락이다.
전개부는 뚜렷하지 않고 제시부가 그대로 연장된다.

allegro vivace는 러시아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활발한 음악으로 첫 주제는 민속 음악적인 요소에서 온 것으로 러시아 민속 춤곡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 주제 역시 민속적인 색채가 있지만 여기에 집시 풍의 요소도 끼어 더욱 이국적으로 채색된다.


피날레. 화려하고 여유로운 소나타형식의 악장입니다. 
2악장에서 이어진 곡은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열광적인 리듬의 축제로 변하게 됩니다.
중간 부분에서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의 선율로 잠시 우수어린 연주가 이어지다가
제시부의 첫선율이 다시 나타나기를 되풀이 하면서 점점 열기를 고조시켜 나간 후
마지막에 환희에 넘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총연주로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게 됩니다.


오케스트라의 강력한 어택과 함께 16마디부터 37마디까지 바이올린 카덴차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러시아의 민속 춤곡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3악장은 서정성과 격정 그리고 탄식과 희망 사이를 교차하고 있다. 5도음정의 관악기들과 함께 제2주제가 시작되는데 활발하게 움직이는 독주 바이올린은 절망과 희망을 교차하면서 감정의 등고선을 자극한다.







하이페츠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은 RCA의 대표적인 레코딩 중 하나로

 

여러 음반에 걸쳐서 출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연주는

 

시카고 심포니 // Fritz Reiner(프릿츠 라이너) 지휘의 57년 녹음입니다

야 샤 하이페츠(1901~1987, 혹은 1899년 생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는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러시아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는 3세 때 처음 바이올린을 손에 잡아 평생 바이올린과 함께 했습니다. 9세 때 헝가리 출신의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된 그는 신동으로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1917년 10월 27일, 그의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의 연주는 일대 하나의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같은 해 11월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그대로 미국에 눌러 앉게 되며, 192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죽을 때까지 미국에 살게 됩니다.

그 의 연주는 인간이 갈 수 있는 '완벽'의 경지에 최고로 가깝게 간 연주라고 평가됩니다. 악보상의 단 하나의 음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음악으로 들려주는 그의 연주, 그러면서도 그 연주는 단지 악보의 재생이 아니며, 폭넓은 표현력과 해석, 그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다양한 음색을 보여줍니다. '신이 빚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에 고개가 끄덕여 질 만합니다. 그와 동시대의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가리켜 하이페츠의 그늘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던 '불쌍한' 자들이라고 평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그 의 연주를 듣고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을 박살내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버나드 쇼는 하이페츠에게 편지를 보내 "인간이 그렇게 완벽한 연주를 하면 하느님의 시기를 사서 요절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며 그에게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 기도 대신 아무 곡이나 서툴게 연주할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그는 1987년 긴 생애를 마치고 세상을 떠납니다

1악장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다.  이 동영상은 영화자료여서 악구가 생략되었다.

 

야샤 하이페츠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I. Allegro moderato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협연하고 있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Oistrakh, 1908~1974)
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 1901~1987)
와 함께
바이올린 연주로 세계 음악계를 뒤흔든 대단한 연주자입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다비트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

지휘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Gennady Rozhdestvensky)



Tchaikovsky-Violin Concerto
David Oistrach (violin), Gennady Roshdestvensky (conductor) Staatskapelle Berlin. live 1963.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사라장 Sarah Chang [1980,12,10~]

Pyotr Ilych Tchaikovsky, 1840-1893

Sarah Chang, Violin


사라장, Sir Colin Davis, Cond / London Symphony Orchestra



매혹적이고 재능있는 사라장(만11세)-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 Major Op.35 ,Sarah Chang,장영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리(sound)' '저장(recording)'할 수 있었던 것은
발명가 
에디슨
이 축음기를 발명한 1887년에야 처음 이루어진 일입니다.
17세기 
바흐(Bach) 하이든(Haydn)
의 시대나 그 이전 시대는 물론, 
바흐(Bach)
 사후에 태어난 18세기의 위대한 음악가들... 예컨데
모차르트(Mozart), 베토벤(Beethoven), 슈베르트(Schubert)
 등은 
당연하게도 축음기를 만날 수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이니 
확실한 
'라이브(live)의 세계'
에 살았던 천재 음악가들입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이 위대한 음악가들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대단한 음악적 투자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바이올린 신동 장영주 일화를 여기에서 소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어렵기로 소문난 
차이코프스키의 이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단 4일만에 마스터해서 일찌감치 천재성을 드러냈다고 전합니다.
불과 4세 때 바이올린을 배워 1년만에 필라델피아에
서 연주회를 가진 바 있는 장영주는 
8세 때 받은 오디션에서 
주빈 메타로부터 뉴욕 필과 협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정도로 
세상이 놀랄만큰 뛰어난 천재적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장영주양의 경우,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타고난 천재성을 저도 분명히 인정하지만
만 4세 유아기의 그녀 역시, 시대를 앞 선 뛰어난 선배들의 연주를 반복해서 감상하면서
이미 '귀'를 통하여 그 수준의 기대치를 스스로 충분히 높여 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타고난 천재성에 더욱 더 뛰어난 기교를 덧붙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작곡하던 1878년에는
당연히 축음기도 발명되기 전이었으니, 100년 앞을 내다 본 그의 위대한 작품의 초연을 보고
"천하고 품위없는 얼굴만 봤고, 거친 고함소리만 들었고, 싸구려 술냄새만 나는" 곡이라고
아주 형편없는 졸작으로 혹평한 당시 음악평론가 빈(Wien) 대학의 
한슬릭(E. Hanslick, 1825-1904)
의 수준을
위대한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없었던 시대의 탓으로 웃으면서 돌릴 수밖에 없겠지요.

 

 

제 1악장(Allegro moderato - Candenza)

소나타 형식의 악장이다. 서주에서 잠시 주제가 암시된 후 바로 바이올린에 의해 낭랑히 울려펴진다. 전개부에서는 화려한 바이올린의 테크닉의 향연이 펼쳐지며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야성적인 외침은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한다.

카 덴짜 (독주자가 반주없이 자신의 기교를 최대한 과시하는 즉흥연주를 하는 부분. 고전파 이후 상당수의 작품에서는 작곡자가 대부분 카덴짜까지 겸해서 작곡해두는 것이 대부분이나 일부 연주자들은 자신만의 카덴짜를 연주하기도 한다)가 끝나면 다시 처음의 주제가 반복되고 곡이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끝나게 된다.


1악장(Allegro moderato - Candenza)
Sarah Chang, Violin
Sir Colin Davis,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1993. 3. 23

제 2악장(Canzonetta -Andante)

' 칸쪼네타 (작은 노래)' 라고 되어있는 A-B-A의 3부형식으로 되어있다. 애수어린 멜로디가 곡전체를 지배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데, 이는 매우 슬라브적인 정서가 풍부한 선율이다. 곡은 명확히 끝나는 부분이 없이 3악장으로 연결된다.


2악장 (Canzonetta-Andante)
Sarah Chang, Violin
Sir Colin Davis,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1993. 3. 23

제 3악장(Allegro vivacissimo)

자 유로운 소나타형식의 악장이다. 전악장에서 이어진 곡은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열광적인 리듬의 축제로 변한다. 중간에 잠시 우수어린 선율이 고개를 내밀다 제시부의 첫선율이 다시 나타나기를 되풀이 하다 점점 열기를 고조시켜 나가면서 마지막에는 환희에 찬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총주로 끝맺는다.


3악장 (Allegro vivacissimo)
 Sarah Chang, Violin 
Sir Colin Davis,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1993. 3. 23



음반소개

사 라는 12살 (1992년 녹 음)때 차이코프스키를 선택함으로써 레코딩에 있어서도 전문연주가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라모폰은 이 앨범이 출시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사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라모폰 93년 신인 아티스트상 수상. 에코 음반상을 수상했다. 1993년, 3월 23일에 나온 이 음반은 3/4 크기 바이올린으로 연주했으며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의 헝거리 춤곡" 이 수록 되어 있다.

장영주(Sarah Chang, 1980. 12. 10~ )

바 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녀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미국의 여러 음악 중심지에서,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필, 보스턴 심포니,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LA 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및 피츠버그 심포니를 포함한, 거의 모든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또 한 그녀는 유럽에서 베를린 필,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그리고 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그녀가 함께 협연했던 지휘자로는 다니엘 바렌보임, 콜린 데이비스 경, 샤를르 뒤트와,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제임스 르바인, 쿠르트 마주어,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앙드레 프레빈, 볼프강 자발리쉬, 레오나르드 슬라트킨 등이 있다. 그녀는 콘서트 실황 중계나 음반의 방송 등을 통하여 그동안 방송에 많이 출연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장 영주는 1996년 여름 시즌, 남미 순회 연주를 가졌고, 아스펜 음악제에 재출연하기로 계약하였으며, Hollywood Bowl에서 사이먼 래틀 경 지휘로 LA 필과 협연하였고, 라비니아 축제에서 에센바흐 지휘로 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하였다. 또 Mann 센터 및 Saratoga 공연센터에서 영국의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이어서 헬싱키 필, 로테르담 필, 로열 스톡홀름 필과 차례로 협연하였다.

장 영주는 1996-97 시즌(즉, 겨울 시즌) 동안에 테미카노프 지휘로 뉴욕 필과 협연하였고, 워싱턴에서 내셔널 심포니와 협연하였으며, 이어서 몬트리올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몬테 카를로 필과 협연하였다. 또한 그녀는 샤를르 뒤트와 지휘로 한국, 일본, 홍콩에서 몬트리올 심포니와 연주를 가졌다. 그 후 그녀는 주빈 메타의 지휘로 빈 필과 협연하였고, 이 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얀손스 지휘로 베를린 필과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녹음하였다.

1995 년과 1996년 사이에 있었던 그녀의 연주 중에는 뉴욕 필과의 협연 및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발티모어 심포니, 달라스 심포니, 디트로이트 심포니와의 협연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녀는 르바인 지휘로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와 카네기 홀에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시기 유럽에서는 주빈 메타의 지휘로 파리에서 이스라엘 필과 협연하였으며, 틸레만 지휘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래틀 경 지휘로 버밍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어서 그녀는 침머만의 지휘로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을 비롯하여 블롬스테트의 지휘로 밤베르크 심포니와 협연하였으며, 자발리쉬와는 함부르크 필과 호흡을 맞추었다. 그녀는 유럽에서 이 시기에 처음으로 리사이틀을 가졌는데, 그녀가 리사이틀을 가졌던 곳은 더블린, 리딩, 하노버와 볼로냐였다.

장 영주는 EMI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그녀의 첫번째 앨범인 'Debut'에서 그녀는 사라사테, 파가니니, 엘가, 프로코피에프 등 대가의 소품들을 선보였는데, 이 앨범을 녹음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9세였고, 1/4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녹음했다. 이 앨범은 1992년 대단한 인기를 모았고 단숨에 빌보드 차트의 클래식 분야 1위를 차지했다.

그 녀의 두 번째 앨범은 콜린 데이비스 경의 지휘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 (위 음원)과 볼프강 자발리쉬의 지휘로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생상의 소품들 그리고 샤를르 뒤트와 지휘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비외탕 바이올린 협주곡 제 5번을 담고 있다.

이어서 그녀는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의 본 윌리엄스 시리즈(런던 필) 중 삽입된 "종달새의 비상" 을 녹음했다.

1997년에 그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집 "Simply Sarah"를 선보였다. 뒤이어 1998년에는 마리스 얀손스 지휘로 베를린 필과 협연한 시벨리우스, 멘델스존 협주곡 앨범을 발매했다.

그녀는 1993년 그라모폰 상 중 "올해의 젊은 음악가" 부문을 수상했고, 같은 해 독일의 "에코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93년에 로열 필의 음악데뷔상, 1994년 국제고전음악상의 "올해의 신인음악가" 부문을 수여받았다.

그 녀의 또다른 주요한 경력으로는 쿠르트 마주어 지휘로 링컨 센터에서 뉴욕필과 생중계로 협연했던 것을 꼽을 수 있으며, 그녀가 플로렌스에서 주빈 메타와 함께 했던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전유럽에 생중계되었다. 또 그녀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라이프치히 등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는데, 그 중에는 유엔에서의 공연도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1994년 카네기 홀에서 데뷔를 가졌는데, 이 때에는 샤를르 뒤트와의 지휘로 몬트리올 심포니와 협연했다.

그 리고 1995년에는 탱글우드 음악 축제에서 보스턴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데뷔를 가졌다. 그 외에도 바이에리셔 룬트풍크 오케스트라,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홍콩 필, NHK 심포니, 토론토 심포니 등과 연주했다. 그녀는 또한 존 윌리엄스 지휘 아래 보스턴 팝스와 두 번의 연주를 가졌다. 그녀는 한국의 가장 권위있는 음악상인 난파 음악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1990년 서울에서 갈라 콘서트에 참여하였고, 1992년 6월에는 UN 정상회담이 열리는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지구를 위한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1995년 8월, 서울에서 한국 광복 50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에 출연하여 KBS 심포니와 협연하였다. 당시 이 콘서트에는 한국 출신의 유명 음악인들이 대부분 출연했다.

이 런 까닭에 장영주는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녀는 The New York Times, The Washington Post, San Francisco Chronicle, The Philadelphia Enquirer, Life, People, USA Today, The Strad, The Times (London), Le Figaro, Berliner Morgenpost, Stern 등의 세계 유수 언론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녀는 TV에도 여러 번 출연했다. "The Tonight Show"와 "Good Morning America"를 비롯하여 NBC 방송의 "Today" 쇼, "CBS This Morning", "CBS Sunday Morning", "Live with Regis and Kathy Lee", "CBS new' 48 Hours", a PB special on gifted children 그리고 BBC 방송의 "Blue Peter"와 "Our Common Future"(이 방송은 100개 이상의 국가에 방영되었다.) 에 출연하였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방송에도 출연하였다. 그녀가 존 윌리엄스 지휘로 보스턴 팝스와 가졌던 첫번째 연주는 PBS의 "Evening at Pops"에 방영되었고, 그녀가 런던 심포니와 가진 데뷔 연주는 영국의 가장 유명한 예술 전문 프로그램인 ITV의 "The Young South Bank Show"에서 다큐멘터리로 구성되어 방영되었다.

장 영주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모두 한국인이다. 그녀는 4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배운지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필라델피아 지역의 오케스트라들과 연주했다. 그녀는 8세 때 주빈 메타와 리카르도 무티 앞에서 오디션을 받았는데, 이들은 곧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1992년 5월 그녀가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그녀의 놀라운 재능은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음악 외에 TV 시청을 즐기고, 독서나 수영, 롤러 스케이팅을 좋아하며, 동생 영진(미국명 Michael)이와 놀기도 좋아한다.

자료출처: EMI Classics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실황 연주와 이해









197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야 그루베르트


정경화-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1972), Chung KyungWha- Tchaikovsky violin concerto







1978년생으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

 열 여덟 살이던 1997년. 당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네덜란드 최고 스타 음악가로 부상한 그는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2003년에는 네덜란드 문화부로부터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큰 상인 더치 뮤직 프라이즈를 수상하기도 했다. 가 볍고 유연한 활놀림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연주자다. 그를 두고 ‘시카고 트리뷴’은 “활을 든 마법사와 같은 팔로 악기에서 색깔을 끌어낸다”고 했고, ‘런던 타임스’는 “젊고 아름답고 놀라운 기술을 지녔고, 빛나고 서정적인 소리를 표현한다”는 호평을 내놨다. 사라 장과 비교해볼 때 산뜻한 표현력이 좀더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야니네 얀센 (Janine Jansen),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파보 예르비 (Paavo Jarvi),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2013









안네 소피 무터 (Anne Sophie Mutter)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지휘:정명훈,Chung MyungWhun,Tchaikovsky Violin Concerto



세 계가 인정하는 바이올린의 여제 안네 소피 무터는 1976년 루체른 페스티벌을 통해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카라얀 지휘 아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를린필과 협연하며 전 세계 클래식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 세계적인 바이올린 여제의 아름다운 동행 ‘안네 소피 무터

15세 때 DG를 통해 발표한 첫 음반으로 ‘올해의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 이후 60개가 넘는 음반을 발매했고, 이 중 ‘카르멘 판타지’는 DG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이후 30여 년이 넘게 ‘바이올린 여왕’의 자리를 지키며 최근까지도 전 세계를 돌며 투어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힐러리 한 (Hilary Hahn)-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 ,바실리 페트렌코 Vasily Petrenko, 로얄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쇼지 사야카(庄司 紗矢香,SAYAKA SHOJI)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유리 하투에비치 테미르카노프,Yuri Khatuevich Temirkanov.

5살 때,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한 쇼지






Violin: 사야카 쇼지(SAYAKA SHOJI)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Tchaikovsky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쇼지 사야카(庄司 紗矢香)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Violin: 사야카 쇼지(SAYAKA SHOJI) 정명훈지휘 Tokyo Philharmonic Orchestra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실황 연주와 이해-율리아 피셔 연주,Julia Fischer,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35,실황 연주와 이해,율리아 피셔 연주,Julia Fischer,Vasily Petrenko.Tchaikovsky Violin Conceto Op.35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Gheorghe Margineanu /Tchaikovsky-Violin Conceto, Op.35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Gheorghe Margineanu /Tchaikovsky-Violin Conceto, Op.35

Gheorghe Margineanu Play Tchaikovsky-Violin Conceto, Op.35.
Iasi Philharmonic orchestra, Gheorghe Margineanu - Solo, Valentin Doni Conductor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Cosmin-Horatiu Stoica(바이올린)

 "Paul Constantinescu" Symphony Orchestra; Conductor: Ovidiu Balan.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 35 레오니다스 카바코스(Leonidas Kavakos)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op. 35 하인리히 시프(Heinrich Schiff),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Patricia Kopatchinskaja)바이올린

Radio Kamer Filharmonie olv. Heinrich Schiff
Patricia Kopatchinskaja, viool
P. Tsjaikovski - Vioolconcert in D, op. 35
Zondagochtend Concert 3 oktober 2010 Concertgebouw Amsterdam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op. 35  하인리히 시프(Heinrich Schiff),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Patricia Kopatchinskaja)바이올린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Graf Mourja(바이올린)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 Viktor Tretiakov(빅토르 트레차코프),미하일 플레트뇨프Mikhail Pletnev,Tchaikovsky Violin Concerto

November 1994, Tokyo, Japan.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Allegro moderato ? Moderato assai (D major)
2.Canzonetta: Andante (g minor)
3.Finale. Allegro vivacissimo (D major)
Viktor Tretiakov - violin
Mikhail Pletnev - conductor
Russian National orchestra

Ноябрь 1994 года, Токио.
П.И.Чайковский, концерт для скрипки, ре-мажор, соч.35. Исполняет Виктор Третьяков, Российский Национальный оркестр, дирижер Михаил Плетнев.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 35 -Nitzan Bartana/지휘 Zubin Mehta





Pyotr Ilyich Tchaikovsky
The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The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Nitzan Bartana, Violin
Zubin Mehta, conducting
Recorded in Mann Auditorium
Tel-Aviv, Israel
October 10th, 2007












차이코프스키의 두 여인-성악가 이승안

 1876 년 말 차이코프스키의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폰 메크(Nadezhda Filaretovna von Meck, 1831~1894) 부인과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차이코프스키에게 경제적 원조를 했고, 1877년 차이코프스키는 그 보답으로 교향곡 제4번을 부인에게 헌정했습니다. 이 곡은 그 전에 발표한 3개의 교향곡을 훨씬 능가하는 역작이었으며, 교향곡 작곡가로서 차이코프스키의 역량을 보여준 것입니다.

 같은 해, 차이코프스키에게 그의 생애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역설적으로 그것은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상 대는 밀류코바 (Miliukova, Antonina Ivanovna Tchaikovskaya, 1849~1917)라는 28세 나이의 제자였습니다. 2주간의 신혼여행 중에 그는 그녀로부터 도망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9월 어느 날 밤 모스크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꾀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 해 9월 말 차이코프스키는 상크페테르부르크로 도망쳤고 결혼 생활을 끝냈습니다. 그 후 요양을 겸해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여행했습니다. 1878년 귀국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시 창작의욕을 회복하고는 폰 메크 부인의 원조로 생활비가 해결되자 음악교수직도 그만두고 작곡에만 전념했습니다.


1881 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별세했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여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기념하는「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란 제목의 피아노 삼중주를 작곡했습니다. <출처:CEO를위한클래식작곡가에피소드,이재규엮음,예솔>

< 성악가 Bass-Bariton 이승안 씨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와 Italia Parma Orfeo Academy, France 'Ecole Normal' de Musique de Paris를 졸업했으며 France Nice National Conservatoire를 수료했다. 현재 제주교대와 숭실대, 백석 콘서바토리에 출강하고 있다.>




악기의 왕은 피아노 였지만 피카소나 샤갈등 명화에 등장하는 악기들은 대부분 바이올린이 독차지하고 있다.
바이올린은 파가니니나 사라사테등 수많은 천재들을 탄생시켰고 명연주, 명곡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가니니등 바이올린의 대가들이 남긴 곡들도 유명하지만 베토벤이나 브람스등 작곡가들이 남긴 곡들도 호평을 받고 있다. 파가니니, 사라사테등 연주가들이 남간 작품들이 기교적이고 연주자 중심으로 흐른데 비해 이들 작곡가들의 작품들은 풍부한 시상이 일품이다.
비니엡스키, 시벨리우스, 생상스등도 바이올린에서 명 협주곡을 남겼고 비발디의 '사계'는 새삼 거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협주곡의 대명사와 같은 곡이다.


injoo Cho 조진주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1st Mov. Allegro moderato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ㄴ 영화<투게더>의 앤딩부분이다.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의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대합실에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최고의 연주를 들려준다.

차 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2003년 초에 개봉했던 바이올린 신동에 대한 중국 영화 "투게더"에 아주 중요한 곡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바이올린 콩쿨에 대비하여 연습하는 곡이 바로 이 곡의 3악장이죠. 힘이 넘치는 피날레 부분을 영화의 결말부에서 정말 잘 활용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며 힘껏 내리긋는 활 동작과 힘이 넘치는 협주곡의 조화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영화용으로 Armand Amar가 편곡한 것이라 한다



Le concert - Tchaikovsky Op.35


영화 <더 콘서트 The Concert> 안드레이 필리포프다 와 각기 다른 사람과 악기가 모여 이루는 작은 세계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avid Oistrakh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뛰어난 기교와 음색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다. 5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1926년 오데사 음악원을 졸업한 뒤 1933년 모스크바에서 데뷔했다. 소련과 동유럽 전역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1937년 외젠 이자이 바이올린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1934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1942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20세기 러시아 작품들과 바이올린 고전 연주곡을 녹음한 음반을 통해서 서유럽과 미국에 처음 알려졌다. 1951년부터 유럽 전역을 순회공연하기 시작했고 1955년부터는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들 이고리 오이스트라흐(1931 태어남)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대를 이은 위대한 연주자라는 평을 받았다. 이고리 오이스트라흐는 1952년 폴란드 포즈나인에서 열린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 1등상을 받았고, 유럽과 미국을 순회공연했으며 때로 아버지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합동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오이스트라흐

20세기 서방세계에서 하이페츠가 그 큰 날개를 펼쳐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를 가리고 있을 때, 그 그늘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던 또 다른 봉황이 있었다. 그는 바로 구 소련이라는 철의 장막에 갇혀 있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Fyodorovich Oistrakh, 1908~1974)였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전통인 레오폴드 아우어 악파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는 19세기 재정 러시아 시대로부터 내려온 옛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으로 ‘새로운’ 러시아 악파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예술가로서 풍부한 감수성과 남다른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로 끌어당기기보다는 자신이 음악 그 자체로 뛰어들어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한편 까다로움과 예민함의 극한을 달렸던 아우어의 제자들과는 달리, 부처와도 같이 후덕한 외모와 인자한 품격 때문에 오이스트라흐는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덕이 높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흥어시 입어예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논어)”의 현현(顯現)으로 오이스트라흐를 꼽는다 하더라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연주 예술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훌륭했던 예술가


예후디 메뉴힌은 “그의 음색은 저음역부터 고음역까지 순수하고 깨끗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람됨마저 순수하고 깨끗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메뉴힌은 소련과 런던을 오가며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바흐를 연주했는데, 그 또한 오이스트라흐의 음악은 물론이려니와 인품까지를 높이 평가했다. 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은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갑자기 세계는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하곤 했다”라고 표현하며 오이스트라흐가 가지고 있는 그 범접할 수 없는 고유의 아우라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사실상 오이스트라흐는 195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서방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는데, 당시 많은 청중들과 비평가, 연주자들 모두 그의 놀라운 연주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하이페츠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바이올린 세계의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각자의 빛을 발산하며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정확한 운지를 바탕으로, 그의 레가토는 비할 바 없이 유연했고 아주 짧은 음표에서도 맵시 있는 음향을 만들어내는 활놀림은 건조하다기보다는 믿음직스러웠다. 더 나아가 시종일관 긴장감과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격정의 순간에 그가 토해내는 클라이막스는 고귀한 영혼의 거룩한 일갈과도 같은 엄숙함에 가까웠다. 한편 그는 만년에 접어들며 은은한 은빛 칸타빌레를 선보이곤 했다. 이는 이전 시대의 슬라이딩 기법 혹은 현대의 벨칸토적인 칸타빌레와도 전혀 다른, 까닭 모를 투박한 질감과 현대적인 날카로움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또한 만년의 그가 호흡을 맞추었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의 그 엄청난 에너지와 동등한 입장에서 앙상블을 이룰 수 있었던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이것은 단지 그의 스타일이나 스케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음악 그 자체에 몰입하여 그 이치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치열한 음악혼을 소유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이미 소련의 명실상부한 단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차대전 이후 소련에는 아우어의 제자 가운데 가장 특별한 재능과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미론 폴리아킨(Miron Borisovich Polakin, 1895~1941)이 일종의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때이른 죽음으로 서방세계는 그의 진가를 알 기회 조차 가질 수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출처: Braun at de.wikipedia>

 

한편 진정한 인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컬어졌던 보리스 골드슈타인(Boris Goldstein, 1922~1987)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비에트 바이올린계를 양분할 것으로 기대가 높았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는 거의 잊혀진 사람 취급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왕성한 나이에 요절해버린 레오니드 코간(Leonid Borisovich Kogan, 1924~1982)은 오이스트라흐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을 구사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올레그 카간(Oleg Moiseyevich Kagan, 1946~1990)은 오이스트라흐와 비교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거대한 독수리의 비상


오 이스트라흐는 1908년 9월 30일 우크라이나의 남부 도시인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유태인으로서 아버지인 다비드 쾰커는 문서정리의 일을 맡은 하급관리이자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인 이사벨라 스테파노프카는 오페라 극장의 단역가수 출신으로서 어린 오이스트라흐를 자주 음악회에 데리고 다녔다. 다섯 살 때 그는 8인치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선물받은 뒤 교습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스승은 바로 아우어와 함께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를 대표하는 표트르 스톨리아르스키(Piotr Stolyarsky)였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제자로 나탄 밀스타인을 꼽을 수 있는데, 밀스타인이 콘서바토리를 졸업할 무렵인 1914년에 오이스트라흐는 처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23년 오데사 콘서바토리에 입학한 뒤 1926년까지 학업에 열중했고, 그 해에는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과 루빈스타인의 비올라 소나타,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등의 프로그램으로 첫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차이콥스키의 수제자였던 작곡가 글라주노프가 이곳을 방문했다가 오이스트라흐의 음악성에 감수성에 매료되었다. 그는 오이스트라흐에게 “키예프에서 내 지휘로 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그는 이 행운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니콜라이 말코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도 협연을 하여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협연하고 있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톨리아르스키의 교육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제자들에게 당장 개선해야 할 기술적. 예술적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낱낱이 일깨우는 반면, 그것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맡겨두었던 것이다. 천재만을 받아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통제해야 식성이 풀렸던 아우어의 교육방식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서, 오이스트라흐가 작품을 탐구하여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던 것은 바로 이 당시의 학습에 의해 완성된 스타일이었다. 한편 1928년에는 피아니스트 타마라 로타레바를 만나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세계로 그 날개를 필 준비를 마쳤다. 1934년 모스코바 콘서바토리에서 선생의 자리를 얻게(1939년에는 교수로 발탁된다) 되었고, 1935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그리고 비네야프스키 콩쿨에서 2위를 했다. 바르샤바에서 열린 이 비네야프스키 콩쿨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당시 1위는 지네트 느뵈, 4위는 보리스 골드슈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승에 대한 갈망은 1937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에서 대상을 차지했고 국제적으로도 그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 당시 그는 1927년 제1회 쇼팽 콩쿨에서 1등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Lev Oborin)과 평생에 걸친 파트너쉽을 이루며 첼리스트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세비츠키(Sviatoslav Knushevitsky)와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의 관심과 애정을 받기도 했다.


만약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그는 이 시기부터 세계를 누비며 하이페츠의 대항마로서 그 명성을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당의 지시로 공장과 병원에서 연주를 펼쳤고, 배급이 끊긴 레닌그라드 대공방전의 와중에 그는 바로 레닌그라드에 남아 항쟁 의지를 북돋우는 콘서트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42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음과 동시에 미아스코프스키와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받고, 프로코피에프의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으로 편곡을 의뢰하여 초연(1944)했으며 쇼스타코비치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의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헌정받아 초연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찾아온 영광의 시기


전 쟁이 끝난 뒤 그가 처음으로 철의 장막을 너머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9년 헬싱키에서, 그리고 1951년 이탈리아를 거쳐, 1952년에는 독일, 1953년에는 프랑스, 1954년에는 영국에 이어 1955년에는 미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며 그 존재감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1959년에는 지휘자로도 활동하기 시작했고 1967년에는 은퇴를 한 오보린의 뒤를 이어 리히테르와 전설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1960년대는 오이스트라흐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절이었다. 매번 매진사례를 거듭하는 연주회의 횟수도 그러하거니와 언론으로부터의 과도할 정도의 찬사, 청중들의 히스테릭할 정도의 열광이 이를 반증해 준다. 더군다나 그는 여러 메이져 음반사들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전설로 남게 될 음반들을 레코딩하기에 이른다.

 

DG에서는 바흐의 협주곡과 베토벤의 로망스, 브람스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며 바이올린 연주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적 스타일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미국 CBS(현재 SONY Classical)에서는 유진 오먼디와 함께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드미트리 미트로풀러스와 녹음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DECCA에서는 힌데미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모차르트의 [콘체르탄테] 등을 녹음하며 역사적인 명반을 남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분위기와 날카로운 조형미를 겸비했던 그는 베토벤과 같은 독일 고전 레파토리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평생의 동반자인 오보린과 함께 Philips 레이블에서 남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반은 그 이상의 추천반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서, 지금까지도 모든 면에 있어서 절대적인 극찬을 받고 있는 희대의 명연으로 그 가치가 높다.


이 뿐만이 아니다. 특히 EMI에서 남긴 녹음들은 한결같이 결정반으로 추앙하기에 손색이 없을 명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협주곡과 같은 대작에서 오이스트라흐의 위대함은 빛을 발한다. 우선 조지 셸의 지휘로 녹음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2중 협주곡](로스트로포비치, 첼로)은 그의 대표적인 명연으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고, 오토 클렘페러와의 브람스와 앙드레 클뤼탕스와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또한 메뉴힌의 음반과 자웅을 겨루는 희대의 명연이다.


지휘자 프란츠 콘비츠니(중앙)와 아들 이고르(오른쪽)와 함께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출처: Zimontkowski at en.wikipedia>

 

식스틴 얼링과의 베토벤과 시벨리우스 협주곡 또한 모노 시대부터 명반으로 일컬어졌던 음반이며, 오보린과 크누세비츠키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과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녹음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가운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로 로스트로포비치와 리히테르가 한 자리에 모인 베토벤 [3중 협주곡] 녹음이야말로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포스와 치열한 예술혼이 어우러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역사적인 레코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리히테르와 도쿄에서 실황으로 남긴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2, 3번]과 프랑크,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등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로제스트벤스키와 키릴 콘드라신 등의 지휘자들과 함께 녹음한 멜로디야(Melodiya) 음원들도 훌륭하다.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아들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연주, 녹음하기도 했고, 자신이 지휘를 맡아 아들의 반주를 도맡기도 하며 가족애를 전면에 드러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로베르 카자드쥐가 아들과 부인과 함께 하거나 메뉴힌이 자신의 누이와 함께 연주한 것 혹은 길렐스가 자신의 딸과 함께 협연한 것과 더불어, 오이스트라흐 역시 당당히 ‘가족 음악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음악과 청중에 대한 헌신


당 시 많은 소련 내의 예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서방 세계로 망명했지만 오이스트라흐는 이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던 프랑스의 브루노 몽생종은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호모 소비에티쿠스(소비에트적 인간)라는, 다소 비난조로 들리기도 하는 언사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의 조국은 그로 하여금 당에 복종하라고 요구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음악과 청중에 대한 헌신 뿐이었다. 그는 일체의 정치적인 고려와 권력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예술과 인간 그 자체의 순수함과 이치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리히테르를 들 수 있겠는데, 오이스트라흐에게 있어서 소비에트 체제는 자신을 위한 최선의 환경은 아니었을지언정 조국과 전세계 청중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음악가로서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한 위대한 음악가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왼쪽)과 협연을 지휘하고 있는 오이스트라흐

 

 

1968년은 그의 60번째 생일로서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그레이트 홀에서 게나디 로제스트벤스키의 지휘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성대한 자축연을 가졌다. 이제 오이스트라흐는 루마니아의 에네스쿠나 영국의 메뉴힌,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하이페츠처럼 소련을 대표하는 바이올린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며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당시 모든 소련의 동료 음악가들이 보드카로 인해 그러했듯이, 그는 심장 질환이라는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리히테르와 리사이틀을 열거나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등 새로운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지만, 이는 그에게 있어서 죽음을 앞둔 마지막 산책이었을 뿐이다. 1974년 암스테르담에서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브람스 사이클을 진행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하릴없이 이곳에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모스코바로 돌아간 뒤 저 성스러운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제 그는 저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청중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약력
1923 러시아 오데사 콘서바토리에 입학
1939 러시아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교수로 발탁
1935 소비에트 연방 경연대회 우승
1935 비네야프스키 콩쿨 2위
1937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콩쿨 대상
1941~1963 오보린, 크누셰비츠키와 함께 오이스트라흐 3중주단 활동
1942 스탈린상 수상
1955 첫 미국 공연
1967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와 듀오 활동


David Oistrakh, 1908~1974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Oistrakh)

   다 비드 오이스트라흐는 살아 생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하이페츠에 버금가는 '2인자'이기만 했을까? 지난 96년 3월호 '객석'의 집중 탐구기사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세계'를 보면, 음반부분에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을 평론가와 칼럼니스트의 투표로 선정한 것을 볼 수 있다.

베 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반으로는 샤를르 뮌슈 지휘, 하이페츠 연주의것 (보스턴 심포니, RCA)이 선정되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오이스트라흐(클뢰탕스-프랑스 국립방송 교향악단, EMI)이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도 역시 하이페츠의 연주(라이너- 시카고 심포니,RCA)가 오이스트라흐(오먼디-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CBS)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브람스 협주곡에서는 하이페츠가 아닌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콘드라신-필하모니아,EMI)가 명반으로 선정되었고, 오이스트라흐(클렘페러-프랑스 국립방송 교향악단)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 모두는 다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음반이지만 오이스트라흐는 불행하게도 어느 하나에서건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 지만 세상에는 협주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선 아직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만한 것을 찾아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오이스트라흐는 하이페츠같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그 연주의 완숙도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이페츠는 '너무 완벽해 차갑다'는 평을 자주 들었으나 오이스트라흐는 그 반대로 '따뜻한 인간미가 넘친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위에서 말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도 하이페츠의 것을 '불타는 빙산'에 비유한다면 오이스트라흐의 것은 '얼음기둥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는 금빛 물고기'에 비할수 있을 것이다.

오 이스트라흐의 연주는 내향적, 사념적이고 절제미가 돋보이며, 폭 넓은 레가토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이페츠의 연주특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지만 모든 면에서 하이페츠에 뒤지는 오이스트라흐의 변호를 위해 누군가가 지어내 준 것은 절대 아니다. 음악은 언제나 치열하고 숨가쁘게 몰아붙여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스트라흐의 미덕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발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자리잡을수 있었다.

오 데사 태생의 오이스트라흐는 렝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오데사 음악원의 또 다른 명교수 스톨리알스키에게 배운 그는 아우어파와는 다른 러시아 바이올린 인맥을 형성했다. 물론 테크닉은 하이페츠를 제외한다면 최고의 수준이었다.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 2위, 1937년 이자이 국제 콩쿠르 우승 등으로 구소련 밖에서 알려졌고, 길렐스의 경우와 비슷하게 구소련이 정책적으로 서구에 소개하는 연주가로 지목되어 많은 혜택을 누렸다.

레 프 오보린과 리흐테르와의 트리오를 중심으로 한 실내악 활동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져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만년에는 지휘대에도 서는 모습을 보였으나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교육분야에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 수 있겠다. 기돈 크레머와 올레그 카간 등이 그가 길러낸 제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는 그의 아들이다.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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