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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안동 지방 재사(齋舍) 건물 몇 군데를 찾아 본 바,
시간 나는 대로 한 군데씩 감상 겸 기행문 적어 보는데,
그 첫 번째가 안동 권씨 능동재사(陵洞齋舍)다.
나는 이 글에서 ‘안동 지방’ 이란 용어를 현 행정구역 ‘안동시’뿐 아니라,
‘안동 문화권’ 그러니까 그 옛날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지역을
염두에 두고 쓴다. 조선 왕조 시대 안동대도호부는 안동, 예천, 의성, 청송, 영덕,
영양, 봉화, 영주 등지를 관할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안동사람’ 이라는
그 어떤 아이덴티티(正體性)를 느끼며 살아 왔던 것이다.
재사(齋舍)
재사는 달리 재실(齋室), 재각(齋閣), 재궁(齋宮)이라고도 하는데,
다 같은 말로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낼 때 편의를 위한 건물이다.
(*) 齋는 ‘제’, ‘재’ 두 가지-아니 ‘자’ 까지 세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데,
齋舍의 경우는 ‘재’다. 점잖은 분들 호(號)에 무슨 齋하고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도 ‘재’로 읽는다. 이번 답사 전 내가 책상 다이어리 일정표에
‘안동 재사’ 하고 한글로 써 놨더니, 집 사람이 그걸 보더니 ‘안동에
갑자기 웬 제사?’ 하고 따지고 들었다. 祭祀와 다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재실은 전통 시대 어느 지역이나 다 있었지만, 안동 지방은
유난히 크고 비교적 잘 보전 되었다는데 (전해 들은 이야기라는 뜻.
내가 다른 곳 재실 본 게 그다지 없으니만큼) 또 재사(齋舍)란 말을 많이 쓴다.
그렇다고 안동 지방에서 재실, 재각, 재궁이란 말을 쓰지 않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재사’를 더 흔히 쓴다는 뜻일 뿐이다.
어느 글을 읽으니 ‘안동 지역 재실 건물이 비교적 커서 ‘재사’ 라고
차별화 시켜 부르고, 되게 큰 것은 심지어 재궁(齋宮)이라고 하기까지 한다’
고 적혀 있으나, 내 생각에 크기에 따른 분류는 아닐 것 같다.
형편없이 작은 것도 아무 거리낌(?)없이 재궁(齋宮)이라고 부르고 있다.
궁(宮)이 지금은 ‘임금의 집’에 특화되어 있으나, 중국 상고(上古) 시대는
일반 사람 집도 궁(宮)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후대에 와서 군주들이
독점(?)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짐(朕)도 진시황(秦始皇)이 ‘도리(?)’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일인칭이었다.
그런 흔적이 상례(喪禮)-죽은 자의 용어에 남아 내려온 것 아닌가 하니,
재궁(齋宮), 현궁(玄宮; 광중 그러니까 관을 넣는 구덩이), 재궁(梓宮/榟宮;
자궁으로도 읽는데, 앞 齋宮 과는 달리 관(棺)을 뜻한다)등은 크기나 신분에
관계없이 두루 쓰는 말이다.
안동 권씨와 권태사(權太師)
안동 권씨는 우리나라에서 손 꼽는 큰 성씨다.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의 조상이 어떻게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고,
그를 돕다가 마침내 왕건으로부터 사성(賜姓)받아 안동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세 성씨의 조상이 되고, 이 세 분을 삼태사(三太師)라 한다는 내용은
널리 퍼져 있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문건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니
굳이 반복하지 않고 생략한다.
권태사(權太師)는 그 삼태사 중 권 씨네 조상으로 휘(諱; 이름) 행(幸)이다.
능동재사(陵洞齋舍)
능동재사(陵洞齋舍)는 권태사(權太師)의 묘제(墓祭)를 위한 건물이다.
묘제(墓祭), 묘사(墓祀)는 조상 산소 앞에서 드리는 제사로
흔히 시제(時祭)와 혼용하고, 또 돌아다니는 해설도 ‘시제의 일종’으로
대개 기술하고 있으나, 예서(禮書)에 나오는 시제는 묘사와는 다른 제사다.
그러니 (새삼 따져 무삼하리오만) 굳이 따진다면, 묘제, 묘사가 맞다 는
내용은 내가 이미 다른 글에서 몇 차례 쓴 바 있다.
안동 지방에서 묘사는 보통 음력 상달-10월 그러니까 양력 11월에 지낸다.
천등산(天燈山)
안동(이번엔 협의) 유적 또는 풍수 이야기에 ‘학가산’과 ‘천등산’을 쳐들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풍수에 관한 ‘썰’ 풀기엔 내공이 달리니 그만 두고,
아무튼 여기 사람들이 이 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틀림없다.
그 생각이 바로 포인트로 산이 실제로 크고 아름다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봉정사는 천등산 자락에 있는데, 봉정사 들어가는 입구에 안동 김씨네 시조,
김태사(金太師)-이름(諱) 선평(宣平)을 위한 태장재사(台庄齋舍)가 있고,
또 봉정사에서 산 하나 남쪽에 안동 권씨네 시조를 위한 능동재사가 있다.
그러니 천등산 골짜기는 안동 주요 호족(豪族)들의 성지(聖地)와도 같다.
사진: 구글지도에 표시해 본 능동재사 위치
죽은 자들의 골짜기
능동재사가 있는 골짜기-안동 서후면 성곡리 393을 들어가다 보면
소나무 몇 그루가 나타나는데, 그걸 또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표시라고
해설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 들어서가 아니라 골짜기 안은 어쩐지 산 사람의
공간은 아닌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으스스 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진: 능동재사 전면
재사(齋舍)의 맞은 편, 그러니까 위 사진 촬영자-곧 나의 등 뒤에 있는 산에
권태사(權太師) 산소가 있다. 재사는 산소 제사를 위한 건물이니만큼
당연히 산소를 바라보고 지은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경계가 어떻다는 말도 듣고, 골짜기고 집이고 간에
우리 일행 외에는 인기척이 없는데, 칠 하지 않은 목조 건물은 원래 그런지,
세월에 따라 그렇게 되었는지, 거무튀튀하기까지 하여 ‘산 사람 집’은
아니라는 인상을 던지고 있다.
잠겨 있는 재사(齋舍)
문은 잠겨 있고 관리인도 없었다. 사전 연락을 해도 쉽지 않다.
문화재 도둑이 하도 극성을 부려 고가(古家)고 어디고 간에
방문객들에게 경계심이 대단하다. 심지어 모 대학 유명 교수라고 하여
정성껏 안내해 주었는데, 며칠 뒤 도둑이 들더라 하는 이야기도 들린다.
최소한의 양심도 없어 사람 자는 방 문짝까지 떼어 간다고 한다.
이러니 후한 인심은 다 사라지고, 부탁하면 공문 보내라 하고 나오니,
공(公)이 아닌 사(私)-민간인이 무슨 공문을 보내나?
또 보낸다고 끝이 아니라 심사(?)할 것 아닌가? 이래저래 피곤하다.
그 중 안동 권씨네는 유난히 관리 철저-달리 말해 까다롭다고 한다.
아예 입장료를 받고 공개를 하라고 말하고 싶어도 재사 건물 일부러
돈 내고 볼 사람 그리 많지 않을 듯 하고, 괜히 인심만 잃을 것이다.
어쨌던 들어 갈 수 없으니 밖에서 재주껏 둘러 보는 수 밖에 없다.
서원(書院) 양식 원용
재사(齋舍) 건축은 조선 후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는데,
집성촌(集姓村)의 출현과 족보 간행의 성행과 맞물려 있다.
의외로 들릴 수 있지만 우리나라 집성촌은 대부분 3-4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렇게 오래 된 것이 아니다. 이건 상속 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장남, 차남, 딸 아들 구별 없이 골고루 나누었다.
이론도 그렇고 남아 있는 분재기를 봐도 그렇다.
제사도 외손이 모시는 외손 봉사가 별 문제 없었고 실제 사례도 많았다.
심지어 외외가-외가의 다시 외가 제사를 받드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외가에 가 사는 경우가 흔하니 세월이 지나면 마을은 여러 성씨가
다 섞이게 된다. 모두 한 때는 사위-외손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그러다 조선 후기 적장자 단독 상속으로 이행한다.
조선 말기 중자(衆子)들은 장자의 20분지 1밖에 못 받았다.
그러다 한 대 더 내려가면 바로 ‘개털’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집안의 기득권을 지켜 나가려면 단독 상속 밖에는 사실 길이 없다.
중서자 균분 상속으로 2-3대 쪼개 내려가다 보면 다 별 볼일 없어진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원시 게르만 사회는 되는대로 나누어 가졌겠지만
봉건-장원 제도가 심화되면서 단독 상속으로 바뀌어 나갔다.
사위, 외손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외손 봉사는 생각도 못할 일이 되니,
외손이 사는 일은 없어지고, 마을은 남계 혈족만 사는 집성촌(集姓村)화,
어쩌다 타성이 들어 와도 버티기 몹시 힘든 배타적 구조가 심화 되어 갔다.
집성촌화가 진행하며 문중-남계 혈족끼리 뭉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 지고,
그러자니 누가 우리 편인가 알아야 하겠기에 족보 간행이 성행하고,
시조에 대한 제사 의례는 일족의 구심점이 되어 갔을 것이다.
또한 족보와 시조 제사는 타문중에 대한 세 과시(誇示)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 모두 조선 후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 관점에서 재사(齋舍)란 일족의 클럽하우스 내지 중앙당 건물 역할을 했다.
며칠이지만 몰려든 몇 백 명 종인이 기거해야 하고, 또 타 문중에 자랑도
할 만 해야 하니 다들 크고 번듯하게 짓고 싶어 했다.
안동 문화권에서 유난히 재사 건축이 발달했다면 그 이유가 또 있을 텐데,
나는 영남 남인(南人)들이 조선 후기 삼백 년 동안 정권에서 소외된 데서
나온 현상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조선 후기 요직은 노론이 독차지했고, 더러 한 자리 얻어 걸린 남인도 있었지만
그건 기호(畿湖) 남인이지, 영남 남인은 벼슬에 발도 붙여 보지 못했다.
중앙에서 왕따 당할 때 믿을 것은 일족의 단결뿐이 아니었겠는가?
안동 문화권은 바로 영남 남인의 중심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문화란 선행하는 그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는 법이니
조선 후기 재사(齋舍) 건축은 기존에 있던 절, 서원 또는 원림, 살림집의
형식을 끌어다 쓰는데, 여기 능동 재사는 서원 형식을 원용한 것이라 한다.
사진: 권태사 산소 가는 언덕에서 찍은 능동재사 전경
높은 누(樓)마루와 그 뒤로 지붕이 보이는 본채는
서원의 루(樓)와 전교당을 연상케 한다.
추원루(追遠樓)
사진: 추원루 전경
재사(齋舍)에서 루(樓) 마루는 문중회의나 음복(飮福)하던 곳이다.
또한 날씨가 궂어 산소에 가지 못할 경우는 바라 보면서 지내는 제사,
곧 망제(望祭)를 올리던 장소다.
그러니 상징이 되게끔 짓는데, 능동재사의 추원루도 아주 당당하다.
재사 건물을 다녀 보니 매우 당연하지만 루(樓)의 이름은 모두 조상 추모와
관련 있는 단어였다. 다른 누 이름 붙일 때 쓰는 좋은 경치라던가,
뭘 깨달았다, 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 따위를 연상하는 이름은 없었다.
저 추원(追遠)도 신종추원(愼終追遠)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曾子曰 愼終追遠이면 民德이 歸厚矣리라’
증자가 말씀하셨다. 종(終-初喪)을 삼가서 치르고, 원(遠, 先祖)을 추모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
(論語 學而 편)
재사(齋舍) 건물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추원루 현판. 31세손 (권태사로부터 31세겠지) 권재형(在衡)이란 분이
썼노라고 왼쪽 끝에 적혀 있는데, 필치가 아주 당당하고 힘차다.
면 분할(?)
사진: 능동재사 동익(東翼) 외벽
이날 재사 답사를 다니면서 저런 벽 나오기만 하면 ‘이 절묘한 면 분할’
운운 하는 분이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 그걸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냥 무심코 지었는데, 오늘 날 우리 눈에 희한하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
의도가 아니라 무심(無心) 그 자체로 우리의 경탄 대상이니 더 대단한 것인가?
사진: 능동재사 후측면. 소위 절묘한 면 분할은 구석 구석에 다 있다.
내정(內庭)
사진: 능동재사 안뜰. 들어갈 수가 없어 문틈으로 카메라 디밀고 찍었다.
인터넷에 좋은 사진 많이 떠 있는데, 내가 퍼 올리긴 뭐하고 각자 검색하면 될 듯.
보판각(譜板閣)
사진: 보판각 원경
능동재사 뒤에 떨어진 건물이 하나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서고 같이 생겨,
다가가 보니 과연 족보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사진: 보판각 앞에서
서기 1476년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 우리 성종 7년 만들어 진
안동 권씨 성화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족보다.
사진: 인터넷에서 구한 성화보 중 일부인데, 과연 듣던 대로 딸들,
정확하게는 女夫-사위 이름과 女夫의 자-외손을 모두 수록해 놓았다.
재혼 경우는 後夫라고 썼다고 한다. 그땐 여자 재혼이 아무 문제 아니었다.
또 보면 아들이라고 반드시 먼저 쓴 것도 아니고, 女夫가 앞서기도 하니
아마 출생 순서대로인 듯하다. 오늘 날 남녀평등은 이때 이미 있었다.
여기 보관하던 족보 목판이 그때 그 성화보 인지는 모르겠으나
창틀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보니 텅텅 비어 있다.
사진: 보판각 내부.
자물쇠 채운다 해도 목판 같이 귀중한 것을 이런 데 둘 수가 없다.
도둑이 마음 먹는 순간 바로 없어질 것이다.
좋기로는 적당한 도서관 또는 박물관 찾아 기증하는 방법인데
이미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권태사 산소 가볼 차례인데, 그 부분은 글 꼭지를 바꾸어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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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 잘하고 많은것을 느끼게됩니다,
추운날씨 답사 다니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따스한 봄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자랑스런 우리 일가님과 고적 답사를 기다려봅니다,
건강하십시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