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
양순례 수필
"마무리를 잘 해야죠."
토요일도 일하냐는 물음에 통화 중에 들은 말이다. 그는 오직 한길만 걸어온 공직자다. 착실한 가장으로 신앙심도 남다르다. 새벽기도는 기본이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리석게도 이 중생은 한마디 할 거 같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왜 부인을 아프게 하고 평생을 모신 장모님한테 치매가 오게 하냐고. 정년퇴직을 앞두고 그는 생각이 깊어진다. 부인은 암 투병에 아들딸은 아직 결혼 전인데다 장모님은 요양병원에 계신다. 아들 같은 사위로 살겠다던 약속이 틀어진 것 만 같아 외동딸인 부인보기 안쓰럽다. 남편의 박봉에도 두 자녀를 장학생으로 키운 부인이 고맙기만 하단다. 하나님께 감사기도가 절로 나오는 이유일 게다.
인간의 삶은 기분처럼 좋을 수만도 나쁠 수만도 없다. 매 순간 순간 기도할 뿐이다. 일찍이 산전수전 다 격어 본 그녀로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듯하지만, 처음 겪어보는 그로서는 암담한 모양이다. 처음 맞이하는 건데 왜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이 드는 그에게 보조를 맞추면서도. 조심스레 말해준다. 현실을 너무 깊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몇 마디 붙인다. 우리 의학이 좋아 암도 고칠 수 있다고, 장모님의 치매는 자연스레 받아드리라고, 자식들 역시 제 밥벌이 잘 하고 있으니 염려 안 해도 된다고. 또한 퇴직을 해도 안정적인 연금이 나올 테니 차차로 일을 찾아보면 될 일이라고 했다.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한다 하겠지만, 변변찮은 나도 혼자 살아낸 것이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란 생각을 토로하다보니 좀 머쓱했다. 아주머니 뵙기에 부끄럽네요. 하는 말은 들었지만 용기 잃지 말았으면 한다. 근심걱정 염려는 주께 맡기라는 성경말씀에 입각하여 긍정의 힘을 발휘할 줄로 믿는다. 그렇다,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다. 해를 넘길 때의 덕담도 마무리 잘 하고 부터 말을 꺼낸다. 해를 넘길 때마다 떠오르는 단어다. 글쓰기도 마무리작업을 잘 해야 한다. 들어가는 문장은 맞는지 하고자하는 말이 주제에 부합한지를 들여다보면서 수정으로 퇴고를 거듭한다. 한 지역에 정착하고 살다가 이주할 때도 되돌아보는 점검을 하게 된다. 수없이 연습을 거듭했던 체조선수도 마지막 착지를 잘해야 점수를 제대로 받는다. 이처럼 마무리는 언제 어디서든 등장하고야 만다.
나는 수 년 째 정신장애자 케어를 하고 있다. 때때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수행의 화음으로 되돌려놔야 한다. 서로의 음이 맞지 않는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맞을 때까지 기다린다. 쉽지 않다. 분석하고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일하게 정신의학과 담당교수와의 상담이 실마리가 된다. 잘못 형성된 뇌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언행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역방향으로 나간다면 나도 장애자다. 환상, 환청, 환시, 망상으로 본인과 상대가 힘들어질 때 있다.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스트레스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십여 년 가까이 함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엄마처럼 아들처럼 화났다가 웃다가 하며 산다.
지난 여름날 잔챙이 다슬기를 한 움큼 잡아왔다.
“이 자디잔 새끼를 잡으면 어떡해! 불쌍하잖여, 차라리 고기를 잡아오지.”
“고기는 안불쌍혀요?” 보호사가 한방 먹었다.
토막뉴스를 전해들을 때는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싸웠어.” 그러면 육하원칙으로 푼다.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싸웠냐고 하면, 순자 어매와 찬이 할머니가 싸웠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날은 자활센터에서 방문한 복지사와 대화 중에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타줬어요"
"먼말이래요?"
그 말도 육하원칙으로 물었더니, 매주 다니는 복지관에서 장애담당 선생님이 커피를 타줬다는 말이었다. 웃을 일은 아니지만 웃을 수밖에 없다. 가운데 토막 만으로라도 소통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를 부여해야한다. 그보다 못한 장애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몸담았던 곳에서 정년을 앞둔 그를 상상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맡은바 책임을 완수하려 노력했던 흔적들이 엿보였다. 좋은 일도 있었을 테고 때론 울분을 토해내는 일도 있었을 게다. 언제나 그가 믿는 하나님은 옷을 여미어주며 토닥여 주었으리라. 삶의 무게만큼 삶의 무대도 만만찮은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살아보면 유행가 부르듯 어디 쉬운 게 있던가.
그런데, 내가 신기한 것은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어려웠던 시간들을 다 꿰고 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나락줄기에 꽤진 메뚜기 훑어 구어 먹던 추억으로 남긴다. 경험과 체험은 삶을 성장시키는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오미자 맛의 열매다.
어느새 노을 역에 다다랐다. 나뭇잎은 떨어졌다 붙었다 수십 번 반복했다. 남은 자리에서 입 꼬리 멈추고 사방을 본다. 오래된 인생 무대에서 방백도 해 본다. "괜찮아.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장애자와 세상 끝나는 날까지 주섬주섬 챙길 것도 질겅질겅 씹을 것도 없다. 주어진 대로 맞이하면서 잔잔한 물결 따라 노니는 송사리 떼 바라보듯 하면 된다. 마무리 잘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벌어지는 사이만 없으면 좋겠다. 수박이 맛없으면 화채로 만들면 되고, 사랑에 까막눈이 아니기 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