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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는 것이 씨앗이 된다
2월 20일 큰스님께서 두 번째 읽어주시는 화엄경 초발심공덕품이 끝났다.
‘견문위종이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종자가 된다. 이 작은 씨앗이 어느 때 봄을 만나면 활짝 꽃으로 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날 마지막에 읽어주신 부분은 ‘일체 중생들의 모든 고통을 다 없애려고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오로지 오로지 보리심을 빨리 내는 것뿐이다’라는 강설문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날마다 화엄경을 읽어주라’고 하셨다.
코로나 때문에 시작된 유튜브 화엄법회는 작년 2월 23일 큰스님께서 고관절을 다치시고 멈춰졌다가 5월 25일 화엄전으로 돌아오시면서 방송이 재개되었다. 7월부터는 주말도 빼놓지 않고 법문을 하셨고, 10월부터는 쉬는 날 없이 법문시간을 아침 8시로 고정하셨다.
이날 초발심공덕품 법문을 함께 들은 청중은 164분이었다.
화엄경을 듣는 것만으로도 ‘보리심을 낸 것이다’ ‘그 무엇하나 헛된 것은 없다’라고 큰스님께서 일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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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법회가 있는 날은 설날을 며칠 앞둔 날이어서 화엄전에 인사를 갔는데 여초스님과 상좌이신 연오스님이 계셨다.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문수선원으로 내려왔는데 재무스님이 현관앞 주차장에서 출발하시려다가 화엄전에 가자고 하셨다.
같은 날 두 번째로 올라간 화엄전에는 회장스님도 계셨고, 원봉스님과 경옥스님도 계셨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는데 화엄전은 따뜻했다. 마루바닥에 열선을 설치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역시 훈훈하다’고 스님들이 말씀하셨다.
문수선원 화엄법회에 참여하시는 스님들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걱정도 하시고, 큰스님께 이런저런 하소연도 하시는 서로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큰스님도 스님들도 자주 웃으셨다.
경옥스님이 해인사 삼선암에서 스님들과 직접 만드신 한과를 가져오셔서 큰스님이 모두에게 보여주시고 맛도 보게 해주셨다. 조청까지 직접 고아서 만드시는 한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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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선원에 새로 오신 스님들도 계셨다. 스님들 숫자가 줄어든 대신 쾌활하고 적극적이게 문답식으로 수업에 참여하셨다. 쉬는 시간에는 QR코드 찍는 법을 다시 숙지하시려고 서로 묻고 답해주시느라 모두 분주하셨다. 문수선원에 신학기 같은 생동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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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게으름을 떨칠 수 있을까요?”
법회가 끝난 뒤에 용학스님께 여쭤보았다.
“인내심이 있으면 부지런해져요. 찬찬히 잘 살피면 인내심이 생겨요.”
용학스님께서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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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경전철에서 내린 순간, 진눈깨비가 내려 보이는 곳마다 은세계로 반짝였다. 경전속 보석 나무 같은 은나무들, 단 한 순간의 기적이었고, 다음날 아침엔 곧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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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화엄법회, 문수선원에서는 부처님이 출현을 마치시고 보현보살이 이세간품을 설하시고, 유튜브 화엄법회의 청중들은 초발심공덕품을 마쳤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三
托法進修成行分 第三
成行因果周
第八會 一品 二千行門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一
일기가 굉장히 불순하다. 비가 오고 쓸쓸하고 이런 날에는 뭘 해야 하는가? (대중스님들: 화엄경) 다 들통났다. 화엄경.
삶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는 먼 길 천천히 가서 화엄경 도표를 보고, 보탑사는 찌짐을 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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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출현품에서 드디어 부처님, 여래가 탄생하셨다.
찰나제삼매가 모든 부처님의 근본삼매라고 한다.
바깥으로 표방할 때는 입법계품에 가서 사자빈신삼매가 있지만, 십정품에서 부처님이 찰나제삼매에 드신 것이 쭉 이어져 패스나 토스를 한다고나 할까, 여기 이세간품으로 이어진다. 여래가 이미 출현했으므로 당연히 세간의 모든 욕심을 떠난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이세간(離世間)의 형성이 따르는 것이다. 처염상정이 무르익어버리면 다시 법계로 들어가는 입법계가 된다. 경전 순서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三
먼저 제목부터 대방광불화엄경 권제 53
53권부터 59권까지가 이세간품 일곱 권에 해당한다.
화엄경은 크고 굵직한 뭉치들이 한 네 군데가 있다.
세주묘엄품이 다섯 권, 십지품이 여섯 권이다.
십회향품은 열한 권 가까이 열 권 반쯤 되는데 제가 일부러 뺐다.
십지품이 여섯 권, 그리고 지금 중요하게 한 분계점을 넘어가는 이세간품이 일곱 권, 입법계품이 스무 권 반, 스물 한 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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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한 대목이 완전히 바뀌니까 어른스님께서 과목을 쳐놓으신 것을 한번 짚어보겠다.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 제삼(第三)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 이렇게 되어 있다.
이제까지 십지품부터 십정품, 십통품, 십인품, 여래출현품까지 보여준 깨달음의 세계, 구체적으로 그러한 법이 무엇인가? 보현행원이다.
화엄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보현행원을 구체적으로 진수(進修) 정진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나하나 수습해서 익히면서 성행(成行)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행을 이루고, 각행(覺行)이 원만한 것이다. 그 원만한 행을, 인격체로 만들어가는 품이 지금 이세간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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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법진수성행분 제삼, 이세간품은 세 번째라고 했는데 그 전에 제2는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이었다.
수인(修因)의 인(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수준에 따른 바라밀행을 닦는 것이다.
십신의 바라밀, 십주 바라밀, 십행 바라밀, 십회향 바라밀, 십지 바라밀, 그러한 인(因)을 통해 등각(等覺)까지 닦은 것이 차별인(差別因)에 해당한다. 묘각(妙覺)에 가면 차별과(差別果)다.
그다음에는 보현행품과 여래출현품이 평등인과(平等因果)다.
그러한 인을 닦아서, 보현행원에 대해서, 이 마음의 이(理)와 사(事)에 대해서, 바깥 내외의 그런 모양, 인연 생멸의 무상한 모습과, 진여의 불생불멸한 모습을 여실히 챙기는 것이 수인(修因)이다.
집착 없는 법성이 공한 줄 알고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하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 제법이 공한 줄 알고, 일체 제법을 닦고 열심히 중생교화에 힘쓴다. 이런 대목들이 수인계과다.
계과(契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과가 계(契)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계합한다는 뜻이다.
보살행, 보현행원을 닦아서 부처님의 결과, 깨달음의 복덕과 지혜에 계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내는 것이 수인계과생해분(修因契果生解分)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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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락은 무엇인가? 거과권락생신분(擧果勸樂生信分)이다. 무조건 믿어야 되는 것이 첫 번째다. 그것을 우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의 첫 여섯 품을 본지풍광이라고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였다.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세계성취품, 화장세계품, 비로자나품까지 부처님의 의보(依報)와, 부처님께서 의지해서 사시는 기세간의 국토와 부처님 당신의 지정각세계, 깨달음의 세계와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부처님의 의보와 정보(正報)에 대해서 신토불이에 대해서 국토와 법신에 대해서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 삼세간이 원융한 것을 1회차 설법에서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그 대목을 우리는 거과(擧果)라고 한다. 거(擧)를 영어로 말하자면 ‘포 이그잼플(for example), 예를 들자면, 열거하자면, 예시를 들자면’ 이런 뜻인데 거과(擧果), 과를 들었다. 무엇을 들었는가? 불과(佛果) 부처님의 결과물을 들었다.
‘진심의 자리는 이러하다’ 라고 세주묘엄, 여래현상, 보현삼매, 세계성취, 화장세계, 비로자나품까지 부처님의 결과물을 보였다. 깨달음, 시성정각의 결과물을 가지고 ‘중생들아 그대들도 똑같은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다. 중생과 부처와 법,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평등해서 차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 거과권락(擧果勸樂),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낙을 권하는 것이다. 열반락(涅槃樂) 또 여러 가지 수행의 낙을 취해라, 하는 것이 거과권락생신(擧果勸樂生信)이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 반드시 결정적인 확신을 가진 믿음을 내라’ 하는 대목이 1회차 설법으로 여섯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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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삼십 한 품을 가지고 2회차부터 몇 회차까지 했는가? 7회차까지 했다. 거기까지가 수인계과생해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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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비로소 탁법진수성행분에 들어간다.
모든 이론적인 조건, 도면 설계는 끝났으니까 실질적으로 기초공사를 짓고 여기서는 ‘부처님이 깨달은 뒤에 우리가 뭘 하느냐?’‘깨달은 뒤에 보현행원을 해야 된다’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
이세간품 전체가 보현행원에 대해서 그 수준에 맞춰서 적나라하게 200가지 질문을 보혜보살이 하고 2천 가지 답을 보현보살이 한다. 이것이 나오기 전에 그러한 조짐이 7회차 설법에서 있었다.
7회차에서 등각설법을 할 때 보안보살이 부처님께 여쭤보고 부처님은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니 누구인가?’
부처님하고 동급이 있는데 보현보살이었다.
‘어디 계십니까?’
‘여기 계신다.’
‘안 보이는데요?’
‘잘 찾아봐라.’
급이 같아야 보이는데 급이 안 같으니까 절대 볼 수가 없다.
선재동자가 덕운비구를 만나러 갔는데, 문수보살이 거짓말을 하거나 헛말씀을 하실 분이 아닌데 ‘그 승락국(勝樂國) 묘봉산(妙峯山)에 가면 덕운비구(德雲比丘)가 계실 것이다. 그 선지식에게 의심 없이 찾아가서 공부를 해라’ 했는데도 선재동자가 일주일 동안 이 산 저 산 아무리 찾아다녀도 덕운비구가 안 보였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선재동자가 마음을 탁 내려놓고 껍데기가 좀 벗겨지고, 눈꺼풀 벗겨지고 나자 갑자기 누가 보였는가? 덕운비구가 건너편 산에서 서서히 보이더라.
병아리가 달걀을 낳을 수 있는가? 병아리는 솜털로 살아야 된다. 어느 정도 지나고 급이 되면 자연적으로 만나게 되고 알아지게 된다.
덕운비구가 그런 것처럼, 십정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찰나제삼매에 드시고 나중에 보안보살이, 보안이라고 하는 이는 모든 연기법 인연 생멸법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 보안인데, 그 생멸법, 유식을 꿰뚫고 있다 하더라도 보현보살을 만날 수가 없었다.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무념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가 부처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보안보살이 아승지삼매에 들어가고, 백천 삼매에 들어가고, 아무리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보현보살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보현보살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보현보살은 삼세제불의 모든 행을 품고 있는 분이라서 함부로 막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억지로 생심으로 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그런 뜻이다.
그래서 십정품 끝에서야 보안보살한테 하는 보현보살의 법문이 있었다. 거기에서 쭉 이어지는 대목이 여러 품을 툭 뛰어넘어서 지금 이세간품으로 왔다.
보(普)자 돌림 보살 중에서도 안목 정도가 아니고 지혜가 특출하니까 보혜보살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텐데도 여기는 보혜보살이 청법자가 된다. 여기서도 역시 보현보살은 설법자가 된다. 청하는 사람 물을 만한 사람이 여쭤봤고, 설법할 만한 사람, 답하실 만한 분이 답을 하셨다.
탁법진수성행이라는 것에 대해 소초에는 ‘보현보살이 자기가 행해야 될 모든 도리를 스스로 자설한다’ 라고 나와 있다. 이것이 이세간품이다. 어떻게 보면 자경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좀 긴 자경문이다.
초발심자경문 같은 것을 우리가 보았지 않은가? 자기를 경책하는 좌우명 같은 것인데, 보현보살의 자경문이 바로 이 이세간품이다.
화엄경 중에서 가장 요점을 두고 우리가 공부해야 될 대목이 이다.
우리는 벌써 앞에서 정행품에서 이미 맛보기를 보였다. 앞에 나온 품들이 다 그렇지만, 제14권 현수품하고 같이 붙어 있는 정행품이 이마트 시식코너처럼 보현행원을 살짝 보여준 품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정행품은 따로 뽑아서 보현행원품처럼 독송을 많이 한다. 여러분들도 정행품만 따로 책을 엮어서 신도님들과 같이 공부하셔도 좋을 듯하다.
저도 이번에 한번 그런 책을 엮어볼까 싶은 생각이 있다.
정행품은 다들 아시다시피 화장실에 가서 손은 어떻게 씻고, 높은 길을 갈 때는 어떻게 가고, 굽은 길을 갈 때는 어떻게 가고, 등등 우리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들이 나온다.
내가 쪼그라들 때는 어떻게 마음을 써야 되고, 내가 힘을 가졌을 때는 마음을 어떻게 써야 되고, 이런 것들이 명심보감처럼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성행인과주(成行因果周)
앞에서 화엄경을 네 부분으로 나눌 때, 거과권락생신분, 수인계과생해분, 탁법진수성행분, 의인증입성덕분이라고 이름했었다.
여기나온 성행인과주는 오주인과라고 해서 화엄경을 다섯 개의 주로 나눈 것이다.
제1번은 1회차 설법에 세주묘품부터 비로자나품까지 소신인과주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될 인과다.
2회차부터 7회차까지는 신해행증(信解行證)할 때의 해(解)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차별인과주와 평등인과주가 있다.
차별인과 평등인과
사람 수준이 다르잖은가. 유치원생이 배워야 될 과목이 있고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전문가가 단계별로 차별이 있다.
화엄경도 단계별로 십주설법 십행설법 십회향설법이 있는데 이것을 차별인과주라고 했다.
그런 것들이 완전히 다 돼서 프로페셔널이 되어 평등인과주로 들어온 것이 49권 보현행품과 50권부터 52권까지 여래출현품이다.
소신인과주, 차별인과주, 평등인과주, 그리고 지금은 무슨 인과인가? 성행인과주다. 마지막 입법계품은 증입인과주, 완전히 깨달은 인과다.
지금 여기는 제8회차 설법이고 오직 이세간품 한 품이 있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방광이 없고, 보현보살이 불화장엄삼매에 든다.
2회차 설법에서는 삼매가 없었다. 설법주인 문수보살이 삼매에 안 드시고 부처님의 발바닥에서 방광만 있으셨다.
제7회(第八會) 일품(一品) 이천행문(二千行門)
여기 8회차 1품은 2천행문이다.
이세간품(離世間品) 1
제38품 이세간품 7권 중에서 제1권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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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눠드린 유인물은 잘 아시겠지만 거기 붙여놓은 QR 코드를 찍어보시면 복잡다단한 내용이 나온다. 참고해 보시기 바란다. 부처님 진여의 모습, 우리 일심의 모습, 성정본각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시성정각의 모습을 21꼭지로 적나라하게 잘 나타내 놓았다.
그중에서 프린트 1페이지 묘오개만만 별처로 해놓고 20개를 소초에서 정리해서 여러분들에게 드렸다.
빨간 QR코드 그리고 그 앞장의 초록 QR코드도 마찬가지다. 앞뒤로 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깨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확실히 중심을 잡고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 대목을 여러분들께 QR코드로 만들어 나눠드린 것이다.
어쨌든지 5위 승진을 마치고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 차례대로 수행하는 것이 있잖은가? 그것을 다 마치고 난 뒤에 지금 어디로 넘어온 것인가? 성행인과주 이세간품으로 넘어왔다.
부처님의 결과물, 깨달음, 각행이 원만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이세간품의 특징이다.
흔히 이세간품을 보현상행(普賢常行)이라고 한다.
항상 상(常)자 있잖은가. 보현상행이라고 딱 적어놓으시면 좋겠다. 보현이 항상 행해야 될 행이 이세간품의 행동이다.
보현의 늘 행해야 될 상행, 보현상행이 바로 이세간품이다.
여기서 다시 시성정각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화엄경 설법 1회차에서 시성정각하신 것, 십정품에서 시성정각하셨던 것과 이 이세간품에 시성정각하신 것이 각각 다른가? 부처님은 시성정각을 몇 번씩이나 하셨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이 동시에 일시에 부처님이 시성정각하시고 이 모든 것을 설한 것이다.
이세간품을 뒤에 설하고 앞에 다른 것을 설한 것도 없다.
동시에 똑같이 했다.
우리가 포토샵을 할 때 레이어라는 개념이 있다.
텔레비전으로 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화면은 한 군데만 나오지만 사실은 동시간대에 MBC도 나오고 KBS도 나오고 BBS도 나오고 CNN도 나오고 NHK도 나오고 있다.
텔레비전에는 계속 동시에 그 자리에서 여러 방송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볼 화면은 하나밖에 없어서 하나씩만 틀어서 본다.
화엄경도 마찬가지다. 그런식으로 레이어를 쌓아서 1회차부터 9회차까지 동시에 있는 것이다.
시성정각에서 부처님께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하시면서 수미정상, 도리천에 가시고 도솔천, 야마천에 가셨다고 하지 않는가.
텔레비전에는 KBS, MBC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인연따라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한 개씩 본다.
그러니까 화엄경은 전후제가 없다고 한다.
거울 밖에 서 있는 나도 허망하고, 거울 안에 비친 나도 허망하고, 거울을 끄집어내 봤자 내가 나오지도 않고, 밀어 넣어봤자 내가 거울 안에 들어가 붙지도 않는다.
신호등도 보면 빨간 것도 헛것이고 노란 것도 헛것이다.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一
一 . 序分
1. 器世間의 圓滿
爾時에 世尊이 在摩竭提國阿蘭若法菩提場中普光明殿하사 坐蓮華藏獅子之座하사
그때에 세존께서 마갈제국(摩竭提國) 아란야(阿蘭若) 법(法) 보리도량의 보광명전(普光明殿) 연화장 사자좌에 앉아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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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분(序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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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간(器世間)의 원만(圓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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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그때에
세존(世尊)이 : 세존께서
재마갈제국아란야법보리장중보광명전(在摩竭提國阿蘭若法菩提場中普光明殿)하사 : 마갈제국 아란야 법보리 도량의 보광명전에서 있으셨다. 보광명을 다른 말로는 비로자나라고 한다. 광명변조 보광명전, 마갈제국 아란야 법보리장중 보광명전하사
좌연화장사자지좌(坐蓮華藏獅子之座)하사 : 연화장이라 할 때 장(藏)자를 소초에 보면 뭘 표한다고 했는가?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갔다는 말씀이다.
장(藏)쯤 되었다면 어디에 들어갔다는 말씀인가?
[藏] 表此位入如來智慧之藏 (초록색은 유인물 1페이지를 표시함)
입여래지혜지장(入如來智慧之藏)이라고 해도 합치면 여래장이다. 여래법신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제가 ‘학교종이 땡땡땡’하면 여러분들도 순식간에 그 노래가 다 기억날 것이다. 60년 전에, 50년 전에, 40년 전에 그때 기억해 놨던 것이 무진장이다. 이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기억이 무진장이다. 아무리 집어넣어도 까먹어지는 것도 없고, 비좁은 것도 없고, 무진장 기억하게 되어 있다.
왜 그런가? 본래 없기 때문이다.
본래 없기 때문에 무진장 기억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 크기도 다 똑같다. 없기 때문에 같을 수밖에 없다.
있는 것은 다 차별이 있다. 그러나 본래 없기 때문에 똑같다.
무진장을 다른 말로 하면 무상이다, 무념이다, 여래장이다, 아뢰야식이다 등등 다양하게 표현을 한다.
연화장(蓮華藏)에 쑥 들어가 버리셨다.
화엄경에선 아무데나 장(藏)자 붙이는 것이 아니다.
십신이라 할 때 범부들은 삼매의 힘이 없기 때문에 본심을 잘 못 쓴다. 쪼가리 마음만 쓰고 옹졸하기 때문에 일반 잡부, 잡법들이다.
거기서는 이름을 아무거나 써도 개똥이를 쓰든지 말똥이를 쓰든지 돌림자가 없다. 보살계위에 딱 들어와서 해행발심(解行發心)이 좀 됐다, 믿음이 완전히 성취되어서 마음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아졌다, 하면 그때사 돌림자를 쓴다.
애써 양념을 안 해도 간이 딱 밴 것처럼 되었을 때, 간이 배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논하는 저 바다는 화엄의 법해다. 소금바다는 바다도 아니다. 화엄의 법해는 향수해 바다다. 향수가 있는 바다보다 더 큰 것이 법해인데 법해는 오죽하면 젖바다라고 하지 않는가? 젖의 바다, 유해진언(乳海眞言)이라는 말을 한다. 유해(乳海) 모든 중생이 먹고 자라는 바다, 우유바다다.
그에 비하면 태평양 바다는 소금바다일 뿐 비유할 때나 좀 써먹을지는 몰라도 바다 같지도 않다.
우리 눈에 이치적인 바다 중에서 향수해라든지, 화장세계 향수의 법바다, 유해진언이라고 하는 유해바다, 중생들을 모두 생장시키고 젖먹여 기를 수 있는 유해(乳海) 젖의 바다가 화엄경의 바다다.
오죽하면 화엄경 십지품에는 ‘세상의 모든 젖이 있다 하더라도 사자의 사자유를 딱 떨어뜨리면 전체가 사자유로 변해버린다’ 라고 하였다.
다른 줄로 거문고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사자의 힘줄을 매어 튕겨 버리면 다른 줄은 다 끊어져 버린다고 한다.
여기 연화장 사자좌라고 하는 것이 다 그런 뜻이다.
연화장(蓮華藏)이라고 하는 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다.
아무리 똥물에 갖다 놔도 똥물이 여연화불착수(如蓮花不著水) 심청정초어피(心淸淨超於彼)라, 어찌 할 수 없는 창고, 무진장 창고, 여래의 창고, 지혜 바다에 쑥 들어가 버리셨다.
보광명전이 보광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본지풍광이고 그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그 자리를 회복해서 들어가버리니까 좌연화장사자지좌라,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다.
2. 智正覺世間의 圓滿
妙悟皆滿하시며 二行永絶하시며 達無相法하시며 住於佛住하시며 得佛平等하시며 到無障處하시며 不可轉法에 所行無礙하시며 立不思議하시며 普見三世하시며 身恒充徧一切國土하시며 智恒明達一切諸法하시며 了一切行하시며 盡一切疑하시며 無能測身과 一切菩薩等所求智하야 到佛無二究竟彼岸하시며 具足如來平等解脫하시며 證無中邊佛平等地하시며 盡於法界하시며 等虛空界하시니라
미묘한 깨달음이 다 원만하시며, 두 가지 행을 영원히 끊었으며, 모양 없는 법을 통달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머무는 데 머무르며, 부처님의 평등함을 얻어 장애가 없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법에 행함이 걸림이 없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데 서서 세 세상을 두루 보십니다.
몸은 일체 국토에 항상 가득하고, 지혜는 일체 모든 법을 밝게 통달하였습니다. 모든 행을 분명히 알고 모든 의심을 끊었으며, 측량할 수 없는 몸과 일체 보살의 구하는 지혜가 평등하여 부처님의 둘이 없는 구경(究竟)의 저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여래의 평등한 해탈을 갖추고, 복판과 언저리[中邊]가 없는 부처님의 평등한 경지를 증득하였으므로 법계를 다하며 허공계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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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원만(圓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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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대목들이 오늘 여러분들께 나눠드린 유인물에 하나하나 설명되어 있다.
우리가 세주묘엄품을 볼 때 삼세간 원융이라고 했다. 바깥에 보이는 물건이나 보는 것이 둘이 아니고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다. 두 개가 쪼개져서 신토가 불이가 되어야 하고 진망이 교철해야 된다.
진짜가 따로 있고, 가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도 가짜도 없기 때문에 본래 없다고 한다.
본래무일물이라. 진짜가 있다고 하면 안 된다.
묘오개만(妙悟皆滿)하시며 : 묘오개만하시며 이것은 총체적으로 부처님의 시성정각이라고 한다.
묘오개만이라. 묘하게 깨달음이 다 원만하셨다.
우리가 시성정각이라고 하지 않는가.
비로소 깨닫고 보니 묘하게 깨달음이 원만하시다.
유인물을 보겠다.
[師子] 明智慧無畏
장(藏)자 밑에 사자라고 하는 것은 소초에 어떻게 해 놓았는가? 지혜롭고 아주 영리하고 두려움이 없다. 무유공포다.
입법계품에는 부처님이 사자빈신삼매에 들지 않는가. 족제비삼매에 들면 별로 안 좋다.
부처님은 사자빈신삼매에 든다.
사자는 죽으면 일주일 동안 다른 짐승들이 그 근처에도 못 온다고 하지 않는가. 겁이 나서 이미 죽은 사자 근처에도 못 온다고 한다.
[普光明] 表契如來本普光明法界大智慧也
보광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표시한다 계합한다. 어디에? 여래의 근본 보광명법계의 대지혜에 계합했기 때문에 그것을 즉사표법(卽事表法)으로 상징한다.
보광명이라고 하지 않고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고 궁전 전(殿)자를 써놓은 것은 무슨 뜻인가?
집안에서는 사람이 편안하다. 마음 자체가 안온한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대웅전 관음전 이렇게 전자를 붙여 놓듯이 보광명전이라고 붙여 놓은 것이다.
[妙悟皆滿] 無功之理智, 性自遍知故
묘오개만이라, 묘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무공지이지라. 무공 아무 힘을 안 들이고 얻는 깨달음이다.
묘오개만이라는 것은 아무 힘을 안 들이고 애쓰지도 않고 자연히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바람이 불듯이 순리대로 되는 것이다. 무공지이지다.
이런 대목처럼 원효스님은 아예 금강삼매경론의 주제가 ‘무리지(無理之)가 지리(至理)고 불연지(不然之)가 대연(大然)이다’ 라고 하셨다. 이치 없는 것이 지극한 이치다. 무생이 진생이다. 입법계품을 빌리자면 무엄(無嚴)이 진엄(眞嚴)이다. 무언(無言) 말 없는 것이 진짜 말이다, 이런 말이 많다.
그래서 여기서도 무공의 공(功)이라고 하는 것은 애써 조작하고 계획하는 것, 생멸법, 인연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묘오라고 하는 것은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근본이지, 무공지이지를 성품이 스스로 변지라. 짜장면 한 가닥을 입에 딱 넣어보면 그 맛 차이를 안다. 요즘은 김장김치가 잘 익어서 김치를 딱 먹으면 ‘아유 작년 것보다 올해 게 맛있네, 이집 것보다 저집 게 맛있네’ 금방 알아버린다.
노래를 한 곡조 딱 부르면, 누구 사람 이름 부르면 그 사람에 대한 색성향미촉법이 다 떠올라 버린다. 그 사람의 향기도 나고 냄새도 나고 그 사람의 음성도 들리고 그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그 사람만 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하고 관계된 것, 좋게 나쁘게 선악으로 다 연관된 것이 훅 떠올려진다. 임의대로 훅훅훅 떠올라버린다.
그것이 우리 아뢰야식 속에 무조건 저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여기서는 안다 모른다, 화엄경에서는 ‘어떻게 아노?’이러니까 ‘무지로 안다’ 아는 바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한다. 이런 것이 무념이지라, 생각 없이 안다.
생각이 동해버리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전부 조작이다.
생각하지 않고 무념이지라.
그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래출현품에서 다 단련해 왔다.
우리가 여래출현품에 자세히 보면 그런 얘기들이 자주 나온다. 성자변지(性自遍知)라 성품이 스스로 두루 아는 까닭이다.
‘들립니까? 들려요?’ 아, 스스로 아는구나.
귀가 먹어도 들리고 눈을 감아도 보인다. 성자변지라 두루 안다. 그래서 광명변조라 비로자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이라서 첫 번째 보현삼매품에서 보현보살이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에 들어가셨구나. 그걸 표출하기 위해서 전부 동시에 있다고 해서 일찰나제, 찰나제삼매에 들어가셨구나. 어떤 번뇌로부터도 두려움 없이 다 떨쳐 원리전도몽상을 해버렸기 때문에 사자빈신삼매에 들어가시는구나,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행영절(二行永絶)하시며 : 두 가지의 행을 영원히 끊었다.
[二行永絶] : 斷常有無, 無二見也
두 가지 행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흔히 ‘있다 없다’ ‘죽으면 끝이다, 죽어도 있다’ 유무(有無) 단상(斷常) 이견(二見) 이런 것이 있잖은가. 그런 것들이 근본적인 번뇌 쪽으로 볼 때는 무명에 찌들어 있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소지장(所知障)
소지장, 아는 바에 막혔다. 그것이 물들어서, 무명에 물들어서 가지치기를 한 것으로 염심(染心)이 돼버리면 마음이 오염되어 지저분하게 변질된다. 그래서 유통기한도 안 됐는데 써먹지도 못하는 그런 마음을 번뇌장이라고 이야기한다.
번뇌가 더글더글 끓는다.
쌀에 바구미, 쌀벌레가 일면 못 먹잖는가. 옷도 무던하게 가만히 있다가 좀이 쳐버린다. 좀이 없는데 어디서 왔는지 좀이 옷에 달라붙어 좀쳐버리면 옷이 좀먹는다.
이세간품을 살살 읽어보면 마음에 좀을 먹는 것을 방지한다. 좀약을 뿌려놓는 것이다.
화엄경 한 번 읽는 것이 좀약 뿌리는 것이다.
옷을 입고 꿉꿉한 데 놔두었더니 울로 된 옷은 그냥 구멍이 뻥뻥 나버린다.
엊그제 빵구 난 것이 얼마나 신경질 나는지, 그 좀을 잡을 수도 없고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그런 것이 어떻게 우리 옷에 좀을 쳐버렸는가? 우리도 그렇다.
미세번뇌가 와서 좀을 쳐버렸다. 큰 번뇌는 쓸어내고 닦아내고 끊어내기가 쉬운데 미세하게 아주 작은 번뇌는 침탈해서 끊어내기도 잡아내기도 힘이 든다. 그래서 참선하는 것이 필요한가 보다.
여기서 이행이 영절이라고 하는 것을 뒤에 보면 이행영절이라는 것은 곧 소지장에 묶여버리면, 무명번뇌에 딱 침탈당해서 캄캄하다. 그러니까 이항에 무명번뇌에 대해서 한결같이 그런 무명에 대해서 소지장을 뚫고 나와서 영원히 끊어버렸다. 그런 데 대해서 장애되고 굴림을 받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한결같이 무장무애한, 어떤 무명으로부터 캄캄한 밤에 그냥 침탈되지 않고 환한 일광명조의 견종종색 같은 공덕을 이행영절이라고 한다.
있다 없다. 시시비비 이런 것이 다 끊어져버렸다.
중생 놀음이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깨달음이 뭐냐? 중생놀음, 이행(二行)이 영절(永絶)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말씀이다. 진여는 무엇이냐?
달무상법(達無相法)하시며 : 무상법을 통달한 것이다.
무상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있다 없다’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에, 유상도 없지만 무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는가?
비유비무(非有非無) ‘본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런 맛을 조금 알면 이런 것들이 말장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법이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체(體), 본체(本體), 근본 뿌리가 진여(眞如)라고 한다. 무상이 진여라고 한다.
육조스님은 일찍이 금강경에서 진여를 이야기하실 때는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하고 무주(無住)로 위체(爲體)하고 묘유(妙有)으로 위용(爲用)이니라’ 라고 하셨다.
육조스님께서 금강경 서문 쓰신 대목이 이세간품 여기에 다 나온 것이다. 무상으로 종지를 삼고 무주로 본체를 삼고, 부처님 머무시는 데 머무르신다.
부처님은 어디에 머무르시는가?
주어불주(住於佛住)하시며 : 불소주는 어디인가? 불소주는 진로 소주인가? 불소주는 무소주라. 부처님 소주는 소주 없는 것이 소주다. 응무소주라 그것이 부처님의 소주다.
육조스님은 간단하게 금강경 서문에서 그렇게 썼다.
‘부금강경자(夫金剛經者)는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하고 무주(無住)로 위체(爲體)하고 묘유(妙有)으로 위용(爲用)이니라’
묘유로 위용이니라.
머무름 없이 머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항상 불사를 하면서 불사에 도취되지 않고, 하루도 쉬지 않는 것이다.
어른스님이 꼭 매일 화엄경 강의를 하시듯이 무유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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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불평등(得佛平等)하시며 : 부처님의 평등함을 얻었다. 부처님의 평등함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작용이 평등하게 마음 씀씀이를 쓰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십회항품 제6회향처 같은 데서 무차법회(無遮法會)라고 하였다.
무차법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물건의 좋고 나쁨에 구애받지 않고, 대소에 구애받지 않고 베푼다.
무차법회라고 하는 것은 나와의 친소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툭 털어서 내기 때문에 득불평등(得佛平等)이다.
그것을 법성게에서는 뭐라고 했는가?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그것이 바로 여기 나온 득불평등이고 보현행원이다.
요 부분만 좀 지루하게 하고 그다음 부분은 조르르 나가겠다.
이렇게 꼭꼭 씹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좀 지루한가? 미안하다. 어쨌든지 할 수 없다. 하시든 안 하시든 저는 꼭꼭 집어서 갈 것이다.
도무장처(到無障處)하시며 : 도무장처라 도무장처라고 하는 것은 빨간색 QR 코드가 있는 프린트 다섯 번째에 보면 장애가 없는 곳에 이르렀다,라고 나와 있다.
이것이 깨달음이구나 알 수 있다.
막힘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하는 것이 깨달음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五. 到無障處는 則修一切障의 對治功德이며(빨간색은 유인물 2페이지를 표시함)
곧 수(修) 일체 장애에 대해서, 그 장애에 따라 눈이 아프면 안약을 넣고, 오들오들 춥고 감기에 걸렸으면 감기약을 먹고, 관절염이 있으면 관절약을 주사를 맞고, 거기에 적절한 대치 방법이 있잖은가? 상대해서 치료하는 것, 그런 데 대해서 완전히 도달해서 도가 트인 공덕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조금만 아프면 안절부절해서 이 절 저 절 막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골치 아프다. 안절부절 그거 별로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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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乳海眞言... 새삼 그 의미가 새겨 집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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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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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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