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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름의 돌 / 이근석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1994년 충남 논산 출생
▲2012년 고등검정고시 합격
[심사평] ‘여름의 돌’ 외 5편이 당선작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리듬감 때문이다. 과장이나 과잉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러운 리듬에 실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범상해 보이나 드문 기량이다. 일종의 빼어난 ‘예사로움’에 달한 기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름의 돌’은 청년의 불안과 기대를 수일한 이미지와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해 순조롭게 표현해 당선에 값한다. 과감함이 숙제라면 숙제인데 안정 없는 기획보다 신뢰할 만한 시적 진술이 올해의 선택이 된 것은 당선자에게 영광이자 도전이 될 것이다.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문정희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이즈 캔슬링 / 윤혜지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이다
나 좀 안아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 윤혜지 1984년생
[심사평] 윤혜지의 ‘노이즈 캔슬링’에는 기차 소리로 달려가는 지상의 시간이 있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공중의 시간이 있다. 날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시는 부유와 진공이 꼭 공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결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관계가 대낮의 파도처럼 무너질 때, 일상의 비애를 지워내는 것 또한 일상이고 그것이 진짜 비극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흔한 구식(舊式)의 삶을 일깨우는 것이 유일한 미덕이었다면 이 시를 내려놓고 각자의 비애 속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든 것은 그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실어나르는 목소리였다.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 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 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
전구 없는 필라멘트들
불을 켜세요
외쳐보는 겁니다
아, 이상해.
▲1994년 서울에서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개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개성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각자의 고유성을 얼마간은 지니고 있으며 생활과 사유 곳곳에서 그 고유함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숨기려 해도 얼핏 내비치는 사투리처럼, 감추려 해도 별안간 나타나는 표정처럼. 시는 나도 모르게 드러나는 개성을 서랍장 곳곳에 잘 수납하고 연과 행에 맞춰 잘 구획하는 관리자일지도 모른다.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은 정돈되면서 어질러진 시였다. 익숙한 지명을 동원하고 친숙한 어투로 말을 건네어 귀를 붙잡아 두면서도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리된 채 구성된 이미지 속에서도 곳곳에 돌출하는 의외성이 시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서효인 장석주 김소연)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최초의 충돌 /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1994년 인천 출생, 수원 거주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졸업
■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본명 고보경(28). 예술가교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문화매개 분야 공부 중
[심사평] ‘유실수’ 외 네 편을 응모한 차원선 씨의 작품은 각각의 시마다 이미지를 극적으로 쌓아가면서 심화시켜 가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본 적 없는 기교와 비약이지만 우리는 이 상실에 맞닥뜨린 자의 눈에 비친 낯설고 속절없이 슬픈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우리는 차씨가 익숙한 새로움을 되풀이하기보다 낯선 전환점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황인숙 손택수 장이지)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단순하지 않은 마음 / 강우근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 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에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가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의 소독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고르는 상대편을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밤의 비행기는 푸른 바다에서 해수면 위로 몸을 뒤집는
돌고래처럼 우리에게 보인다.
매일 다른 색의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고 있다.
버스에서 승객들은 함께 손잡이를 잡으면서 덜컹거리고,
승용차를 모는 운전자는 차장에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편의점에서 검은 봉투를 쥔 손님들이 줄지어 나오지.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없는,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생겨나는.
어느새 나는 10년 후에 상상한 하늘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쥐었다가 펴는 손에 빛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아도 그랬다.
내가 지나온 모든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995년 강릉출생
▲서울예대문예창작학과 졸업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돌고래 기르기 / 한준석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1990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는 ‘돌고래’라는 상징어를 넣어 이미지가 보일 듯 말 듯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미소는 돌고래를 기르기에 좋습니다”의 표현이 말하듯 시가 기본적으로 비유의 장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돌고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시 내용으로 보아 사랑, 꿈, 슬픔, 기쁨까지 다 아우르게 한다. 돌고래자리에 이 단어들을 집어넣고 읽어보면 금세 느껴질 것이다.(김영남 이학성)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독사가 고독에게 / 박소미
나는 자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동을 알아채는 침묵 이전의 기억 밑으로 밑으로, 웅크리고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재생에 몰두한다 어느 애도가 부재를 지나 탯줄로 돌아올 때까지, 타자의 몸속을 오가는 이 반복은 고고학에 가깝다 생환의 뒷면은 그저 칠흑 덩어리일까 벽과 벽 사이 미세한 빗살로 존재할 것 같은 한숨이 어둠 안쪽 냉기를 만진다 사금파리 녹여 옹기 만들 듯 이 슬픔을 별자리로 완성케 하는 일, 아슴푸레 떨어지는 눈물도 통로가 될까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창문 안으로 울컥, 쏟아져 내린다 살갗에 도착한 바람은 몇 만 년 전 말라버린 강의 퇴적, 불을 켜지 않아도 여기는 발굴되지 않는 유적이다 잊기 위해 다시, 죽은 자의 생애를 읊조려본다 그래 다시, 귀를 웅크리지 태아처럼, 점점 화석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방 안이 점점 어두워진다
▲1966년 전남 목포출생
▲김포문예대학 수료. 시품, 달詩 동인
[심사평] 박소미 씨의 당선작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나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무척 돋보였다. 함께 보내온 ‘달리는 숲’ 역시 당선작 못지않은 사유와 작품성을 담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런 점을 높이 사 박소미 씨의 ‘고독사가 고독에게’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의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좋은 작품들을 보여주길 기대한다.(강은교, 안상학, 김참)
■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변성기 / 김수원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
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모르게
▲1971년 경남 고성 출생, 본명 김경숙,
▲동아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수료, 동아대 강사.
[심사평] ‘변성기’는 일견 조금 서툴고 추상적인 시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가 있다. 호흡과 이미지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상상력의 폭이 크다. 심사자들은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잘 다듬어진 시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를 선정하기로 했다. 시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보다 힘찬 모험을 통해 유니크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박태일 전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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