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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島 紀行
한강과 예성강, 그리고 임진강이 어우러져 보석처럼 빚어낸 강화도-
강화도는 황금의 바다 위에 꽃봉오리처럼 피워 올린 한반도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올 가을 여행의 목적지로 삼은 강화도로 떠나는 날,
아침 기온은 쌀쌀하였지만 일행 모두는 설레는 기색이 완연하였습니다.
영주를 벗어나기도 전에 추수를 끝낸 들판의 넉넉함을 가슴 가득 담을 수 있었고, 잎새를 모두 떨구고도 알알이 영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과수원의 풍성함을 눈요기로 삼았습니다.
에피소드1. 뜻밖의 만남
가을 여행의 설렘으로 밤잠을 설친 탓으로 죽령터널을 통과하면서 눈을 감은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 도중에 버스가 멈춘 곳이 치악휴게소.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향하는데 계단을 막 올라서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아내였습니다.
‘오늘 동창들이 모여 어디로 놀러간다고 했는데…우리가 함께 가기로 했던가?’
아내도 많이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려서 사방을 둘러보니 아는 얼굴들이 여기저기에서 싱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맥반석 쥐포구이를 몇 마리 사서 들려보내고 나니 "참 좋은 세상, 참 좁은 땅덩어리”라는 느낌이 확 오데요.
커피 한 잔을 마시고는 버스 안에서 국산 양주 몇 잔을 거듭 마셔야 했습니다. 아내와의 재회(?) 기념으로 말입니다.
강화땅으로 들어서서 맨 처음 닿은 곳은 강화역사관이었습니다. 아담한 2층 한옥 형태의 건물로 1988년 개관하였는데, 2001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쳤다고 했습니다.
눈길을 끈 것은 강화에서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금속활자 중흥 발상 기념비와 조선 시대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명세 불망비 및 선정비 등 67기의 비석군이었습니다.
천연기념물 78호인 탱자나무도 이채로웠으며, 강화유수 최석항이 "강화는 국가의 목구멍”이라 했듯이 병인,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 등 외세 침략의 시발점이기도 했던 갑곶돈대(甲串墩臺)도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일행은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일컬어지는 보문사를 향했습니다.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섬으로 이동하는 기분(그것도 버스를 타고서)은 울릉도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도 무척 설레었습니다.
외포리에서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뱃길이지만 떼지어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의 춤사위도 볼만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에 길들여진 때문이겠지만, 서해바다답지 않은 맑은 바닷물의 일렁임이 신선함으로 다가온 게 사실입니다.
뒤로는 낙가산(洛迦山) 앞으로는 서해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서기636년)에 희정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23기의 나한상이 안치된 석실(지방 유형문화재 제27호)이 천연동굴 법당이라는 점입니다. 법당 맞은 편에는 제법 큰 윤장대(輪藏臺: 불교 경전을 넣어두는 대로서 한 바퀴 돌리면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함))가 세워져 있었는데 사람이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넣으면 저절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입맛이 씁쓸하였습니다.
가파른 계단과 언덕길을 지나면 눈썹바위가 나타나고, 거대한 암벽에는 십일면 관음존상 미암석불(眉岩石佛)이 눈길을 끄는데 그 높이가 9.7m, 폭이 약3.64m로 그야말로 위용이었습니다.
에피소드2. 순무김치와 인삼동동주
보문사에 가거든 반드시 맛보라는 지인의 권유도 있었지만, 목도 컬컬하던 참이라 일행을 꼬드겨 좌판에 둘러앉았습니다. 그 집 술맛은 달콤하였고 순무김치 또한 단맛이 깊었습니다.
“아지매, 동동주에 삼맛은 없고 우째 단맛 뿐인교?”“”
“어디서 오셨어요?”
“우리요? 인삼의 고장 풍기에서 왔다 아입니꺼? 원래 인삼막걸리도 우리 고장이 특산인데, 강화도에서 원래 맛을 다 베리놨습니더.”
“그럼 도토리묵을 좀 드셔보시지요.”
“뭐라꼬요. 우리보고 꿀밤묵을 쳐 먹으라꼬요?”
“아뇨. 드셔 보시라구요.”
“원래가 묵은 쳐 먹는 긴데.”
그제서야 경상도 사투리를 눈치챈 아주머니, 배꼽을 잡고 웃데요. 오늘쯤은 제자리를 찾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보문사 바로 아래쪽, 주차장 부근에는 어김없이 난전이 펼쳐져 있었고, 어촌 아낙네(대부분은 할머니들이었지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토산품을 사가라고 은근히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순, 진짜, 참기름”을 외치는 듯 했습니다. 그 중에도 원산지를 “북한산”으로 표기한 것들도 있었고, “중국산”이라 밝힌 것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산채들과 곡식이었지만,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순무김치와 새우젓도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시식용 막걸리에 순무김치를 곁들여 마셔보니 맛깔스러웠지만, 내려갈 때까지 짐이 될 듯하여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마니산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습니다. 전등사 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솔밭이 자리잡았는데, 구월 보름달이 솟아오르는 중이었습니다. 한가위 달만큼은 아니지만, 농익은 보름달빛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비쳐 나오는 것이 환상적이었습니다.
아담한 모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강화의 저녁이 고즈넉하게 밀려왔습니다. 달빛 아래 정족산(鼎足山)이 나지막하게 움츠리고, 바람결에 짠내음도 배어들었습니다.
일행 중에서 “와우, 달이 째지게 밝다!”고 감탄하는 바람에 한동안 웃다가 노래방에서 잠시 객고를 풀기도 했지만 나이 탓인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이 급하다며 방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어이없이 선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같은 방에서 잠자던 이들을 깨워 새벽에 마니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해발 468m의 마니산(磨尼山) 정산에는 참성단(塹城壇)이 있어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단풍숲길은 너무도 고요하고 새벽바람도 신선하였으며 산새들의 지저귐도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사적지 136호로 지정된 곳이지만 기독교 기도원이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유지라지만 좀 심하다 싶었거든요.
마니산 참성단까지는 대부분이 돌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드문드문 놓여진 자연석을 제외해도 약 920여 개가 되더군요. 숨이 가빠져 오는데 동행들의 발걸음이 늦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지난 5월 중순 비슬산을 오를 때의 숨가쁨이나 다리 통증은 없었기에 그동안 꾸준히 운동을 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끔 내려오는 이들과 인사도 나누며 한 시간 남짓 등산을 계속했는데 이미 일출은 끝나고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참성단에 이르니 촘촘한 철책이 나를 맞아 주었습니다. 보호 차원이라니 하는 수 없이 먼발치에서 바라볼 밖에요.
참성단은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데, 제단 아래는 둥글고 위는 네모난 형태라고 합니다. 아랫단의 지름은 8.7m, 윗단은 한 변이 6.6m이며 윗단 동쪽에는 21개의 돌계단이 있다 합니다. 상·하단의 높이는 벼랑의 높이를 빼고 3∼5m인데 고려 원종 11년(서기1270년)과 조선 숙종 43년(서기1717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참성단은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왕의 명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했고, 고려 국왕 원종이 직접 주재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관리가 국왕을 대신해 제사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제사의 목적은 외적의 침입이나 큰 가뭄 때의 기우제 등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는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께 제사를 올리며, 전국체전 때마다 강화여고 출신 7선녀에 의해 성화가 채화되고 있다 합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단군이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그 이유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여기저기 쓰여진 글을 토대로 유추해보니 나름대로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간 위치라는 점입니다. 백두산 천지와 한라산 백록담까지의 거리가 같다고 합니다.
둘째, 우리나라에서 땅의 기운(生氣)이 가장 센 곳이라고 합니다. 마니산 정산에서 초당 68회의 기운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셋째, 중국과의 거리가 가깝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곡창지대라는 점에서 옛 왕조의 도피처로 삼기에 적당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동녘 하늘을 환히 비추는 햇살 사이로 마니산을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오는 게 더욱 힘들다는 사실- 경험자는 다 알 것입니다.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올라가기 위해서 공을 들이지만, 언젠가는 내려서야 한다는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놓아야 할 것인데도 꼭 쥐고 아등바등 한다든지, 내려서야 할 때를 놓쳐서 손가락질을 받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호흡을 거듭하면서 지금 내가 움켜쥔 것에 대해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하며 입구에 이르니 다른 일행들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쳤더군요.
에피소드3. 술이 죄지, 사람이 죈가?
숙박한 사람들이 여러 단체인지라 식사 때를 놓친 이들은 정해진 자리가 없이 아침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된장국이 차려진 식탁, 미역국이 준비된 식탁도 보였는데, 유독 한 식탁이 비교적 온전하길래(식당 아주머니가 그리로 가라고 권해서이지만)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지요. 나중에 하나 둘 씩 들어오는 이들은 처음 보는 중년 아낙들이었습니다. 금방 감은 머릿결에서 풍기는 향내가 각 다르고, 화장 솜씨도 각 다른 낯선 이들 사이에서 밥 먹는 일도 고역이더군요. 또한 중년 아낙들의 수다스러움이란! 그 중 한 아낙이 내가 먹고 있는 국그릇을 건드려 그만 흘러 넘치고 말았습니다.
“아따 죄송허요. 밤새 술독에 파묻혀 지내다봉께 팔다리가 꼬여부렀으라.”
분명 전라도 사투리라.
“거시기하면 거시기한께. 괜찮니더.”
“아따,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라?”
옆에 앉았던 아낙이 대충 닦아주며 이야기를 걸어왔습니다.
“경북 영주서 왔니더.”
그때부터 화제 만발이었습니다. 밥 먹는 것보다 영주 자랑하기에 더 바빴거든요. 아낙들은 세 부류가 우연히 동행하였다면서 서해대교를 거쳐 내려가는데 어젯밤 광란의 밤을 보낸 남정네들을 자기들 옆자리로 앉혀서 놀려먹을(?) 궁리에 골몰하였습니다.
나보고 묻데요.
“아저씨, 다음에는 어디로 간당가요? 엊저녁에 보니께 거시기한 사람도 보이던디, 한번 거시기 해 볼라요?”
무슨 놈의 거시기가 그렇게도 자주 쓰이는지 도무지 헷갈려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옆자리에 앉으셨던 분이 속삭이듯 물어왔습니다.
“어제 새벽에 남의 방문을 마구 두드리던 분이 일행이신가요?”
“왜요? 혹시 그 방문도 두드렸나요?”
“아뇨. 그건 아닌데, 무지하게 급했나 보더라구요. 자기방 화장실을 두고 남의 방을 찾은 걸 보면 말이지요.”
'아하, 이분도 그 시간에 화장실을 쓰고 있었나보구나.'
“술이 죄지, 사람이 뭔 죈가요? 즐거운 여행되세요.”
전라도 아낙들 중에서 끝까지 사투리를 쓰지 않는 분이어서일까. 그 중에서 제일 예뻐보였습니다.
강화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전등사(傳燈寺)였습니다. 한자 표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로 오해를 했습니다만 알고 보니 유래가 이러했습니다.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위치한 절인데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372년)에 아도 n화상이 창건했고 처음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불렀다 합니다. 고려 충렬왕 때 정화공부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바쳤는데 그때부터 전등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수령 500년, 60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 고목은 이미 낙엽을 시작하였는데, 남문에서 올라가는 길목에는 칠보 단청의 윤장대가 손잡이를 내밀고 우뚝 서 있었으며,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는 기원문을 붙인 연등이 수없이 걸려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빌 게 많다는 것은 사람살이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이겠지요.
한 무리의 일본 관광객이 한국 불교 사찰음식 사진전과 조계종 31본산 사진전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네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으로 잠시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 통역을 들었답니다.
매년 10월 하순에 열린다는 삼랑성 역사문화 축제가 금방 끝났음을 알리는 그림도 전시되고 있어서 잠시 눈요기 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했는데, 목조삼존불상(지방유형문화재 42호)의 얼굴 형상과 양감이 뛰어나게 보였습니다.
눈길을 끈 것은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의 처마 끝 부분에 추녀를 받치고 움츠린 괴상(怪象)이었습니다. 사람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한 괴상한 모양인데 얽혀있는 이야기도 그럴 듯 하였습니다.
전등사 대웅보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온갖 정성을 들여 절을 짓기 시작하여 여러 해가 지나자 아랫마을 주막에서 회포를 풀게 되었던 바 그곳에서 아름다운 주모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나중에는 살림을 차리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주모가 그만 도편수가 건네 준 재물을 모두 가지고 줄행랑을 쳤다고 합니다. 이에 크게 상심한 도편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업을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인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세 곳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고 있는 반면에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어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는 듯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재치와 익살을 보는 듯하여 잠시 즐거웠습니다.
동문으로 나가는 길에 삼랑성 석문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성벽도 그런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으며 자동차가 지나다닐 만큼 크고 넓었습니다.
전등사를 나오면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청구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 용지에 서명을 하였는데, 약소국가의 설움을 다시 한 번 회고해보았습니다.
1781년에 조선 정조가 세운 도서관인 외규장각에는 국가 주요 행사 기록을 보관했다고 하며 총 1,000여 권의 서적이 보관되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것 중에서 일부는 반환을 받았으나 아직도 도서 191종 279권이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바 그 중에는 한국에도 그 필사본이 없는 63권의 유일본이 포함되어 안타까움을 더해주었습니다.
제 물건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국력이라면, 빼앗긴 제 물건조차 되찾아 올 수 없는 국력이라면 진정한 주권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습니다.
아쉬움을 더해주는 강화 기행의 끝머리에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다시 한 번 꼭 들러 볼만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화문석 전시관과 강화도 고인돌 축제도 보고 싶고, 당도가 우리나라 최고라는 포도맛도 궁금하며, 속노랑고구마 맛 역시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오젓(5월산), 육젓(6월산), 추젓(가을산), 동백화(겨울산)로 구분되는 새우젓과 밴댕이젓을 즐기고 싶기도 하고요.
돌아오는 길, 강화의 낙조(落照)는 태고의 역사를 머금고 황해로 잠겨들었습니다.
-2004.10.29
첫댓글 역시 그릇만큼 담을수 있고, 아는만큼 보인다는게 느껴집니다 같은 곳을 다녀와도 이렇듯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됨은 ...
거금 5,000냥을 들여서 "강화역사문화"에 관한 책자를 구입해서 보았거든요. 잊지 않을려구요. 칭찬받을 줄 알았으면 더 자세히 읽어보고 여기저기 끼워넣을건데--- 아쉽네요.
이글도 충분히 긴데..더 쓰시려구요? ㅎㅎㅎ
껌벅이 선생님...윗글을보고 저도 강화도 다녀온것같네요. 정말...역시...입니다.
여행애 행복애 삶애 복합된 좋은 글, 감상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