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린이 날 즈음, 성동구 성수동 한강부터 중랑천을 거쳐 우이천을 따라 걸었다. 우이천은 소의 귀를 닮은 도봉산 봉우리에서 발원했다는 의미로 이름 지어졌는데, 내 머리 속 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도봉구 쌍문동 둘리뮤지엄 신축 공사 현장으로 잡았다. 한강과 중랑천, 그리고 우이천 및 쌍문동에 이르는 길은 아기 공룡 둘리가 얼음 속에서 이동한 구간으로, 개인적으로는 이를 ‘둘리 코스’라고 부른다.
둘리는 지난 달 22일,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정확히는 둘리가 1983년 만화 월간지 ‘보물섬’에 첫 연재가 되던 날을 기념한 것이다. 둘리는 만화가 김수정 작가의 대표작으로, 작가는 원래 소년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던 것을 공룡으로 대체했는데, 당시 만화에 대한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군사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둘리는
우리나라 캐릭터 시장의 25%를 차지해 연간 20억 원을 벌어들이는 캐릭터계의 선두그룹을 차지하고 있다.
둘리는 뿔이 달린
육식공룡 케라토사우루스(Ceratosaurus)의 어린 모습을 형성화 했다. 원작에서 둘리는 약 1억 년 전 중생대 어느 날 지구 생물을 조사하는 ET 행성의 외계인(1982년 영화 <이티>는 전세계적인 광풍을 일으켰다)에게서 초능력을 이식 받고, 빙하기 동안 얼음 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돼 오늘 날에 이르렀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둘리 탄생과 발견을 두고 몇 가지 미스터리가 회자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둘리 출신지는 어디인가에 대한 것이다.
둘리 출신지는 북극 또는 남극?둘리의 첫 장면은 거대한 빙산이 바다에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그렇게 거대한 빙산이 있는 곳은 지구상에 북극과 남극뿐이다. 원작 등에서는 펭귄이 나오고, 한강 다리에 걸린 거대한 빙산을 두고 TV
아나운서가 남극에서 온 빙산이라 했지만, 1983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는 과정에서 몇 차례 시나리오가 수정 되면서 관련된 언급이 사라졌다. 아마도 둘리 출신지, 즉 북극인지, 남극인지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원작의 펭귄과 TV 아나운서의 멘트를 근거로 둘리의 출신지가 남극이라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반면 남극에서 빙산이 오려면 지구에서 태양과 가장 가까워 1년 내내 뜨거운 적도를 거쳐야 한다는 점과 둘리가 잠들어 있던 빙산의 형태가 남극의 판상형이 아닌, 북극 특유의 괴상형이란 점을 들어 북극에서 왔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또한 케라토사우루스의 화석이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점도 북극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 말한다.
개인적으로 굳이 하나를 선택해 보라고 한다면, 북극보다는 남극에 가능성을 두고 싶다. 영구동토층이 있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피부와 내장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어린 암컷 매머드가 발견된 사례가 있으나, 둘리 원작에서 거대한 빙하에서 분리된 빙산이 바다로 바로 떨어졌다는 점에서 육지이거나 바다 속 얼음일 가능성은 일단 제쳐두고 생각해야 한다.
남극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대륙 이동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약 2억 년 전, 즉 고생대
후기부터 중생대에 걸쳐 남극대륙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호주, 인도 대륙과 하나였다. 이를 곤드와나(Gondwana) 대륙이라 하는데, 얼음으로 가득 찬 남극에서 중생대에 번성했던 열대 양치류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이 그 증거 중에 하나다.
둘리 남극설의 또 다른 가능성은 북극과 남극의 빙하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헨리 폴락 미 미시건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얼음 없는 세상 (A
World Without Ice)』에서 “북극해 상부의 바다 얼음은 그저 부유하는 상태”라 진단한다. 북극해 얼음은 해류에 따라 흐르기 때문에 수명이 길어야 10년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극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얼음은 무려 80만 년 된 것도 있다고 한다. 남극의 얼음 두께는 평균 2.5킬로미터이고, 가장 두꺼운 곳은 63빌딩 15개를 쌓아도 모자랄 만큼의 두께를 갖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극해와 남극의 얼음 이동 속도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북극해의 얼음은 계절에 따라 바람과 해류의 영향으로 하루 5~6킬로씩 이동한다. 반면 남극의 얼음은 연간 9~12미터씩 이동해 한 번 눈이 와서 얼음이 되면 적어도 10만 년이 지나야 바다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둘리가 잠든 빙산은 적어도 북극보다 남극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둘리가 1억 년 동안 얼음 속에서 잠을 잤다는 설정으로 본다면 북극해, 남극 둘 다 적절하진 않다. 이 미스터리는 추가적인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
한강에서 우이천까지 강물이 거꾸로 흐른다?
둘리 탄생과 관련해 또 다른 미스터리는 한강에서부터 우이천까지 어떻게 얼음이 갈 수 있을까에 대한 부분이다. 이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흘러야 가능한 상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금의 상상력’만 더하면 어쩌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 ‘조금의 상상력’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둘리의 얼음은 조금만 늦었어도 서울에 들어오지 못했을 뻔 했다.
현재 직선화된 서울 한강 모습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다.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을 개척한 겸재 정선은 18세기 중반 한강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겨져 있다. 1960년대 당시 사진에서 한강은 여름에 백사장에서
일광욕하고 겨울에 썰매와
얼음낚시를 즐기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강은 박정희 정권의 한강 개발부터 본래의 아름다음과 빛깔을 잃었다.
박정희 정권에 이은 전두환 정권은 1982년 9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한강종합개발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으로 서울은 하류의 신곡수중보와 상류의 잠실수중보 등으로 물길이 막혀 더 이상 모래가 쌓이지 않게 됐다. 습지가 번성했었을 강변 둔치에는 거대한 자동차 전용도로가 만들어졌다. 또한 중랑천과 탄천 등이 한강과 합류되는 지점에도 낙차공(수위를 높이는 인공 구조물)이 만들어져 물과 모래의 흐름을 차단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한강 개발 과정에서 역사적, 문화적인 장소와 생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훼손되거나 파괴됐다.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에만 당시 9,560억 원이 쓰였는데,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3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물의 흐름을 막고 일괄적으로 준설한 서울 한강은 아직도 그 파장이 남아 생태계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강 개발의 과정과 문제점 등은 나중에 다룰 영화 <김씨 표류기>의 생태 이야기에서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다시 둘리가 잠든 얼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강종합개발사업 착공식은 1982년 9월 28일이지만, 자료에 따르면 한강종합개발계획의 기본계획은 1983년 5월에 만들어졌다. 기본계획은 공사의 세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으로 실제 한강종합개발사업은 기본계획 수립 이후 진행됐을 것으로 봐야 한다. 둘리가 잠든 빙산이 발견된 시점은 1983년 4월이니, 신곡수중보와 중랑천 낙차공 등이 아직 본격적으로 공사가 되기 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늦었어도 둘리의 빙산은 신곡수중보에 걸려 서울에 들어올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둘리 얼음 이동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두 번째 열쇠는 바로 밀물과 바람이다. 서울시의 자료에 따르면 신곡수중보가 없을 경우 서해의 밀물은 잠실수중보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그리고 4월이면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인 탓에 바람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바람이 거센 날 수면은 물의 흐름과 달리 아래에서 위로 물살을 일으킨다. 어찌어찌해서 서해까지 온 둘리의 빙산은 때마침 가장 큰 밀물에 의해 한강으로 유입된다.
물론 빙산은 물 위에 드러난 부분보다 물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7~9배 크지만, 여기서 가능한 상상력을 더해 보자. 원작에서 한강 다리에 걸린 빙산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얼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생선가게 아저씨 등 사람들이 몰려와 순식간에 얼음을 채취해 간다. 남은 얼음은 다시 밀물에 의해 상류로 이동하는데, 때마침 불어온 강력한 서풍의 힘으로 중랑천을 거쳐 만화 속 장소인 쌍문동 우이천까지 가게 된다는 상상이다.
만화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질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사회지금까지 둘리 탄생 미스터리에 대한 고찰은 다분히 재밌자고 해본 상상이다. 둘리와 관련된 이러한 상상이 즐거운 이유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화이기 때문이다. 둘리 출신지가 북극인건, 남극이건, 또 어떻게 서해를 거쳐 한강과 중랑천의 장애물 헤치면서 물을 거슬러 올라갔던 간에 만화라서 재밌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만화적 재미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질 상상력이 현실이 되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인류의 상식과 과학을 부정한
4대강사업은 어느 권력자의 저질 상상력에서 비롯됐다. 또한 옆 나라에서 원전 사고로 엄청난 피해를 봤음에도 ‘우리 것은 달라’라면서 여전히 원전 확대 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저질 상상력과 다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떡값 받은 이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이를 알리는 이를 처벌하는 것과 4대강 추진을 위해 무고한 이에게 형을 집행하는 것도 권력을 가진 이들의 질 낮은 상상력에서 비롯됐다. 또한 헌법으로 보장된 평등권을 구체화 시키려는 ‘
차별금지법’을 ‘동성애 조장’과 ‘종북’이라 상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망상이다. 바라건대 우리 사회가 재밌는 상상력은 아니더라도 상식에 기초한 상상력이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