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는 법/박경리
내 것 아니면 길가 개똥같이 보인다
단단한 땅에 물 고이고
오늘 먹으면 내일 걱정을 해야 한다
항상 하던 어머니의 말이다
또 한마디 하는 말이 있었다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돈을 지니고 가면 배가 안고프다
그 말 그대로 살다 간 어머니
남의 것 탐내거나 부러워한 적 없었고
쉬어서 못 먹는 밥도 씻어서 끓여 먹고
가을에는 일 년치의 땔감 양식을
장만하지 않고는 잠이 안 오는 성미
하여 태평양전쟁 말기, 육이오전쟁 때도
우리는 죽 아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돈은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장무새는 충분하게, 밑반찬은 빠짐없이
늘 준비가 돼 있는 상태였기에
시장 출입은 한 달에 두세 번 할까 말까
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를 들었지만
평소에는
쓸 만큼 손수건에 돈을 싸서
어머니는 그것을 꽉 쥐고 다녔다
필요 없는 것은 사지 않았으며
다만 옹기전 앞을 지날 때는
예쁘고 야문 단지를 골라 들고
한참을 살피는데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듯
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장독대 항아리는 윤이 나서 반짝거렸다
방 안의 이불장에도 비단 이불이 그득했다
이불의 몇 채는
내 혼수로 준비한 것이었지만
어머니는 말하기를
여자란 음식은 아무거나 먹어도
잠자리는 가려서 자야 한다
그래서 이불 호사가 그리 대단했을까
깊은 겨울에도 우리 모녀는
온 집 둘레게 장작을 쌓아 놓고도
불 안 땐 냉방에서 잠을 잤다
이불 요를 두 채씩이나 깔고 덮고 잤다
사막 같은 집 안이었다
장독대와 장롱 속의 비단옷
이불장의 비단 이불 그것 말고는
색채도 모양도 없는 살풍경이었다
부엌에는 막사발 몇 개
겨울에는 놋그릇이었지만
소반 물독 가마솥 두개
그 외에 기억에 남는 세간이 없다
길이 잘 난 가마솥은
메주콩을 삶는다듲니 간장을 대린다든지
빨래를 삶고 손님이 온다거나
그럴 때만 사용했고
대개는 작은 법랑 냄비에
장장를 성냥개비처럼
칼로 잘게 쪼개어 밥을 지었다
평소에는 밑반찬 한두 가지
된장국 김치가 고작인 밥상
더 이상
절약할래야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어머니도 돈을 아끼지 않을 때가 있었다
절에 시주하는 일
길 가다가
다리 놓은 공사라도 마주치게 되면
상당한 금액을 희사했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닐 다리인지라
시주는 큰 공덕이 되는 것은 물론
죽어서 삼도천 건널 때도
도움을 받는다고 믿는 까닭이다
어머니는
남과 나누어 먹는 데도
인색한 편은 아니었다
손이 작으면 못쓴다 그러면서
이숙 간에 고사떡도 듬뿍 담아 돌렸고
여름에는 우무콩국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언제였던가
박재삼 시인이 세상 떠나기 전에
왕십린가 청량리,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아프다는 소식 듣고
찾아간 일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박 시인 댁네가
결혼해서 처음 서울 왔을 때
할머니가
된장 고추장 챙겨 주더라는 말을 하며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머니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하기는 정릉 살 때
산동네 판잣집 사람들에게
된장 간장을 곧잘 퍼 주었고
일거리가 없는 힘든 겨울철
출산했다는 소식 들으면
연탄과 미역을 갖다 주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에도 배고픈 사람
데려다 밥 먹여 보내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같은 자비의 행위가
내게는 정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불교적 계율을 지켰다 해야 할지
심하게는 형식적이었다 할 수도 있고
감동이 없는 성격 탓이었을까
다정하게 말할 줄 몰라 그랬는지
어머니는 받아야 할 것은
반드시 받아 냈고
줄 것은 또 어김없이 돌려주었다
물건을 사거나 돈거래 때
셈이 발못되어 돈이 남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돌려주었다
육이오전쟁이 생각난다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았는지
기적 같기도 하다
어머니의 깐깐한 그 성미 탓으로
우리 식구가 사지에서 구원된 일
아득한 옛날인데 어제 일 같기도 하고
당시 우리는 흑석동에 살았다
한강 다리가 끊어지던 밤
날이 새가 어머니는 옆집 가게에서
피난에 필요한 부식 같은 것을 사고
그간에 밀린 외상값도 갚고
관악산을 향해 우리는 떠났다
이내 인민군은 마을을 점령했고
남진을 계속하는 상황
우리는 피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반동을 색출하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마을을 내리누리고
옆집 가게는 반장 집이기도 했기에
아저씨는 진작부터 피신했으며
나머지 식구들은
무덥고 긴 여름 동안
수월찮이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가을바람과 함께
사태는 반전했다
국군의 입성은
또 한 번 세상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빨갱이는 씨를 말여야 한다는
구호가 충천했고
사람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부역자들을 잡아서 국군에게 넘겼다
무리 중에 가장 과격하고 앞장선 사람은
반장네 식구들이었다
우리 사정은 그들과 반대였다
직장으로 내려간 남편은
좌익이라 하여 인천서 체포되었고
빨갱이 가족인 우리가
무사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집은 적산으로 지목되어
가재도구 일체를 봉인했고
국군이 총대를 디밀고
집을 비우라 했다
속절없이 거리로 내쫓길 판국에
반장네 식구들이 달려왔다
이 집은 확실치 않으니 다른 데로 가자
하여 우리는 위기를 모면했다
좌익에 대한 증오심이
골수에 사무친 반장네 식구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
난리가 나니까 모두 달겨들어
가게 물건을 약탈해 가는데
외상값 갚고 피난 간 사람은
영주네 밖에 없었다 하며
시민증도 내어 주었고
일사후퇴 때에는
남편이 어느 곳으로 이감될지 몰라
우리는 피난길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는데
반장네는 전화 속에 남은 우리를 위해
많은 식량을 건네주고 떠났다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흘러
지금은 그들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지만
생각이 나곤 한다
각기 다르게, 그러나 모두 한길을 가는
목마른 삶의 모습을
생각하는 밤이 그 얼마인가
나는 어머니가 목청을 돋우어
남과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삐거덕거리기 마련인
기봉이네하고도 다투는 것을 못보았다
사람들이 남의 험담을 하면
세상에 숭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했고
말소드레기 일으키는 것들
상종 안한다는 말도 했다
말소드레기란
말을 옮겨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뜻인데
어머니는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호기심도 없었다
밥 먹고 할 일 없는 것들,
내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여하튼 어머니는 매사에 소극적이며
남에게나 지신에게도
과소평가를 원칙으로 하여
남을 추켜세운다거나
자기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꿈을 꾸는 사람에게
일이란 돼 봐야 안다는 말로
번번이 찬물을 껴얹었으며
나 역시
어머니의 방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남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아이로
아니 남보다 뒤쳐지는 아이로
유년기의 나의 감성은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새와도 같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
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
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
유배기 같은 정릉에 살았다
천지 간에 의지할 곳 없이 살았다
수수께끼는
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 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뼈가 으스러지게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
태평야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
그런 세사은 처음이었다
약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
아 참, 그 얘기는
저승에나 가서 풀어 놔야지
그 끔찍한 사실들을
측천무후인들 믿을 것인가
그는 그렇고
역적은 삼족을 멸한다는
옛날 관념에 사로잡힌 친지들고
우리를 뿌리치고 가는
그렇지 그 무렵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길에 유일한 호사는
수도 없이 많은 부적이었다
시신을 덮고도 남는 큰 부적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부적이 수의와 함께 쏟아졌다
그중에는 동그랗게 찍어 낸 종이돈
삼도천을 건널 때 쓰려고 했는가
수월찮이 많았다
쓸쓸한 장례였다
어머니를 화장하고 돌아온 날, 그 밤
딸고 손주는 원주 시가로 내려가고
아무도 없이 혼자 남은 밤
외등을 켜 놓고
나는 뜰에서 돌을 깔았다
경국사 뒷산이
씻꺼멓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어머니 방 쪽에서
소독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는
꿈같은 하루
어머니의 죽음을 일깨워 주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유고 시집 중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유고 시집은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어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고, 2008년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2008년 5월 5일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발견한 것을 박경리 선생님의 따님이신
김영주 님께서 2008년 6월에 마로니에북스 출판사에서 발간하신 것입니다.
따님 김영주님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남기신 39편의 시를 모아 책으로 묶었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가다듬고 가다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 가면서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습니다.
늘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글 쓰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변함없이 수십 장, 수백 장의 파지를 내시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들은 그다지 고치시지도 않고 물 흐르듯 써 내셨습니다......."라고요.
잘 알고 계신바와 같이 사위는 "김지하"시인입니다.
유고 시집 중에서 가장 긴 글(60쪽~73쪽)이더군요.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음은
그 옛날 화롯불에 앉아 듣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이야기 같아서입니다.
오늘이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입니다.
기분 좋은 날, 웃음이 많은 날 되세요.
=적토마 올림=
첫댓글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신 후,
저의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애비 없어 버릇없다"라는 말을 들을세라 몹시도 엄격하셨습니다.
꾸중하시고 뒤돌아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