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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 사랑을
암치유의 핵심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몸, 마음, 영혼의 관계속에서 치유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상의 원리
사회적 경험속에서 관찰을 되풀이하고 그 진실의 여부를 확인한 다음, 각자의 문제들에 실제로 적용해서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
억압된 감정이 강화시킨 구체적인 믿음체계에 무의식적 죄책감이 더해진 것이 병의 근원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병의 감각 경험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린다.
2) 병의 이름이나 딱지를 더이상 붙이지 않는다.
3) 말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꺼이 받아들인다
4) 생각이라는 형체와 믿음체계를 철회한다.
5)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사랑 에너지 장을 선택한다.
참고)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의 MBTI성향은? INFJ
나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이런 성향탓에.. Judgement 판단형
연설을 힘들어 하는 극도의 내향형
환자의 감정에 공감하고 심하면 역전이를 일으키는 감정형(feeling)
아마도 직관형(intuition)
2. 치유의 촉진
앞장에서는 의식자체의 본질에 대한 연구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하여, 고통같은 인류의 문제해결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탐구해보았다.
이제는
병의 근원과 그 근원을 놓아버리는 방법을 살펴보겠다.
이것은 철학적이나 신학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개개인의 경험속에서 임상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문제들, 우리 스스로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개개인의 사회적 경험속에서
관찰을 되풀이하고
그 진실의 여부를 확인한 다음,
각자의 문제들에 실제로 적용해서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
이것이 바로 임상의 기본이다.
임상의학은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실용주의를 표방한다.
경험을 통해
진실이라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다시 탐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유용한 모델이며,
경험을 통해봐도 실제적이다.
영혼의 본질은 무엇일까?
영혼은 그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확신할 수 있는 실제일까?
몸과 마음, 영혼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일까?
치유를 촉진하려면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꼭 이해해야 한다.
몸이
스스로를 경험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몸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팔은 자신이 팔임을,
다리는 자신이 다리임을
경험할 수 없다.
몸의 감각들을 경험하고
몸이 공간속에서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바로 우리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감각에도
자신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감각은
자신보다 더욱 큰 어떤 것
즉 마음속에서 경험되어진다.
감각의 경험과
이 경험이
몸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을
우리는 실제로 '마음을 통해 경험'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마음도
자신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의 생각을
경험하지도 느끼지도
자신의 느낌을 기억도
자신의 기억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모두 마음보다 큰
어떤 것에서 경험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법칙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들 모두를 덜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에너지 장을 통해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언제나
더욱 큰 어떤 것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예를들어
'마음은 의식자체의 에너지 장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의식은
형체도 없고
무한하다.
움직이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영화의 화면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속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의식덕분이다.
마취의 기본도 바로 이것이다.
의식을 제거해서
몸이나 마음의 경험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마취다.
의식자체는
자각(awareness)이라는 무한한 에너지 장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각덕분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오감이
몸에 대해
보고해주는 내용들은
마음 덕분에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몸에 대해 보고해주는 내용들은
마음 덕분에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몸에서
여러 단계를 벗겨냈을 때
우리의 진정한 본질이 나타나며,
몸이 우리가 아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의식의 무한한 장속에서
인식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할 문제다.
명상 상태에서는
실재의 이 모든 차원들을
인식하는 주체가
우리라는 진실을
비교적 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치유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기법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이 기법들의 작용과
적용방식을
알아볼 것이다.
또
억압된 감정이 강화시킨
구체적인 믿음체계에
무의식적 죄책감이
더해진 것이 병의 근원이라는
기본적인 원리에도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아울러
기존의 전통적인 의술로는
전혀 고칠수도 없고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
스무가지 이상의
만성적 난치병들을 치유하는데
이런 기법과 이해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도 설명할 것이다.
나아가
병이 어떻게
집단적인 의식을 통한 프로그래밍과
믿음체계의 결과로 나타나는지도
단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카르마에 의한
유전의 범위 안에 있는 병도
고칠 수 있다.
아무리 심각한 병처럼 보여도
어려움에 경중은 없다.
또
자연의 형태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기 치유자를 활성화하는 방법도 알아보고
다중인격 현상도 살펴볼 것이다.
다중인격 현상은
아래 정보의 많은 부분이
진실임을 입증해준다.
과학과 정신의학에서는
다중인격이라는
임상학적 상태를
갈수록 흥미롭게 연구하고 있다.
다중인격에서는
몸을 통해
하나 이상의 인격이 표출된다.
임상학적으로
하나의 인격은
천식이나 알레르기, 통풍같은
여러 병들들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인격이 떠나고
다른 인격이 들어오면
이런 병들은
하나도 앓지 않을 수 있다.
두번째 인격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이런 병들따위 안믿어.
병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이를 통해 우리는
정신이 몸에 미치는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의식이라 해도
마음속에 품은 생각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치유의 기본원리다.
신비롭거나 당혹스럽게 들린다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의식지도를 참고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에너지 장의 방향을 보면 그 에너지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지닌 부정적인 에너지 장인지 아니면 긍정적인 에너지 장인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알면
자신이 합당하고 확실하며
이해가능한 것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기본적인 진실들을 입증해준다.
여러분도
이런 진실들을
직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면,
부정적인 믿음체계에 프로그램되거나
부정적인 사고체계의 일부가 되지 않는
법같은 방식들을 치유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
뇌-마음 회보 brain-mind bulletin 1987년 1월호에 "기대 :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Expectancies : What you see is what they give you"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연구논문이 실렸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 자기충족적 예언은
실제로 이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의 적극적인 믿음이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창조적인 사회적 실제"라고 불렀다. 이것은 매일의 상호작용과 건강의 세부적인 부분들, 주가에서부터 무기경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모든 현상을
우리는 의식속에서
경험한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의식자체의 수준과
마음속에서 의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가 출발로 삼는 전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 대신에 원인의 차원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들은
몸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싶으면
몸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고
몸의 행동을 관찰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기억을 다시 더듬어 봐도
그런 믿음체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도
그 믿음체계를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사실은
개인이나 집단의 무의식 어딘가에
이런 믿음체계가
자리잡고 있을때 말해준다.
가장 일반적인 예로 알레르기 환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저는 알레르기를 전혀 안믿어요. 제 삶에 알레르기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인적도 없고요.
그러나
이들의 유년시절로 돌아가보면
대개 아주 어린 두세살부터
알레르기에 대한 믿음체계를 갖고
이 병을 앓아왔음을 알 수 있다.
예외가
거의 없다.
식구중 누군가가
"알레르기는
우리 집안 내력이야"라고
한 말을 받아들이고 믿는 순간,
이것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작동한 것이다.
이처럼
성인의 신체에 나타난
많은 현상은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들은 말이나
책에서 잘못 받아들인 정보,
교사가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를 통해
아주 어린 시절에 아이에게 입력된 것이다.
이런 정보들이
암시적인 프로그래밍과
일반적인 믿음체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이 정보들은
의식적인 것으로
우리 몸에 자리잡는다.
이처럼
마음속에 품은 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병의 본질은 무엇일까?
병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아픔에 있다.
고통과 아픔의 표현이
병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단순한 상식이다.
의식지도를 보면
고통과 아픔은
낮은 에너지 차원에 위치해 있으며
이때 에너지 장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은
고통이나 통증이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책감의 본질과
무의식적인 죄책감,
이것이 표면화되는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믿음체계는
마음속 생각의 패턴을 가리킨다.
죄책감은
판단을 중시하는 태도와
부정적인 견해들에서 생겨난다.
자만심이나 분노, 욕망, 두려움, 슬픔,
냉담함, 죄책감을 포함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함께 작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한데 모여 병을 유발한다.
자만심이나 분노에 찬생각,
결핍감, 갈망, 두려움에 사로잡힌 생각,
슬픔, 무감각, 죄책감에서 비롯된 생각처럼
용기보다 에너지 차원이 낮은 생각들을
마음에 품으면 근력 테스트에서
근육의 힘이 약하게 나타난다.
후회나 상실감, 무력감, 절망,
자기증오, 근심, 걱정, 불안, 불만,
오만이나 경멸같은 감정들도
근육의 힘을 곧바로 약화시킨다.
그리고 동공도 확장시킨다.
근력약화와 동공확장은
대뇌 반구가 비동기화되고
몸의 에너지 장이 급격히 약해졌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삶에 해로운 무언가가
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몸의 경혈에너지 체계를
비동기화한다는 것은
누구나 증명할 수 있다.
이 경혈 에너지 체계는
중추신경계보다 훨씬 민감하며
자율교감신경계보다 빠르게 반응한다.
몸의 경혈에너지 체계는
열두개의 주요경락을 통해
모든 부정적인 것들에 즉시 반응한다.
용기(200)이하의
모든 에너지 장들은
진실이 아닌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희생자의 사고체계와
에너지 장을 받아들인다.
아픈 사람이
자신의 병을
희생자로 여기는 것이 그렇다.
그러므로
병과 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병을 받아들인 사람이 변화해야
병이 사라진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특정한 병에서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더불어 몸과 심리, 감정, 정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실제의 사건들을 다루는 방법, 그리고 치유가 저절로 일어나게 하려면 우리 존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도 살펴보자.
의식지도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병을 촉진하는 반면
긍정적인 감정들은
병을 치유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일단 진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넘을 수 있는 용기의 차원 위로 올라가면서,
편견이 없는 사람으로 변한다.
그러고 나면
자발적이고 수용적이며
따뜻한 사람으로
변할 여지도 생겨난다.
의식지도를 보면
사랑은 500에서 생겨나고
치유는 540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몸에서 치유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하는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일까?
물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판단하지 않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랑,
이해와 연민의 마음이
함께 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생명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지지하며,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한다.
그래서
치유의 에너지 장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데
이 에너지 장은 540에서 측정된다.
그렇다면
의식의 전체적인 성격과
단계 덕분에
치유가 저절로 일어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동시에
특정한 질병이 치유는
어떻게 촉진시킬 수 있을까?
먼저 병의 특징을 살펴보고 나서 의식의 일정한 메커니즘을 이야기 하자. 또 이장과 이후의 장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몇몇 기법들을 활용하는 방법도 알아보자.
먼저
자신이 경험하는 감각들에 대한
저항을 버리고
감각들에 이름붙이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예를들어 십이자장 궤양이나 천식은 경험할 수 없다. 이것들은 단지 명칭이나 정신의 구조물, 정교한 프로그램, 믿음체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천식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확실하고 진실한 기법들이 생겨난다.
먼저
감각의 내적인 경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경험과 함께
종국에는 감각들이
실제로 사라지게 만든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모든 명령을 철회한다.
궤양이라고 부르기를 멈추고,
궤양의 내적인 감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적인 감각은
압박감이나
피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압박감이나 피로같은 말도
꼬리표고 명칭이다.
이런 명칭들을 철회하고
다시 몸이 경험하는 것의 핵심속으로
절대적인 본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다음 이 경험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다.
병이 불러일으키는
신체적 증상들을
실제적으로 치유하려면
증상에 의식적으로
어떤 명칭도 부여하지 말고
병의 내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도
내려놓아야 한다.
의식적인 명칭들을
철회시켜 버리고
그 자리를 진실로 대체한다.
긍정화가 이런 철회를 가능하게 해준다.
"난 더이상 그것을 믿지 않아.
난 무한한 존재니까.
그것에 휘둘리지 않지.
내가 마음에 품은 것만은 내게 영향을 미쳐"
"무한한 존재이므로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믿음체계만이
우리를 제한한다는 의미이다.
그럼
이 믿음 체계를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설까?
의식에서
형체를 제거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형체가 없는 것이
남는다.
그러면
이것에 대한 내면의 경험도
무한해진다.
경계도 시작도 끝도 없다.
형체없음이야 말로
의식자체의
핵심적인 본질이다.
그리고
형체가 없는 것은
무제한적이다.
제한을 두거나
형체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마음속에 머무는 것들에
휘둘린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로 형체를 제거해버리면 의식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
"나는 십이지장 궤양이든 천식이든 다른 어떤 병이든
이 병에 대한 모든 믿음을 철회한다.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나의 생각뿐이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병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근력 테스트를 해보면
이것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피실험자가 철회한다. 나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내가 마음속에 품은 것만 내게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하면 실제로 근육의 힘이 강해진다. 이런 결과는 이 말이 진실임을 말해준다.
요컨대
거짓을 진실로 대체하는 순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과 거짓은
의식속에서 에너지 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거짓은
본질상
우리를 200아래로 끌어내려
그 자체로 병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순간 용기의 에너지 장이 우리를 즉각 200 위로 상승시킨다. 여기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한한 존재이므로 마음에 품은 것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이런 자발성 덕분에
자신의 몸을 안좋게 만드는 대신 존중하며,
삶을 나쁘게 만드는 대신 사랑하고
존재에 대한 비판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상태로 상승한다.
그러므로
비판이나 공격적인 생각들,
비판하고 판단하는 생각들은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은 옳고
타인은 틀렸다는
견해도 내려놓는다.
이런 식의 옳고 그름은
180도 정도의 에너지 차원에 있으며,
이런 에너지 차원에서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건강과 생명 에너지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병에서 벗어나려면
병을 불러오는 태도를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습관적인 방식과
태도의 표현결과가
바로 이 병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병의 감각 경험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린다.
2) 병의 이름이나 딱지를 더이상 붙이지 않는다.
3) 말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꺼이 받아들인다
4) 생각이라는 형체와 믿음체계를 철회한다.
5)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사랑 에너지 장을 선택한다.
관련 에너지들의 기본적인 작용을 살펴보면 사랑(500)이 왜 두려움(100)을 압도하는지 알 수 있다. 두 에너지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데, 사랑의 힘은 10에 500승으로 두려움은 10에 100승으로 나타난다.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540의 에너지 장에 들어가면
치유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의 생각은
치유를 가져오는 반면
부정적인 생각은
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으면
두뇌에도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이런 작용은
몸의 건강과 행복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행복은
부정적인 것을 내려놓고
그자리에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발성에서 생겨난다.
의식이 손상된 경우가 아닌 한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의 핵심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를 봐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본성의 핵심적인 표현이다.
아이는 아직 두려움이나 의심,
한계를 갖도록 프로그래밍되지 않았다.
우리 안의 모든 병을 완화시키고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놓아버리려면,
사랑이라는 본성의 표현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믿음체계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텔레비전이나
의도가 선한 사람들을 통해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습득하기도 한다.
이들의 의도는
물론 병에 대한 교육으로
우리안에 병이 생기지 않게 막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특정한 믿음체계를 받아들이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그러면
무의식적 죄책감이 일어나
이런 믿음체계를 이용한다.
그리고
열두개의 경락을 통과하는
에너지 장에서
에너지가 흐르는데
장애가 발생한다.
단적인 예로 검사를 해보면 200(용기) 아래로 내려갈때마다 에너치 체계가 불균형적으로 변함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어느 하나의 경락이 다른 것들에 비해 푹꺼진다.
이를테면
부정적인 믿음체계로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가질때마다
심장경락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면
분노에 휩싸이거나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누군가를 비난할때마다
에너지에 혼란이 일어나고
심장경락이 아래로 처진다.
그러면
심장의 생명 에너지가
점점 줄어든다.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심장의 생리작용이
아주 미묘하게 달라진다.
심장이
자율신경계의 이상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은
신체기관들의 기능에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심장동맥의 내벽을 포함한
심장자체의 생리작용에
장애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심장경락의 습관적인 혼란이
신체적인 차원의
장애로까지 이어진다.
마음에 품은 것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요컨대
몸은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그 반대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바로 기본전제다. 몸은 개인적인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기대로 표현해낸다.
부정적인 사고체계와 움직임은
경혈에너지 체계와
자율신경계를 망가뜨린다.
그러면
다시 세포속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전기적, 화학적 작용에서도
변화나 장애가 발생한다.
그 결과
조직내에서 병적인 변화와
기능장애가 발생하고
이것은 관상동맥의 질환이나
심장병, 심부전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심부전은 오랜기간 동안
부정적인 정신자세를 취하는데서
일부 비롯된다.
물론 사람들은 콜레스테롤이나 스트레스, 생활방식, 유전자, 가정상 등에 원인을 돌리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명확하게 규정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려는 설명이나 변명,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처럼
정확한 작동원리를 들여다보면,
마음속에 있는 것이
몸의 차원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힘을 지닌 것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중립적인 생각도
주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 예로 "나는 하와이에 갈거야"라고 생각을 했다고 하자. 이 생각이 재원을 확보하는 일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후 6개월동안 여행준비를 위해 해야 할일도 결정하게 만든다. 나아가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게 하는 등 행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고는 결국 짐을 꾸려 수천킬로미터를 비행하게 만든다. 생각 하나가 이후 6개월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제 알 것이다.
자기치유에서
극복해야 할 어려움 중 하나는
마음의 위대한 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발성을 갖는 일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걸림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나는 당뇨병에 걸렸어'라는 말로 병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면 안된다. 당뇨병이 있다고 믿기만 해도 그 증세가 더 심해질 정도로 믿음체계가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체계를 버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한때 내게 당뇨병이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뿐이야.
나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뇨병에 휘둘리지 않아"
어떤 증상이든
이렇게 벗어던지고 지워버릴 수 있다.
그리고
증상 대신 진실을 받아들이면
주어진 병의 세부적인 증상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어떻게 나의 많은 병들을 제거해 버렸는지는 차차 설명할 것이다. 설명을 읽으면서 내가 말하는 원리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많은 병을 앓았다. 일일이 적어 봐야만 내가 걸린 병들을 기억해 낼 수 있을 정도다. 몇년이나 고생했는데도 앓았던 병들을 이미 반이나 잊어버렸다.
예를들어 난치성 십이지장 궤양을 앓은 적이 있다. 전통적인 치료법들을 다 써보고 정신분석까지 받아봤다. 의대시절부터 이런저런 방법들을 모조리 시도해 봤지만 20년이 지나도 궤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종류의 궤양때문에 십이지장에 구멍까지 났다. 구멍이 생겨 출혈을 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고 이로인해 췌장염까지 재발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장염에 출혈성 게실염까지 있었다. 사실 게실염은 증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입원해서 여러차례 수혈까지 받아야 했다. 거의 죽을만큼 출혈이 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치기 힘든 편두통까지 않았다. 정신분석으로 어느정도 도움을 받기 위해 신경학자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문가들까지 만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러가지 알레르기와 연관이 있는 듯한 편두통을 치료하는데 사실상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다. 나는 또 공기를 통해 흡입하는 것들에도 민감했다. 살충제를 뿌리고 몇주가 지났어도 그곳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소량으로 남아있는 살충액에 노출되기만 해도 편두통을 앓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레이노병까지 앓았다. 이병 때문에 사지의 혈액순환에 장애가 생겼다. 손가락 끝에 심각한 괴저가 발생했으며 손발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고 언제나 추웠다.
설상가상으로 통풍에 요산수치도 높았다. 물론 이것 때문에 식이요법도 했다. 또 통풍성 관절염때문에 차 뒷좌석에 언제나 지팡이와 약을 비치하고 다녔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통증과 더불어 느닷없이 찾아오는 통풍을 디비해 차 뒷좌석에 지팡이를 싣고 다니는 기분이 어떤지 상상이 안될 것이다. 지팡이는 몇년동안이나 내 차안에 있었다.
동시에 심각한 저혈당도 있었다. 하지만 설탕이나 사탕, 전분을 먹을수도 없었다. 온갖 알레르기에 궤양, 게실염을 포함한 여러 위장관련 질환과 췌장염 간헐적 담낭염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이 극히 적었다. 이따금 식당에 가도 샐러드에 있는 상추 말고는 안전하게 먹을 음식이 없었다. 토마토 씨를 먹으면 게실염이 악화돼 입원해서 수혈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토마토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몸무게는 50파운드나 과체중이었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위장관 전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또 순환계와 소화계, 호르몬의 균형도 깨져 있었다. 혈액의 화학작용에도 문제가 있어 혈중 콜레스테롤과 요산 수치도 높았다. 거기다 편두통도 심했다. 이 모든 병들은 중추신경계가 스트레스와 압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율신경계에도 장애가 발생했다는 신호였다.
여기에 모소낭병까지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술이 필요한 병인데오린 시간에 걸쳐 저절로 사라졌다. 나중에 진단이 되지 않는 갑상선 기능항진증으로 심각한 심부전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의사는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흉부 엑스선 촬영을 해보니 오른쪽 폐 맨위에 종양이 보였다. 그런데 폐 생체검사때문에 폐기흉과 허탈이 발생했다. 생체검사 결과 인간에게는 감염되지 않는 조류성 결핵균이 병소였다. 의사가 한 달에 1만달러짜리 가격의 다섯가지 항생제를 처방해주었지만 거절했다. 약의 치료효과가 낮았기 때문이다. 이후 어떤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 폐의 병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기흉처럼 심부전도 말끔히 나았다.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았는데 갑상선 기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목공일을 하던 중에 왼쪽 엄지손가락이 절단됐지만 마취제도 쓰지않고 접합수술을 받았다. 또 오른쪽의 재발성 서혜부 탈장도 마취제 없이 치료했다. 만성적으로 재발하던 난치성 십이지장 궤양도 침치료 세번만에 사라져버렸다.
위 병들과 수술들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매 순간 저항을 내려놓고
믿음체계를 지워버리면서
신성한 의지에 전적으로 순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취제나 진통제 없이 모든 치유를 이루어냈다. 일련의 모든 병들은 카르마가 낳은 기질때문이었다. 이런 기질의 내면의 강도높은 영적 작업으로 표면화시킬 수 있는데, 처음에는 카르마에 의한 기질들이 더욱 빠르게 표출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결국은 이런 작업이 기적같은 치유와 병의 근절을 촉진시킨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명히 파악하려면
심리체계부터 살펴봐야 한다.
병이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갈등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이런 성향탓에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스스로 포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으로
타인들은 잘 용서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자기안의 모든 것을 포용하지 못하고
비난하거나 공격하면,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품게 된다.
이런 심리적 경향은
도덕적인 엄격함과
죄에 대한 두려움의 형태로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나는 변화를 통해
나의 인간적인 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했으며
불완전한 감정들을 느끼는 것이
인간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또
나약하다도
스스로를 공격하는 태도도
버려야했다.
그래서
인간성의 내적인 본질과
핵심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시작했다.
덕분에
의식자체안에
본질적인 순수가 있음을 자각하고
의식의 본질을 들여다보았다.
순진무구할 뿐
부정성은 없던 아이가
그토록 많은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여
병들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의 본질을 살피고
어린 시절
이 순수에 가해진 일들을 더듬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아이의 순수함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다.
하드웨어는 순수하며,
이 하드웨어를 통해
출력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프트웨어다.
하지만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 자체에
영향받지 않는다.
아이들을 보면
그들의 의식이
얼마나 순수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온갖 부정적인 프로그램들이
아이의 순수한 내면에 깔리는 것일까?
이유는 바로 순수함때문이다.
순수하기 때문에
들은 것을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것이다.
아이가
프로그래밍되는 이유는
부모와 스승에 대한 사랑과 신뢰, 텔레비전,
상업적 광고들, 사회때문이다.
근본적인 순수함 때문에
받아들이게 된 온갖 프로그램들이 작동하면서
아이의 순수함은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그리고
부모나 놀이친구의 편견을
믿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런 애들하고는 안놀아와 같은 사소하고도 교활한 말이 그 예다.
다시말해
부정적인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아이의 순수함때문이다.
이런 순수함은
우리의 의식속에
평생 남아있으며
언제나 작동한다.
순수함때문에
잘못된 것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면의 순수자체는
더럽혀지지 않는다.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용서하려면
이 내면의 순수를
다시 인식해야 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도
이 내면의 순수함 덕분이다.
아이의 순수함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사실 지금 이순간 이글을 읽는 것도 여러분 내면의 아이같은 순수함 덕분이다. 이 순수함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한결같이 믿고, 진실을 들으며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지금 읽는 내용을 못믿겠다면
그 이유는
내면의 상반된 프로그램이
'믿지 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믿지 말라'는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이 순수함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믿음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믿지말라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아마도 어느날 아버지에게 "바깥 사람들은 누구도 믿으면 안돼'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 순간 순수한 의식은 이런 불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자체는 오염되지 않고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순수함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함은
의식자체의 내재적 본성이며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다.
부정적인 생각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마음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은
하드웨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드웨어는
언제나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하고 청정한
본래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 본래의 순수성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순수성은
우리를 연민의 마음으로
이끌어준다.
청소년기나 사춘기에
부정적인 프로그램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자신에게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는 두려움까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욕망이나 상실감, 후회,
무력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면 자기혐오와 죄책감이 쌓인다. 그러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치유해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연민과 용서의 마음을 선택하지만 하면 된다.
나는 나 자신도
타인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하리라 결심했다.
자신에게
연민과 용서의 마음을 가지면
타인들에게도
자연히 그렇게 할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용서한 점들은
자연히 내 자신에게서도
용서할 수 있다.
외부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세상에 투사시킨
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성을 버리고
낮은 차원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교체하면
세상과 자신 그리고
삶의 관계를 다르게 경험하기 시작한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비난을
기꺼이 버림으로써
내면의 기쁨을 경험한다.
그러면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나 습관으로 정착된다.
자신과 타인에게
치유의 원천이 되려는 의도가
하나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환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환경을 만드는 것은
의도다.
치유의 원천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도를 가지면
이런 의도가
의식의 전체 에너지를 구축하면서
의식과 화합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그렇게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
지각의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세상을
용서와 치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연민은
낮은 에너지 차원의
동정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을
치유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겠다는
내적인 결심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비난하는 마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것이다.
더불어
'내 견해는 옳지만
네 생각은 잘못됐어'라는 식의 말로
타인과 갈라놓으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훈계적인 태도를 버린다.
몸과 마음은
믿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이런 결심은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의 작동원리는 근육 테스트로 확인할 수 있다. 자애로운 생각을 품거나 누군가의 모습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떠올릴때 근육테스트를 해보면 팔의 저항력이 강하게 나타난다. 반면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팔의 저항력이 약해진다. 마음이 믿은 것을 몸이 즉시 반영하기 때문이다.
용서와 연민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고,
다시 말해
삶을 부정하거나
도덕적으로 무시하면서
안좋게 만드는 시나리오에 가담하는 대신
삶을 지지하고
가꾸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고
안좋게 만드는 것들을
기꺼이 내려 놓으면,
병때문에 자신을 비난하는 일도 멈출 수 있다.
영적인 작업을 수행하거나
형이상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병에 걸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이들도 있다.
이런 태도는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든다.
이럴때는
몸의 차원에서
어떤 형상이 나타나든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식을 들여다보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또
삶의 모든 일들은
치유가 필요해서
표면화된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구도자는
몸에 병이 있음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한다.
"아하!
뭔가 낫기 위해
표출되고 있구나"
우리에게는
치유해야 할 여러가지를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의 신호다.
이런 것들을
치유할 기회가 생긴 것에
기뻐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중요하거나 근본적인 영혼의 진화(즉 카르마)가 있어야 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표면화된다.
역사상 위대했던
신비주의자들도
대부분 몸에
여러가지 병을 갖고 있었다.
병은
살펴보아야 할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하는
의식일 뿐이다.
병에 걸렸다는 것은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다.
내려놓고 지워버려야 하는데도
부여잡고 있는
믿음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용서해야 할 어떤 것,
사랑해야 할 어떤 것이
내면에 있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이 무엇이든
의식위로 떠오른 것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말해야 한다.
"고마워 궤양.
덕분에 나를 사랑하는 대신
비난하는 태도를 들여다보게 됐어.
정말 고마워"
"저혈당증,
내가 얼마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는지
알게해줘서. 고마워"
이렇게
병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병들때문에
연민에서
사랑의 장으로 기꺼이 옮겨가고
깨달음의 기쁨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몸은
이런 식으로
자기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통증에도 목적이 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식으로 이 목적에 충실할 것이다.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것이다.
병으로 자기 연민이나 분노에 빠지는 대신 "
병이 전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처럼 흥미롭게
의식의 본질을 배우며
병의 저변에 숨어있는
원인을 발견한다.
더욱 큰 이해를 통해서
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첫번째 도구는
자발성과 열린 마음이다.
치유를 위해
살펴봐야 할 무언가를
기꺼이 들여다보겠다고
자발적으로 말해야 한다.
몸의 치유는
마음의 치유와 더불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병을 놓아버릴 수 있었던 것도 생각의 형태를 변화시켜서 궁극적으로 병의 근원까지 치유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치유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비난을 놓아버리고
비판과 자기연민, 분노, 후회나 걱정, 불안,
슬픔, 자기비난,자기혐오같은
200이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놓아버리는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부정적인 것들을 놓아버려야
에너지 장의 특징도
치유를 불러오는 것으로 변한다.
나는 저혈당과 통풍의 믿음체계를 지워버리면서 계속 내려놓는 작업을 했다. 각각의 믿음체계가 나타나면 곧바로 지워버리면서 말했다. '
난 그것을 더이상 믿지 않아.
그것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다.
그것은 믿음체계때문에 생겼어.
내게는 그것을 철회할 힘이 있어"
이렇게
자신에게
거부와 거절, 부정의 힘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게는
그것을 거부할 힘이 있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우리 문화속에는
부정적인 믿음체계가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순진하게도
이런 믿음체계들에
나름의 실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오로지 생각의 차원에서만 실재한다.
어떤 생각의 형태에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해서
그 생각이 실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온갖 다양한 병에 대한
집단적인 믿음체계를 거부하며
이런 프로그램들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다.
또 선의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저혈당증이나, 통풍, 심장병,
콜레스테롤 등의 병들을 둘러싼
온갖 교육프로그램들에 대한
믿음도 거부했다.
각각의 병들이 생겨나는 순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요컨대 믿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달걀을 먹으면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라가고 콜레스테롤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자. 그렇게 생각하면 달걀은 실제로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콜레스테롤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킨다. 마음의 힘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은 생각을 몸의 차원에서 구현시켜 구체적인 실재로 만들 정도로 아주 강력하다.
그러므로
자기치유를
실제로 좌우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보통의 믿음체계를 역전시키는 일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은
몸의 차원에서 구현된다.
하지만 이 반대는 아니다. 콜레스테롤을 높이는 음식을 먹는다고 심장에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콜레스테롤을 많이 섭취했을 때 심장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믿음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점이다.
병의 전체적인 그림을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믿음체계다.
'믿음이 없으면
병은 몸에서 사라진다.
무의식적 죄책감의 근원을 내려놓고,
병에 딱지를 붙이고
증식시켜 강화하는 행위를 멈추면
우리의 주위와 자기예언은 드디어 실현된다.
그러므로
믿음체계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그저 떠오르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불리한 쪽으로 작용할수도 있고,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미처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힘의 방향을 돌려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
마음의 힘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줄 알면
부정적으로 작용하던 힘이
자신을 위해 움직인다.
그래서 나는 저혈당증이 있어라는 생각이 들면 생각을 멈추고 지워버리면서 진실을 말한다.
"난 그것에 더이상 영향받지 않아.
나는 순수한 존재야.
그것에 더이상 종속되지 않는다고"
저혈당증은 아주 좋은 예다. 나 자신이 저혈당증에서 회복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몇넌 동안 이병에 대해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저혈당증은 임상학적으로 내안에서 하나의 실재적이고 물리적인 현실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영양에 많은 신경을 썼는데, 저혈당증과 중독, 특히 알콜 중독과의 관계를 연구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저혈당증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내 몸안에서 작동하고 몸이 이런 믿음을 표현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깨닫기 까지 나는 저혈당증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믿음을 계속 지워버리면서 진실을 말했다. 그러자 심각한 저혈당 증상들이 사라져버렸다. 비정상이던 혈당도 저절로 돌아왔다. 몇년이나 이 병을 앓다가 저혈당증에 대한 믿음을 놓아버리고 비로소 병에서 회복된 것이다. 치유기법을 실천하고 약 2년만의 일이었다.
회복기간은
천차만별이었지만
이런저런 다른 병들도 사라졌다.
며칠만에 사라진 병이 있는가 하면
한시간도 안돼
치유된 병도 있고
몇달이 걸린 증상도 있었다.
2년동안 유스타키오관이 막혀있던 것을 빼면 가장 길게 앓은 병이 저혈당증이었다. 덕분에 몸무게도 늘어나지 않았고 저혈당 증세도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저혈당증은 내 삶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watchfullness 원칙
마음이 아주 강력하므로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한번이라도
그냥 넘겨버리면 안된다는 것
치유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경계(watchfullness)의 원칙이 있다.
마음이
아주 강력하므로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한번이라도
그냥 넘겨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알레르기가 있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이 생각에 제동을 걸고
떨쳐 버려야 한다.
알다시피
한번이라도 강력한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물리적 차원에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에
게으름을 피우면 안된다.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믿음체계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의 깊게 경계해야 한다.
다양한 병들을 치유할때 난이도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심각한 병이라고 여기는 것도
가벼운 병만큼
쉽게 털어버릴 수도 있다.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나 친구, 동료, 환자들 중에서 여러가지 심각한 질병을 말끔하게 회복된 이들이 있다. 의사들도 이들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가망없는 환자라 여기고 포기했다. 그러나 나의 친구가 된 사람들은 병의 흔적도 없이 아주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진실은 진실이고
거짓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거짓의 형태도
상관없다.
거짓된 것은
모두 거짓이고
마찬가지로
진실된 것은
모두 진실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은
마음으로 지울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
마음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치유 작업은
아주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병의 경험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고
생각의 형태들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모든 비판과 공격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자신과 타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사랑하면,
자신의 순수성을
다시 자각하면서
더 강력하고
전체적인 방식으로 치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럼 세번째 단계, 즉
기존 의학의 치료단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기치유에서
기존 의학의 치료법은
어떤 역할을 할까?
기존의학의 치료법도
이제는 놀라우리만치
효과를 발휘한다.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연민이 부족하여 생긴
죄책감을 내려놓으면
쓸모가 전혀없던 치료법들도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편두통부터 궤양, 게실염같은 온갖 질병을 앓는 동안 나는 20년 넘게 기존 현대의학의 치료를 받았다. 식이요법을 쓰기도 하고 약물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진정제와 제산제를 복용하는 등 온갖 치료법을 다 써보았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물론 증상악화를 막아주는 것 같기는 했다. 위와 결장을 떼어내지는 않았으니 치료법이 효과가 있었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 치료법들은
내 마음속에서
계속 작동중인
부정적 프로그램들과 싸워야만 했다.
모든 부정적인 프로그램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면
전에 잘듣지 않던
온갖 치료법들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진경제로는 거의 통제할 수 없던 경련이 완화되었다.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진경제와 제산제, 침술과 함께 식이요법도 필요할 것같아 시행한 결과 드디어 궤양이 완치되었다. 약물치료도 아주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알레르기를 완화시키는 약물치료법도 놀랄만큼 잘 들었다. 나중에는 약물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성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 온갖 개선책들이 드디어 필요없게 되면서 나는 환자식이나 규정식이 아닌 보통의 음식들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에 저혈당증, 게실염, 활동성 궤양, 편두통 무엇보다도 알레르기에 시달리는 동안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아야 했는지 아마 상상이 안될것이다.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언젠가 식당에 들어가서 메뉴를 봤는데 먹을 수 있는 것은 샐러드와 시금치 뿐이었다. 다른 음식을 먹으면 그 안의 씨앗들이 게실염을 악화시키고, 산은 궤양을 악화시킬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토마토든 그 비슷한 것이든 전혀 먹을 수 없었다. 물론 설탕이든 음식도 일절 못먹었다. 파스타도 제과점에서 파는 빵도, 디저트도, 고기도 먹을수 없었다. 통풍으로 요산수치가 높았기 때문에 이런 음식들을 피해야 했다. 지구상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몇가지 안됐다.
그러나
병이 완화되면서
음식도
믿음체계의 하나임을 깨달았다.
특정음식이 해롭다는 믿음체계는
건강에 전체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
특정음식이 해롭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음식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의 세계에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당분이나 콜레스테롤, 지방이 적게 들어있는 규정식을 더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콜레스테롤과 혈당은 정상이었다. 규칙적인 식사를 했으며 통풍에도 걸리지 않았다. 모든 증상들이 결국은 믿음체계의 결과였던 것이다. 통풍에 대한 믿음체계를 갖고 있으면 이것에 부합하는 믿음들도 전부 갖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청어절임(지금은 거의 매일 먹는다)같은 생선이나 이런 저런 육류들이 통풍을 일으킨다고 믿는 것이다. 통풍이 매우 심했을 무렵엔 크래커위에 간 파테를 약간만 얹어 먹어도 통풍증상이 일어나곤 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항상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새끼 고양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프라이팬에 간과 콩팢을 요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양이는 먹기는 커녕 냄새도 맡지 않았다. 프라이팬 한가득인 요리는 냄새도 좋았다. 양파에다 베이컨도 약간 넣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개박하도 살짝 뿌렸는데 고양이는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식이요법에 따른 제약이 전부 터무니없다는 믿음체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무한한 존재야.
나는 이런 제약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이런 제약은 말도 안돼"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서 한냄비나 되는 간과 콩팥을 거의다 먹어치워 버렸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먹었는데도 퉁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통풍은 한번도
재발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의 농담이다.
슬프지만 농담은 분명 농담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힘의 원천을 다시 획득하고
이것을 세상에 넘겨주지 않으면
통풍의 원인이
콩팥이나 간에 있지 않음을,
스트레스나 요산수치, 퓨린대사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통풍은
우리가 마음에 품은 것과
관련이 있다.
마음의 힘을 되찾고
이 힘을 부정하는 일을 그만두면
건강이나 병의 근원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근원이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의 의식, 우리의 무한한 존재가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제 이런 현상을 설명해주는 에너지 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본질적인 물리학과
에너지 장,
에너지 수준은 무엇일까?
진실(200)보다 낮은 곳에
자신을 두고
거짓된 힘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대신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진실을
기꺼이 들여다보면
이것이 진실임을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경험적 순수다.
우리 스스로
실험을 통해
이 진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개인적 자아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신이 근원임을
다시 인정하고
상위의 의식차원으로 올라가면
마음에 품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인 믿음체계와 생각의 형태들이 경험의 근원 혹은 원인이라는 점도 알게된다. 세상에는 어떤 것도 창조할 힘이 없다. 콩팥 요리 한 조각에 힘이 있을까? 물론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병을 창조할 힘이 있을까? 있다 .이것은 사실이자 진실이다.
이제
버블인간 신드롬을
파헤쳐보자.
버블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어린애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전인적인 건강과 영양에 대한 주장들을 전부 받아들인다. 그리고 관련 책자들도 모조리 잃어나간다. 하지만 이런 책들만 너무 오래 읽다보면 세상의 모든 것과 경험, 환경 등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죽일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이 이런 책들에서 버블인간이 받는 메시지다.
마그네슘도 칼슘도 자신을 죽여버릴 것 같다. 깔개와 페인트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와 공기 중의 모든 것들도 해로운 생각이 든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 옆에 지나가면 폐암에 걸릴 것같은 생각이 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부정적 사고체계를 전부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하나 지워버릴 수 있다. 나도 그렇게 했다.
친구 한명이 내게 달걀이 몸에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달걀을 끊었다. 콜레스테롤이 나쁘다고 해서 콜레스테롤을 멀리했다. 유제품도 고기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과일은 괜찮다고 했다. 좋아 그런데 과일은 살충제 덩어리 아닌가? 이런 과일을 좋아했지만 계속 먹지는 못했다. 살충제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과일과도 이별했다. 그 후에는 야채로 옮겨갔다. 오 이런 야채도 살충제 범벅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밭에서는 전부 살충제를 뿌렸다. 그리고 물고기에는 수은이 들어있었다. 대체 먹을 만한 것이 뭐야?
우리는 갈수록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어간다. 갈수록 건강해지기는 커녕 피해망상만 커진다. 그래선지 피해망상증을 잘 아난 의학계에서 주로 종사했던 나의 '누런 종이봉지" 친구들도 전부 죽었다. 이들은 음식에 대한 믿음체계를 너무 많이 받아들여서 유기농으로 지은 쌀이나 곡류 한두가지만 먹었다. 지구상에 안전하게 먹을 만한 것이 몇 안된다고 하면서 갈색봉투에 자신이 먹을 걸 싸들도 다녔다. 버블인간이 연회장에 갔다고 하자.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전부 독으로 가득찬 음식을 먹고 있다. 완두콩과 과일, 상추에 묻은 살충제와 고기로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런 종이 봉지에 먹을 것을 준비해 온 사람들로 북적대는 테이블 뒤쪽구석에 앉아서 역시 누런 종이봉지에서 음식을 꺼내 먹는다. 대규모 연회장에 가면 실제로 이런 장면을 볼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단식도 자주하고 달리기처럼 몸에 좋은 운동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런 친구들도 지금은 죽었다. 매일 달리면서 건강하게 살던 사람이 왜 일찍 죽었을까? 버블인간이 되어 피해망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이런 시각이 그들을 궁지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기조차 믿고 호흡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카페트도 의심했다. 카펫에서 숨 막히는 섬유질 조각같은 알레르기성 물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 였다. 페인트에서 뿜어나오는 가스나 절연제, 폐암을 유발할 수도 있는 담배연기입자 같은 것들도 삶의 환경을 갈수록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차츰 부정하게 된다. 더불어 자기 존재의 힘을 세상에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힘에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힘에 서서히 내주게 된다. 진실과는 반대로 향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상처를 잘 받는 희생자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 "환경 알레르기"에 시달리는 버블인간,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어 버린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순수한 공기, 즉 버블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마음안에서
의식안에서 일어난다.
현실의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모든 증상을 털어버리려면
자신이 내린 결정의 힘이
진실하다는 점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것뿐이다.
또
우리에게는
믿음체계를
무효화할 힘이 있다.
집단적인 부정적 믿음체계들을 거부하고
이것들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있는
힘이 있다.
우리는
가족에게서 비롯된 믿음체계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 집안사람들은 몇가지 알레르기를 앓아왔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 모두 알레르기 환자였다. 모두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으며, 돼지풀과 먼지, 건초, 말에 민감했다. 나도 이런 알레르기 증상을 전부 갖고 있었다. 눈이 붓고 가려운 것을 포함해서 온갖 증상들에 시달렸다. 식구들 모두 항히스타민제를 달고 살았다. 게다가 덩굴 옷나무에도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어서 나중에는 중증의 덩굴 옷나무 피부염으로 병원신세까지 졌다. 그러나 어떤 치료법도 효험이 없었다. 효과가 있는 것은 위스콘신 델스에 사는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 주술사에게 받은 갈색 고약뿐이었다.
그로부터 몇년 후 기적수업 모임에 참가한 나는 살충제를 맡아도 머리가 아프지 않아 깜짝 놀랐다. 이제 막 살충제를 뿌린 어느 집에 들어간 순간 내가 더이상 믿음체계에 영향받지 않음을 불현듯 알았다. 이 놀라운 발견이 있고 얼마 후였다. 어느날 아침 잠이 깬 나는 덩굴 옻나무에도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덩굴 옻나무 가지를 몇기 꺾어 도기 항아리에 꽃았다. 그리고는 "오 이런 기적이" 가지를 갖고 돌아다니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내가 "맛이 간"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부정적인 믿음체계도
차례차례 떨어져 나갔다.
그후로 22.6킬로그램을 감량해 과체중에서도 벗어나면서 내 몸에 대해 전체적으로 훨씬 편안해졌다. 삶을 통제할 힘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불안도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새로운 평온과 활력이 생겨났다.
모든 병은
몸과 마음,
영혼 전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 모든 방법들을
전부 적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회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운데는
카르마적 성향처럼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
더욱 깊은
내면의 발견이나
개인적인 의식의 진화로
병의 근원을 밝힐때까지
집요하게 계속되는 병들도 있다.
그러므로
영혼을 위해
영적인 작업을 계속하되
치유는 신에게 맡겨야 한다.
광대한 근원을 발견하고
밝혀내는 일이므로
성공적인 치료와 치유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렇다면
겸허와 내맡김이
충분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지 그 상황 자체에 무심하다면, 두가지 모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신에게 아주 깊이 자신을 내맡기고 상황을 통제하거나 바꾸려는 욕망을 버린 결과다.
주의할 점!
언제나
다른 의사에게 진단 결과를
확인받는 것이 좋다.
큰 실수가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도 여러차례 심각한 오진을 받은 적이 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아마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졌을 것이다.
예를들어
갑상선 기능항진증 때문에 생긴
심부전의 원인을
초기에 완전히 잘못 진단받았다.
또
전립선 장애는
수술할 필요가 없었으며
코막힘 제거제 사용을 중단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방가방가 ㅎㅎㅎ
감사합니다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병의 감각 경험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린다.
2) 병의 이름이나 딱지를 더이상 붙이지 않는다.
3) 말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꺼이 받아들인다
4) 생각이라는 형체와 믿음체계를 철회한다.
5)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사랑 에너지 장을 선택한다.
watchfullness 원칙
치유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경계(watchfullness)의 원칙이 있다. 마음이 아주 강력하므로 부정적인 믿음체계를 함번이라도 그냥 넘겨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알레르기가 있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이 생각에 제동을 걸고 떨쳐 버려야 한다. 알다시피 한번이라도 강력한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물리적 차원에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작업에 게으름을 피우면 안된다.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믿음체계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의 깊게 경계해야 한다. 다양한 병들을 치유할때 난이도가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은 마음안에서 의식안에서 일어난다. 현실의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모든 증상을 털어버리려면 자신이 내린 결정의 힘이 진실하다는 점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것뿐이다. 또 우리에게는 믿음체계를 무효화할 힘이 있다
모든 병은
몸과 마음,
영혼 전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회복에 도움을 주는 모든 방법들을
전부 적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