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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반야바라밀.
제10장 열반의 기쁨
1. 강물은 바다로
부처님께서 제자 카사파에게 말씀하셨다.“너에게 여래가 얻은 오래 사는 업을 말하겠으니 자세히 들어
라. 어떤 보리의 인이 될 만한 것인지 지성으로 들어 그 이치를 알고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어야 한다. 나도 그러한 업을 쌓아 바른 깨달음을 얻었고, 지금 그 이치를 여러 사람에게 말한다. 보살이 오래 살려거든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보살펴라. 크게 사랑하고(대자), 크게 버리는(대사), 평등한 마음을 내어 살생하지 않는 계행을 일러주고 선한 법을 가르쳐라. 모든 중생을 오계와 십선 들 에 의해 살도록 할 것이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세계에 다니면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건져라. 해탈하지 못한 이는 해탈케, 하고 헤매는 이는 건져내며, 열반을 얻지 못한 이는 열반을 얻게 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로해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업을 짓는 인연으로 보살은 수명이 길고 지혜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카사파가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보살이 평등한 마음을 닦아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하면 오래 살게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생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래 살아 계시면서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백년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나려 하십니까?” “카사파, 강물은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와 같이 인간이나 천상이나 땅이나 공중에 있는 목숨의 강물은 모두 여래의 목숨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여래의목숨은무한한것이다.온갖존재중에서허공이가장영원하듯여래도모든중생가운데서가장수명이길다.” “부처님, 여래의 수명이 그렇다면 일 겁 동안만이라도 사시면서 중생을 위한 깊은 진리를 비내리듯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카사파, 너는 여래가 아주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비구 .비구니나 신통을 얻은 선인들도 오래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모든 법에 자제한 여래가 일 겁이나 백 겁을 더 못 살겠느냐.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고 바뀌지 않는 법이며, 여래의 몸은 화현한몸이고 음식으로써 유지되는 몸이 아니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보이는 것임을 알아라.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열반에 들려고 한다. 열반이란 여래의 법성이다. 여래는 영원한 법이고 바뀌지 않는 법이니, 너희들은 그런 이치를 알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그리고 정진한 뒤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널리 가르쳐야한다.“ <열 반경 장수품>
2. 멸하지 않는 법의 성품
카사파가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법의성품은 그 뜻이 무엇인지, 저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제가 알기로는 법의 성품이란 곧있었던 것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만약 있던 것이 없어진다면 몸은 어떻게 존재하며,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거기에 법의 성품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몸에 법의 성품이 있다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카사파, 너는 없어지는 것을 법의 성품이라 하지마라. 법의 성품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래의 경지는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 수 없다. 여래는 어느 곳에 머무르며, 어디로 다니며, 어디서 보며, 어디서 줄거워하느냐고 묻지마라. 여래의 법신과 여러 가지방편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승을 받들어 수행하면서 영원하다는 생각을가져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다르지도 무상하지도 않으며 바뀜도 없다. 만약 이 세 가지 법에 대해서 다르다는 생각을 낸다면 그는 청정한 삼보에 의지하지 못하며, 금지된 계행도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는 성문이나 연각의 보리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여래의 법신과 방편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하면 곧 귀의할 곳이 있을 것이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영원한 법이 있으므로 귀의할 곳이 있어 무상하지 않다. 만약 여래가 무상하다면 여래는 천상이나 인간의 귀의할 데가 아니다.” 부처님, 어둠 속에서는 나무는 있어도 그 그림자는 없습니다.” “카사파, 그렇게 말하지 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여래도 그와 같이 그 성품은 항상 존재하여 없어지거나 바뀌는 것이아니다.다만 지혜가 없는 눈으로는 보지 못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는 나무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여래를 법보나 승보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귀의할 곳이 못될 것이다.” “부처님, 저는 여래와 교법과승단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이치를 널리 말해도 믿지 있다면 그들은 오랫동안무상만을 닦아온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서리와 우박이 되겠습니다.” “착하다 .너는 바른 법을 잘 지킨 것이며 사람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오래 살 것이며, 지나간 세상일도 잘 알게 될 것이다.” <열반경 장수품>
3. 가짜 약
카사파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라한과 같은 훌룡한사람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안락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여래와 같으므로중생들의 귀의할 곳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미라 열매의 설고 익음을 알 수 없듯이 그들이 파계하거나 청청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카사파, 심오한 이 법문을 의지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어떤 고을에 약장수가 있었다. 그는 히말리아에서 캐온 좋은 약을 팔면서 더러는 다른 약도 섞어 팔았다. 사람들은 히말리아에서 가져온 약만을 사려고 했으나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약장수가 다른 약을 주면서 히말리야에서 가져온 약이라 속였지만 그들은 분별하지 못하고 좋은 약인줄로만 알았다. 성문들 가운데도 이름만 빌린 사문이 있고 진실한 사문도 있다. 계행이 청정한 이도 있고 계를 깨뜨린 이도 있다. 그러나 신도들은 그들을 평등하게 공양하고 예배한다. 그것은 저 가짜 약을 히말리야의 약인줄 알고 사온 사람들처럼 신도가 육안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려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어떤 이는 계행이 청정하고 어떤 이는 계를 깨뜨리며, 아무개는 참 스님이고 아무개는 가짜 스님인 것은 천안통을 얻은 이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파계한 줄 알았다면 그에게는 보시하거나 예배하고 공양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법답지 못한 줄 알았거든 그의 요구를 거절하라. 그가 가사를 입고 있을지라도 공경하거나 예배하지 마라.” <열반경 사의품>
4. 네 가지에 의지하라
카사파가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옳은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진실하여 헛됨이 없으니 제기 금강석처럼 굳게 지키겠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구들은 네 가지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말며,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며,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다, 카사파.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곧 여래의 열반에 의지함이다. 모든 여래의 가르침이 곧 법의 성품이며, 법의 성품이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인데, 여래를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이다.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는 의지하지 말아라. 아라한과 같은 이는 세상에 나와 법을 지키는 사람이니 그런 줄 알고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래의 은밀하고 깊은 법을 잘 알아 여래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파계한 몸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여래는 무상하고 변한다고 말하면 그런 사람에는 의지하지 마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마라. 뜻은 깨달음이고 깨달았다는 뜻은 만족함이다. 만족하다는 뜻은 여래의 영원함이고, 교법이 영원하다는 것은 승가가 영원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뜻에 의지함이다. 말에 의지하지 마라는 것은, 꾸며내는 언론과 번지르르한 문장에 팔리지 말라는 뜻이며, 교활하고 아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마라. 지혜란 곧 여래다. 여래의 공덕을 잘 알지 못하는 성문들의 분별은 지식이니 거기에는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여래가 곧 법신인 줄 알면 그것은 지혜이니 의지해야 한다. 여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몸을 보고 그것이 오온에 속하고 음식물로 기르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니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마라. 소승은 불요의이고, 영원해서 변하지 않는다 하면 요의이다. 만약 여래가 음식물로 산다고 하면 불요의이고, 영원해서 변하지 않는다 하면 요의이다. 여래의 열반이 불이 꺼짐과 같다고 하면 불요의이고, 여래가 법의 성품에 든다면 요의이다. 성문승은 밭갈이가 서툴러 열매를 거두지 못함과 같으니 의지하지 말 것이고, 대승의 진리는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말한 것이므로 의지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와 같은 네 가지를 의지하고 의지하지 말 곳을 잘 알아야 할 것 이다. 나는 육안밖에 갖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 네 가지 의지할 곳을 말한 것이지, 지혜의 눈을 가진 이를 위해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의지할 곳을 거듭 말하겠다. 법이라 함은 곧 법의 성품이고, 뜻이라 함은 영원해서 변치 않음이며, 지혜라 함은 중생들이 모두 부처의 성품을 지녔다는 것이고, 요의라 함은 모든 대승의 법문을 통달하는 것이다.” <열반경 사의품>
5. 바다의 구명대
부처님께서 카사파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출가하면 계율을 지켜 위의를 잃지않고,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항상 행동이 의젓해서 조그마한 허물도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려는 마음이금강석과 같이 단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몸에 구명대를 차고 바다를 건너가는데, 바다 속에 있던 나찰 귀신이 그에게 구명대를 달라고 했었다. 구명대를 주어 버리면 자기는 물에 빠져 죽게될 것을 생각하고‘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줄 수없다’ 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나찰은 전부를 주기 어렵거든 그 반이라도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나찰은 절반을 줄 수 없거든 삼분의 일이라도 달라고 했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를 보고 이번에는 손바닥만큼만 떼어 달라고 했다. 그래도 안 된다면 티클만큼이라도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잘라 거절했다. “네가 달라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넓은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앞길이 얼마나 먼지 도 모른다. 그런데 바늘귀만큼이라도 너에게 떼어 준다면 그 구멍에서 점점 공기가 새어 결국은 바다를건너지 못한 채 죽고 말지 않겠느냐.” 카사파, 보살이 계율을 지키는 것도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구명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이와 같이 계를 지킬 때에 온갖 번뇌의 나찰이 따라다니면서네 가지 근본계를 깨뜨리면 편안히 열반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꾄다. 이때 보살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계율을 지키다가 무간지옥에 떨어질지라도 계율을 깨뜨리고 천상에나지 않겠다.’ 보살은 이와 같이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금강석처럼 단단히 가져, 대소승의 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정한 계의 덕을 갖추게 될 것이고 성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거룩한 행이라 한다.” <열반경 성행품>
6. 생과 사의 비유
“카사파, 또 거룩한 행이 있으니 그것은 네 가지 진리 인. 고 .집. 멸. 도. 이다. 고는 괴로움이 핍박하는 것이고, 집은 애욕을 일으키는 집착이며, 멸은 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도는 대승의 행을 말한다. 괴로움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원수와 만나고, 구해도 얻지 못하고, 모든 욕망이 불붙듯 일어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괴로움은 살려고하는 데서 일어난다. 중생은 어리석음에 덮여 나는 것은 탐하고 죽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보살은 처음 나는 것을 볼 때에 이미 근심을 본다. 어떤 여인이 남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여인의 얼굴이 아름답고 값진 옷을 입었으므로 주인이 호감을 가지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 사는 누구십니까?” “나는 공덕천입니다.” “ 무슨 일을 하십니까?” “ 찾아가는 데마다 그 집에 온갖 보물을 생기게 해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그 여인을 집안에 맞아들여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려 공양하였다. 조금 후에 또 한 여인이 문앞에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찌그러진 얼굴에 떗국이 흐르고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주인은 기분이 언짢아“당신은 누구요?”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흑암천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왔소?” “나는 가는 데마다 그 집의 재산을 없애버립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칼을 들고 나오면서 “썩 물러가지 않으면 이 칼로 죽여버릴테다.” 하고 덤벼들었다. 그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고 지혜가 없소. 조금 전에 당신집에 찾아온 이는 내 언니요.나는 항상 언니와 행동을 같이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쫓아내면 결국 내 언니도 따라나가게 될 것이요.”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 공덕천에게 물었다. “밖에 어떤 여인이 와서 당신의 동생이라 하는데 사실입니까?” 공덕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를 좋아하려거든 내 동생도 함께 좋아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동생과 행동을 같이하였고 한 번도 서로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나는 좋은 일을 하고 동생은 나쁜 짓을 하며, 내가 이로운 일을 하면 동생은 손해 끼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려거든 동생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주인은 두 여인을 다 내쫓아버렸다. 두 여인이 팔을 끼고 나란히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주인은 마음이 후련했다. 두 여인은 가난한 집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 집 주인이 두 여인을 보자 반기면서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삽시다.” 하고 맞아들였다. 카사파,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병이 들면 죽게 되는 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두 가지에 다 같이 집착하지만, 보살은 함께 버리고 애착하지 않는다. 바라문의 어린 아들이 배가 고파 똥 속에 과일이 있다는 것을 보고 건져냈다. 어떤 지혜로운 이가 이것을보고 “ 너는 바라문의 지체 높은 집 아들인데 어째서 똥 속에 떨어진 더러운 과일을 건져내느냐?” 하고 물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며 “먹으려고 주운 것이 아니라 깨끗이 씻어 도로 버리려고 그랬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지혜로운 이는 어이가 없어 이렇게 꾸짖었다. “도로 버릴 것을 무엇하러 주웠느냐?” “카사파, 보살도 같다. 생을 받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음은 지혜로운 이가 아이를 꾸짓는 일과 같고, 범부들이 생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아이가 과일을 도로 버리는 일과 같다.” <열반경 성행품>
7. 꽃밭에 숨은 독사
부처님께서 카사파에게 말씀하셨다.“카사파, 고는 죽음이다. 억센 폭우가 쏟아지면 약초와 나무와 숲이 다 꺽이고 말지만 금강석만은 깨뜨려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폭우도 모든 중생을 다 쓸어가지만 대승열반의 경지에 있는 보살만은 해치지 못한다. 저 금시조가 모든 용을 잡아먹지만 삼보에 귀의한 용은 먹지 못한다. 죽음이란 금시조도 그와 같아서 무수한 중생을 잡아가지만 공. 무상. 무원의 선정에 든 보살은 잡아갈 수 없다. 죽음이란, 험난한 길에 노자가 없는 것 같고,갈 길은 먼데 길동무가 없는 것 같고, 밤낮으로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길과 같다. 어두운 길에 등불이 없고, 들어 갈 문은 없는데 집만 있고, 아픈 데가 있어도 치료할 수가 없으며, 내 몸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런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은 참으로 큰 괴로움이다. 카사파, 집이란 애욕을 말한다. 사랑에는 선과 악이 있는데, 선한 사랑은 보살이 구하는 것이고, 악한 사랑은 중생이 구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랑은 집착이고 보살의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왕이 거동하면 신하도 따라가듯이 애욕이 가는 곳에는 항상 미혹이 따른다. 습한 땅에 잡초가 무성하듯 애욕의 습지에는 번뇌의 잡초가 무성하다. 또 애욕은 나찰의 딸과 같아 아이를 낳는 대로 잡아먹고 마침내는 자기 남편까지도 잡아먹는다. 중생들이 선업의 아이를 낳으면 낳는 대로 잡아먹고 중생까지도 잡아먹는다. 애욕은 또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사람들이 꽃을 탐해 꽃밭에서 꽃을 꺽다가 독사에 물려 죽는다. 중생들은 오욕의 꽃을 탐하다가 애욕이 뿜은 독을 받고마침내 악도에 떨어진다. 멸은 애욕의 불이 꺼짐이다. 보살은 번뇌의 불을 끄고 고요한 적멸에 들어간다. 번뇌가 다한 사람에게는 즐거움뿐이므로 어떤 괴로움도 받지 않는다. 도란 팔정도다 .빛이 있어야 물체를 볼 수 있듯이, 보살은 대중 속에서 살면서 팔정도에 의해 모든 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대승의 열반에 머물러 고집멸도의 참된 이치를 관찰해야 한다.” <열반경 성행품>
8.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살이 청정한 행을 갖추려면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고, 기뻐하고, 버리는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사무량심)을 수행해야 한다. 여래는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어떤 중생이 재산을 탐하면, 그를 위해 왕이라도 되어서 그의 요구대로 갖가지 물건을 주어 기쁘게 한 뒤 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그를 편안하게 한다. 또 어떤 중생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하면, 그의 하인이 되어 시중을 들면서 마음에 들게한 뒤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중생이 성질이 사나워 자기 고집만을 세우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몇 천 년이라도 그를 타이르고 달래어 마음을 누구러뜨린 뒤 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들인다. 선남자, 여래는 이와 같이 끝없는 세월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중생들을 권유하고 교화하여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여래는 나쁜 무리 속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음이 연꽃과 같다. 사랑하는 마음을 닦는 이는 탐욕을 끊게 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는 이는 성내는 일을 끊게 되며, 기쁜 마음을 닦는 이는 괴로움을 끊게 되고, 버리는 마음을 닦는 이는 성냄과 차별 두는 마음을 끊게 된다. 이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은 온갖 착한 일의 근본이 된다. 보살이 가난한 중생을 만나지 못하면 사랑하는 마음을 낼 인연이 없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면 중생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보시를 하면서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또 보살은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라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여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 곧 사랑(자)의 성취다. 그러나 큰 사랑(대자)은 아니다. 큰 사랑은 실로 이루기 어렵다. 끝없는 세월에 번뇌만 쌓고 선한 법을 닦지 않았으므로 하루 동안에 마음을 조복할 수 없다. 이를테면 마른 완두콩은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번뇌의 굳기도 그와 같다. 하루 동안 마음을 거두어 산란치 않으려 해도 조복하기가 어렵다. 또 집에 있는 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산에 있는 사슴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 달아난다. 성내는 마음을 버리기 어렵기는 집 지키는 개와 같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기는 산에 있는 사슴 같으므로 조복하기 어렵다. 또 성내는 마음은 돌에 새긴 글씨처럼 지우기 어렵고, 사랑하는 마음은 물위에 쓴 글씨처럼 빨리 사라진다. 성내는 마음은 달아오른 불덩이 같고, 사랑하는 마음은 번갯불과 같다. 그러므로 조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해 이롭고 즐겁지 않은 일은 없애버린다. 이것이 대자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해 이로움과 즐거움을 준다. 이것이 대비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대할 때에 마음으로부터 기뻐한다. 이것이 대희다. 보살은 모든 법을 볼 때에 평등한 마음으로 차별을 두지 않고 자기 기쁨을 남에게 준다. 이것이 대사다. 이 네 가지 그지없는 마음은 모든 선해의 근본이 된다.” <열반경 범행품>
9. 자비심이 곧 여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보시를 하는 것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아니고 남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내거나 은혜 갚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보시를 할 때에는 자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받는 사람을 가려서도 안 된다. 그가 계행이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거나, 선지식이거나 선지식이 아니거나 따져서는 안 된다. 보살이 만약 보시받을 사람의 계행이나 그 결과를 따진다면 끝내 보시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보시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다를 갖출 수 없고, 보시바라밀다를 갖추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도 없다. 보살이 보시를 할 때에는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해야 한다. 병든 중생을 보면 부모가 병든 자식을 대하듯 가엾이 여겨 보살펴주고, 즐거워하는 중생을 보면 병든 자식이 다 나은 것을 보듯 기뻐하고, 보시한 뒤에는 다 큰자식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듯이 해야 한다. 보살이 자비스런 마음으로 음식을 보시할 때에 다음과 같이 서원을 세워야할 것이다. 내가 지금 보시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함께 하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중생들이 모두 큰 지혜의 음식을 얻어지이다. 바라건대 중생들이 법으로 맛있는 음식을 삼고 애욕의 음식을 찾지 말아지이다. 모든 중생들이 공한 이치를 깨달아 허공과 같이 걸림없는 몸을 얻어지이다. 바라건대 모든 중생들이 자비심을 일으켜 복밭이 되어지이다.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한량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이 모든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여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선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은 곧 자비심이며, 자비심은 곧 여래다.” <열반경 범행품>
10. 적멸의 즐거움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 “무엇이 큰 열반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나이고, 청정한 것이 큰 열반이오. 보살이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괴로운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고 진실한 가르침을 보여 준 다면 그것은 곧 큰 열반이오. 크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들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여래와 보살은 보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합니다. 또 대아가 있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대아란 무아의 경지에서 자유자재함을 말하는 것이오. 따로 구하는 일이 없으니 얻을 법도 없고,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 차 있으니 없는 것 같지만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오. 또 큰 즐거움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선악에서 벗어난 것이오.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고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안합니다.또 한결같이 청정하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온갖 청정하지 못한 것을 아주 끊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큰 즐거움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선악에서 벗어난 것이오.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고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또 한결같이 청정하기 때문에 큰 열반이라 하는데, 온갖 청정하지 못한 것을 아주 끊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업의 싹을 말려 버린 중생이라 할지라도 나쁜 생각을 돌이켜 바른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바른 꺠달음을 얻을 수 있소. 열반에는 머물 곳이 없소. 다만 번뇌를 끊을 뿐이오. 열반의 경지는 이와 같이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나이고 청정한 것이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애욕의 즐거움이 아니라 적멸의 즐거움이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1. 선지식
부처님께서 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이란 부처님과 보살과 대승경전을 믿는 사람이오. 그들은 중생을 교화하여 열 가지 나쁜 업을 버리고 열 가지 선한 업을 쌓게 하기 때문이오. 또 선지식은법대로 말하고 말대로 행동합니다. 스스로 살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살생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도를 닦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를 가르쳐 닦게 합니다. 자기의 즐거움은 돌보지 않고 항상 중생을 위해 즐거움을 구하며 남의 허물을 볼지라도 그의 단점을 말하지 않으며, 남을 위해 착한 일만 하는 것이 선지식이오. 허공에 걸린 달은 보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차 가듯이, 선지식도 배우는 이로 하여금 나쁜 법은 멀리하고 선한 법은 자라게 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선지식을 가까이 섬기는 사람은 본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한 지견이 없었더라도 단박 갖추게 됩니다. 진실한 선지식은 여래와 보살이오. 여래와 보살은 지혜로운 의사와 같소. 중생의 병과 그 약을 알고 병에 따라 약을 주어 낫게 하기 때문이오. 중생에게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병이 있소. 탐욕의 병에 걸린 사람은 해골을 생각하게 하고, 성냄의 병에 걸린 사람은 자비한 것을 생각하게 하며, 어리석음의 병에 걸린 사람은 십이인연을 생각하게 하여 각기 그 병을 낫게 하는 것이오. 여래와 보살은 또 뱃사공과 같소. 나고 죽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중생을 건너게 해주기 때문이오. 여래와 보살은 모든 선한 법의 바탕이오. 그러므로 중생들은 여래와 보살로 인해 선한 법을 갖추게 되는 것이오. 마치 모든 약초가 히말리야에서 나오듯이, 모든 선한 법은 여래와 보살로부터 나오는 것이오. 이와 같이 여래와 보살은 선지식이오. 중생들이 선지식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의 병을 없애고 열반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2. 인연 따른 해탈
부처님께서 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번뇌를 끊는 것이 열반이 아니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오. 여래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항상 열반이오. 지혜가 걸림이 없는 것을 또한 열반이라합니다. 보살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아주 끊어 버렸으므로 해탈했다 합니다. 그리고 보살은 모든법을 막힘없이 잘 알므로 해탈의 지견을 얻었다고 하며, 혜탈의 지견을 얻었으므로 그 전에 듣지 못한것을 이제 듣고,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이르지 못한 데를 이르게 됩니다. 이 떄 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해탈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품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본래 얽매인 것이 아닌데 어째서 마음이 해탈한다 하십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소. 마음은 탐욕의 번뇌에 얽히는 것도 아니고 얽히지 않는 것도 아니며, 해탈도 아니고 해탈 아님도 아니오. 있음도 없음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과거나 미래도 아니오. 모든 법은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오. 여래와 보살은 중도를 보이오. 모든 법이 있다고도 하지 않고없다고도 하지 않소. 인연으로 생겨나므로 그 인연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오. 여래와 보살은 마음에 깨끗한 성품과 부정한 성품이 있다고 단정적인 말을 하지 않소. 그것은 꺠끗함 마음이나 부정한 마음이 머무는 데가 없기 때문이오, 인연을 따라 탐욕을 내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고, 본래 탐욕의 성품이란 없는 것이므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오. 이 마음은 탐욕과 화합하지 않고 성냄이나 어리석음과도 화합하지 않소. 마치 해와 달이 안개나 구름에 가리면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와 달이안개와 구름에 화합될 수 없는 것과 같소. 그러므로 탐욕의 번뇌가 마음을 더럽하지 못한다고 하며, 여래와 보살은 탐욕의 번뇌를 아주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했다는 것이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3. 삼매의 선행
부처님께서 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큰 열반을 닦는 것은 든든한 뿌리를 얻는 일이니 그것은 곧 게으르지 않는 불일망이오. 방일하지 않음은 도의 뿌리이고 모든 선의 근본이오. 모든 짐승의 발자국 가운데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 크고, 모든 빛 중에서는 햇빛이 제일인 것처럼 불일망은 모든 선행 중에서 첫째가는 선행이오. 또 보살은 이 몸이 바른 깨달음의 도를 얻는 그릇임을 생각하여 악마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좁은 소견을 가져서도 안되오. 모든 중생은 다 복밭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해치려는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오래 살기를 원하시오. 훔치려는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구하는 것을 얻도록 원하시오. 음란한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애정에 목말라하는 일이없기를 원하시오. 거짓말하려는 생각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정토를 이루어 꽃이 향기롭고 온갖 소리가 아름다워지기를 원하시오. 이간질이나 남을 헐뜯는 생각을 버려 중생들이 화목하여 바른 말 하기를 원하시오. 그릇된 소견을 버려 이 선행으로써 중생들이 모두 지혜가 충만하기를 원하시오..이와 같은 원력과 인연으로 부처를 이룰 때에는 그 원이 성취되어 이 세상은 청정하게 정화되고 모든 번뇌의 적을 물리치게 될 것이오. 대지는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지만 지녔다는 생각이 없듯이, 보살은 번뇌를 깨뜨리고 중생을 건진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 되오. 보살은 어떠한 형상이나 자취에 집착함이 없이 항상 삼매에 의해 교화해야 합니다.” <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14. 불 성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불성이란 무엇이며, 왜 영원하고 즐겁고 <나>이고 꺠끗하다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 물었소. 누구든지 법을 위해 물으면 그는 지혜와 복덕을 갖추게 되고, 보살이 이 두 가지를 갖추면 불성을 알게 될 것이오. 불성을 제일의공이라 하니 그것은곧 지혜요. 지혜는 공과 불공을 보고, 상과 무상을 보며, 고와 낙을 보고, 아와 무아를 봅니다. 공과 무상과 고와 무아는 생사요, 불공과 상과 낙과 아는 열반이오. 중도는 불성이고 바른 깨달음의 종자요. 중생은 무명에 덮이어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죽는 것과 같이 스스로 업을 지어 생사에 오락가락하는 것이오. 성문과 연각은 공한것만 보고 <나>인 것은 보지 못하오. 그래서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고, 제일공덕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고, 중도가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못하는 것이오. 생사의 원인은 무명과 애욕에 있고 이 두 중간에서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오.이러한 생사는 중도에 의해 꺠뜨릴 수 있으므로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 하며, 불성은 영원하고 즐겁고 나이고 꺠끗한 것인데, 중생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서 무상하고 괴롭고 내가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반이란 곧 번뇌의 불이 꺼져 버린 것이오. 또 열반은 우리들이 거처하는 방과 같아서 번뇌의 비바람을 막는 것이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밝지 못하지만 여래의 눈으로 보면 환하게 밝소. 아는 데에는 두 길이 있소. 눈으로 보는 것은 마치 손바닥에 과일을 쥐고 보는 것과 같은데, 중생은 들어서 알기 때문에 밝게 볼수 없소. 그러나 지극한 믿음을 내면 볼 수 있을 것이오.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오. 그러나 불성은 깨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끌려가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아니하며 허공과 같소. 모든 중생에게는 다 허공과 같은 불성이 있소. 만약 이 불성이 없다면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나고 크는 것도 없을 것이오. 허공에는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중생의 불성도 그러하여 보살이라야 겨우 볼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은 여래의 경지이니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중생은 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의 그물에 걸려 생사에 괴로워하지만, 불성을 보면 생사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얻을 것이오.”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15. 보리심을 내는 일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부처님, 만약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모두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인연이 화합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끝내 못 이루는것이 아니라 늦게 얻는 것이오. 인과 연이 화합되어야 결과를 이루는 것이오. 인은 불성이고 연은 보리심을 내는 일이오. 보살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하면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되오. 믿지 않고, 짓지 않고, 의심하고, 몸과 재물을 아끼고, 열반을 두려워하고, 참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걱정 근심으로 모든 일을 즐기지 못하고, 게을러 도 닦기를 힘쓰지 않고, 나쁜 벗과 친하고 교만하며, 스승의 허물을 찾고, 생사를 좋아하고, 삼보를 공경하지않는 등 이와 같은 일이 보리심을 깨뜨리는 것이오. 그러나 뜻을 바로 세워 법에 의지하고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보리심을 내게 될 것이오. 중생들이 나를 해치려 하면 ‘이 사람이 나에게 보리의 인연을 심어 주는구나. 만약 이런 이가 없으면 나는 무엇을 의지해 도를 이룰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자비심으로 대하시오. 교만한 마음을 내지 말고, 항상 법문을 듣고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시오. 들은 것이 많은 것보다 조금 들었을지라도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몸과 말과 생각의 세 가지 업을 악에 물들지 않게하고, 몸과 목숨과 재산을 아끼지 말며, 남에게 은혜을 입었거든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크게 갚으시오. 말을 항상 부드럽게 하여 나쁜 말을 하지 말고, 마음이 거친 사람을 부드럽게 대해 주며, 근심이 있는 이는 근심을 덜어주고, 굶주리는 사람에게 음식을 넉넉히 나누어주며, 병든 사람을 고쳐 추고, 전쟁이 일어나거든 중재하여 화평하게 하며, 부모와 스승을 공경하고,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는 자비로써 대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라면 무량겁에 지옥의 고통을 대신 받더라도 뉘우치지 말고, 남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볼지라도 시기하지 말며,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과보의 인연을 모으지 말고, 현재의 쾌락에 탐착하지 마시오. 이와 같은 선행에 의해 보리심을 물리치지 않으면 부처를 보고 불성을 환히 깨칠 수 있을 것이오.” <열반경사자후보살품>
16. 칠보산의 비유
부처님께서 사자후보살에게 말씀하셨다.“중생이 보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중생에게 불성이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두 나그네가 있었소. 그들은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소. ‘어느 곳에는 칠보로된 산이 있고, 그 산에는 감로수가 철철 넘치고 있다. 그 산에 가기만 하면 많은 보석을 얻어 단박에 부자가될 수 있고 시원한 감로수를 마시면 죽지 않고 오래 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기가 어렵다.’ 이 말을 들은 두 나그네는 정신이 번쩍 나서 길을 떠났소. 길을 가던 도중 칠보산에서 많은 보석을 가지고 온다는 사람을 만났소. ‘그 곳에는 정말 칠보로 된 산이 있고 감로수가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많은 보석과 시원한 감로수를 마시고 오는 길이오. 그런데 길이 험하고 도둑이 많아가는 사람은 수없이 많은데, 그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이 말을 듣고 한 나그네는 미리 겁을 먹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말았소. 그러나 다른 한 나그네는 ‘이미 갔다가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라고 못 갈 리가 없다. 그 곳에 가기만 하면 소원대로 많은 보석을 가질 수 있고 감로수를 마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만약 가다가 도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죽음밖에 더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든지 언젠가는 한번 죽게 마련 아닌가. 다행이 뜻을 이루게 되면 부모 형제와 모든 이웃을 두루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쉬운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결심하고 길을 재촉하였소. 칠보산이 큰 열반이고 감로수는 불성이며, 도중의 도둑떼는 번뇌이고, 꾸준히 길을 간 나그네는 불퇴전의 보살이며, 되돌아온 나그네는 나약한 중생에 견줄 수 있을 것이오. 불성은 그 길과 같아 항상 있어 변하지 않소. 겁을 먹고 되돌아가는 자가 있다고 하여 그 길이 상주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소. 그와 같이 보리의 길에는 누가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물러남이 있을 뿐이오. 모든 중생은 반드시 도를 이룰 수 있고, 어떠한 죄를 범한 자라도 다 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17. 사라숲을 빛내는 사람들
사자후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어떤 비구가 이 사라숲을 빛나게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셧다. “가르침을 잘 들어 그 뜻을 밝히고, 중생을 위해 널리 말해주는 비구라면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사자후보살이 말했다. “그런 비구라면 아난다이겠습니다. 아난다는 그릇에 담긴 물을 다른 그릇에 그대로 옮기듯이,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잘 듣고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안으로 시방세계 보기를 손바닥 안에 아마라 열매 보듯이 하는 비구라면 또한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 그런 비구라면 아니룻다이겠습니다. 아니룻다는 천안으로 온 세계를 환히 보되조금도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고 고요를 즐기며 부지런히 정진하는 비구라면 또한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그런 비구라면 카사파이겠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공덕을쌓을 뿐 자기 이익 때문에 공덕을 쌓지않는 <갈등없는삼매> 에 든 비구라면 또한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그런 비구라면 수부티이겠습니다.” “신통을 잘 쌓고 지혜를 성취한 비구라면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음을 말하고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는 몸으로 걸림없이 자유로운 비구라면 이 숲을 빛나게 할 것이오.” 이때 사자후보살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그것은 다만 부처님 한 분뿐입니다. 원컨대 큰 자비를 베풀어 이 숲이 빛나도록 여기 오래 머물러 주십시오.” “머문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오. 교만을 가지고는 해탈을 얻을 수 없소. 그러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소. 여래는 모든 교만을 아주 떨쳐 버렸는데 어찌 여기에만 머물러 있겠소. 또 머문다는 것은 생사가 있는 유위의 법이오. 그러나 여래는 이미 유위의 법을 끊었는데 어찌 이곳에만 머물겠소. 허공은 시방세계 어디에고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여래도 동서남북 상하 어는 곳에도 머무는 일이 없소.” 사자후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물었다.“ 열반을 어째서 모양이 벗음이라 하십니까?” “모양에 집착한 이는 어리석음을 내고, 어리석기 때문에 애욕을 일으키며, 애욕으로 인해 얽매이고, 얽매이므로 태어나게 되오. 태어나므로 죽게되고, 죽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리석음을 내지 않고, 어리석지않으므로 애욕이 없으며, 애욕이 없으므로 얽매임이 없고, 얽매임이 없으므로 태어나지 않소. 태어나지않으면 죽는 일이 없고, 죽임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겠소? 이런 뜻에서 열반을 영원하다고 하고, 모양 없는 선정[무상정]을 대열반이라고 하는 것이오.” <열반경 사자후보살품>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