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晉州城)/촉석루(矗石樓)
진양호
진주 청동기문화 박물관
1.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을 말한다.
특히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 논개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① 제1차 진주싸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수천 죽제(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에서는 의병대장 곽재우의 응원이 적과 아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② 제2차 진주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우키타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반성·의령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의병장 고종후·이계련·민여운·강희열,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이끈 3,400명의 병력과 6∼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우리 군과 적군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진주성 입구
진주성(晉州城)
경남진주시 남성동(南城洞) ·본성동(本城洞)에 있는 성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내성의 둘레1.7km, 외성의 둘레 약 4km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3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城內洞)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 고려 말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하였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진주성 지휘본부 촉석루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왜장을 안고 순국한 의암 현장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논개를 추모하는 의암비
진주의 유래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 되었으며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양호(남강댐)
산청의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진양호는 1969년 완공하여 1999년 보강 공사를 끝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리산의 맑고 깨끗한 물은 1급수의 수질을 자랑하며 서부 경남의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로 쓰일 뿐만 아니라 홍수조절 역할과 전력생산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진양호는 진주시민 및 서부 경남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주변에는 우약정, 남인수 동상, 전통예술회관, 동물원, 진주랜드, 가족쉼터, 일년계단, 이재호 노래비 휴게전망대, 물 홍보관, 아시아 레이크사이드 호텔, 여관, 식당 등의 위락 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진양호 전망대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진주 대평리 옥방 유적지에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이 있다.
수차례의 발굴 결과 대평리에서만 400동이 넘는 집터와 6곳의 환호, 4000제곱미터가 넘는 밭이 발견되었다. 아낌없이 주는 강이 있어 이런 대규모의 취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청동유물은 한 점도 수습되지 않았다고 한다. '옥'의 산지여서 옥을 가공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청동기는 수습되지 않아도 청동기 시대의 토기, 석검, 집자리, 청동기 시대의 밭터, 무덤자리로 확인되었다.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진주 청동기문화 박물관
2013년4월21일/파인아트 및 동향展 회원 스켓치여행/유적지 재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